과학과 철학 에세이/인지와 경험

시각 경험에 바탕을 둔 당연한 믿음들과 증거들

착한왕 이상하 2015. 7. 2. 02:58

* 다음은 199년도에 발표한 논문을 1차 수정한 것이다. 너무 오래 되어 사실 정확한 연도는 기억나지 않는다. 원고 작성을 위해 별도로 작성한 것은 올리지 않는다.

 

왜 옛날 논문을 다시 보게 되었는가? 개인적으로 철학의 궁국적 출발점은 일상경험이라 믿는다. 그리고 그 경험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인간의 한계가 모든 형이상학을 제한하는 뿌리라 믿는다. 수입을 줄이고 공부량을 다시 늘리면서 최근 연구 작업들을 본 결과, 일상적 대상은 아예 '실재의 그림자'처럼 굳어지는 판국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특히 분석철학 형이상학 진영의 양상 논리 존재론, 지속론, 편차론 등등을 보면 일상생활에서 친숙한 대상들은 그림자화되어 가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한 반동으로서 후설이나 하이데거가 마치 일상성을 구해낼 수 있는 구세주처럼 등장하기도 한다. 최근 작업들을 보고, 경험 이전의 것과 경험하는 것을 단순히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이분하고 존재론적으로 전자에 1차적 지위를 부여하는 사고방식에서 철학자들이 맴돌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나는 그런 사고방식을 하나의 세계 이해로 간주한다. 하지만 그것이 이 땅의 담론을 지배하고 있고 계속 지배하게 되는 상황에 대해서는 '끔찍하다'고 여긴다. 그래서 지각 경험, 일상성 등과 관련된 과거 개인적 작업들을 일단 재정리하기로 했다. 이런 일이 업이 아닌 사람이라 계획대로 진행될지는 모르겠으나, 진행할 작업들의 순서는 이 글 제일 하단에 있다. 

 

칸트는 라이프니츠에게 매료되었다가 '몸통이 없다면 왼손과 오른손 중 무엇이 먼저 창조되었을까?'라는 물음을 스스로에게 던지고 고민하다가 뉴턴의 절대적 시공간 개념을 받아 들이게 되었다. 그러나 학위 논문을 쓰면서 그 시공간은 경험을 가능하도록 해주는 마음의 선험적 조건이 되고 말았다. 이렇게 된 결정적 이유는 수동적인 감각성만을 가지고 정신적 재표상과 경험 주체를 구분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의 시공간은 그 구분을 가능하도록 해주는 논리적 장치와 같다. 그리고 그 논리적 장치를 발견한 칸트는 9년에 걸쳐 순수이성비판을 쓰면서 자신의 선험 철학이 '새로운 철학의 출발점'이라 확신했다. 이를 철학사에서 코페르니쿠스의 혁명에 비유하길 좋아하는 철학자들은 21세기 철학도 칸트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나는 반대로 생각한다. 칸트의 사고방식을 깨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그리고 그 출발은 그와는 다른, 하지만 정말 일상적인 지각 경험론을 체계화하는 것이라고 ...

 

 

 

시각 경험에 바탕을 둔 당연한 믿음들과 증거들

 

  

I 머리말: 목적과 논의의 제한에 관하여

 

§1. 철학자들의 권위적인 하나의 가정이 있다. 그것은 외부 세계의 존재성은 실재론(realism)’이라는 이름 아래 정의되고 증명되거나 정당화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회의주의(scepticism) 또는 유아주의(solipsism)에 빠진다는 것이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철학자들이 세미나 혹은 강의에서 어떤 입장을 취하든 그들 또한 일상생활에서 가족, 나무들 그리고 다른 동물들의 존재성을 당연시한다는 것이다. 어떤 추상적 이론에 근거하지 않고 다음과 같은 일상생활에서 발견할 수 있는 실재론적 태도(realist attitude)에 따라 사람들이란 일상적 실재론자(naive realist or common sense realist)’들이라 할 수 있다:

 

나무와 사과와 같은 대상들은 우리의 머리혹은 두뇌에 들어있지 않다.

 

일상생활에서 만나는 대상들은 우리가 없어도 존재할 것이다. 즉 그것들은 인과적 의미가 아닌 존재론적 의미에서 우리와 독립적으로 존재한다. 일상적 대상들의 독립적인 존재성을 의심하는 태도는 자연스럽게 보이지 않는다.

 

이 글의 첫 번째 목적은 지각 경험과 이에 바탕을 둔 특정 믿음들의 즉각적인 당연성(spontaneously certainty)’과 관계된 다섯 가지 특성들을 통해 일상적 실재론자연스런 태도를 재조명하는 것이다. 그 다섯 가지 특성들은 당연히 일상적 의미에서 수긍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두 번째 목표는 그 다섯 가지 특성들이 외재주의(externalism)와 내재주의(internalism)로 나뉘는 현대 인식론에서 무시되었거나 충분히 고려되지 않았음을 보이는 것이다. ‘일상적 지각 경험과 이에 바탕을 둔 당연한 믿음들은 일상생활에서 어떻게 기능하는가?’라는 물음은 현대 인식론의 흐름에서 무시된 경향이 크다. 따라서 일상적 의미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인식론을 건설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지각 이론 및 마음과 외부 세계의 관계에 대한 재조명이 요구됨을 논할 것이다. 불필요한 문제와 논쟁을 회피하기 위해 우선 몇 가지 개념들의 범위를 제한하자.

 

§2. 보고 듣고 만지는 지각 행위 중, 눈을 통해 바깥세상을 보는 경험, 즉 시각 경험에 논의의 초점을 맞춘다. 일상적 대상들이란 허상을 만드는 현미경과 같은 기계 장치의 도움 없이 눈으로 볼 수 있는 나무, 사람 그리고 돌멩이 등을 의미한다. 일상적 대상들의 범위를 정확히 정하는 별도의 작업은 하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러한 대상들의 존재성이 어떤 개념적 해석의 도움 없이도 당연한 것으로 여겨진다는 점이다. 이 점에서 지구는 일상적 대상으로 분류되기 힘들다. 우리는 지구 전체를 볼 수 없다. 단지 실제 발을 대고 있는 장소들만 볼 수 있을 뿐이다. 지구라는 것은 그러한 장소들을 포함하는 전체라는 개념과 관련되어 파악되는 존재이다. 일상적 대상으로서 장소들이 존재한다는 믿음 자체는 지구가 둥근지 평평한지 암시하지 않는다. 물론 모두가 달나라에서 휴가를 보낼 수 있는 미래에, 둥근 지구는 일상적 대상으로 여겨질 것이다. 이점은 일상적 대상들의 모임이 반드시 정해진 것은 아님을 보여준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인간들이 존재하는 어떤 시대에나 볼 수 있는 일상적 대상들이 많이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마다 분류 방식에서 차이를 보이지만, 믿음들은 일반적으로 따라야할 것들에 관한 규범적 믿음들(normative beliefs)’. ‘세상의 서술 방식과 관련된 기술적 믿음들(descriptive beliefs)’로 분류된다. 후자는 다시 감정들과 같은 현상들을 기술하는 내적인 믿음들(internal beliefs)’, ‘외부 대상들 및 그들과 우리의 관계를 기술하는 경험적 믿음들(emprical beliefs)’로 구분될 수 있다. 경험적 믿음들은 직접 지각되는 대상들과 관계된 일상적 의미에서의 경험적 믿음들전자(electron)와 같이 그렇지 않은 이론적 대상들과 관계된 이론적 믿음들(theoretical beliefs)’로 구분될 수 있다.

 

 

 

다루어질 일상적 의미에서 경험적 믿음들이란 이것은 나무다’, ‘너는 장갑을 끼고 있다’, ‘사과는 먹을 수 있다’, ‘사람은 언젠가는 죽는다등 이다.

 

 

 

II 시각 경험과 그 경험에 바탕을 둔 당연한 믿음들에 관한 다섯 가지 일상적 특성들

 

§3. 일상적 시각 경험에서 우리에게 당연하게 나타나는 많은 믿음들이 있다. 예를 들어, 우리는 한 나무를 볼 때 그 나무가 존재한다고 믿는다. 그렇게 믿는 것은 별도의 생각이나 논리적 계산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즉각적이고, 그 나무의 존재성을 의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당연하다. 그렇게 믿을 때, 우리는 그 믿음을 당연히 참으로 여긴다. 결코 그 믿음이 참이어야 한다는 이유로 그렇게 믿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당연한 믿음들에 대해서는 나는 ...을 믿는다또는 나는 ...을 안다등의 태도 명시유형적 표현(canonical expression)’은 일반적으로 적용되지 않는다. 하나의 언어를 공통적으로 사용하고 그 사용과 관련된 규약들을 체득한 사람들은 나무를 볼 때 나는 이것이 나무임을 믿고 혹은 알고 있다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는다. 그들은 단순히 이것은 나무다혹은 이 나무는 썩어가고 있다라고 말할 것이다. 이러한 사례에서 엿볼 수 있는 믿음들의 당연성은 특정 시간과 장소에서의 보는 상황’, 시각 환경과 맞물려 있다.

 

한 주어진 시각 환경 S와 맞물려 있는 믿음 BS에 참여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당연하게 나타는 경우, ‘나는 ...을 믿는다또는 나는 ...을 안다와 같은 태도 명시유형적 표현은 일반적으로 B에 적용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불필요하다.

 

위의 불필요성을 태도 명시유형적 표현의 국소적 불필요성(local redundancy)’이라 하자. 시각 경험에 근거하는 당연한 믿음들의 또 하나의 부류는 특정 시각 환경 S에 종속죄지 않는 일반화된 믿음들이다. 실례로 나무들이 있다’, ‘사과는 먹을 수 있다등이 있다. 이제 이러한 부류의 당연한 믿음 B에 대하여 나는 ...을 안다와 같은 태도 명시유형적 표현의 전체적 불필요성(global redundancy)’은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

 

나는 ...을 안다와 같은 태도 명시유형적 표현이 특정 시각 환경과 무관하게 B에 대해 일반적으로 적용되지 않는 경우, 그러한 유형적 표현은 B에 대해 불필요하다.

 

시각 경험을 바탕으로 당연시 되는 믿음들에 대한 태도 명시유형적 표현의 국소적, 전체적 불필요성이 함축하는 바는 무엇인가? 그러한 믿음들은 별다른 정당화를 요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4. 어떠한 이유 때문에 시각 경험에 근거한 특정 믿음은 별다른 정당화를 요구하지 않는가? 왜 그러한 믿음은 우리에게 즉각적으로 당연하게 나타나는가? 태도 명시유형적 표현의 국소적, 전체적 불필요성은 일상생활에서 즉각적으로 당연한 믿음들에 대해서는 그 질문을 던지지 말라고 우리에게 암시한다. 이러한 암시는 일상적 언어놀이를 가능하도록 해주는 일종의 약속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앞서 언급한 질문에 대해 어떠한 상식적인 대답도 할 수 없는 것일까? 경험이 어떻게 가능한가를 설명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앞서 언급한 질문은 다음을 뜻한다.

 

어떠한 경우에 특정 믿음들은 일상적 시각 경험에 근거해 우리에게 즉각적으로 당연하게 나타나는가?”

 

태도 명시유형적 표현의 국소적 불필요성이 적용되는 당연한 믿음들의 경우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주장할 수 있다.

 

주어진 시각 환경 S에 대하여 한 개인 X이것은 나무다라는 믿음은 관계된 대상, 즉 특정 나무를 보았다는 데 기인하며, 그의 믿음의 당연성은 X가 그 나무를 볼 때 별다른 이유 없이 그 믿음을 갖는다는 것이다.

 

이 점을 암시하는 일상적 보기를 들어 보자. YX의 믿음의 확실성에 대하여 의심할 때 상상되는 X의 보기는 이러할 것이다. ‘이것을 봐, 이것이 나무가 아니면 뭐니?’ 이러한 반문은 X의 믿음이 관계된 대상에 의해 만족된 것임을 보여 준다. 태도 명시유형적 표현의 전체적 불필요성이 적용되는 당연한 믿음들의 경우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주장할 수 있다.

 

X나무들은 존재한다라는 일반적 믿음의 당연성은 X가 그 믿음에 대한 증거들, 즉 사과나무, 소나무 등을 쉽게 찾을 수 없었다면 불가능하다.

 

이 점을 암시하는 일상적 보기를 들어 보자. YX의 믿음에 대하여 장난으로 혹은 철학적으로 의심할 때, X의 반응은 아무 말도 하지 않거나, 화를 내거나 혹은 이러할 것이다. ‘여기를 봐, 이거 나무지, 저기를 봐, 저것도 나무지?’ 물론 X는 자신의 일반적 믿음이 참이도록 해 주는 모든 나무들을 경험할 수 없다. 그 믿음은 나무들의 경험에 근거해 일반화된 것 혹은 그러한 경험에 강하게 근거하는 것이다. 일상적 의미에서 당연한 믿음들의 증거는 지각행위와 관계된 일상적 대상들이다. 이를 받아들일 때, 두 보기를 통해 시각 경험에 바탕을 둔 특정 믿음들의 당연성에 관한 전체적 윤곽으로서 다음의 근본 틀(the basic framework)을 생각할 수 있다.

 

<BF>

시각 경험을 바탕으로 어떤 믿음 BX에게 당연하게 나타나는 경우는 ‘XB에 대한 증거로서의 일상적 대상들을 쉽게 찾을 수 있는 경우이다.

 

§5. 어떤 믿음이 반드시 참이기 때문에 당연하다는 식의 생각은 일상생활에서 허용되지 않는다. 내가 당연히 나무라고 믿은 것이 알고 보면 플라스틱 모형일 수도 있다. 오히려 하나의 믿음이 우리에게 당연하게 나타날 때 우리는 별다른 근거들을 열거하지 않고 그 믿음을 참으로 여긴다. 하나의 믿음이 우리에게 당연하게 나타나지 않는 경우, 그것을 참 또는 거짓으로 여기는 것은 근거들, 즉 다른 믿음들을 열거해야 한다는 점에서 정당화를 요구한다. ‘어떤 믿음이 정당화를 요구한다는 것그 믿음이 일상생활에서 참 또는 거짓에 관한 질문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음을 뜻한다. 정당화를 요구하는 질문은 의심을 전제한다. 반면에 정당화를 요구하지 않는 당연성은 일상생활에서 의심을 전제하지 않는다. 특정 옷은 저기에 옷이 걸려있다라는 당연한 믿음에 대한 증거가 되지만, ‘이 옷은 그녀에게 잘 어울릴 것이다라는 믿음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다. 그 옷을 지각하는 행위는 저기에 옷이 걸려 있다는 믿음에 증거를 실어 주며, 일상생활에서 그 믿음과 서로 돕는 관계를 맺는 다른 믿음들은 그 믿음의 당연성을 재확인해 줄 뿐이다. 그 믿음을 정당화하기 위해 그러한 다른 믿음들을 근거로 동원하는 것은 무엇이 정당화에서 우선적인지 결정되지 않는 순환적 생각만을 만들어낼 것이다.

 

<BF>§1에서 언급한 실재론적 태도와 개념적으로 마찰하지 않는다. 시각 경험에 바탕을 둔 당연한 믿음들은 바깥에 나 이외에 다른 무엇들이 있음을 의심하지 않는 태도를 반영하기 때문이다. <BF>는 당연한 믿음들에 대한 나는 ...을 안다와 같은 태도 명시유형적 표현의 국소적, 전체적 불필요성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일상경험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어떻게 경험이 가능한가?’라는 물음과 무관하다. 이 때문에, <BF>로부터 철학의 인식론은 출발할 수 없다고 누군가 반문할 것이다. 그러나 <BF>는 우리의 일상적 시각 경험의 분석을 통하여 적어도 다섯 가지 특성들에 의하여 재해석될 수 있으며, 그러한 해석은 현대 인식론에 대한 반성적 고찰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 그 특성들 중 처음 세 가지는 시각 경험에서 일상적 대상들에 대한 직접적 연결성에 관한 분석이고, 다른 두 가지는 일상적 대상들이 당연한 믿음들의 증거로 파악되는 조건에 관한 분석이다.

 

 

시각 경험과 본다는 것의 무차별성(No-Distinction between Visual Experience and Seeing)

§6. ‘경험이라는 개념의 폭은 임의로 설정될 수 있게 때문에, ‘시각 경험시각 경험에 근거한 개념적 판단’, 개념적 시각 판단(visual judgement)’을 구분하자. 전자는 ‘...F와 같은 술어(predicate)의 의미 혹은 언어적 이해를 반드시 함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후자와 구별된다. 물론 일상생활에서 시각 경험과 시각적 판단이 독립되어 작용하지 않는다는 점은 분명하다. 일상적 시각 경험에 바탕을 둔 당연한 믿음들은 일종의 즉각적 시각 판단(a spontaneous visual judgement)’으로 간주되며, 그러한 즉각적 시각 판단조차 나무’, ‘’, ‘사람등과 같은 개념들을 요구한다. 그러나 그러한 믿음의 당연성에 대하여 개념 외에도 분명히 무엇이 보이는 경험, 즉 비개념적 시각 경험과 같은 지각 경험은 필수적이다.

 

우리 모두는 한때 언어를 사용하지 않았던 유아기를 겪었고, 언어 행위에서 장애를 겪는 사람도 있다. 인간과 같은 수준의 언어 능력을 갖고 있지 않은 동물들도 무엇이 보인다는 의미에서 시각 경험을 한다는 점은 상식적으로 부정할 수 없다. 이러한 점에서 시각 경험과 개념적 시각 판단의 구분은 무의미하지 않다. 만약 시각 경험에 개념적 시각 판단을 포함시키면, 그것은 넓은 의미에서의 시각 경험이고, 좁은 의미에서의 시각 경험은 그러한 판단을 포함하지 않는 경우로 해석하면 된다. 그럼에도 시각 경험 자체와 개념적 시각 판단의 구별이 무의미해 지는 것은 아니다. 개념적 시각 판단에서 발견되는 언어적 추리가 시각 경험 자체에 반드시 전제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경험의 범위는 정하기 나름이기 때문에, ‘경험이라는 용어의 사용은 혼란을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다. 그래서 시각 경험이라는 용어에 대해 다음 사용 규칙을 정할 것이다.

 

별 다른 언급이 없는 한, ‘시각 경험시각 판단에 대비된 의미의 무엇이 보이는 경험에 국한된다. 이러한 시각 경험에 언어를 매개로 한 개념적 판단이 개입 된 경우는 넓은 의미의 시각 경험으로 규정하자.

 

위 규칙에 따를 때, 태도 명시유형적 표현의 국소적, 비국소적 불필요성이 적용되는 당연한 일상적 믿음들의 내용은 시각 경험 자체만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은 분명하다.

 

§7. 여기서 만나는 중요한 철학적 문제가 있다. 시각 경험 자체도 개념적 시각 판단처럼 어떤 내용을 가지는가? 첫째, 시각 경험 자체는 아직 개념적으로 해석되지 않은 정보 처리 과정(a non-interpreted information process)’의 일종이며, 개념적 이해 능력의 개입 없이는 외부 세계 자체에 대해 아무것도 함축하지 않는다. 이 관점에 따르면, 시각 경험의 대상은 머릿속 혹은 마음속에서 처리된 개념적 해석을 기다리는 표상과 같은 것들이다. 둘째, 시각 경험은 비언어적 혹은 비개념적이지만 이미 외부 세계에 대한 어떤 내용을 갖고 있고, 이것은 개념적 판단의 바탕이 되거나 그러한 판단 속에 흡수된다. 이 두 관점을 구체적으로 비교하지는 않는다. 그 이유는 그러한 비교에 핵심이 되는 진화론, 발달 심리학, 인지 과학의 이론들에 대한 철학적 해석들을 여기서 다루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두 번째 관점의 그럴듯함에 대한 일상적 근거들을 들 것이다. 우선 다음 두 물음을 살펴보자.

 

1. 무엇이 경험되는가? 혹은 무엇이 보이는가?

 

2. 무엇을 보는가?

 

일상적 시각 경험에서 12에 대한 일반 사람들의 대답은 일상적 대상들, 예로 나무’, ‘사람’, ‘사과등으로 불리게 될 것들이다. 이 점은 시각 경험과 본다는 것이 일상생활에서 반드시 구분될 필요가 없음을 뜻한다. 그러나 시각 경험이 개념적으로 해석되지 않은 정보 처리 과정의 일종이라면, 1에 대한 대답은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 그 과정에서 얻어진 머릿속의 어떤 것은 개념적으로 해석되지 않는 한 일상생활에서 아무런 기능을 갖지 않기 때문이다. 이를 받아들이는 경우, ‘무엇을 본다는 것존재론적 범주 구분을 전제한다는 가정은 자연스러운 것이 된다. 결국 물음 2어떤 관점에서 혹은 어떤 방식으로 무엇을 보는가?’라는 질문과 동일한 것이다. 이렇게 여기는 것은 구분성을 포함하는 내용이란 반드시 언어적 혹은 개념적이어야 한다는 가정에 근거한다. 그러한 가정에 따르면, 시각 경험이란 그저 행위라는 출력을 위한 입력과 같은 것일 뿐, 직접적으로 행위를 유발할 수 없다.

 

그러나 구분 능력의 비언어적 혹은 비개념적 측면이 무시된다면, 동물들과 유아들이 보는 것은 비어있다고 말해야 한다. 이 점은 일상적 의미에서 쉽게 납득할 수 없는 것이다. 아무도 시각 경험에서 잡을 수 있는 것이란 개념에 의해 무엇을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또한 인간의 구분 능력의 비언적적 혹은 비개념적 측면이 무시되면, 엄마의 얼굴 표정을 의도적으로 흉내내는 유아의 능력조차 쉽게 설명될 수 없을 것이다. 무엇이 보일 때, 그 무엇은 비록 개념적으로 무엇으로 규정되지 않더라도 우리에게 많은 비언어적 혹은 비개념적인 자연적 제시성들을 제공한다. 사과를 볼 때, 사과는 기독교에서 악을 상징하는 개념적 제시성 이전에 잡을 수 있다등의 자연적 제시성을 띠고 있다. 시각 경험에서 자연적 제시성에 의한 행위 등이 일상생활에서 거부될 수 없는 한, 인간의 원초적 구분 능력은 언어를 매개하지 않는 비개념적 측면을 가지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우리가 보는 무엇이 다른 것과 구분된다는 것이 반드시 개념적 능력을 전제하지 않는다면, 그 무엇은 보이는 경험, 즉 개념적 판단 능력을 반드시 전제하지 않는 시각 경험 속에서 그 다른 것과 구분되어 나타나야 한다. 역으로 시각 경험에 드러난 그 무엇을 우리는 동시에 보고 있는 것이다.

   

누군가 이렇게 반문할 것이다. 많은 경우, 우리는 대상들을 보는 것이 아니라 사실들을 보며, 이 점은 대상과 사물의 개념적 구분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 대상을 볼 때 인접한 다른 대상들, 그리고 그것들 사이의 거리 관계 및 변화 또한 동시에 경험된다. 사과나무를 볼 때, 그 나무에 달린 잎들과 사과들 또한 동시에 경험하는 것이다. 두 대상들 사이의 거리 관계가 ‘ab는 서로 멀어져 가고 있다라는 사실로 분류되더라도, 실제 보이는 것은 어떤 추상적 사실이 아니라 그 두 대상들이며, 동시에 둘 사이의 거리감이 경험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꽃집 배달차가 도착한다는 사실을 보는 것이 아니라 꽃집 배달차라고 불리게 될 무엇이 다가오고 있음을 시각적으로 경험하는 것이다. , 우리는 단지 움직이는 그 무엇을 볼 뿐이다. 시각 경험 자체에 대상과 사실을 엄격히 구분하는 존재론이 전제되어 있다는 생각은 터무니없다. 동일한 시각 경험을 바탕으로 그러한 존재론이 아닌 다른 존재론, 실례로 전체 대 부분의 존재론도 생각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논의에 따를 때, 시각 경험의 첫 번째 특성은 시각 경험과 본다는 것의 무차별성이다. 언어를 매개로 하는 개념적 판단이 고려되지 않는 한, ‘무엇이 보이는 시각 경험그 무엇을 보는 것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다만 보이는 그 무엇어떤 무엇으로 부르거나 혹은 규정할 때, 이것이 시각 경험 자체만으로는 불가능함을 알 뿐이다. 따라서 개념 없이는 직관은 불가능하다거나 개념적 판단 없이는 시각 경험은 불가능하다는 입장은 여기서 부정된다. 단지 직관 없이는 개념은 불가능하다거나 시각 경험 없이는 개념 형성도 불가능하다는 입장만 인정된다. 이를 암시하는 지각 경험에 대한 정의 방식 중 하나는 지각 경험이란 지각하는 주체를 포함한 관계적 과정의 한 측면이 그 주체의 행위를 사방전후(四方前後)로 제한하도록 드러난 방식일 것이다. 이러한 정의 방식이 갖는 타당성은 이 글에서 다룰 수 없다. 하지만 이 글의 궁극적 목적은 그러한 타당성을 지향하고 있다는 것은 이 글을 다 읽는 순간 짐작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직접적 지향성(Immediate Directedness)

§8. 과연 어떤 의도성(intentionality)은 시각 경험 자체에 내재하는가? 의도성은 ‘Xp를 의도한다라는 표현 유형과 종종 관련된다. 그러나 무엇이 언어를 매개로 표현된다고 하여 반드시 언어적인 무엇일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대상과 대상의 표현은 다르기 때문이다. ‘나는 밥을 먹는다라는 표현이 밥먹는 행위를 대신할 수는 없다. 상호주관적 언어 사용에 의해 형성된 개념 혹은 믿음 체계에 바탕을 두지 않는 의도성이 있는가? 이 문제는 의도성의 표현 문제가 아니다. 그러한 의도성이 있다면, 비언어적 혹은 비개념적 의도성이라 부르면 될 것이다. 반면에 언어적 혹은 개념적 의도성은 어떤 개념 혹은 믿음 체계가 없다면 불가능한 것이다. 개념적 시각 판단과 대비된 시각 경험에 의도성이 존재한다면, 그 의도성은 당연히 비개념적인 것이다.

 

일반적 의미에서 의도성이란 행위를 유도하는 마음의 어떤 능동적 상태로 이해된다. 시각 경험이 얼마나 의도적인가를 결정하기는 힘들지만, 시각 경험의 모든 측면이 반드시 능동적이지 않다는 점은 분명하다. ‘잡을 수 있는 것이라는 자연적 제시성과 관련된 비언어적 구별 능력이 관찰자의 어떤 능동적 의도성에 의해 조절된다고 보기 힘들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우리들에게 혹은 한 살짜리 유아들에게 대상들이 구별되어 나타나는 것을 가지고, 우리가 혹은 유아들이 그렇게 보이기를 의도했기 때문이라는 주장은 납득하기 힘들다. 유아들에게서 발견되는 일종의 호기심으로서의 의도성은 일반적으로 지각된 것 등에 대한 능동적 반응으로 보는 것이 일상적 의미에서 타당하다. 그러한 능동적 반응이 반드시 개념 혹은 믿음 체계에 바탕을 둔 것은 아니다. 말 못하는 아이가 처음 보는 장난감에 호기심을 가지고 어떤 의도적 반응을 보일 때, 본다는 것 자체가 완전히 의도적이라면 여기서 처음 본다는 말 자체는 무의미해 진다.

 

§9. 시각 경험에 대한 일상적 견해는 그것이 무의식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가 무엇을 볼 때, 그 무엇에 대해 직접적으로 의식한다. 여기서 무엇에 의식함은 의도성과는 달리 반드시 능동적 의미를 띠고 있지 않다. 무엇을 볼 때 그 무엇에 의식함은 결코 무엇을 의도적으로 이렇게 저렇게 보는 것이 아니다. 즉, 시각 경험에서 무엇을 의식함은 무엇이 의식됨과 다르지 않다. 우리가 그 무엇을 의식할 수 없다면, ‘본다는 말 자체가 무의미할 것이다. ‘시각 경험과 본다는 것의 무차별성(§7)’에 따르면, 시각 경험에서 우리가 의식하는 것은 당연히 나무와 돌, 정확히 말하면 나무혹은 로 불리게 될 일상적 대상들이다. 여기서 소위 직접적 지향성이란 다음 맥락에서 이해된다.

 

시각 경험에서 일상적 대상들에 의식함언어 혹은 개념적 판단을 매개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그 대상들에 직접적으로 지향하는 것이다. 개념적 판단이 개입하지 않는 한, 시각 경험에서 직접적으로 지향하는 대상들은 형태, , 거리감 등이 분리되어 경험되지 않는다.

 

 

이중성(Dual Aspect)

§10. 시각 경험은 눈을 통해 무엇이 보이는 경험이다. 하지만 꿈과 같은 경험도 무시할 수 없다. 꿈이라는 현상은 시각 경험이 눈이라는 감각기관뿐만 아니라 뇌에 좌우된다는 발견과 일치한다. 언급한 직접적 지향성은 꿈과 같은 시각 경험에도 적용된다. 다만 지향하는 대상은 나무와 같은 일상적 대상이 아닐 뿐이다. 이를 전제로 경험 대상을 구분하는 것은 일상적 시각 경험과 꿈의 경험이 서로 다른 경험임을 바로 함축하지 않는다. 그래서 두 가지 입장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첫째, 일상적 시각 경험은 꿈과 결코 구별되지 않는다. 둘째, 그 둘은 서로 다른 경험이다.

 

첫 번째 입장에 따르면, 일상적 시각 경험과 꿈의 경험에서 지향하는 것은 어느 경우에나 실재하는 일상적 대상들이 아니라 어떤 정신적 장면(mental scene)과 같은 것일 수 있다. 이러한 장면의 시공간성은 순전히 내적이며, 마음은 외부 대상들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지 않는다. 결국 외부 대상들이 아닌 감각되는 것 자체가 존재하는 것이라는 식의 주장이 타당성을 가질 수 있다. 이 점은 눈으로 보는 것들이 머리혹은 두뇌속에 들어있지 않다는 실재론적 태도(§1)와 정면으로 충돌한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우리가 꿈과 일상적 시각 경험을 구분한다는 점이다.

 

§11. 여기서 누군가 꿈은 무의식적인 반면에 시각 경험은 의식적이기 때문에 두 경험은 서로 구별된다고 주장할지 모른다. 꿈이 정말 무의식적이라면, 꿈을 꿀 때 어떤 장면을 의식함은 근거가 없어진다. 또한 꿈이 가끔은 기억될 수 있다는 사실도 설명하기 힘든 사실이 되어 버린다. 꿈은 마치 일상생활에서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오는 말과 유사하다. 굳이 강조하지 않아도 될 표현을 담은 말은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오는 경우가 많다. 그러한 경우, 해당 표현은 근본적으로 의도되지 않았음을 보여 줄 뿐이며, 화자는 분명히 그 말이 튀어나온 순간을 의식한다. 따라서 꿈을 무의식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것은 꿈과 일상적 시각 경험을 구분하는 데 효과적이지 않다.

 

이제 앞서 의심의 대상이 된 입장, 일상적 시각 경험이 의도적이라는 입장을 검토해 보자. 이 경우, 꿈을 꾸는 것은 의도적이 아니기 때문에 일상적 시각 경험과는 다른 차원의 활동에 속한다. 반면에 일상적 시각 경험은 하나의 의도적 상태로서의 정신 상태이다. 이 상태는 비개념적이지만 어떤 내용을 가지고 있으며, 그 내용은 관계된 대상에 대해 직접적 지향성을 가진다. 노란 자동차를 볼 때의 시각 경험은 단순히 노란색이 아닌 노란 무엇이므로 결국 그 자동차를 보는 것과 구별되지 않는다. 이러한 입장에 따르면, 시각 경험과 관련된 의도적인 정신 상태의 내용이 직접적 지향성을 갖게 된다. 이러한 이유로 해당 정신 상태는 관계된 대상의 경험을 구성하는 인과적 요소들 중 하나이다.

 

일상적 시각 경험이 의도적이라는 입장에 따라 일상적 시각 경험과 꿈을 구분하는 경우, 시각 경험은 완전히 내적일 수 없다. 왜냐하면 시각 경험의 의도성은 외부 대상에 대한 직접적 지향성이라는 특성과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일상적 시각 경험이 의도적이라는 입장은 분명히 그러한 직접적 지향성을 부정한 채 시각 경험을 정신적 재표상과 같은 것으로 규정하는 입장보다는 일상적이다. 그러나 전자의 입장은 여전히 일상적 시각 경험과 정합적인 관계를 맺기 힘들다. 일상생활에서 우리는 시각 경험의 시공간적 실재성에 대해 의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일상적 시각 경험을 외부 대상에 대한 직접적 지향성을 갖는 의도적 상태로 규정할 때, 그러한 상태는 여전히 일종의 정신 상태이며, 그러한 정신 상태에 시공간적 실재성을 부여하기는 힘들다.

 

§12. 꿈과 일상적 시각 경험의 구별은 후자의 시공간적 실재성이 일상생활에서 의심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뚜렷해진다. 일상적 시각 경험은 단순히 관찰자의 정신 상태나 혹은 두뇌의 상태로 위치화되지 않으며, 관찰자뿐만 아니라 관찰자와 관계된 일상적 대상들을 포함하는 시공간적 경험이다. 이러한 해석은 철학자들에게는 이상해 보일지 모르지만 분명히 다음과 같은 일상적 사실들에 부합한다.

 

(i) 일상적 시각 경험은 관찰자가 자기 몸을 의식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자기 몸의 일부를 항상 보고 있다는 점에서 관찰자를 포함한다. 특히 관찰자의 몸이나 나무와 같은 대상이나 모두 외적인 것으로 인식된다는 사실에 주의해야 한다. 이러한 사실로부터 시각 경험은 대상들과 관찰자를 동시에 포함한 일종의 시각의 방(visual room)’에 비유 가능하다. 시각 경험을 그저 외부의 자극에 의해 구성되는 정신적 재표상과 같은 것으로 간주하고, 그러한 재표상과 관찰자를 구분하는 일상성을 구제하기 위해 마음의 선험적 형식으로서 선험적 시공간을 가정하는 칸트 방식의 생각은 일상적 시각 경험과 거리가 멀다.

 

(ii) 일상적 시각 경험에서 관찰자는 경험과 관계된 대상들에 직접 의식하며, 이때 그와 그것들 혹은 그것들 사이의 거리감이 그에게 파악된다. 그와 그것들 사이의 거리감의 기준점은 그의 몸이 되고, 그것들 사이의 거리감의 기준점은 특정 그것이 된다. 그러한 기준점의 선별은 그의 활동 방식에서 기인한다. 그러한 활동 방식에서 대상들의 거리감과 변화는 결코 분리되어 경험되지 않는다. 그러한 분리는 오로지 시각 경험에서 추상화된 것일 뿐이다.

 

(iii) 관찰자는 직접적으로 지향하는 일상적 대상들이 그의 머리혹은 두뇌속에 들어있다는, 그리고 그것들이 관찰자의 의지에 따라 움직인다는 느낌을 가지지 않는다.

 

꿈에 부여되는 시공간성이 위의 세 가지 사실들에 부합한다고 보기는 힘들다. 눈을 뜨고 대상을 보는 의식, 시각 경험이 관찰자의 몸을 경험 대상으로 포함한다는 일상적 사실을 꿈에 적용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꿈속에서 자신을 나타내는 어떤 상(image)을 의식하는 경우는 있을 수 있지만, 실제 관찰자의 신체 일부가 보이는 경우는 없다. 일상적 시각 경험에서 관찰자는 계속해서 움직이고 있으며, 그 움직이는 방식을 바탕으로 (ii)의 관찰 기준점이 시시각각 고정된다. 더욱이 꿈속에서 느껴지는 거리감은 일상적 시각 경험에서의 거리감과 일치하지 않는다. 꿈을 꾸는 동안 무서운 장면에 놀라 어떤 반응을 하려는 순간, 꿈의 내용은 관찰자의 욕구에 따라 뒤바뀌기도 한다. 이러한 사실들은 꿈과 일상적 시각 경험의 차이를 아는 것의 근거가 된다.

 

꿈의 경험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것은 두뇌 활동 없이는 시각 경험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로부터 시각 경험 자체가 그저 그런 두뇌 활동의 산물이라는 결론은 성립하지 않는다. 시각 경험에서 그 누구도 그런 두뇌 활동에 의식하지 않는다. 더욱이 시각 경험의 시공간적 실재성, 관찰자의 몸조차 외부 대상이 되며, 거리와 변화가 동시적으로 인식되는 것은 두뇌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꿈의 경험과 달리, 이미 사라진 별의 폭발 현상이 지금 관측되는 것은 외부 대상과의 인과적 상호 작용 없이는 시각 경험은 불가능함을 보여 주는 극단적 경우이다. 이 경우도 인과 관계 없는 시각 경험은 불가능함을 보여 줄 뿐이다. 일상생활에서 별을 그저 빛이라는 자극에 의해 두뇌 속에서 구성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시각 경험은 닫힌 실험실 안의 특수한 조건 아래에서 성립하는 지각 경험이 아니다. 그것은 시장터와 같은 열려진 일상생활의 기반이다. 시각 경험은 결코 정지된 상 혹은 그러한 상들의 연속체가 아니다. 시각 경험의 시공간성의 실재성을 인정하면, 시각 경험은 결코 내적일 수 없다. 그 경험은 단순히 두뇌에 위치화되는 정신 상태와 같은 것이 될 수 없다. 그렇지만 시각 경험에서 일상적 대상들에 직접 지향한다는 특성은 의식 상태이기 때문에, 시각 경험은 주체의 내면적 측면이 완전히 무시된 순수한 어떤 외적인 것도 아니다. 여기에서 시각 경험의 이중성이란 특성을 얻을 수 있다.

 

시공간적 실재성을 가진 시각 경험은 내적 그리고 외적인 양 측면을 가진다.

 

§13. 시각 경험의 시공간적 실재성이야말로 일상생활이라는 나무의 뿌리와 같은 것이다. 그 실재성을 의심하는 것은 결국 생활세계의 실재성을 의심하는 것이다. 그러한 실재성을 경험 이전의 실재성이 갖는 객관성에 무차별하게 대비시켜 일종의 환영과 같은 것으로 취급하는 것은 삶을 환영으로 돌리는 것과 마찬가지다. 어떤 철학자가 교통사고를 내거나 당한 상황을 경찰에게 설명할 때, 그의 시각 경험의 시공간적 실재성에 대한 확신은 그 설명에서 떼어낼 수 없는 것이다. 이 점은 시각 경험에 대한 그의 철학적 입장과 무관하게 성립하는 것이다. 시각 경험의 실재성은 많은 새로운 문제들과 관련된다. 이러한 문제들 중 하나로서 관찰자를 포함하지 않는 시공간적 실재성시각 경험의 시공간적 실재성의 관계에 관한 것을 들 수 있다. 이 문제는 경험 이전의 세계와 경험의 세계의 관계, 미시 세계와 거시 세계의 관계, 전체와 전체를 구성하는 것들의 관계 문제와 밀접히 맞물려 있다.

 

어쨌든 분명한 사실은 일상적 대상들이 시각 환경과 무관하게 있는 그대로 경험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시각 경험에서 일상적 대상들에 대한 직접적 지향성은 그것들이 시각 환경과 무관하게 항상 동일하게 경험되어야 함을 논리적으로 전제하지 않는다. 많은 철학자들이 눈속임 문제로 감각 소여(sense data), 감각 인상 혹은 정신적 재표상과 같은 이론적 개념을 만들고, ‘그러한 것이 진실(veridical)한가?’라는 문제를 놓고 고민해왔다. 그러한 감각 소여나 정신적 재표상과 같은 것이 정말 시각 경험의 직접적 대상이라면, 그래서 일상생활에 내재해 있는 실재론적 태도가 환영에 불과하다면, 지금까지의 논의는 공허한 것이 되고 만다. 시각 경험과 이에 바탕을 둔 당연한 믿음들 사이의 관계에 대한 또 다른 두 개의 특성은 이러한 결론을 성립하지 않도록 해 준다.

 

 

그물망(Network)

§14. 시각 경험에서 찾을 수 있는 세 가지 특성들, 시각 경험과 본다는 것의 무차별성’, ‘직접적 지향성그리고 이중성을 인정하면, 외부 대상들에 지향하는 능력은 생활세계의 목차에 속한다는 점을 또한 인정해야 한다. 다시 말해, 그러한 능력은 일상생활을 바탕으로 이론적 논의에 의해 쉽게 거부될 수 없는 것이다.

 

시각 경험에서 개념의 도움 없이 외부 대상들에 직접적으로 지향한다는 점은 §4에서 언급한 근본 틀 <BF>를 형성하는 데 필수적인 인지적 요소이다. <BF>시각 경험에 바탕을 둔 믿음들의 증거를 쉽게 찾을 수 있는 경우에 그 믿음들이 당연하게 나타난다는 점을 함축한다. 그 믿음들이 시각 경험에 바탕을 두는 한에서, 그것들의 증거는 이미 그 경험 안에 도달되어 있어야 한다. 시각 경험에서 이 공은 노랗다라는 나의 당연한 믿음에 대한 증거는 내가 본 혹은 보는 노란 공이며, ‘그 버스는 방금 출발했다라는 나의 당연한 믿음의 증거는 나로부터 멀어져가는 버스이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비개념적인 시각 경험 자체에서 보이는 무엇이 반드시 하나의 공또는 하나의 버스로 분류됨이 보장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반면에 시각 경험에 바탕을 둔 당연한 믿음들은 사물들의 개념적 분류를 전제하고 있다. 그러한 믿음들은 개념적 시각 판단(§6)의 영역에 속한다. 다시 말해, 무엇이 보인다는 사실만으로 그 무엇이 이러이러한 믿음에 대한 직접적 증거라고 주장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경험 대상에 직접적으로 지향한다는 점은 <BF>에 대한 하나의 필요조건일 뿐이지 결코 충분조건은 아니다. 시각 경험이 어떤 방식으로 개념적 시각 판단을 포함한 넓은 의미의 경험으로 발달되는지, 혹은 개념적 판단이 어떻게 시각 경험에 개입하는지는 여전히 알 수 없는 상황이다. 그 문제를 일단 심리학자와 인지과학자 등에게 넘기더라도, 일상생활을 바탕으로 <BF>에 대한 또 다른 인지적 요소를 찾을 수 있다.

 

§15. X는 공연장에서 한 마술사가 공중에 뜨는 것을 목격했지만 믿지 않는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 장면을 표현하는 믿음이 X가 시각 경험에서 가질 수 있는 당연한 믿음들과 마찰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우, 일상적 시각 경험에서는 X는 공중에 뜬 마술사라고 불리는 무엇에 의식하지만 그 마술사는 날 수 있다라는 믿음을 당연시 여기지 않는다. 그는 그 마술사를 그 믿음에 대한 증거로 여기지 않는다. 이러한 보기 또한 비개념적인 측면을 가진 시각 경험과 개념적 시각 판단의 구분(§7)을 요구한다. 또한 직접적 지향성(§9-§10)이라는 특성은 시각 경험에 바탕을 둔 한 특정 믿음의 당연성이 결코 그 믿음의 독립성을 함축하지 않음을 암시한다. , 그 믿음이 또 다른 당연한 믿음들과 독립된 상태로 특정 일상적 대상과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한 일상적 대상이 시각 경험에 의해 X에 도달되고 X의 믿음 B의 즉각적인 당연성에 대한 증거로 파악되기 위해서, BX가 일상생활에서 당연시 여기는 다른 믿음들과 마찰하지 말아야 한다. 문제는 당연한 일상적 믿음들의 관계가 무엇인가?’라는 점이다. 그 관계는 일단 일상생활에서 서로 돕는 관계(mutual supporting relation)’라고 말할 수 있다.

 

X가 자신의 손을 볼 때 잠재적으로 가질 수 있는 당연한 믿음은 하나가 아니다. 실례로 나의 손은 두 개다’, ‘장갑은 겨울에 유용하다’, ‘손은 발과 다른 기능을 한다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믿음들이 없다면, X왜 장갑이 두 짝인가?’를 묻게 될 것이다. 그러한 물음이 일상생활에서 불필요한 것으로 여겨지는 사실은 근본 틀 <BF>를 만족하는 당연한 믿음들이 일상생활에서 서로서로 돕고 있음을 암시한다. 어떤 믿음이 이렇게 서로 돕는 관계를 맺고 있는 다른 믿음들에 반할 때, 그 믿음을 당연하게 여겨질 수 없음은 언급한 마술사 보기에서 잘 나타난다.

 

시각 경험을 바탕으로 어떤 대상이 당연한 믿음 B의 증거로서 파악되기 위해 요구되는 첫 번째 조건은 직접적 지향성이다. 두 번째 조건은 <BF>를 만족할 수 있는 다른 당연한 믿음들과 B의 서로 돕는 관계이다. 그러한 관계를 당연한 믿음들의 그물망이라고 하자. 물론 당연한 믿음들의 그물망은 전체로서 한 번에 의식될 수 있는 어떤 것은 아니며, 그 돕는 관계 또한 B의 당연성이 B를 가지는 주체 X에게는 심리적으로 즉각적임을 배제하지 않는다. 하지만 일상생활에서 서로 돕는 당연한 믿음들의 그물망 없이는 B는 결코 X에게 즉각적으로 당연시 여겨질 수 없다.

 

§16. 일상생활에서 서로 돕는 당연한 믿음들의 그물망은 결코 외부 대상들과 그 어떠한 인지적 관계도 맺지 않는 내적인 것이 아니다. 이미 살펴본 일상적 시각 경험의 세 가지 특성들은 외부의 일상적 대상들에 대해 직접적으로 지향하는 능력을 수긍하도록 강요한다. 따라서 그 경험 자체가 완전히 내적일 수 없고, 그 경험에 바탕을 둔 특정 믿음들의 당연성 또한 그렇게 간주되어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시각 경험이 개념적 시각 판단에 흡수될 근거는 사라진다. 즉 당연한 믿음들이 경험 대상들에 대해 이러이러하다고 암시한다는 근거가 사라진다. 아이가 엄마를 보고 갖게 되는 저기 엄마가 온다는 믿음의 당연성은 아이가 엄마라고 불리는 혹은 개념적으로 그렇게 분류되는 무엇에 의식하지 못한다면 불가능하다. ‘나는 ...을 안다혹은 나는 ...을 믿는다와 같은 태도 명시유형적 표현의 국소적 불필요성(§3)을 만족하는 믿음들은 이러한 보기에 해당한다. 물론 서로 돕는 관계의 그물망을 형성하는 모든 믿음들의 당연성이 특정 장소에 국한된 지각 환경을 반드시 전제하는 것은 아니다. 태도 명시유형적 표현의 전체적 불필요성(§3)을 만족하는 소위 일반화된 믿음들이 그렇다. 실례로 나무들은 존재한다’, ‘꽃들은 언젠가는 시든다’, ‘새들은 날개를 가지고 있다등을 들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믿음들이 특정 지각 환경에 국한된 당연한 믿음들과 단절된 것은 아니다. 그것들은 태도 명시유형적 표현의 국소적 불필요성을 만족하는 단순한 믿음들에 근거하여 일반화된 것들이기 때문이다. 또한 근본 틀 <BF>는 일반화된 믿음들도 그것들의 증거가 되는 일상적 대상들을 쉽게 찾지 못한다면 즉각적으로 당연시 여겨질 수 없음을 함축한다.

 

일상생활에서 당연시 여겨지는 믿음들의 그물망은 고정불변한 것이 아니다. 특히 일반화된 믿음들이 그렇다. 우리가 뉴질랜드에 산다면 키위라는 새는 상식적 의미에서 날개를 갖고 있지 않음을 쉽게 발견할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모든 새는 날개를 가진다라는 일반화된 믿음은 수정될 것이다. 이러한 수정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키위를 하나의 새로 파악하는 데 있어서 새에 관한 개념적 판단 이외에 비개념적이지만 혹은 비언어적이지만 키위와 다른 새들 사이의 유사성을 찾을 수 있는 어떤 인지 능력을 시각 경험에서 가정하는 것은 자연스러워 보인다. 만약 보이는 어떤 무엇을 로 분류하는 것이 완전히 언어적인 개념적 판단에만 의존한다면, 새로운 증거에 의해 당연한 믿음들의 그물망이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은 불가능한 것이 되고 만다. 우리의 분류 능력이 언어적 혹은 개념 체계에 완전히 갇혀 있다면, ‘새로운 증거라는 말 자체가 무의미해지고, 일상생활에서 서로 돕는 당연한 믿음들의 그물망은 고정불변한 것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지각 경험은 그러한 그물망 형성 및 변화에 필수적이고, 살펴본 시각 경험의 세 가지 특성들은 그러한 그물망이 결코 완전히 내적인 것이 아님을 함축한다. 이 점은 시각 경험과 개념적 시각 판단이 일상생활에서 결코 분리되어 작용하지 않음을 분명히 해준다.

 

 

정상적 그리고 비정상적 시각 환경의 구별(Distinction between Normal and Abnormal Visual Environment)

§17. 넓은 의미의 시각 경험은 개념들과 믿음들이 개입되어 있는 경험이라는 사실은 보이는 것 자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경우에 더욱 분명해 진다. 다시 말해, 시각 경험 자체가 당연한 믿음들에 대한 확실한 증거를 제공해 주는 것은 아니다. §15의 마술사 보기는 이에 대한 실례이다. 그런데 우리를 속인 것은 시각 경험 자체가 아니라 마술사이다. 반면에 시각 경험 자체가 우리를 속인다고 여겨지는 경우가 있다. 여기서 생각할 수 있는 경우는 다음 두 가지다.

 

환각: 이러 이러한 특성들을 가지는 한 일상적 대상 O를 보았다고 믿지만 O는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눈속임: OF로 보였는데 실제로는 G이다.

 

환각의 경우, 철학자들은 환각을 불러일으킨 원인으로 종종 마약복용을 실례로 든다. 그러나 특정 마약을 복용한 남자가 디스코텍에서 수천 명의 여자들을 보았다는, 혹은 누가 자기를 쫓아오고 있다는 증언 등은 환각 현상을 입증하지 못한다. 진정한 환각은 외부 대상과 관련된 자극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진정한 환각 현상은 눈으로 세상을 볼 때 아무런 연관성이 없는 꿈과 같은 경험이 중첩되고, 동시에 그 경험의 대상들을 실재하는 대상으로 간주하는 경우일 것이다. 그러한 경우가 있다면 그리고 실험적으로 증명된다면, 두뇌 기능을 포함한 감각 기관의 비정상적 기능(malfunction)이 그 원인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감각 기관의 비정상적 기능의 가능성은 지금까지 살펴본 시각 경험과 이에 바탕을 둔 당연한 믿음들의 네 가지 일상적 특성들에서 논리적으로 배제되지는 않는다. 그 특성들은 시각 경험이 자연 현상으로 두뇌 기능과 관계함을 부정하지 않고, 두뇌 기능의 이상 현상을 논리적으로 배제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12의 논의와 비슷한 맥락 정상적인 시각 경험과 환각 현상을 구별할 수 있다. 중요한 점은 아무도 일상생활에서 어떤 정신적 환각을 본다고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외부자극이 불필요한 진정한 환각 현상이 있다면 철학적으로나 과학적으로 흥미 거리가 된다.

 

눈속임 현상은 크게 두 가지 종류로 나눌 수 있다. 관찰자에 원인이 있는 주관적 눈속임과 그렇지 않는 객관적 눈속임이 있다. 주관적 눈속임의 한 실례는 바로 위에서 언급한 마약 복용자의 경우이다. 이 경우, 그 원인은 마약이 그의 잠재된 희망 혹은 불안감을 극도로 자극한 데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디스코텍에서 분명히 많은 여자들을 보았고, 우리가 그에게 그들의 수를 정확히 세도록 강요할 수 없다. 그러한 강요는 시각 경험의 세 가지 특성들, 즉 시각 경험과 보는 것의 무차별성, 직접적 지향성 그리고 이중성이라는 특성들에 전제되어 있지 않다. 수천 명이나 되는 여자들이 있다는 그의 믿음 또한 시각 경험에 바탕을 둔 당연한 믿음들과 일단은 직접적으로 마찰하지 않는다. 특히 이중성이라는 특성은 시각 경험에서 어떤 주관적 측면, 실례로 의식을 제외할 수 없음에 근거한다. 따라서 관찰자에 원인을 두는 주관적 눈속임은 가능하다. 어쨌든 시각 경험과 이에 바탕을 둔 당연한 믿음들에 대하여 살펴본 네 가지 특성들이 눈속임 현상으로 부정될 이유는 없으며, 특정 믿음의 당연성은 그 믿음이 참이어야함을 반드시 전제하지는 않는다. 다시 말해, 눈속임을 허락하는 시각 경험 자체가 그 믿음이 참이어야하는 당위성을 갖지는 않는다. 중요한 점은 시각 경험의 비교를 통해 주관적 눈속임과 그렇지 않는 경우가 구별 가능하다는 것이다. 아마 그 마약 복용자는 정상 상태에서 그 디스코텍을 다시 방문했을 때 그 그 공간에 수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모일 수 없음을 알게 될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당연한 믿음들과 지각 경험이 정상적 그리고 비정상적 시각 환경의 구별에 있어 서로 협력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그 협력 관계를 객관적 눈속임의 사례를 통해 살펴보자.

 

§18. 관찰자에 원인을 두지 않는 객관적 눈속임의 대표적인 일상적 실례는 물이 반쯤 담긴 컵 속의 젓가락이 휘어져 보이는 현상이다. 그러나 우리는 젓가락이 일반적으로는 곧바르지만 물속에 반쯤 잠길 때 휘어진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 젓가락이 휘어져 보일 때도 우리가 가지는 당연한 믿음은 그것이 곧바르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정상적 시각 환경과 비정상적 시각 환경을 구분함을 시사한다. 이에 대한 또 다른 실례는 우리가 색안경을 통해 모두 녹색으로 보이는 주위 환경을 있는 그대로 믿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정상적 그리고 비정상적 시각 환경의 구별에 필요한 인지적 요소들은 무엇인가? 이 문제는 대략 다음과 같은 맥락에서 대답될 수 있을 것이다.

 

(i) 시각 경험과 본다는 것의 무차별성, 직접적 지향성 그리고 이중성이라는 시각 경험의 세 특성들은 객관적 눈속임의 경우에도 해당한다. 이 특성들은 일상적 대상들이 시각 경험에서 있는 그대로 드러나야 함혹은 경험 이전의 상태는 반드시 경험 속에 그대로 반영되어야 함을 논리적으로 전제하지 않기 때문이다.

 

(ii) 정상적 그리고 비정상적 시각 환경을 구별하는 데 시각 경험은 필수적이다. 대기 중의 젓가락 l1과 물이 반쯤 담긴 컵 속의 젓가락 l2의 시각 경험은 후자가 비정상적 시각 환경 속에 존재함을 아는 데 필수적이다. 동시에 질적으로 다른 두 가지 시각 경험이란 없다. l1l2경우를 동시에 포함한 시각 경험이 ‘l1과 관계된 시각 경험 그리고 l2와 관계된 시각 경험의 합집합과 같은 것도 아니다. 시각 환경의 구분은 오히려 동일한 대상에 대한 과거의 시각 경험을 기억해 내고, 이를 그 대상에 대한 현재의 시각 경험과 비교하는 것에 근거한다. 언급한 시각 경험의 세 특성들은 기억을 통한 과거의 시각 경험과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시각 경험을 구별해 준다. 예를 들어, 일상적 대상들에 대한 직접적 지향성은 전자에 해당하지 않는다.

 

(iii) 과거의 시각 경험들을 기억해 내고 현재의 시각 경험과 서로 비교하는 능력이 얼마만큼 개념적 판단에 좌우되는지는 잘 알 수 없다. 어쨌든 우리 인간은 문장의 형태로 과거 경험을 기억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방법이 과거 경험을 그림의 형태로 직접 기억해 내는 것보다 용이하며, 환경 적응에도 유리할지 모른다. 일상생활에서 서로 돕는 당연한 믿음들의 그물망은 과거와 현재, 여기와 저기의 비교를 통한 시각 환경의 구별에 효과적으로 개입한다. 그 그물망은 이러 이러한 환경이 정상적임을 함축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함축은 단일 믿음이 아니라, 밥을 먹는 등의 일상생활에서 젓가락은 곧다’, ‘컵은 물을 담을 수 있다’, ‘물속에 잠긴 젓가락은 변하지 않는다등의 믿음들의 돕는 관계 속에 가능하다.

 

여기서 예상되는 흥미로운 반론이 있다. 정상 그리고 비정상적 시각 환경의 구별은 유기체의 생태 방식에 좌우된다는 것이다. 물에 반쯤 잠긴 채 생활하며 우리와 비슷하게 주위 환경을 지각하는 가상의 생물체 X를 가정해 보자. X에게 있어 정상적 시각 환경이란 대상들이 물에 반쯤 잠긴 경우이기 때문에, X는 젓가락이 휘어져 있다고 확신한다. 우리에게 정상적인 시각 환경은 이 생물체에게는 비정상적인 것이다. 따라서 젓가락이 곧바르게 보이는 상태를 정상적 시각 환경과 관련시킬 수 없다. 이러한 반론은 시각 경험과 다른 지각 경험의 협력 및 통합 관계를 무시하고 있다. 이 점은 다음과 같이 논의될 수 있다.

 

(iv) 생물체 X는 수면 아래와 위의 젓가락이 곧게 보이는 것을 보고 젓가락을 만져 본다. 물에 반쯤 담긴 젓가락은 휘어져 보이지만 만져보면 곧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 경우, 시각 경험과 만지는 경험은 대립하는 것처럼 보인다.

 

(v) 수면 아래와 위의 젓가락의 경우, 시각 경험과 만지는 경험이 대립하는 것은 나타나지 않는다. 결국 X는 젓가락이 곧바르다고 확신한다. 이러한 확신은 대상들이 갑자기 변하지는 않는다’, ‘세상은 하루아침에 바뀌지 않는다등의 일반화된 믿음들에 의해 강화된다. 만약 X가 이 전에 젓가락은 휘어져 있다고 믿었다면, 시각 경험에 바탕을 둔 당연한 믿음들의 그물망은 젓가락이 물에 반쯤 잠긴 경우를 더 이상 정상적 시각 경험으로 간주하지 않도록 수정된다.

 

논의 (i)-(v)는 정상적 그리고 비정상적 시각 환경의 구별이 시각 경험을 포함한 제반 지각 경험들과 당연한 믿음들 사이의 공조성을 요구함을 보여준다. 그러한 공조성은 일상생활 속에 내재한다. 그물망과 정상적 그리고 비정상적 시각 경험의 구별이라는 두 특성들은 시각 경험에서 증거 파악의 복잡성을 암시한다. 왜냐하면 다른 세 특성들만 가지고 시각 경험에서 이러 이러한 당연한 믿음들에 대하여 이러 이러한 일상적 대상들이 그 증거로 파악된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일상적 대상들이 당연한 믿음들의 그물망 속에서 구성된 것이라는 주장은 터무니없다. 일상적 대상들은 시각 경험 속에서 드러나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논의에 따르면, 당연한 믿음들의 그물망에 그러한 대상들이 증거로 포섭되는 것은 시각 경험과 판단의 상호 의존성을 보여 준다고 말해야 한다.

 

논의 (i)-(v)에서 정신적 재표상과 같은 개념이 사용되지 않았음에 주목하자. 눈속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전통적 방법은 진실된 정신적 재표상그렇지 않은 정신적 재표상을 가정하고 구분하는 것이다. 그러나 일상생활에서 그 누구도 그러한 재표상을 본다고 믿지 않는다. 정상적 그리고 비정상적 시각 환경의 구별은 바로 이러한 사실에 바탕을 둔다. 철학이 일상생활에 뿌리를 둔다면, 진실된 정신적 재표상, 감각 소여 혹은 감각 인상과 그렇지 않은 것들을 가정하는 것은 철학적 혹은 이론적 허구일 수 있다. 그렇게 가정하는 것은 모든 문화에 공통된 것이 절대 아니다. 그것은 경험 이전의 상태와 경험을 이분하고 전자의 실재성에 우선성을 부여해 온 서양 철학 전통에서 기인한 것일 뿐이다. 그러한 전통이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음을, 그리고 그러한 전통을 부정하는 입장에서조차 여전히 남아 있어, 일상적 대상들을 마치 궁극적 실재의 그림자처럼 취급하는 현대 존재론의 문제는 다른 기회에 다룰 것이다. 이제 현대 인식론, 특히 신뢰할만한 지식을 산출하는 역사적 조건과 무관하게 특정 믿음을 참으로 정당화하는 방식에 집중된 인식론의 다양한 이론들에 대한 자세한 분석 없이 그 핵심만 살펴보아도, ‘시각 경험과 그 경험에 바탕을 둔 당연한 믿음들에 대한 다섯 가지 특성들이 현대인식론에서 무시되고 있음을 알아 보자.

 

 

 

III 근본 틀 <BF>의 일상적 다섯 가지 특성들과 일상적 정당화

 

토대주의 대 정합주의

§19. 실재론적 태도(§1)를 반영하는 근본 틀 <BF>(§4)가 함축하는 바는 우선 시각 경험에 바탕을 둔 당연한 믿음들은 별다른 정당화를 요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점은 그러한 믿음들에 나는 ...을 믿는다혹은 나는 ...을 안다와 같은 태도 명시유형적 표현(§3)이 적용되지 않는다는 일상적 사실에서 분명해 진다. 그러한 믿음들은 일상생활에서 당연하게 나타나지 않는 믿음들의 정당화에 대한 기반이다. 하지만 <BF>는 현대 인식론에서 말하는 토대주의(fundamentalism)를 옹호해 주지 않는다. ‘시각 경험에 바탕을 둔 당연한 믿음들이 일상적 정당화의 바탕이 된다할 때, 그 바탕은 토대주의의 핵심 개념인 토대를 뜻하지 않는다. 토대주의에서는 토대에 속하는 믿음들은 진리성 혹은 신뢰성에 있어 서로 독립되어 있어야 한다. , 한 믿음 B의 진리성 혹은 신뢰성이 다른 믿음들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자명한(self-evident) 경우, B는 정당화의 토대에 속한다. 여기서 스스로 자명하다는 것을 일상적인 당연성과 혼돈해서는 안 된다. 그물망이라는 특성(§14-§16)에서 시각 경험에 바탕을 둔 특정 믿음들의 당연성에 대한 필수적인 인지적 요소는 외부 대상들에 직접 지향하는 능력이다. 또 다른 요소는 그물망을 형성하는 당연한 믿음들의 서로 돕는 관계이다. 그러므로 그물망의 속한 믿음의 당연성은 정당화를 포함하는 일상생활에서 다른 믿음들과 독립되어 있지 않다.

 

§20. 당연한 믿음들의 서로 돕는 관계의 그물망은 또한 현대 인식론에서 말하는 정합성(coherence)과 동일시될 수 없다. 정합주의에 따르면, 정합성은 올바른 정당화 및 정당화되었음의 충분조건이며 믿음 체계 속에 갇힌 순수한 내적 관계이다. 이러한 정합성이 논리적, 설명적 혹은 확률적 관계 중 무엇으로 특성화되든 간에 근본적으로 외부 대상들과 어떠한 관계도 맺지 않는다. 시각 경험에 바탕을 둔 당연한 믿음들의 그물망은 결코 믿음 체계 안에 갇힌 내적 관계가 아님은 §16에서 이미 논했다. 우리는 그물망이라는 특성 하나만 가지고도 <BF>가 현대 인식론의 토대주의와 정합주의의 맥락 속에서 해석될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우리의 관심사를 믿음과 증거의 연결 문제로 옮겨보자.

 

 

내재주의 대 외재주의(Internalism versus Externalism)

§21. <BF>에 따르면, 시각 경험에 바탕을 둔 한 믿음 B가 관찰자 X에게 당연하게 나타나는 경우는 XB의 증거, 즉 관계된 일상적 대상을 즉시 찾을 수 있는 경우이다. 아마도 충분히 발달한 미래의 인지 과학은 이 경우에 대응되는 인지 상태를 밝힐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 인지 상태가 무엇이든, <BF>의 다섯 가지 일상적 특성들은 시각 경험에서 이러 이러한 당연한 믿음에 대해 이러 이러한 일상적 대상들을 증거로 파악하는 능력을 배제하지 않는다. 외적 능력으로 규정 가능한 그러한 능력은 결코 신비한 것이 아니다. 그러한 외적 능력은 시각 경험과 본다는 것의 무차별성’, ‘직접적 지향성’, ‘이중성이라는 시각 경험의 세 특성들 속에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물망정상적 그리고 비정상적 시각 환경의 구별이라는 두 특성은 그러한 외적 능력이 이러 이러한 당연한 믿음에 대해 이러 이러한 일상적 대상들을 증거로 파악하는 데 필수적일 뿐 충분하지 않음을 함축한다. 젓가락이 곧게 보이든 휘어져 보이든 보이는 무엇으로서의 젓가락이 당연한 믿음들의 증거가 되려면, 당연한 믿음들의 그물망, 그물망과 다른 지각 능력들의 공조 또한 필요하다.

 

어쨌든 외부 대상들에 지향하는 능력은 시각 경험에서 증거 파악의 필수적인 인지적 요소로서 간주되어야 하며, 이 점은 우리가 무엇을 볼 때 개념의 도움 없이도 그 무엇에 직접 의식한다는 일상적 사실의 철학적 표현일 뿐이다. 이러한 외적 능력은 현대 인식론에서 말하는 내재주의 혹은 외재주의에서 무시되어 왔다. 일반적으로 내재주의에서 증거란 결코 실재하는 일상적 대상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외부 대상들에 지향하는 의식 또는 의도성 같은 것이 설명력을 가지는 외재주의란 없기 때문이다.

 

§22. 내재주의의 대표적인 사례는 전통적 의미에서의 토대주의로 내적 토대주의라고 정의할 수 있다. 여기서 증거란 외부대상들이 아니라 그것들에 대응하는 자극, 감각 소여 또는 정신적 재표상들이며, 경험주의에서 말하는 주어진 것(the Given’)이란 바로 그러한 것들이 경험의 원천이라는 개념이다. 스스로 자명하며 서로 독립적인 믿음들, 즉 정당화의 토대에 대한 증거가 바로 이 주어진 것이라는 관점이 경험주의에 바탕을 둔 내적 토대주의이다.

 

내재주의로서 내적 토대주의는 시각 경험과 본다는 것의 무차별성이라는 <BF>의 특성을 갖지 않는다. 시각 경험의 대상은 바로 주어진 것이지 일상적 대상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직접적 지향성 및 이중성이라는 두 특성들 또한 내적 토대주의는 갖지 않는다. 내적 토대주의는 이 세 특성들 속에 반영된 외적 능력을 인정하지 않는다. 내적 토대주의는 §20에서 언급한 토대주의의 한 종류이기 때문에 <BF>의 모든 다섯 가지 특성들을 거부한다. 그물망이라는 특성은 이 토대주의에서 당연히 거부되며, 정상적 그리고 비정상적 시각 환경의 구별이라는 특성은 진실된 그리고 그렇지 않은 정신적 재표상의 구별 문제로 대체된다.

 

§23. 정합주의에서 내재주의로 간주될 수 있는 것은 전통적인 진리 정합론(a coherence theory of truth)이다. 여기서 정합성은 한 믿음의 정당화가 좋은지 아니면 별다른 정당화를 요구하지 않는지의 기준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그 믿음이 참인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유일한 기준이다. 이 두 기준의 구별은 적어도 일상적 정당화 수준에서는 의미가 있다. 일상적 의미에서 좋다고 여겨지는 믿음의 정당화는 당연한 믿음들의 그물망에 바탕을 두며, 이때 해당 믿음들의 당연성은 정당화될 믿음이 반드시 참이어야만 함을 보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정합성 자체가 진리 혹은 참과 동일하다면, 일상적 대상들을 경험적 믿음들에 대한 직접적 증거로 보기 힘들다. 진리 정합론에 의하면, 진위 여부의 합리적 판단은 궁극적으로 정합성을 추구하는 믿음 체계에 갇혀 있다. 이 점에서 정합성은 순수한 내적 관계이므로 외부 대상들과 단절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 결과, 대상들에 지향하는 외적 능력이 믿음 체계 형성의 필수적인 인지적 요소로 가정될 이유가 없다. 진리 정합론에서 믿음의 증거가 되는 것은 다른 믿음 혹은 믿음의 내용, 즉 명제이며, 이 점은 근본 틀 <BF>와 양립할 수 없다. <BF>에 의하면, 시각 경험에 바탕을 둔 당연한 믿음들의 증거는 일상적 대상들이다. 어떤 믿음들이 참이어야 하기 때문에 당연하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당연하기 때문에 참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이때 그 당연성이 증거 파악과 관련되어 있으므로, 진위 여부의 합리적 판단에서 외부 대상들의 존재성은 결코 과잉 요소(a redundant factor)로 간주될 수 없다.

 

§24. 대상들에 지향하는 외적 능력이 무시되기는 외재주의에서도 마찬가지다. 현대 인식론에서 외적이라는 개념은 의식 또는 의도성 같은 내면적 측면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정착했다. 행동주의 심리학자들이 어느 개인의 이상 행동을 고치기 위해서 관찰 불가능한 그의 내면적 측면이 아니라 그의 주변 환경에서 그 원인을 찾으려고 노력하듯이, 외재주의를 옹호하는 이들은 마음의 내적 측면에 어떠한 인과적 실재성을 부여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 결과, 의도성 또는 의식 등은 믿음과 증거의 연결에서 고려되지 않는다. 따라서 시각 경험에서 대상들에 대한 지향성을 강조하는 이중성의 특성은 외재주의에서는 무시된다.

 

토대주의에 바탕을 둔 이론 중에 외재주의로 분류되는 것이 있다. 스스로 자명한 믿음들의 상호 독립성이 그 믿음들과 외부 현상들 사이의 어떤 법칙성 같은 것으로 대체 가능하다는 입장이다. 첫째, 그러한 믿음 B‘B 그리고 B의 증거와 관련된 외부 현상 P사이의 어떤 법칙성 같은 것 R의 서술에서 다른 믿음들과 무관하다는 점에서 직접적으로 정당화되어 있다. 둘째, 어떠한 정신적 상태도 R의 기술에서 나타나지 않는다. , R은 물리적 의미에서의 인과성만 갖는 법칙성과 같은 것이다. 이 두 조건들을 만족하는 토대주의를 편의상 외적 토대주의라고 정의하자. 외적 토대주의에서는 정신적 재표상과 같은 것이 가정될 이론적 이유는 없다. 하지만 직접적 지향성과 이중성이라는 특성은 인정되지 않는다. 그렇지 않다면, 시각 경험에서 외부 대상들에 직접적으로 의식할 수 있다는 외적 능력이 가정되어야 한다. 그러한 능력을 가정하는 것은 외적 토대주의의 정의와 모순된다. 그물망이라는 특성이 토대주의에 대해 적용될 수 없음은 이미 보았다. 따라서 정상적 그리고 비정상적 시각 환경의 구별이라는 특성 또한 외적 토대주의에서는 유효하지 않다. 왜냐하면 당연한 믿음들의 서로 돕는 관계의 그물망은 그러한 구별에 필요하기 때문이다.

 

§25. 전통적 진리 정합론과 달리, 정합성을 진위 여부의 기준이 아니라 좋은 정당화의 기준으로 여기는 관점이 있다. 이 관점에 따르면, 시시각각 변화하는 환경 속에서 오랫동안 지속하는 믿음 체계의 정합성은 우연이 아니다. 믿음 체계의 정합성이 우연이 아니라는 점은 일상적인 진리 대응 개념(the correspondence concept of truth)에 근거한다. 이러한 관점은 외재주의로 간주될 수 있다. 첫째, 믿음들은 두뇌의 상태들과 같은 상태들로 환원 가능하다. 둘째, 진리 혹은 참이란 그러한 상태들로서의 믿음들 그리고 믿음들을 참으로 만드는 외적 상태들 사이의 어떤 인과적 관계이다. 실례로 시각 경험에 바탕을 둔 당연한, 즉 별다른 정당화를 요구하지 않는 특정 믿음은 다른 당연한 믿음들과 정합적 관계를 맺고, 그 정합적 관계는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 믿음들의 안정되고 오래 지속하는 정합성은 실재하는 외부 세상은 이러이러하다는 객관성을 함축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요약된 정합주의를 외적 정합주의라고 하자. 외적 정합주의는 외적 토대주의와 마찬가지로 정신적 재표상이라는 이론적 대상을 반드시 가정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시각 경험에서 대상을 지향하는 외적 능력은 외적 정합주의에서도 아무런 설명력을 가질 수 없다. 외적 정합주의에서 직접적 지향성을 가지는 의식 같은 것은 믿음과 증거의 연결에서 과잉 요소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직접적 지향성 및 이중성이라는 시각 경험의 일상적 특성은 외적 정합주의에서 배제된다. 이미 논했듯이, 그물망이라는 특성은 정합성과 달리 완전히 내적인 어떤 관계가 아니다.

 

§26. 실재론적 태도(§1)를 반영하는 시각 경험에 바탕을 둔 당연한 믿음들의 근본 틀 <BF>에 관한 다섯 가지 특성들을 다루었다. 그 다섯 가지 특성들이 현대 인식론에서 충분히 고려되지 않았거나 무시되었음을 살펴보았다. 처음 세 특성은 시각 경험에서 대상들에 직접 지향하는 외적 능력을 반영한다. 다른 두 특성은 일상적 대상들이 당연한 믿음들의 증거로 파악되는 조건들과 관련된다. 근본 틀 <BF>가 일상적 정당화의 바탕인 한, 시각 경험과 개념적 판단의 관계는 현대 인식론에서 다시 고려되어야 한다.

 

 

앞으로 다루어야 할 것들

(1) 경험 이전의 상태와 경험을 이분하고 존재론적으로 전자에 1차적 지위를 부여하는 사고방식이 서양에서 굳어진 과정

 

(2) 시각 경험의 시공간적 실재성의 의미를 구체화하고, 이것이 다른 종류의 지각 경험에도 해당함을 보이는 것

 

(3) (2)와 관련해 (1)의 사고방식이 하나의 세계 이해 방식으로 간주될 수는 있지만 일상성을 파괴하는 것임을 구체화하는 것

 

(4) (3)을 위해 일상적 대상의 존재론을 사물은 어떻게 지속하는가?’ 등의 물음과 연관시켜 구성해 볼 필요가 있음

 

(5) (4)와 관련해 대상에 대한 의식과 자의식의 관계를 다루어야 함

 

(6) 어족 및 문화의 차이로 인해 당연한 믿음들의 그물망이 다원적으로 형성 가능함을 다루어야 함

 

(7) (6)으로부터 직관적인 진리 대응론이 성립하지 않는다는 반론을 재반박하고, 존재론은 다양할 수밖에 없으며, 이것이 실제적인 형이상학의 한계임을 보이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