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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능언어+미니논구술훈련: 17세기 예학

착한왕 이상하 2014. 11. 10. 19:38

* 다음 OX 퀴즈 자료를 개발자 이상하의 허락 없이 변형하여 상업적 목적으로 사용하는 것을 금합니다. (GK 비판적 사고 010-9750-5880)

 

* 17세기 예학

 

다음 수능에 출제된 다음 제시문을 읽고 적절한 것에 대해서는 ‘O’, 적절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X’를 표기하시오.

 

한국철학사에서 17세기를 보통 예학(禮學)의 시대라고 한다. 예학은 15세기 말 성리학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가 이루어지고 그에 따라 유교적 이념의 실천이 강조되면서 발달하기 시작했다. 17세기에 들어서 예학이 더욱 성행하게 된 것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사회 질서가 흔들리면서 국가적으로 이를 재정비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17세기의 예학은 크게 두 계열로 나뉘어 발전했다. 하나는 기호학파에 속한 김장생과 그 문하의 예학이고, 다른 하나는 영남학파에 속한 정구와 그 문하의 예학이다. 김장생을 중심으로 한 기호예학은 주자가례(朱子家禮)*를 존숭하여 가례를 중시한 반면, 정구를 중심으로 한 영남예학은 가례뿐 아니라 국가 제도부터 일상 의례에 이르기까지 예의 전반적인 영역을 폭넓게 연구했다.

 

우선 김장생은 학문적인 관점에서 예를 시행해야 하는 명분과 그 철학적 근원을 고증하고 정립하는 데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예를 실천하기 전에 수신(修身)을 통해 온전한 심성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고, 예를 실천하는 과정에는 반드시 성의가 있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리고 예학의 귀결을 통()을 바르게 하는 것, 곧 정통(正統)으로 보았다. 가정·사회·국가에서는 그 나름의 기강과 보편적인 질서가 필요한데 그 근간이 통()이며 이러한 통을 뒷받침해 주는 것이 예라는 것이다. 김장생은 안정된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보편적인 질서를 가례에서 찾았다. 그리하여 가례를 사대부만의 소유가 아니라 인간의 보편적인 예법의 근간이 되고 더 나아가서는 왕실 의례 또한 가례와 같은 범주에서 구현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한편 정구는 예의 근본이 마음에 있다고 보고 마음의 수양과 실천을 강조한 소학(小學)과 심경(心經)* 공부를 중시했다. 아울러 몸을 다스리는 것은 마음이요, 마음을 다스리는 것은 경()이라고 하여, 일신을 다스리는 요체인 경을 함양하는 과정을 예를 실천하는 과정으로 간주했다. 그리고 주자가례가 관혼상제의 기본적인 예만 제시하고 있어 조선의 실정에 맞지 않는 부분이 있다고 보고 예법을 우리 실정에 맞게 개선하여 예가 실제로 행해질 수 있도록 유도했다. 정구는 예학의 연구를 가례에 국한시키지 않고 국가 의례뿐 아니라 왕실 의례, 사대부 의례, 일상 의례 등으로 다양화하여 구체적으로 접근했다. 그리고 천하가 바로 서기 위해서는 만사가 예를 바탕으로 행해져야 하지만 실행 주체와 상황의 특수성에 따라 적용되는 예법이 다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처럼 예학에 대한 두 학파의 연구 방향은 달랐지만 그 궁극적인 목적은 모두 성리학의 인문 정신을 실천하여 천리(天理)를 보전하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성리학을 사상적 배경으로 한 지배계층은 예의 시행 기준을 명확하게 규정하여 철저하게 예를 준수해야 했고, 그러한 모습을 본받도록 백성들을 교화함으로써 예학이 사회 질서와 윤리를 재건하는 데 어느 정도 기여할 수 있게 했다. 그러나 예학이 점점 복잡한 절차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형식적인 엄격성에 얽매이게 되면서 예학의 본류에서 일반 백성들이 도외시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또한 임금과 신하의 위상과 권한에 대한 정치적인 입장 차와 당파에 따라 지향하는 예학이 달랐고 예학이 집권을 위한 정쟁의 도구로 사용됨으로써 국가의 발전을 저해하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

 

*주자가례명나라 구준이 가정의 예법에 관한 주자의 학설을 수집하여 만든 책.

*심경송나라 진덕수가 성현의 마음을 논한 격언을 모아 만든 책.

 

1. 17세기 예학이 발달한 이유 중 하나는 연이은 전쟁으로 인한 사회적 혼란이었다.  (    )

 

2. 영남학파보다는 기호학파가 주자의 가례를 더욱 중시했다.  (    )

 

3. 사대부의 예뿐만 아니라 왕실의 의례도 동일한 범주에 속한다고 여겼던 이는 정구이다.  (    )

 

4. 기호학파와 영남학파는 예학에 대한 연구 방향에서 차이를 보였지만, 두 학파의 궁극적인 목적은 동일했다.  (    )

 

5. 주자의 가례가 우리 실정에 맞지 않는 부분이 있다고 본 정구에 의하면 다양한 예법에 따라 예를 행하는 목적도 여러 가지이다.  (    )

 

6. <보기>에서 제시문을 정확히 이해한 친구는 장생빠이군. (    )

<보기>

 

장생빠: 나는 김장생의 예학을 받들지. 사회의 근간은 가족이야. 가족이 조화롭게 유지되도록 해주는 예법은 사대부뿐만 아니라 왕실에도 해당해. 따라서 가족에 적합한 예법, 사대부에 적합한 예법, 왕실에 적합한 여러 예법들을 만드는 것은 주자의 뜻을 저버리는 것이지.

 

정구빠: 나는 정구의 예학을 받들지. 주자의 가례는 우리 현실에 적용되기 힘든 측면을 갖고 있어. 또 사회를 구성하는 집단들은 규모의 측면에서 다를 뿐만 아니라 관계의 측면에서도 다르게 마련이야. 더욱이 중국과 조선의 상황은 다르기 때문에, 주자의 가례를 존중하는 것은 중국적인 것을 기준으로 우리 것을 평가하는 사대주의적 발상에 불과해. 따라서 우리 현실에 맞는 다양한 예법들을 마련하고, 그 예법들을 바탕으로 예의 목적을 논해야 마땅해.

 

삐딱이: 17세기 예학이 이후 세대에 미친 영향은 결코 긍정적으로 평가될 수 없어. 예학의 목적은 본질적으로 권력을 쥔 사람들을 위한 것이야. 일반 백성들의 행위 방식을 권력층의 입맛에 맞도록 유도하는 것이 예학의 궁극적 목적이기 때문이지.

 

7. 위 글에 근거해 <보기 1>(A)와  (B)를 비교한 것으로 적절한 것을 <보기 2>에서 모두 고른다면,  (),  (),  ()가 되겠군.  (     )

<보기 1>

 

(A) 율곡 이이의 사상을 계승한 (   ㉠   )17세기 예학의 토대를 닦은 인물 중 한 명으로 평가된다. 예는 개인의 행위 규범과 사회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제도가 현실에 구체화된 것을 뜻한다. 이러한 예에 대한 그의 관심은 그가 혼란스러운 시대를 살았다는 사실에 기인했다. 그는 임진왜란, 정유재란, 정묘혼란, 인조반정, 이괄의 난을 겪었다. 이러한 혼란한 시대를 산 그는 전통적인 가치관의 동요와 사회 질서 및 국가 기강의 해이를 극복하기 위해 예학에 관심을 기울인 것이다. 그는 모든 종류의 예는 유교 공동체의 기본 단위인 가족에 적용 가능한 것에 그 뿌리를 두고 있으며, 또한 그것의 확대에 지나지 않다고 보았다. 그는 주자의 가례를 고증에 근거해 분석하고, 올바른 규범과 국가의 정통성을 확립하여 사회 질서와 국가의 기강을 세우려고 하였다.

 

(B) 예라는 것은 크게는 관혼상제, 작게는 언행에서 지켜야 하는 것이나 절차를 뜻한다. 유교 사회에서 예는 주자의 예에서 벗어나서는 안 되기 때문에, <주자가례>는 예를 논할 때 중심이 되었다. 그러나 주자의 가례는 유교의 예에 대한 근간만 밝히고 있기 때문에 구체적 상황에 적용되기 힘든 측면을 갖고 있었다. 더구나 조선의 실정에 맞는 준칙이 확립될 필요가 있었다. (   ㉡   )은 주자의 예설에만 만족하지 않고 우리 실정에 맞는 예학을 정리했다. 그는 예서의 편찬에서 주자의 가례를 무조건 삽입하는 것에 반대했다. 그는 예학의 이론적 근간을 가례에 두되 구체적 상황에 적합하도록 종류별로 정리된 예법들을 강조했다.

 

<보기 2>

 

()  의 인물은 김장생, 의 인물은 정구라고 할 수 있군.

()  (A)(B)는 연구 방향에서 기호학파와 영남학파의 입장 차이를 보여주는군.

(사회적 실천에 있어서 의 목적은 의 목적과는 판이하게 다르겠군.

()  (A)(B) 중 무엇을 지지하든, 예를 실현하려고 했던 사람은 예학이 집권 유지의 수단으로 전락하지 않도록 경계해야 했어.

 

8~9. 생략

 

 

* 미니 논구술 훈련

 

[논제 1] 제시문을 250자 내외로 요약하라.

 

[논제 2~3] 생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