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철학 에세이/인지와 경험

욕망 충족 2. 경험 기계 EM(수정)

착한왕 이상하 2016. 8. 1. 21:52

 

3.

욕망 충족 이론에서 욕망은 광범위한 의미를 갖는다. 그 의미 반경은 배설 등 본능적 욕구에서부터 인생의 장기 전망에 이르기까지, 현재 불편한 것을 제거하려는 것에서 새로운 것을 확보하려는 것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물질적 대상을 소유하려는 욕심에서부터 특정 인간 유형에 도달하려는 욕심에 이르기까지 모두를 포함한다. 이 때문에, 욕망 자체를 단일적으로 규정하기란 어렵다. 배설 등 본능적 욕구에 주목하는 경우, 욕망은 특정 행위를 유발시키는 성향(disposition)으로 규정 가능하다, 하지만 모든 욕망이 그러한 성향으로 설명될 수는 없다. 실례로 나는 10년 후에 이러이러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욕망을 들 수 있다. 욕망을 정의하고 분류하는 방법은 행위, 욕망 대상, 처벌과 보상에 의한 학습 등의 맥락에 따라 다양하다. 이러한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욕망들이 삶에서 보여주는 기능적 공통점은 있다.

 

한 개인 X의 욕망이란 ‘X가 삶을 지속시키고 변화시키기 위해 충족되길 원하는 어떤 것이다.

 

이때 ‘X가 원한다는 것은 의도적인 것일 수도, 아닐 수도 있다. 배설 등의 본능적 욕구는 후자에 속한다, 삶에서 중요한 대부분의 욕망은 의도적인 것이다. 이로부터 그러한 욕망을 형성시킨 맥락 전체가 ‘X의 의도적 구성물이라는 결론은 성립하지 않는다. 그러한 맥락은 X의 의지와 무관한 요인들을 포함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실례로 나는 10년 후에 이러이러한 사람이 되고 싶다X의 의도적 욕망을 생성시킨 맥락은 그 욕망의 내용만으로는 알 수 없는 것이다. 욕망이 의도적이든 아니든, 욕망은 삶을 지속시키기고 변화시키는 데 필요하다.

 

욕망 충족의 직접적 결과가 항상 쾌락 상태는 아니다. 더욱이 욕망에 내재된 목적, 즉 욕망 대상이 항상 쾌락은 아니다. 따라서 욕망 충족과 쾌락 추구는 동일한 것이 아니다. 욕망 대상이 쾌락인 경우에만, 그 둘은 동일한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삶에서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대부분의 욕망은 그러한 경우에 해당하지 않는다. 하지만 욕망 충족의 직접적 결과가 고통 상태이기를 기대하는 사람은 없다. 욕망 충족과 쾌락 추구가 일치하지 않는다고 해서, 전자가 후자를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욕망 충족의 만족 수준을 결정할 때, 즐거움이라는 쾌락을 고려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 점은 긍정 심리학(positive psychology)의 주관적, 객관적 연구 방법론에 반영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을 논하는 데 있어 모든 형태의 쾌락주의를 완전히 제거시키려는 철학자들이 많다. 그들이 의례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경험 기계 논증(experiencing machine dilemma)’이다(Nozick, R.(1974), Anarchy, State, and Utopia, Basic Books). 그 논증을 이 글의 맥락에 맞게 재구성해 보면, 다음과 같다.

 

<경험 기계 논증 EMA>

경험 기계 EM과 너의 두뇌가 전선으로 연결되어 있다. 전원을 꼽기만 하면, EM은 네가 원하는 모든 즐거움을 제공해 준다.

AB를 사랑한다. AB도 자신을 사랑해 주길 원한다.

EM의 스위치를 누르면, AB가 자신을 사랑해 줄 때의 모든 경험을 할 수 있다. 심지어 B와의 섹스에서 얻을 수 있는 모든 쾌락도 즐길 수 있다.

AEM의 스위치를 누를지 말지 고민한다.

EM으로부터 ‘B와의 사랑이라는 경험을 얻을 수는 있다. 하지만 ‘B로부터 사랑받고 싶다는 욕망이 충족되는 것은 아니다. AEM을 통해 B와 사랑하는 경험을 하고 있는 동안, 또 다른 C가 B에게 사랑을 고백할지도 모른다.

AEM의 스위치를 누르지 않기로 했다.

 

경험 기계 논증 EMA로부터 이끌어낼 수 있는 교훈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 쾌락과 욕망 충족이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욕망에 내재한 목적, 즉 욕망 대상이 항상 쾌락은 아니기 때문이다. 누구로부터 사랑받기를 원하는 욕망은 사랑과 관련된 심리 상태만으로는 충족되지 않는다. 둘째, 행복한 삶을 위해 고려해야 하는 것은 쾌락 이외에도 많다는 것이다. 사실 쾌락을 위한 삶이 행복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이 두 교훈을 받아들일 때, 쾌락과 행복을 일치시켜 쾌락만이 선하다는 입장은 성립하지 않는다. 사실 그러한 입장은 쾌락주의에서 벗어난 모든 세계 이해 방식을 행복한 삶의 담론에서 제거시키려 한다는 점에서 독단적이다. 그런데 EMA를 가지고 쾌락주의 자체를 행복한 삶의 담론에서 제거시키려는 입장 역시 독단적이다. 쾌락주의에 반감을 가진 철학자들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특정 쾌락 유지를 우선시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EM의 스위치를 눌러야 한다. 그가 EM의 스위치를 누른다면, 그는 온갖 제약으로 가득 찬 실제 삶을 외면하는 사람이다. 실제 삶 속에서만 행복은 의미를 갖기 때문에, 쾌락 추구의 삶은 행복론에서 불필요하다.

 

앞서 살펴본 우리의 거지는 EM의 스위치를 눌러야만 하는가? 거지는 쾌락 그 자체가 본래 선하다는 특정 철학적 전제에 동의해서 최소한의 쾌락만을 추구하는 삶을 선택한 것이 아니다. 거지는 거지 나름대로의 삶의 전략을 갖고 있다. 그 전략은 자기중심적 삶의 전략이다. 자기중심적 삶의 전략에는 다른 사람의 삶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그리고 동시에 나의 삶에 다른 사람의 개입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동기가 깔려 있다. 이러한 거지의 동기를 고려한다면, 그가 EM의 스위치를 누르지 않을 것임은 자명하다. 스위치를 누르는 것은 그에게는 자신의 삶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는 꼴이기 때문이다. 경험 기계 논증 EMA오로지 쾌락만이 선하고 쾌락 추구의 삶만이 행복하다는 주장을 반박하는 데에는 효과적이다. 하지만 이로부터 어느 개인이 자신의 삶의 전략을 짜는 데 있어서 쾌락을 제거하라는 권고는 성립하지 않는다. 또한 쾌락을 추구하는 모든 형태의 삶이 실제적이지 않다고 주장할 수 없다.

 

참다운 행복론은 행복한 삶을 위해 고려해야 하는 것들을 개인에게 열어 놓는 방식이어야 한다. 행복한 삶에 대해 고민할 때, 쾌락과 욕망은 빼먹을 수 없는 것들이다. 이때 경계해야 하는 것은 오히려 강한 당위성과 보편성을 함축한 행복론인 것이다. 그러한 행복론은 쾌락과 욕망에 대한 특정 규정 방식에 근거해 모두가 따라야만 하는 혹은 선택해야만 하는 어떤 당위성을 강조하는 독단에 불과하다. 그러한 독단을 멀리 할 때, B로부터 사랑받기를 원하는 A의 다음 선택도 현명한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A는 자신이 다혈질임을 잘 알고 있다. 강한 욕망이 충족되지 않았을 때 폭력을 행사한 적도 있다. AB에게 사랑을 고백하려고 한다. 하지만 B가 자신을 받아들일지 자신이 없다. 만약 B가 자신의 고백을 거절하는 경우, 스스로를 통제할 수 없을 것 같다. AEM을 만든 과학자에게 자신이 원하면 언제든지 EM을 끌 수 있는지를 물어 보았다. 과학자는 그렇다라고 대답했다. AEM의 스위치를 누르고 B와의 황홀한 사랑을 경험하기로 했다. 그러한 경험을 하고 나면, 설령 B로부터 거절당하는 경우에도 어느 정도 분노 조절이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