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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와 경찰: 현 정부의 ‘경찰국가적 태도’

착한왕 이상하 2016. 10. 24. 04:54



대의 민주주의에서 시민의 정치적 참여는 제한적이다. 정부를 구성하는 직업 정치가들을 선출하는 투표 행위도 그들에게 정치적 권력을 양도하는 행위이다. 그렇기 때문에, 민주주의는 정부가 스스로를 제어하려는 노력이 없는 경우 정상적으로 기능할 수 없다. 이를 잘 보여 주는 것이 정부와 경찰의 관계이다.

 

시민들이 직업 정치가와 직접 만나 특정 사안을 놓고 논할 기회는 많지 않다. 더욱이 정당들이 민중과의 연대를 기반으로 형성되지 않은 이 땅은 더욱 그렇다. 반면에 경찰 권력은 시민들이 매일 접하는 민주주의의 요소이다. 경찰의 역사는 근대 국민 국가의 형성 역사와 함께 한다. 산업화를 기반으로 한 국민 국가를 효율적으로 유지하려면, ‘질서와 자유의 조화가 필수적이다. 하지만 질서와 자유의 관계는 항상 갈등의 소지를 않고 있기 때문에, 질서의 이름으로 경찰 권력을 허용하는 것은 민주주의 제도 틀 내의 반민주적 요소가 될 수 있다. 그렇다고 민주주의를 위해 경찰을 없앨 수도 없다. 치안 부재 상태에서 그 누구도 자유를 누릴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자유를 어떤 식으로 규정하는 가는 무의미하다. 이 때문에, 대의 민주주의는 정부가 시민들, 즉 법적 피지배자들뿐만 아니라 정부 자체를 제어 대상으로 삼을 수 있을 때만 법치주의로 기능할 수 있다.

 

민주주의 이론에 따르면, 경찰 권력은 민주주의의 틀 내에서는 다음의 세 가지 조건 아래 허용된다.

 

(i) 경찰 권력은 특정 정치적 지도자나 정당의 관심사가 아니라 법치에 종속되어야 한다.

(ii) 경찰 권력은 최소한의 범위로 제한된 환경 속에서만 시민의 삶에 개입할 수 있다.

(iii) 경찰 권력은 그 어떤 행위에 대해서도 공적으로 설명해야 하는 책임성을 지닌다.

 

위 세 조건을 위반한 경찰의 행위는 공권력 남용으로 규정된다. 그런데 정부 구성원들이 자신들의 권력을 스스로 제어하려 하는 태도를 결여한 경우, 시민들 다수에게 명백한 경찰의 공권력 남용도 법적으로 허용된다는 것이다. 그러한 태도를 결여한 정부 구성원들의 태도는 민주주의에 걸맞지 않는 경찰국가적 태도로 규정된다. 이 번 백남기 농민 사건은 현 정부의 수장을 비롯한 구성원들 스스로 본인들이 경찰국가적 태도를 지닌 반민주적 인물들임을 고백하게 만든 사건이다.

 

(i)을 살펴보자. 경찰은 시위 등이 발생했을 때 정부의 명령에 따라야 한다. 경찰 개개인의 의도는 명령 수행에 반영될 수 없다. 문제는 법 규정과 수행도 대의민주주의에서는 정부의 몫이라는 데 있다. 대의 민주주의에서도 법은 특정 정치적 지도자나 정당의 관심사를 관철시키기 위한 수단이 될 수 있다. 그러한 지도자나 정당에게 그 무엇보다 우선하는 합법적 권위가 부여되어 있기 때문에, 그러한 지도자나 정당은 역으로 법치를 강조해 각자의 행위를 합리화할 수 있다. 공권력 남용이 명백하거나 의심스러운 사건에 대해서 그러한 자기 합리화를 시도하는 정부는 절대 사과를 하지 않는다. 이 번 백남기 농민 사건을 놓고 시민들과 줄다리기를 하고 있는 현 정부가 이에 대한 대표적 실례라 할 수 있다. 현 정부는 (ii)와 관련해 물대포 살수가 과격 시위로 인한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벌어진 일이라고 주장한다. 고립된 노인에게 고수압 물대포 정조순 살수가 최소한의 범위로 제한된 환경속에서 벌어진 적법 행위라고 주장한다. (iii)과 관련된 책임성도 권력의 앞잡이를 국회 청문회에 내세워 정당화하려 한다. 이쯤 되면, 현 정부의 태도를 경찰국가적 태도로 규정하는 데 이의를 제기하기 힘들다.

 

정부 구성원들이 자신들의 권력을 스스로 제어하려 하는 태도를 결여한 경우, 시민들 다수에게 명백한 경찰의 공권력 남용도 법적으로 허용된다. 공권력 남용도 법적으로 허용되는 국가는 경찰국가에서나 가능한 반민주적인 것이기 때문에, 정부 구성원들 스스로 자신들의 권력을 제어하려는 태도를 결여한 경우, 그들은 경찰국가적 태도를 지닌 인물들이다.

 

경찰국가적 태도를 지닌 직업 정치가는 정부 권력 자체를 제어 대상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그에게 제어 대상은 오로지 법적 피지배자인 시민들이다. 그들에게 시민이란 그저 자신들의 뜻에 따라야 하는 졸개인 것이다. 이야기가 이렇게 흐르면, 다음과 같은 반문도 가능하다.

 

대의 민주주의에서 선거란 알고 보니 진정한 의미에서 시민이 정치적 권력을 나누어 갖는 것이 아니네. 그것은 기껏해야 정부를 구성할 직업 정치가들에게 무시무시한 권력을 법적으로 보장해 주는 수단에 불과할 수 있다. 그렇다면 경찰국가적 태도를 가진 정부는 언제든지 나올 수 있는 것 아니냐?

 

불행히도 그렇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다행인 것은 하나 있다. 정부는 추상적 집단이 아니다. 그것은 특정 관심사와 야욕이라는 정치적 DNA’를 공간적으로 확산시키고 시간적으로 지속시키려는 직업 정치가들의 집단일 뿐이다. 그들 모두가 경찰국가적 태도를 갖고 있거나 그런 태도를 가진 특정 수장의 하수인인 경우, 누가 보아도 명백한 공권력 남용을 합리화하려는 짓이 벌어진다. 그러한 짓이 반복되면, 결국 그들의 정치적 DNA는 소멸한다는 것이다. , 그들에게 동조하는 시민들의 수는 급격하게 줄어들며, 그들 자체의 분열도 피할 수 없게 된다.

 

과거 노무현 대통령은 시위에서 농민이 사망하자 즉각 사과문을 발표했다. 물론 이후 벌어진 대추리 사건을 감안하면 그의 사과가 얼마나 진정성이 있었는지는 의심스럽다. 하지만 그가 사과를 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고, 그의 정치적 DNA가 여전히 살아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반면 현 정부의 수장인 박근혜는 백남기 농민 사건을 통해 스스로 경찰국가적 태도를 지닌 인물임을 증명했다. 그녀의 정치적 세력은 분열할 것이며 자멸의 길로 들어선 듯싶다. ‘... 길로 들어섰다고 단언하지 않는 이유는 반대편 직업 정치가들의 무능력 때문이다. 그들의 무능력 또한 경찰국가적 태도를 지닌 정치 세력이 지속되는 데 한 몫을 하기 때문이다.

 

지금 전두환 장군은 아주 곱게 늙어 행복한 말년을 보내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민주주의 공화국의 비종속적 자유 보장에 필요한 보복적 정의조차 실현되지 않은 이 땅의 현실을 보여 준다. 분배적 정의보다 실현하기 쉬운 보복적 정의, 즉 잘못한 인간에게 잘못한 만큼 대가를 치루 게 하는 것조차 제도적으로 기능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어떤 철학자들은 말할 것이다. “전두환 장군의 행복은 진정한 행복이 아니다.” 개소리 그만 집어 치우시라. 아무튼 박근혜도 곱게 늙은 할머니가 되어 행복한 말년을 보내게 될까? 이런 물음이 더 이상 나오지 않는 사회가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