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오늘 시위 현장에서 물대포의 살수를 직접 맞고 쓰러져 병원으로 옮겨진 백남기 씨가 사망했습니다. 경찰은 가족의 반대에도 무릅쓰고 고인의 부검 결정을 내렸습니다. 행정부가 정부로부터 독립적이지 못한 이 나라 상황을 고려할 때, 이 번 경찰의 결정은 정부의 결정이라고 해도 무방합니다.
물대포 사건은 동영상까지 남아 있는데, 정부는 왜 백남기 씨 부검 결정을 내렸을까?
부검의 법적 근거는 형사법 제 222조라고 합니다. 형사상 사건의 사인이 불분명할 때, 검찰은 (강제적으로) 부검을 결정할 수 있다는 규정입니다.
부검 결정을 한다. 부검 결정을 하지 않는다. 이렇게 두 안이 있습니다.
(1) 부검을 결정하지 않으면, 정부는 공권력 남용이라는 법적 책임론에서 벗어나기 힘듭니다.
(2) 부검을 결정하고, 물대포 살수가 사인의 직접적 원인은 아니라는 결론이 나온다면, 정부는 그러한 법적 책임론을 회피할 수 있습니다. (사건 이후 316여일이 지나 돌아가셨기 때문에, 사신의 직접적 원인을 의학적으로 정확히 밝히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3) 더욱이 부검을 결정하는 경우, 유가족 등을 중심으로 한 반대 시위가 일어날 것은 뻔합니다. 유족은 사인의 원인을 물대포 살수로 보기 때문입니다. 반대 시위로 부검을 할 수 없게 되면, 정부는 사인을 정확히 규명할 수 없었다면서 책임을 다른 편으로 떠 넘길 수 있습니다.
(1)~(3)을 근거로 부검 결정을 한 것입니다. 나름대로 영리한 결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결정에는 '책임을 회피하겠다'는 동기가 사전에 깔려 있습니다. 물대포 살수가 사망으로 이르게 한 최초의 원인이었기 때문에, 공권력 남용 문제는 부검과 무관하게 논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백남기 씨 사망 직후 부검 결정을 내렸습니다. 이는 책임을 회피하겠다는 동기를 애초부터 정부가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정부가 이러한 식으로 기능한다면 민주 국가의 정부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번 부검 결정을 보면서 (뭐랄까) 마치 망조가 든 조선 후기 명분론을 보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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