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철학 에세이/비판적 사고

직관적 표상(실험판)

착한왕 이상하 2016. 12. 5. 00:53

2.7. 기호, 직관적 표상, 표현

     2.7.1. 기호 (생략)

     2.7.2. 직관적 표상 (실험판 올림)

     2.7.3 표현 (생략)

 

 

2,7.2. 직관적 표상

원은 어떤가요? 원반을 보면, 그 형태를 즉시 파악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눈을 감고 원 모양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원반은 우리 몸밖에 있는 대상이기 때문에 외부 대상으로 분류됩니다. 원반의 형태에서 떠올린 원은 대부분 머리 근처에 위치합니다. 많은 철학자들은 원을 마음속에서 떠올린다고 주장하지만, 이 주장을 받아들이기는 힘듭니다. 머리 근처에 아른거리는 원 모양은 원반과 달리 다른 사람에게는 인식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사적 경험속합니다. 원반은 그것을 보는 모든 사람에게 인식된다는 점에서 공적 경험에 속한다고 할 수 있겠죠. 또한 머리 근처에 떠올린 원 모양과 달리 원반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정도의 범위가 약합니다. 원반을 던질 수 있지만 다른 모양으로 바꿀 수는 없습니다. 반면에 머리 근처에 떠올린 원 모양은 다른 모양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공적 경험의 외부 대상들은 특정 믿음에 대한 객관적 증거가 되지만, 사적 경험의 대상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차이들을 가지고 원반은 마음 바깥에, 원은 마음속에 있다고 주장할 경험적 근거는 없습니다. 원반은 그저 몸 외부에 있고, 원반에서 파악해 낸 원 모양은 머리 근처에 아른거릴 뿐, 둘 모두 나에게 외적인 것으로 파악됩니다. 심지어 배꼽 근처에서 원을 떠올릴 수도 있습니다. 배꼽을 중심으로 손가락을 돌리면 원 모양이 떠오른데, 그 위치는 배꼽 근처입니다.

 

나에게 대상이 외적으로 나타난다고 할 때, 라는 것은 무엇일까? 경험 이전에 주어진 라는 것이 있을까? 이러한 물음들을 여기서 다루지는 않겠습니다. 하지만 경험 이전에 주어진 라는 것을 전제할 논리적 이유는 없습니다. 인지 체계의 원초적 기능이 대상 구분이라면, 대상에 대한 되먹임 과정에서 대상을 외적인 것으로 드러나게 해 주도록 훈련된 체계의 특징이 있을 것입니다. 또한 생존을 위해 그런 특징은 체계가 환경에 반응하는 방식과 맞물려 있을 것입니다. ‘라는 것은 단지 그런 특징의 발달한 형태에 불과할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나에게 외적으로 나타는 것을 실재하는 것으로 간주하는 경우, 몸 바깥의 대상뿐만 아니라 그런 대상에서 파악해 낸 모양들 모두 실재하는 것들입니다. 물론 둘 사이에는 명백한 차이가 있습니다. 외부 대상은 공적 경험 영역에 속하는 반면, 머리 근처에 떠올린 원 모양은 사적 경험 영역에 속합니다. 원반과 같은 외부 대상은 나와 다른 사람이 함께 보고 만지며 가지고 놀 수 있는 대상이지만, 원반에서 떠올린 원 모양은 나에게만 파악되기 때문입니다. 만약 나에게 외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물리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경우, 몸 바깥의 대상뿐만 아니라 그런 대상에서 파악해 낸 모양들 모두 물리적인 것들입니다. 물리적인 것들이 물질적 활동을 바탕으로 시공간적 크기를 갖고 있다고 할 때. 머리 근처에 떠올린 원 모양도 시공간적 크기를 갖는 것으로 나의 외부에 드러난 것입니다. 또한 그런 모양을 떠올리는 것에는 두뇌의 물질적 활동이 필수적입니다.

 

원반을 보거나 만지는 행동을 통해 원 모양을 떠 올릴 때, 논리적 추리나 계산은 불필요합니다. ‘직관적이라는 것을 논리적 추리나 계산에 대비시키는 이해 방식에 따를 때, 직관적 표상을 다음과 같이 규정할 수 있습니다.

 

직관적 표상이란 논리적 추리나 계산 없이 외부 대상에서 파악해 내거나, 의도적으로 혹은 행위를 통해 떠올린 고정된 혹은 동적 모양들을 일컫는다. 또한 그러한 동적 모양에 대응하는 물리적 구성물로서의 그림 등도 직관적 표상에 속한다.

 

머리 근처에 떠올린 원, 배꼽 주위에 손가락으로 그린 원, 종이 위에 그린 원 모두 직관적 표상을 대표합니다. 이러한 직관적 표상들 없이는 기하학이라는 수학의 분야는 탄생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기하학에서 말하는 원은 엄밀히 말해 직관적 표상이 아닙니다. 머리 근처에 떠올린 원, 배꼽 주위에 손가락으로 그린 원, 종이 위에 그린 원 등 모두를 지칭하는 것이 기하학의 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하학의 원이 있다면, 그것은 시공간적 크기를 결여한 추상적인 것으로 분류됩니다. 하지만 실제 기하학적으로 참인 진술들을 발견한 과정은 직관적 표상들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습니다. 그렇다고 직관적 표상들 자체에 기하학적으로 참인 진술들이 함축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음의 참인 진술을 살펴봅시다.

 

원둘레의 각 점에서 원 중심으로 이은 선분의 길이는 항상 동일하다.

 

위 사실을 알도록 해 주는 가장 단순한 방법은 컴퍼스로 직접 원을 그려 보는 것입니다. 컴퍼스 다리의 일정한 간격이 반지름이 되니까, 위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또 손가락을 이용해 원을 그려 보는 방법도 있습니다. 그런데 손목은 360도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두 손의 집게손가락을 배꼽에 대고 두 엄지를 12시 위치에 맞댄 후, 두 엄지를 아래 방향으로 180도 돌리는 것입니다. 이때 배꼽을 중심으로 원 모양이 그려지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집게손가락과 엄지의 일정한 간격이 반지름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세 가지 흥미로운 물음을 던질 수 있습니다.

 

첫째, ‘이라는 단어에 대해 원 모양을 머리 근처에 바로 떠올릴 수 있다. 또한 원형의 대상을 보고 원 모양을 바로 떠올릴 수 있다. 하지만 머리 근처에 원을 구성해 보는 것은 쉽지 않다. 이마 중앙 부분에 특정 선분을 회전하는 상상조차 생각보다 쉽지 않다. 왜 그럴까?

 

둘째, 기하학의 발달 역사를 살펴보면, 기괴하고 복잡한 표상들이 많다. 그러한 표상들이 논리적 추리와 계산의 도움 없이도 구성 가능한 것일까?

 

셋째, ‘원둘레의 각 점에서 원 중심으로 이은 선분의 길이는 항상 동일하다는 사실은 원 자체에 내재한 것인가? 아니면 원을 구성할 때 수반되는 것인가?

 

어떤 기하학적 모양을 손짓 발짓 등 행위와 무관하게 구성하는 것은 힘든 작업입니다. 물론 그런 작업을 상대적으로 쉽게 할 수 있는 사람도 가끔 있기는 합니다. 훈련을 통해 그런 작업 능력을 향상시킬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기하학적 모양이 복잡해질수록 그 모양을 손쉽게 구성하기는 힘들어집니다. 반면에 손가락을 돌리는 행위만으로도 원을 쉽게 구성할 수 있으며, 그 구성 과정은 원 모양으로 드러납니다. 그것도 머리 근처가 아니라 손가락의 움직임에 따라 드러납니다. 행위의 도움 없이 원 하나조차 그리기도 힘든데, 원 모양은 쉽게 떠올릴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한 답은 습관입니다.

 

다양한 기하학적 모양을 떠올릴 수 있는 능력은 타고나는 것이겠죠. 하지만 원, 삼각형, 사각형의 모양 자체를 가지고 타고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러한 모양을 파악할 수 있는 잠재 능력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잠재 능력은 지각 경험, 행위 등을 통해 활성화됩니다. 원형의 대상으로부터 원 모양을 파악하고, 손가락으로 원을 그려보거나 컴퍼스로 원을 작도해 보는 등의 경험과 행위를 통해 이라는 단어에 즉시 원 모양을 떠올리는 반응은 활성화됩니다. 그러한 반응이 습관화된 경우에도, 행위의 도움 없이 머리 근처에서 점과 선을 이용해 원을 정확히 구성해 보는 것은 힘듭니다. 이러한 일상적 경험을 통해 첫 번째 물음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답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물음에 대한 답>

작도 등 행위의 도움 없이 타고난 능력만으로 원을 머리 근처에 정확히 구성해 보는 것은 어렵다. 원 전체 모양을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이유는 지각 경험 및 행위 속의 반응이 습관화된 결과이다. 그렇게 습관화된 경우에도 원 전체 모양이 아니라 원을 단계적으로 구성하는 것은 쉽지 않다.

 

두 번째 물음에 답해 봅시다. 원 모양을 떠올리는 반응이 습관화된 경우, 논리적 추리와 계산은 그러한 반응의 활성화에 개입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논리적 추리와 계산이 없다는 것논리적 추리와 계산관의 무관함을 함축하지는 않습니다. 기괴하고 복잡한 기하학적 표상을 얻는 과정에는 여러 요인들이 개입되어 있습니다. 논리적 추리와 계산, 배경 지식, 수면 등 무의식 상태 속의 두뇌 활동을 들 수 있습니다. 해결하기 어려운 기하학의 문제를 놓고 고심하는 어느 수학자 M이 있다고 합시다. 그 문제를 풀려면 특별한 기하학적 모형이 필요합니다. 복잡한 계산을 처리하는 프로그램의 도움을 받아 컴퓨터 시뮬레이션도 해 보았지만, 만족스러운 결과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 문제를 푸는 것을 포기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차를 타려는 순간 그렇게 원하던 기하학적 모형이 떠올랐습니다. 두뇌는 그 문제를 놓고 계속 돌아가고 있었던 것이죠. 물론 그렇게 돌아가고 있던 과정은 M에게 의식되지 않았습니다. 한 번 갑자기 떠오른 그 모형은 이후 의도할 때마다 쉽게 떠올랐습니다. 이러한 사례는 수학사에서 찾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M이 얻어 낸 복잡한 기하학적 모형에는 공간을 3차원으로 규정하거나 공간 표면 위의 최단 거리를 직선으로 규정하는 등의 해석이 개입된 경우가 많습니다.

     

<두 번째 물음에 대한 답>

원이나 삼각형 등 기하학적 모양을 떠올리는 데 별도의 논리적 추리 및 계산이 필요 없다고 하여, 논리적 추리 및 계산이 복잡한 기하학적 모형을 얻는 과정에서 배제되는 것은 아니다. 더욱이 그러한 과정은 의식되지 않는 두뇌 활동에도 영향을 받으며, 특정 해석에 의존적인 경우가 많다. 지각 경험에서 단순한 특정 모양을 분리해 떠올리는 것과 달리, 복잡한 기하학적 모형을 얻는 과정은 반복적인 시행착오의 과정이다. 일단 그러한 복잡한 기하학적 모형을 얻고 자주 사용하다 보면, 그 모형을 즉각적으로, 즉 논리적 추리와 계산 없이 표상할 수 있다.

 

세 번째 물음에 답해 봅시다. 원형의 대상을 바라 볼 때, 그것의 형태만 분리해서 원 모양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반지름이라는 것이 정말 원 모양 자체에 내재한 특징일까요? 그래서 원둘레의 각 점에서 원 중심으로 이은 선분의 길이는 동일하다는 사실도 원 모양 자체에 내재한 것일까요? 그러한 사실을 원 모양에서 발견할 수 있어도, 반지름 자체가 원 모양 자체의 특징이라고 단언할 수 없습니다. 원의 중심을 정하고 원둘레 각 점에서 중심으로 선분을 이어보는 작도나 사고활동을 통해, 그러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점은 원 모양을 작도해 보는 것, 배꼽을 중심으로 손가락을 회전시키는 것 혹은 선분을 떠올리고 선분을 회전시키는 것이 원 모양을 수반한다는 사실에 의해 뒷받침됩니다. 원 둘레의 각 점과 원 중심의 일정한 간격 유지는 원 자체에 내재한 특징이 아니라 원 구성에 필요한 규칙과 같은 것이며, 원 모양에서 그러한 규칙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역으로 그러한 규칙에 따라 나오는 것이 원 모양입니다. 선분 모양도 마찬가지입니다, 선분에서 두 점을 지나는 최단 거리라는 특징을 발견할 수 있어도, 그 특징이 선분 자체에 내재한 것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최단 거리에 대한 합의가 필요하며, 그러한 합의 아래 선분을 그을 때 최단 거리라는 특징이 수반되는 것입니다.

 

<세 번째 물음에 대한 답>

원둘레의 각 점에서 원 중심으로 이은 선분의 길이는 항상 동일하다는 사실은 원 자체에 내재한 것이라고 할 수 없다. 그 사실은 원 구성의 규칙과 같은 것이다. 그러한 규칙에 따른 기하학적 모양이 원이고, 원 모양에서 역으로 그러한 규칙을 발견해 낼 수 있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바탕으로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점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직관적 표상 자체에 수학적으로 참인 진술이 들어 있는 것은 아니다. 수학적으로 참인 진술들은 적절한 기호 체계 및 표현 방식을 매개로 하여 얻어진다. 따라서 각 수학 분과의 발달 과정도 그런 기호 체계 및 표현 방식에 의존적이다. 기하학, 대수학, 해석학, 위상수학 등 수학의 분과들을 살펴보면, 적절한 특정 기호 및 표현 방식 덕분에 그런 분과가 발달하고 정착할 수 있었음을 직감할 수 있다. 그러한 분과들의 추상적 대상들 역시 특정 기호 체계 및 표현 방식의 사용 속에서 가정되는 것이다.

 

원반에서 그것의 형태를 분리시켜 원 모양을 머리 근처에 떠올리는 것도 일종의 추상화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추상화 과정을 현실적 제약을 제거하는 과정으로 폭넓게 해석하는 경우, 그렇게 원 모양을 떠올리는 것도 원반을 구성하는 실제적 제약들을 제거하는 과정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떠올린 원 모양이 기하학에서 말하는 원은 아닙니다. 그렇게 떠올린 원 모양 역시 컴퍼스의 작도로 얻어진 원과 마찬가지로 일정한 시간적 지속성과 공간적 크기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구체적 표상입니다. 반면에 기하학의 원은 시공간적 크기를 결여한 추상적 대상으로 간주됩니다. 철학자들은 수학의 그러한 추상적 대상이 정말 존재하는지를 놓고 여전히 논쟁 중이지만, 정작 그러한 추상적 대상을 가정하도록 만드는 기호 체계와 표현 방식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는 것 같습니다.

 

컴퍼스 작도에 의한 원, 배꼽 주변에 손가락을 돌려 떠올린 원, 원반에서 파악해 낸 원 모두 기하학적 원을 표상하는 것으로 간주하려면, 그것들에서 원을 구성해 내는 방식의 공통 패턴을 찾을 수 있어야 하며, 그 공통 패턴을 표현할 수 있는 수단을 만들어야 합니다. , , 선분, 각 등에 대한 기호 및 기호들로 합성된 적절한 표현 방식 없이는 기하학이라는 분과는 탄생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한 표현 방식 속에서만 원이라는 추상적 대상을 가정할 수 있습니다. 관심을 더하기 빼기 등 연산 등에 국한된 산수로 돌리는 경우, 수와 수들의 관계에 직접적으로 대응하는 직관적 표상은 없습니다. 원 속에 두 점을 찍은 것을 가지고 2를 나타낸다고 할 때, 원과 점은 기하학적 표상에서 벗어나 새로운 의미를 획득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새로운 의미를 획득한 원과 점을 가지고 산수 체계를 건설할 수 없습니다. 그러한 건설이 가능하게 해 주는 특별한 기호들과 표현 방식이 있어야 합니다. ‘1, 2, 3, +, -, 등의 기호들로 구성된 표현 방식들 말입니다. 이로부터 발견과 설명에서 직관적 표상들의 역할이 사소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원을 모임으로 해석하는 것은 집합을 이해하고 설명하는 데 중요합니다. 하지만 원에 대한 그러한 해석만으로 집합론을 건설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 }, , , 등으로 구성된 표현 방식 속에서 추상적인 집합을 가정해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대부분의 수학 연구서나 논문에 등장하지 않는 작업, 즉 원과 기호 ‘{ }’의 차이를 따져 보는 작업이 필요한 이유도 조금은 분명해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