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철학 에세이/잡세상 잡글

신문맹 시대의 이벤트: 도킨스 대담 (+ 월리스의 <말레이제도>)

착한왕 이상하 2017. 1. 30. 01:49



나는 무신론자다. 그런데 무신론자에 앞서 무종교인이다. 서양의 세속화 과정을 무신론 중심으로 서술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논리적으로 유류다. 이에 대한 종합적 이유는 <세속화 '저기'와 '여기': 무종교인의 관점> 590-594쪽을 참조하라. 여기에서 그 이유를 논하기는 귀찮다.


급작스럽게 '잡세상 잡글'에 이 글을 올린 이유는 다음 실시간 검색어로 한때 '무신론'이 1위에 등극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찾아 봤더니 다음과 같은 기사가 떴다.


"과학은 우주와 삶에 대한 경외감 높여주는 최선의 대답"

http://v.media.daum.net/v/20170126030217430


기사를 보는 순간 든 생각이 "이 찌지들이 뭐하는 짓이래". 도킨스 광신도들은 나의 이런 표현을 지나치다고 할 텐데, 과학이 우주와 삶에 대한 경외감을 높여주는 최선의 대답이라는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이 대담만큼 황당한 것도 없다.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는 그나마 논쟁거리가 되었다는 점만으로도 볼 만한 책이다. 다른 책들은? 아니올시다.


도킨스가 대중적 권위를 얻게 되자, 영국 학계에서도 그를 빨아주는 분위기는 있었다. 이후는 아니다. 그를 비판하는 사람들 모두를 지적 설계자 가설 옹호자로 몰지 말라. 상당수는 무신론자들이다. 더욱이 창조과학과 지적 설계자 가설 옹호 세력을 무조건 동일시 할 수 없다. 두 세력다 비판의 대상으로 삼는 경우, 창조과학 진영은 아예 지적 설계자 가설과 관련된 자연신학 전통에서도 광신도 무리일 뿐이다. 더욱이 도킨스 진영이 속한 속칭 '신무신론(New Atheism)' 진영은 진화생물학을 '생물학의 통합 이념'으로 과장시키는데, 이것은 일종의 '과학의 종교화'에 해당한다. 지적 설계자 가설 진영과 신무신론자 진영의 갈등은 일종의 '독단 대 독단'의 성격을 갖고 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세속화 '저기'와 '여기'>의 6-7장을 참조하라. 도킨스가 주도하는 세력을 '신무신론'으로 지칭하게 된 이유 중 하나는 그의 독단이 무종교인 및 무신론자들의 다양한 입장을 단일화시켜 왜곡시키기 때문이다. 아무튼 도킨스 입장을 둘러싼 논쟁은 개인적으로 너무나 유치해서 책에서는 직접적으로 다루지 않았다.


과학을 하면서도 누구나 자신의 삶을 되돌아 보고 우주에 대한 경외감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이로부터 과학이 종교성을 사장시키고, 궁긍적으로 종교성이 사라진 세상을 유토피아로 묘사할 수 있을까? 자세한 정보 없이도 다음 물음들에 대해 약간만 고민해도, 신무신론 진영의 주장이 독단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혹시 나의 책을 읽고 있는 지극히 소수 중 소수인 사람들은 다음 물음들에 대해 나름대로의 구체적 답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책의 내용을 맹신하지 말라. 단지 생각의 자극제로 여기고 접해 주었으면 한다. 오늘 도킨스 대담 쇼를 통해 알게 된 것은 하나 있다. 책 제 2부를 끝낸 경우, 바로 마지막 제 4부를 본 후 제 3부를 보는 것이 오히려 효과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제 앞서 언급한 물음들을 나열해 보자.


● 100여년 전부터 과학자들을 대상으로 무신론자인지 유신론자인지를 묻는 통계조사가 몇몇 국가에서 행해지고 있다. 과거에나 지금이나 신을 믿는 과학자는 40~50% 사이로 일정하게 유지되고 있다. 그렇다면 아직까지도 과학은 과학계에서 유신론자들이 사라질 만큼 발전하지 못했다는 말인가?


도브잔스키, 피셔 등을 비롯해 다윈 진화론을 생물학의 분과로 정착시킨 상당수 인물들은 가톨릭 신자들이며, 그들은 철학적으로 '유신론적 진화론'을 옹호했다. 그렇다면 이들은 지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과학자들인가?


  과학은 여전히 많은 것을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과학은 진행형이다. 과학의 한계를 들어 신 등을 포함한 특정 세계 이해 방식을 주장하는 이들이 여전히 많다. 그러한 이들은 하나의 정합적 세계 이해 방식을 구성하는 것이 철학의 목적 중 하나로 여긴다. (이러한 관점은 실천적 의미에서 성공할 수 없는 것이다.) 과학의 한계를 가지고 삶과 우주에 대한 경외감을 가져야 하는 이유는 없다. 그런데 그런 경외감을 갖는 과학자가 있다고 하자. 그는 미래에도 과학이 삶과 우주에 대해 많은 것을 미지의 영역으로 남길 것이라고 확신한다. 이러한 과학자는 도킨스 진영의 주장에 따르면 종교적 인물로 설정될 수 있다. 당신이 그러한 과학자라면, 이 결론에 수긍할 수 있겠는가?


진화생물학은 정말 무신론을 증명했는가?


기독교의 신 개념이 오로지 지적 설계자 가정으로 해석 가능하다고 생각하는가? 기독교 신 개념의 다양성, 그것도 시기별로 요동치는 그 다양성을 단순히 지적 설계자 개념 하나에 포섭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특정 세계 이해 방식을 제거하거나 사회에 정착시키는 것이 과학의 책무 중 하나라고 생각하는가? 그래서 종교성을 함축한 세계 이해 방식을 제거하는 것이 과학의 합리성인가?


과학을 통해 삶과 우주에 대한 경외심을 가질 필요가 있을까? 경외감을 그렇게 과학과 연결시키는 것은 그저 과학이 종교를 대체할 수 있다는 야망을 숨긴 것에 불과한 것 아닌가?


자연물이나 인공물의 매개로 한 주술성을 거부하고 신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 혹은 신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의 연결을 강조하는 기독교의 뿌리가 삶과 우주에 대한 경외감인가?


19세기 중엽 다윈 진영이 무신론을 강조한 이유 중 하나는 과학의 직업적 전문화 과정과 맞물려 있다. 여전히 특정 종파의 사람은 특정 대학에 들어갈 것을 강요받던 시대, 과학의 직업적 전문화 과정은 과학 분과별로 다르다. 정말 당시 종교의 권위를 약화시키고 과학을 귀족 및 종교 권력에서 해방시키려고 했던 인물들은 다윈을 중심으로 똘똘 뭉쳤을까? 당시 성직자들 모두가 당시 종교의 사회적 권위를 유지하려고 했을까? 


당신이 무신론자라고 해서 도킨스의 주장을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위 물음에 대해 고민해 보면, 왜 그런지 스스로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현대 과학철학이나 과학사의 분위기도 도킨스의 주장을 한때 판치게 만든 원인 중 하나이다. 실례로 '뉴턴 역학은 기계론을 함축한다'는 방식의 섣부른 주장은 특정 과학 이론들과 특정 세계 이해 방식 사이에 일대일 대응이 성립한다는 착각을 생성시켰다. 이것이 왜 착각인지에 대해서는 설명을 생략한다. 궁금한 사람은 나의 책을 보라. 분명한 것은 하나있다. 과학이 자연주의에 근거한다고 할 때, 그 자연주의는 '초자연적인 것'을 '가설 생성 과정'에 섞지 않겠다는 방법론적 의미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그것을 무신론으로 해석하는 순간 당신은 도킨스의 책 '신의 블라블라'에 세뇌당하는 것이다. 수천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기독교의 사유전통이 일방적으로 도킨스의 신 규정 방식에 포섭당할 것 같은가? 그 전통은 결코 삶과 우주에 대한 경외감을 근거로 한 것이 아니라, 이질적 집단들을 규합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인데 도킨스의 서술 방식처럼 그렇게 단조로울 수 있을까? 생각해 보시라.


위 물음들 중 마지막 것과 관련해 한 가지만 언급하면, 과학의 직업적 전문화 과정은 나라별로 다를 뿐만 아니라 과학 분과별로도 다르다. 오히려 19세기 말 영국 이론 물리학이나 수학 진영은 '인간적인 것의 신성화'를 강조했다. <과학 직종의 전문화: '저기'와 '여기'>는 실로 흥미로운 주제인데, 쓸지 말지는 나중에 결정할 것이다. 솔직히 뭘 쓰기가 이제는 짜증난다. 그렇게 지속할 동기도 잃어버린 상태다. 아무튼 나중에 불과 드모르간 등 수학자 진영의 과학직종의 전문화 노력을 간략히 정리해 블로그로 올리긴 할 것이다. 정말 흥미로울 것이다.


마지막으로 특정 과학 이론이 특정 세계 이해 방식을 전제하거나 증명해 줄 것이라는 착각을 잘 보여주는 현대판 무지의 논쟁이 있다. 바로 다윈과 월리스(A.R. Wallace)의 관계를 둘러싼 논쟁이다. 월스의 책 중 하나는 최근 <말레이제도>로 나왔다. 이 출간은 여러 신문사를 통해 기사화되었는데, 다음은 이정모 서울시립관장의 서평기사이다.


'종의 기원' 다윈도 놀란 월리스의 위대한 탐사

http://v.media.daum.net/v/20170121033640778


기사를 보면, 다윈과 월리스의 교류 관계를 다루는 부분이 있다. 일반적으로 다윈은 월리스보다 먼저 자연선택 가설 아이디어를 얻은 것으로 회자된다. 자연선택 가설을 담은 논문은 월리스가 먼저 발표했음에도 말이다. 기사를 보면, 다윈의 '커밍아웃'이 나온다. 자세한 설명은 없다. 짧은 기사 성격상, 필자가 그 부분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비판적 독자라면, 그리고 그 부분에 정말 관심이 있다면, 구글을 통해 'on the relationship between Darwin and Wallace' 등 검색어를 사용해 궁금증을 해소하려 해야 한다. 그래야 진정으로 능동적 글 읽기가 되는 것이다.


기사 내용만으로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이관장은 통설에 따라 서평기사를 쓴 것 같다. 즉, 다윈은 월리스보다 생물진화의 아이디어를 먼저 갖고 있었지만 발표를 미루다 1858년 월러스의 논문을 읽고 부리나케 <종의 기원>을 완성시켜 발표했다는 통설 말이다. 그런데 비판적으로 글을 읽는 사람이라면, 그 통설에 의문을 가져야 마땅하다. 그래도 공식 발표가 더 신빙성을 갖는데, 어떻게 나중에 발표한 다윈이 월리스보다 먼저 권위를 갖게 되었을까? 이 물음과 관련된 주변 얘기, 즉 귀족 가문 다윈의 신분과 그렇지 않은 월러스의 신분 등에 관한 얘기를 제쳐둘 때, 당시 왕립 학회의 거물인 찰스 라이엘과 조시프 후크가 다윈의 말을 신뢰하고 그를 전폭으로 지지했다는 것을 그 이유로 들 수 있다. 하지만 이로부터 정말 다윈이 월리스와 무관하게 독자적으로 자연선택 가설을 먼저 발견했다는 결론은 성립하지 않는다.


비판적인 독자라면 월리스를 다룬 최근 출판물을 찾아볼 필요가 있다. 2000년 이후 출판물에만 국한하는 경우에도 J. 윌슨의 <Fogotten Naturalist>, P. 레비의 <Afred Russel Wallace: A Life>, M. 셔머의 <In Darwin's Shadow>, R.A. 슬로턴의 <The Heretic in Darwin's Court>, M. 피크맨의 <An Elusive Victorian> 등을 들 수 있다. 여기에 월리스 관련 논문들까지 더하면, 2000년 이후 월리스 복권 사업이 진행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이런 분위기를 만들려는 선구자는 이미 있었다. 다만, 60-80년대 다윈의 광풍 속에 그들의 의견은 묻힐 수밖에 없었다.


다윈이 비공개적으로 월러스의 아이디어를 슬쩍 했다는 주장은 1968년 생물사학자 바바라 비덜의 연구 논문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문헌학적 연구를 바탕으로 다윈이 자신의 주장과 달리 1858년 훨씬 이전에 문제의 월리스 논문을 접했다는 사실을 찾아 내고, 이를 바탕으로 다윈의 진실되지 못한 면을 강조하는 동시에 당시 라이엘과 후크를 중심으로 한 서클을 범죄자 집단으로 묘사한 연구서도 있다. 1980년 출간 당시에는 별로 주목받지 못하다 최근 들어 오히려 학계에서 주목받게 된 그 책은 다음이다.


Brackman, A.C.(1980), A. Delicate Arrangement: The Strange Case of Charles Darwin and Afred Russel Wallace, Times Book(절판).

https://www.amazon.com/Delicate-Arrangement-Strange-Charles-Wallace/dp/081290883X


위 책 내용이 다윈에 대한 통설을 비판한다고 해서 일종의 음모론을 다룬 책으로 착각하지 말라. 월리스를 다룬 2000년 이후 대부분 책이나 논문도 위 책을 인용하고 있다. 그 만큼, 위 책이 다룬 문헌은 방대하다.


나는 위 책의 내용을 받아들이는가? 딱히 이렇다 저렇다 대답할 수 없다. 위 책에서 제시된 내용만 가지고 무조건 브랙먼의 손을 들어 줄 수는 없기 때문이다. 다윈의 진화생물학이 얼마 만큼 월리스의 논문들에 의존적이었는지를 둘러싼 논쟁은 두 사람의 관계만 가지고는 영원히 대답되지 않을 것이다. 그 문제는 어쩌면 미궁으로 남을 여지가 있다. 그럼에도 비판적으로 글을 읽는 사람이 생물학사에 대한 지식도 갖고 있다면, 다음 물음을 던져야 할 것이다.


다윈의 <종의 기원>의 내용 상당 부분은 자연선택을 인공선택에 유비시켜 비교하는 것에 근거하고 있다. 그런데 월리스가 자연선택 가설을 이끌어 내는 과정은 다윈과 어떤 면에서 확연한 차이를 보이고, 어떤 면에서 유사할까?


 적어도 그러한 차이와 유사성을 체계적으로 다룰 때, 다윈과 월리스의 관계도 좀 더 분명해질 것이다. 그래서 위 물음을 다룬 논문을 거의 1시간 동안 검색해 보았다. 결과는? 건질 만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대부분 다윈의 권위를 약화시키려 하거나, 아니면 월리스를 부각시키려 하는 내용의 논문들이었다. 그러한 논문들 상당수는 종교의 문제를 건드리고 있다. 월리스는 신지학에 빠진 인물로서 신앙을 포기한 적이 없다. 하지만 그의 과학적 저술들을 가지고 자신의 종교를 증명하려 시도하지 않았다. 만약 그랬다면, 현재의 월리스 복권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월리스의 신앙을 문제시 삼는 이들은 과학자로서뿐만 아니라 자연철학자로서의 다윈의 일관성을 강조한다. 그런데 이러한 강조는 근거를 결여한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다윈은 <종의 기원> 2판에 국한되어 있다. 왜냐하면 그 판의 자연선택 설명에서 환경의 선택압 개념이 분명하게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윈이 유전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된 후 <종의 기원>은 판을 거듭하면서 내용이 수정된다. 6판에 이르면, 환경은 선택압이 아니라 변이를 선택하는 인과적 힘처럼 등장한다. 오죽하면 피셔가 그 부분에 당황해 블라블라 한 얘기는 유명하다. 이러한 문제는 스스로 찾아 보시라. 6판인지는 지금 내 기억으로는 맞는 것 같은데 불확실하다. 아무튼 피셔가 고백했듯이, <종의 기원> 6판에는 '환경=신'이라는 공식을 느끼게 하는 부분들이 많다는 것이다. 종교를 가지고 월리스를 깍아 내리고 다윈을 띠울 수 있다? 이러한 착각에는 과학에는 특정 세계 이해 방식이 전제되어 있다거나, 둘 사이에 일대일 대응이 성립한다는 더 큰 착각이 도사리고 있다. 과학과 세계 이해 방식을 관련시킬 때, 특정 과학을 가지고 이러이러한 세계 이해 방식을 생각해 볼 수는 있다. 하지만 특정 과학이 특정 세계 이해 방식을 증명해 준다거나, 전제한다는 식의 주장은 성립하지 않는다. 역시 이에 대한 나의 이유를 여기서 자세히 열거할 수는 없으며, 내 책 얘기를 또 하는 것은 그만 둔다.


아무튼, 21세기는 점점 신문맹 시대라는 생각이 든다. 글자는 누구에게나 흔한 소유물이 되었지만, 비판적으로 글을 읽는 훈련은 오히려 과거보다 떨어진다. 그 결과, 대부분 독자의 글읽기 방식의 능동적 측면은 너무나 약하다. 도대체 책은 왜 사서 보는가? 적어도 정확한 지식을 얻고, 동시에 세상사를 바라보는 시각을 기르는 것이라면, 비판적으로 글을 대하는 훈련은 있어야 한다. 자유가 선택의 자유에 그치는 것이아니라 '맹목적 시각에서 벗어남'을 뜻하는 경우, 자유는 훈련 없이는 쟁취할 수 없다. 이와 비슷한 말은 죤 두이가 한 것인데, 의심하려 해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고 만 것 같다.



* 글 마지막 부분에 던져진 물음을 체계적으로 다룬 국외 논문은 아직 찾지 못했다. 기껏해야 다윈의 안경으로 월리스의 글들에 숨겨진 종교성을 파헤치는 내용이 마치 그 물음에 답하는 것처럼 과장된 논문은 있더라. 그렇다면 언어 언어로 쓰는지와 무관하게 국내 누군가 도전해 볼만한 물음인 것이다. 다윈 논의 체계 구성에는 장 가이용의 논문들이 큰 도움을 줄 수 있다. 월리스 가문이 상대적으로 자주 등장하는 서신왕래는 (기억이 맞다면) 다윈과 헨슬로의 서신왕래이다. 이런 자료를 통해 다윈과 월리스의 논의 방식들을 도식과 함께 비교해 보면, 두 사람 사이의 관계도 좀 더 자세히 규명될 소지가 있다. 범인 잡기 탐정 놀이 비슷한 성격도 갖고 있는 작업이라 흥미는 있다. 하지만 자료 수집, 분석 과정이 긴 고행을 요구하는 작업이다. 논문 쓰기가 생활비로 환원되는 사람들 중 누군가 한 번 다루어 주었으면 하는 물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