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철학 에세이/잡세상 잡글

치유 열풍: 세네카 대 혜민

착한왕 이상하 2017. 3. 1. 00:37

 

 

혜민의 책 하나가 영어로 번역되어 영국 아마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는 기사가 떴다.

 

http://v.media.daum.net/v/20170227192550656

 

정말 혜민의 <멈추면, 비로서 보이는 것들>이 기사대로 다른 국가에서 열풍을 이어갈지는 의문스럽다. 아무튼 그렇게 된다면, 이렇게 말하고 싶다. '평균 지성 급감 현상'을 전지구적 차원에서 방증해 주는 것이니, 개한민국도 덕분에 쉽게 망하지 않을 것이라고 ...

 

헤민의 책은 이 땅의 출판 문화게를 휩쓸고 있는 치유 열풍을 대표한다. 2012년 출간 이후 300백만부가 팔렸다니 말이다. 과연 그의 책은 치유의 성격을 가진 책인가? 이 물음에 답하려면, 치유가 무엇인지 논해야 한다. 사실 치유가 무엇인지를 규정하는 것조차 쉽지 않은 작업이다. 이 잡글에서는 철학의 치유적 기능에 대해 아주 짧게 언급한 후, 혜민의 책은 이 잡글보다 못한 치유 관련 책임을 천명하고자 한다.

 

누가 치유를 필요로 하는가? 뭔가 비정상 상태의 사람이다. 따라서 치유라는 것은 항상 정상적인 것과 비정상적인 것의 구분을 필요로 하며, 치유의 규정 방식도 그 구분에 의존적이다. 크게 두 가지 규정 방식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정상적인 것을 정의하고, 그러한 정의에 따라 비정상적인 것을 '정상적인 것의 결여'로 간주한다. 이때 치유는 정상적인 것의 복원을 목적으로 한다.

 

둘째, 정상적인 것을 정의하지는 않는다. 정상적인 것은 그저 비정상적인 것들에 대비된 포괄적 개념일 뿐이다. 치유의 목적은 정상적인 것의 복원이 아니라 '비정상적인 것의 제거'에 국한된다.

 

치유에 대한 첫 번째 규정 방식은 가깝게는 마르크스에게 엿볼 수 있다. 자본으로 대체된 노동으로 인한 소외는 공산체제의 인간 본성에 대비된 비정상적인 것이다. 정상적인 것의 복원은 자본주의의전복을 거쳐야 한다는 점에서 정치적이다. 이 점은 치유가 여러 종류임을 암시해 준다. 심리학적 치유, 철학적 치유, 정치적 치유, 문화적 치유 등등 말이다. 이러한 점 때문에 치유를 학적으로 다루는 것은 만만치 않은 작업이다.

 

치유에 대한 두 번째 규정 방식은 비트겐슈타인에게서 찾아 볼 수 있다. 많은 골칫거리 문제가 사실은 언어적 혼선에서 비롯된 것임을 밝히고, 그 문제를 제거하는 방식의 철학적 방법론이 그의 저술 속에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 규정 방식은 정상적인 것에 대한 이상화된 정의를 전제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좀 더 실용적이다. 치유에 대한 두 번째 규정 방식은 푸코를 비롯한 여러 후기구조주의자들에게서도 엿볼 수 있다. 이들은 특히 자아 구성론을 강조하면서 근대성을 비판한다. 그들은 점적인 자아 혹은 고정된 자아 개념을 전제한 것으로 근대성을 규정하기 때문이다. 언어적, 사회적, 문화적 요인들의 영향으로 구성된 자아는 현시점에서 비정상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것들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변화한다.

 

푸코 등이 유명해 지면서 로마 스토아 사상도 재조명 받게 되었다. 왜냐하면 스토아적 가치체계, 즉 자연적 본성에 따른 삶을 강조하는 가치체계를 전제하더라도, 스토아 사상의 자아는 고정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자아 고정론과 자아 구성론은 고대부터 경쟁 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근대에서도 그 경쟁 관계가 완전히 사장된 것도 아니다. 따라서 자아 고정론이 마치 근대 과거를, 그리고 자아 구성론이 현대성을 대표한다는 포스트모던 계열의 서술 방식은 문제가 많은 서술 방식이다. (자아 고정론과 자아 구성론이 고대부터 경쟁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나의 <세속화 '저기'와 '여기': 무종교인의 관점> 39~43쪽을 참조하라. 스토아 사상 자아 개념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은 사람은 C. Gill의 2006년 연구서 The Structured Self in Hellenistic and Roman Thought를 보라.)

 

푸코 등이 뜨면서 로마 시대 세네카(seneca)도 재조명을 받았다. 로마 제국은 기술만 발전했을 뿐 철학은 그리스를 모방했다는 식의 주장이 한때 유행했다. 그러한 주장은 역사적 증거를 결여한 것에 불과하다. 그러한 주장이 통념화되는 데에는 헤겔,니체, 하이데거 등의 철학사 서술 방식이 일조했다. 천년 동안 이질적 집단들을 관리한 로마 제국의 사상이 이들 철학자들 묘사 방식일 수는 없다는 것은 당연하다. 특히 세네카는 철학의 치유적 측면을 제일 먼저 간파한 인물 중 한명이다. 그는 소위 '위안서'라는 장르의 개척자로 불린다. 그가 쓴 위안서로는 Consolation to Marcia, Consolation to His Mother Helvia, Consolation to Polybius 등이 있다.

 

세니카가 누군가를 위로하기 위해 특정 세계 이해 방식이나 착각 등을 제거 대상으로 삼을 때, 그의 서사 구조는 치유의 두 번째 규정 방식보다는 첫 번째 규정 방식에 따른 것에 가깝다. 그는 스토아 사상의 가치 체계를 이상적으로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글에서 세네카는 치유자인 동시에 치유 대상으로 등장한다. 위안서를 통해 그 자신의 자아를 좀 더 스토아 사상의 가치 체계가 요구하는 것에 가깝도록 확립시켜 보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가 황제 카리귤라의 여동생과의 간통죄로 추방당했을 때, 그는 슬픔에 잠긴 그의 어머니를 위안하는 글을 썼다. Consolation to His Mother Helvia가 그것이다. 자신은 비록 추방당한 신세라고 하더라도 스토아 가치체계에 따른 삶의 방식에는 변화가없음을 천명한다. 단지 삶의 장소만 바뀌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제어 불가능한 세상사에 슬픔의 원인을 전가한다면, 이것은 삶을 회피하는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세네카 자신이 추방지 생활로 슬퍼할 이유가 없다면, 어머니도 자식의 부재로 괴로워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세네카의 위안서 및 다른 에세이들을 보면, 괴로움의 종류와 원인들, 그리고 그러한 원인들을 제거하기 위한 삶의 태도들이 한편으로는 논증적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수사적으로 서술되고 있다. 글 속에서 세네카 자신은 치유자인 동시에 치유 대상으로 등장한다. 글쓰기를 통해 자신의 삶의 방향성을 설정하려고 하기 때문에, 글쓰기는 세네카 자신에게는 일종의 수양과 같은 것이다.

 

스토아 사상의 가치 체계를 최선의 것으로 전제하고 있기 때문에, 그가 쓴 것들을 지금 현실에 그대로 적용할 수 없다. 단 치유를 목적으로 한 글이 갖추어야 할 조건들을 그의 글들에서 이끌어 내 볼 수는 있다.

 

첫째, 괴로움이나 착각을 불러 일으킨 현실에 대한 체계적 분석이 있어야 한다.

둘째, 그러한 현실에 직면할 수 있도록 해 주는 시각을 열어 주어야 한다.

셋째, 독자를 단순히 병든 치유 대상으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 글을 쓰는 자도 동시에 치유 대상이 되어야 한다.

넷째. 글을 통해 현실 속에서 방황하는 '나'를 되돌아 보게 해 주되, 그 방법은 단순히 공감에 호소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단순한 공감은 그저 모든 것을 현실 탓으로 돌리는 나약함을 정당화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과연 혜민의 <멈추면, 비로서 보이는 것들>은 위 조건들을 충족하고 있는가? 바쁜 것이 문제라면, 그것이 어떤 식으로 우리를 비정상적으로 만드는지에 대한 구체적 분석이 있는가? 그 자신도 치유의 대상으로 등장해 진솔한 쌍방향성 대화를 추구하고 있는가? 내 눈에는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개소리들이 전부더라. 이 개소리가 먹히는 이유는 살면서 누군가 한 번쯤 느껴본 것들에 심정적으로 호소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느낌이 발생하는 상황적 맥락은 다르기 때문에 그의 심정적 호소는 일반화될 수 없다. 물론 본인은 수행을 통한 깨달음이라 항변하겠지만, 정말 그가 그렇게 항변한다면 불교의 '불'자도 모르는 땡중임을 스스로 증명하는 셈이다. 잠언서 스타일의 흉내를 낸 그의 책을 보면, 본인이 깨달은 자로 등장한다. 학교생활에서부터 직장생활 모두에 걸쳐 말이다. 과연 혜민의 책을 읽고 좀더 아나진 사람들이 있을까? 어차피 치유가 되었다면, 자아라는 것도 긍정적으로 변화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현실을 진단할 수 있도록 시각이 확장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오늘도 라디오에서는 독서를 권장하는 방송이 나온다. 도대체 우엇을 위해 독서를 하는가? 공감하기 위해? 그래서 읽는다면 이해는 하지만, 당신에게 실질적으로 남는 것은 없다. 어느 집을 방문했을 때 서가를 보곤 한다. 나의 판단 기준은 양이 아니다. 어떤 책을 어떻게 읽는가가 기준이다. 수백권을 읽는 것보다는 자신에게 좀 버겁더라도 밑줄 그어가면서 일년을 정독하는 게 낫다. 점점 책읽는 사람들 수가 줄어든다고 난리인데, 인류사에서 도대체 언제부터 책과 글자가 대중화되었나? 1년에 100권 돌파하겠다고? 미친놈의 발상에 불과하다. 정독을 목적으로 하는 경우 10권도 힘들다. 다만 좀더 자신을 낫게 만들기 위해 현재 자신에게 버겁지만 내용 알찬 책들을 접하다 보면, 책을 평가하는 안목이 생겨 대충 목차와 머릿말만 보고도 사야할 책과 버려야 할 책을 구분할 수 있다. 혜민 빠들에게는 미안한 얘기지만 혜민의 책은 후자에 속한다. 치유를 원한다면 차라리 애니메이션 <충사>를 보라. 그게 훨씬 낫다. 시간 떼우기도 중요한 인생 팩터인데, 신간도 떼우면서 생각도 하고 이런 짓에는 사실 책보다는 드라마 등이 나은 경우가 많다. 나는 최근 시간 떼우기로 미드 syfy의 <The Expanse> 시리즈를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