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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더우먼이 페미니즘의 상징?: 경향 신문기사 비판 (수정 보완)

착한왕 이상하 2017. 5. 5. 20:43




원더우먼이 페미니즘의 상징? 다음 경향 신문 기사를 보면 그렇다고 답해야 할 것 같다.


[책과 삶]원더우먼, '여성 해방'을 위해 태어난 여인
http://v.media.daum.net/v/20170505155833080


위 기사는 질 르포어 하버드대 교수가 2015년에 펴낸 <원더우먼 히스토리(원제: 원더우먼의 비밀스러운 역사)>에 대한 서평 성격을 갖고 있다. 기사 내용을 보면, 허핑턴포스트 등 국외 쓰레기 서평들을 짜깁기한 느낌이 든다. 그래서 위 기사에 대한 나의 비판은 그러한 국외 서평들에 대해서도 성립할 것이다. 원더우먼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으니 잡설은 집어치우자. 위 서평 기사 내용에 따르면, 원더우먼을 창시한 윌리엄 몰튼 마스턴은 페미니스트였다는 것이다. 마스턴을 페미니즘 옹호자로 규정할 때, 다음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 페미니즘은 인종주의와 양립 가능하다.


왜 그럴까? 마스턴의 원더우먼 시리즈에서 인종주의 시각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당장 원더우먼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는 아마존 섬의 여성 전사들이 죄다 백인으로 등장한다. 독자들의 반응을 고려한 어쩔 수 없는 조치였다고 하자. 하지만 원더우먼 시리즈 #19를 본다면, 마스턴에게서 ‘인종주의자’라는 상징어를 쉽게 뗄 수 없다. 그 시리즈를 다룬 다음 에세이는 이를 분명하게 해 준다.


Wonder Woman #19: The Incredibly Racist Wonder Woman
http://fyeahwilliammoultonmarston.tumblr.com/post/108953627828/wonder-woman-19-the-incredibly-racist-wonder


위 에세이의 저자는 원더우먼의 창시자 마스턴의 지지자이다. 하지만 마스턴 역시 2차 대전 당시 여전히 남아 있던 백색 우월주의 혹은 인종주의 시각에서 벗어나지는 못했음을 강조한다. 아프리카 흑인들은 히틀러와 결탁했으며, 이로 인해 생겨난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흑인 여성의 역할은 없다. 원더우먼 시리즈 #19는 인터넷을 통해 볼 수 있으니, 그 내용은 각자 찾아보길 바란다. 더욱이 심리학자로서 마스턴이 거짓말 탐지기를 고안한 동기에서도 인종주의적 시각을 찾아 볼 수 있다. 흑인들은 백인들과 달리 원시적이기 때문에 흑인들의 심리적 반응 방식을 ‘자발성’의 이유로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책 49쪽을 참조하라.


Alder, K.(2007), The Lie Detectors: The History of an American Obsession, Free Press.


거짓말 탐지기의 배경이 된 마스턴의 심리학은 뉴런 사이 공간을 차지한다고 가정된 '싸이콘' 가설에 근거하고 있다. 의심스러운 이 싸이콘 가설에 따르면, 정서를 지배하는 네 가지 타입이 있다. 노란색을 선호하는 것은 복종심을 반영한다면서 마스턴은 중국인들을 복종심이 강한 인종으로 묘사하고 있다. 마스턴의 싸이콘 가설의 문제점 등은 다루지 않는다. 다만, 싸이콘 가설 등을 언급하지 않고 무조건 마스콘이 제일 먼저 거짓말 탐지기를 발명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지나치다. 거짓말 탐지기 고안 동기인 싸이콘 가설, 싸이콘 가설 속의 인종주의, 그리고 그 가설과 원더우먼의 연관성에 대해서는 다음 글을 참조하라. 버클리대 인류학과 학생 글로 해당 대학에서 무슨 상을 받았다는 글인데, 대학생이 쓴 글이지만 눈여겨 볼 곳이 많다. 내가 출판사를 가지고 있다면 차라리 이 에세이를 번역해 내고 싶다.


Wilkey, D.(2012), Man as Magician, Man as Machine: Narrative, Wonder & Politics in 20th Century Lie Detection, UC Berkeley.

http://escholarship.org/uc/item/27s4g4ww#page-1


좀 더 전문적인 논문으로는 다음을 보라.


Bunn, G.C.(1997), "The lie detector, Wonder Woman and liberty: the life and work of William Moulton Marston", History of the Human Sciences.

http://comicsstudies.pbworks.com/w/file/fetch/52420066/bunn.pdf


원더우먼 시리즈 #19의 한 컷


경향 신문 기사를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온다.


그(마스턴)는 “언젠가는 여성이 세계를 지배할 것”이라고 믿은 사람이었다. “여성은 남성보다 감정이 두 배로 발달되어 사랑하는 능력이 뛰어납니다. 그들이 세속적으로 성공할 능력을 사랑하는 능력만큼 계발한다면 경제와 국가와 세계를 지배하게 될 것이 명확합니다.” 그에게 원더우먼은 “이 세상을 지배해야 한다고 믿는 새로운 유형의 여성상에 대한 심리적 프로파간다”였다.


기사의 위 내용에 따를 때, 여성에 대한 마스턴의 시각은 지금의 페미니즘 이해 방식과는 거리가 멀다. 그의 시각은 여성우월주의라고 할 수 있다. 좀 더 정확하게는 모계중심사회 옹호론이다. 마스턴은 그의 모계중심사회 옹호론을 지지하는 증거로 여성 고유의 친화력, 배려심, 모성애, 유대감 등을 들고 있다. 이렇게 특정 정서를 여성 고유의 것으로 규정하는 것은 현대적 페미니즘에서는 통용되기 힘들다. 물론 페미니즘 관점은 고정된 것이 아니다. 여성 참정권 운동으로 시작한 페미니즘 전개 과정을 살펴보면, 한때 남성우월주의에 맞서 여성우월주의가 사회적 표면으로 부상한 적도 있다. 마스턴의 입장이 사실은 모계중심사회 옹호론에 불과한 것일지라도, 원더우먼을 페미니즘 발달 역사에서 다루어 보는 것은 분명히 의미있다. 그러나 마스턴의 입장을 페미니즘 그 자체로 묘사하는 것은 문제가 크다. 여성 해방 운동과 마스턴을 관련시킬 때, 그 해방 운동은 어디까지나 ‘백인 여성’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여성에 대한 마스턴의 입장은 오늘날 페미니즘보다는 여성우월주의 혹은 모계사회중심주에 가깝다. 그가 여성 참정권 운동에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만 가지고, 그를 현재 관점의 페미니스트로 규정할 수 없다. 더욱이 그는 ‘백색’에 높은 가치를 부여하는 인종주의 시각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따라서 마스턴을 진정한 페미니스트로 규정하는 경우, 다음을 주장이 성립한다.


• 페미니즘은 인종주의와 양립 가능하다.


현재 위 주장에 동의하는 페미니즘 옹호자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백인 중심의 페미니즘' 혹은 '화이트 페미니즘'이라는 용어도 생겨난 것이다. 페미니즘의 백인 중심 성향으로 페미니즘 운동 동력이 상실되었다고 주장하는 데에는 인종주의의 부정이 전제되어 있다. 질 르포어 하버드대 교수의 <원더우먼 히스토리(원제: 원더우먼의 비밀스러운 역사)>가 나오자마자, 그녀의 책에 대한 비판도 함께 나왔다. 물론 1940년대 백인 남성에게 현재의 페미니즘 관점을 기대하기는 힘들다. 또 당시 미국내 세태에서 여성에 대한 환기를 불러일으키는 데 여성 우월성을 강조하는 것이 더 효과적인 측면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페미니즘 역사에서 차지하는 원더우먼의 위상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특히 원더우먼을 미국 여성 해방 운동사의 '미싱 링크'처럼 묘사하는 르포어의 서술 방식은 문제가 있다. 그러한 서술 방식에 따르면, 1940년대에서 1970년대 여성 해방 운동 사이를 매개하는 결정적 요인 중 하나로 원더우먼이 규정되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러한 변화 과정 속에서 원더우먼의 상징성도 수용되고 변화했다고 해야 마땅하다. 다시 말해, 원더우먼을 여성 해방 운동, 혹은 페미니즘 확장의 결정적 원인처럼 서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2016년 원더우먼을 여권신장 UN 대사로 추대하려 했을 때, 일방적으로 원더우먼의 보디슈트 때문에 반대 여론이 일어난 것이 아니다. 그 반대 여론에는 마스톤의 원더우먼이 페미니즘 정신 자체를 왜곡시킬 수 있다는 동기도 깔려 있기 때문이다.


페미니즘 등 무슨 주의가 형성되는 과정은 오랜 기간을 필요로 한다. 현재적 관점과 모순되는 것이 역으로 현재적 관점 형성에 기여한 경우는 역사 속에서 흔하게 찾아 볼 수 있다. 마스턴의 경우도 이에 해당할 수 있다. 인종주의가 만연한 시절, 남성성과 여성성을 구분하고 여성성에 우위를 부여하는 것 자체로만으로 페미니스트로 행세할 수 있었을 것이다. 또 권리의 측면에서 여성 해방 운동이 활발했던 시절, 페미니스트들은 원더우먼을 전략적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현재 페미니즘 관점이 형성되는 과정의 복잡성을 보여 주는 데 마스턴의 사례를 들여다보는 것은 흥미로울 수 있다. 구글을 통해 대충 일부분만 본 책이라 자세한 평가는 힘들지만, 저자 질 르포어도 지금과는 다른 1940년 대 페미니스트 운동의 여러 측면을 보여 주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을 것이다. 다만, 이 책의 문제는 현재의 페미니즘 관점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현재와 과거의 불일치 혹은 모순되는 측면을 밝히려고 마스턴의 사례를 사용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데 있다. 적어도 경향 신문 기사만을 보면 그렇다. 마스턴을 미국 내 초기 페미니스트 운동을 주도한 중요 인물로 부활시키려 한다면, 페미니즘 역사에서 인종주의가 탈색되는 별도의 역사적 서술이 필요하다. 아니면 페미니즘이 인종주의를 극복해야 하는 당위성 정도의 설명은 필요하다. 현재 통용되는 페미니즘은 적어도 이론적 측면에서는 인종주의와 양립 불가능하다. 이 때문에, '마스턴을 정말 미국 내 초기 페미니즘 형성 기원자 중 한 명으로 볼 수 있는가?'라는 문제는 질 르포아가 생각한 이상으로 복잡한 문제가 될 수 있다. 그 문제는 마스턴이 여성 해방을 지지했다 혹은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로 자청했다는 등의 단편적 기록들로 단순하게 대답될 수 없다는 것이다.


페미니즘 형성 과정 속에서 그리고 페미니즘 시각으로 원더우먼을 해석해 보는 것에는 반대하지 않는다. 오히려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하지만 위 신문 서평 기사처럼 원더우먼을 UN이 여성 권리 신장 홍보대사로 임영하려 했던 2016년 사건과 마스턴을 연관지어 그를 현대적 페미니즘의 기원자 중 한 명처럼 묘사하는 것에는 동의할 수 없다. 더욱이 위 신문 서평 기사를 보는 독자들, 특히 페미니즘 형성 과정 역사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독자들은 여성성의 우월성 확보를 페미니즘과 동일시 할 수 있다. 적어도 2차 대전 당시 여성들의 애국심과 사회적 참여를 독려 했던 미국의 분위기 속에서 마스턴의 원더우먼이 성공할 수 있었다는 정도는 기사에 들어갔어야 했다. 그리고 여성에 대한 마스턴의 시각이 지금의 페미니즘 관점과 어울리기 힘든 측면 정도는 기사에 들어갔어야 했다. 쓸 데 없는 애기 빼고 말이다. 


사실 현재 우리에게 필요한 책은 하버드대 교수의 책이 아니다. 나에게는 그렇다. '원더우먼, 과연 백인이 아닌, 그것도 식민지 경험을 한 우리에게도 페미니즘 상징성을 가질 수 있을까?' '가질 수 있다면 어느 선까지인가?' '원더우먼의 상징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이 땅의 여성 문제들은 무엇일가?' 코믹 문화에 정통한 누가 이러한 문제들을 다룬 책을 내준다면, 바로 구매할 것이다. 



* 덧글
언젠가부터 하버드대 무슨 교수가 펴낸 책들을 재빨리 번역하여 마치 그 책들을 인류의 위대한 산물인 것처럼 소개해 대는 신문 기사들이 늘어나고 있다. 르포어의 책에 대한 경향 신문 기사를 읽고 ‘이 책을 통해 페미니즘을 배울 수 있을 거야’라고 생각하면서 책을 구매하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적어도 신문사가 번역서를 소개하려면, 그 책에 대한 정보를 자세히 뒤져보아야 한다. 그리고 장점과 단점, 비판할 수 있는 것 등을 독자에게 알려 주어야 한다. 경향 신문 기사를 보면, “야 원더우먼에 이런 숨은 이야기가 있다니”, “원더우먼의 작가는 페미니스트였어”, ‘이건 꼭 사보아야 해“, 이런 독자의 반응을 유도하려는 의도가 다분하다. 이러한 기사를 싣는 신문사가 어떻게 사회 진보를 외칠 수 있단 말인가? 한심하기 그지없다. 이 한심한 작태는 경향 신문이 아니라 모든 신문사에 해당한다. 진짜 제대로 된 신문사, 출판사 한 개만 생겨도 이 땅은 많이 바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