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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과 창작력의 관계?

착한왕 이상하 2017. 7. 3. 18:54



어제 Dr. Who 시즌 10 마지막 에피소드 12를 보고난 느낌 ...


사실 이번 시즌은 중반은 닥터 후 명성을 깍아먹는다고 할 정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카팔디의 명품 연기를 제대로 살리지 못하는 데다가, 모펫의 '떡밥 던지기 장난질'에 환멸이 느껴질 정도였다. 전체 맥락을 사전에 구성한 다음 떡밥을 살려야 한다. 마치 린치와 포르스트가 Twin Peaks를 제작하듯 말이다. Twin Peaks 시즌 3이 25년만에 시작했는데, 그 내용을 보면 25년 전에 이미 전체 내용을 어느 정도 다 구성해 놓은 상태임을 알 수 있다. 그러한 내용 속에서 린치의 초현실주의 비주얼 이펙트도 'high!'가 되는 것이다. 반면에 모펫의 경우, 어느 순간부터 일단 떡발들을 던져 놓고 떡밥들 수습하기에 바쁜 방식으로 이야기 맥락을 억지로 짜맞추는 방식이다. 결과는 폭망! 실례로 셜록 지난 시즌을 들 수 있다. 이 번 시즌 닥터후를 보면서 닥터후 역시 셜록 시리즈의 전철을 밟는구나, 이런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다음 시즌부터 모펫 하차하고 다시 러셀이 닥터후 지휘봉을 잡는다는 데 개인적으로 다행이라 생각한다. 모펫의 경우, 리제너레이션 타임이 필요하다.


그나마 닥터후 이 번 시즌을 살린 것은 에피소드 5 옥시즌, 그리고 몬다스 사이버맨이 등장하는 마지막 에피소드 11과 12이다. 마지막 에피소드를 보고, '구원'이라는 개념이 서양 사람들의 창작 모티브에 여전히 강하게 작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빌이 몬다스 사이버맨이 되었다가 에피소드 1에서 시공간적으로 초월한 파일럿 여성에게 구원되는 맥락은 플라톤의 <향연>에 등장하는 신화의 내용과 많이 닮아 있다. 원래 인간은 남남, 남녀, 혹은 여여 한쌍으로 되어 있었고, 이 상태에서 완전한 행복을 누린 존재였다. 이러한 존재에 겁을 먹은 신들은 한쌍으로 된 인간을 분리시켰다. 하지만 인간은 원래 한쌍이었던 시절을 기억하고 자기 짝을 찾으려고 한다. 그 짝이 동성이든 이성이든 상관없다. 이것이 소위 플라톤의 '에로스' 개념의 시작이다.


에피소드 12의 또다른 구원 모티브는 몬다스 사이버맨의 존재에서 엿볼 수 잇는데, 중세 시절 유행한 기독교 교리에서 그 모티브를 엿볼 수 있다. 원죄를 짓고 낙원에서 추방된 지상의 인간은 행복할 수 없다. 그저 천상을 바라보며 신성을 찬양할 수 잇는 정도의 존재이다. 다만 구원을 받은 인간은 다시 완전한 행복을 누릴 수 있다. 그렇게 신에 의해 구원을 받은 존재는 지상의 인간과 달리 새로운 육체를 부여받는다. 그 새로운 육체의 존재는 고통, 충동, 분노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진다. 몬다스 사이버맨의 탄생 과정을 보면, 고통받고 분노하는 인간이 기계화된다. 그런 기계화로 인간은 새롭게 변형되는 것이다. 기독교 교리와 달리, 그러한 변형으로 개성을 상실한 존재를 구원된 것으로 여기지 않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에피소드 속의 이러한 구원의 상징성은 서양인들의 사고방식에 영향을 미친 과거 세계 이해 방식들을 각색함으로써 구체화된 것이다. 각종 과학소설, 판타지소설, 관련 미디어에 자주 등장하는 구원의 상징성! 이것은 서양 사람들의 중요한 창작 모티브인 동시에 창작 소재의 한계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그 상징성을 각종 이야기 맥락 구성에서 그럴듯하게 잘 살려낸다는 점이다. 이 점에서 작가들은 칭찬받을 만하다.


우리 역사를 살펴보면, 유교, 불교, 도교, 무속신앙, 전설 등에는 다양한 세계 이해 방식들이 뒤섞여 있다. 그리고 그런 세계 이해 방식들에는 인간과 구원 등에 대한 서양과는 다른 상징성이 함축되어 있다. 그런데 그런 상징성을 새로운 맥락 속에 녹여내지 못하고 있다. 영국의 닥터후와는 또 다른 성격을 갖지만, 서양 사람들이 보면 '와 이렇게 될 수도 있구나?'라는 느낌을 불러 일으킬 수 있는 이야기들이 없다는 것이다. 무엇이 문제일까? 답은 교육이라고 생각한다.


영국 대중매체 작가들 상당수는 교육비가 많이 드는 사립학교 출신들이다. 또 개인교사의 지도를 받은 사람들도 많다. 공교육에서도 영국 만큼 엄격한 글쓰기 과정을 중시하는 나라는 많지 않다. 우리처럼 한 학기에 수십권 읽고 조잡한 독후감 쓰기 같은 것은 없다. 영국 대중매체 작가들은 어릴 때부터 까다로운 책을 한 학기 동안 체계적으로 분석하고, 주어진 엄격한 조건들을 만족하면서도 창의적인 맥락을 구성하도록 해 주는 체계적 훈련을 받았다. 그러한 체계적 훈련은 우리나라 교육 과정에는 완전히 결여되어 있다. 특수 학교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죄다 입시! 부유한 가정도 그저 입시! 그 돈이면 자식득이 정말 교육다운 교육을 받게 할 수 있는 데도 말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권력가들은 그저 학제, 입시 제도를 바꾸면 다 되는 것처럼 개처럼 짖는다.


학점제를 도입하면 뭐하나. 실제 학생들을 가이드해 줄 정교한 콘텐츠 개발에 무관심한 데 말이다. 융합을 외치면 뭐하나. 그저 신기한 발명 블라 블라 이야기가 융합 콘텐츠 자격을 갖는다고 생각하는가? 무엇보다 초등학생 및 청소년들에게 필요한 '맥락 구성 훈련'과 같은 것은 없다. 그저 다독과 단시간 내의 의무적 쓰기 과정밖에 없다. 이러한 교육이 개선되지 않는다면, 한국판 닥터후는 나오지 않을 것이다. 맥락 구성 훈련을 해 보지 않으니, 상황판단력도 떨어진다. 지식을 습득하면 뭐하나. 상황 맥락에 맞게 사용할 수 없는데 말이다. 결론은 죽은머리의 소유자들의 수적 확장 ... 그 결과는? 각자 판단할 일이다.


시즌 10의 마지막 시리즈에는 몬다스 사이버맨을 소재로 삼은 것은 카팔디의 발상이었다는 소문이 있다. 아무튼 전체 시즌은 그의 연기력을 살려줄 만큼 맥락 구성이 탄탄하지 못했다고 평가한다. 이야기 맥락 구성이 탄탄했더라면, 카팔디야말로 역대급 닥터 후로 남을 수 있었는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