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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솔로지의 개척자들: 마구누스 히르쉬펠트 2.2-3 중요한 물음, 성적 취향의 다양성

착한왕 이상하 2017. 6. 13. 00:28

 

(2) 중요한 물음

히르쉬펠트의 이론적 연구들은 전통적인 남성과 여성의 이분법을 해체시키는 것이며, 그 해체의 토대는 생물학과 심리학이었다. 인간은 누구나 이상적 남성 혹은 여성이 아니다. 누구를 남성혹은 여성으로 부를 때, 이것은 분포적 의미만 가질 뿐이다. 히르쉬펠트와 거리를 두고 남성과 여성을 생물학적 차원에서 접근하는 경우, 남성과 여성의 가장 안정적인 구분은 생식 가능성에 근거한다. 이때, 남성과 여성은 짝짓기를 통해 새끼를 낳을 수 있는 상대적 배우자로서 수컷과 암컷을 뜻한다. 지구상 대부분의 유기체들은 성 구분이 없는 미생물, 박테리아 등이다, 이것들은 무성 생식을 하기 때문이다. 유성 생식을 하는 곤충, 포유류, 어류 등의 암수 구분은 생각보다 가변적이다. 환경 변화에 따라 암컷이 수컷으로, 수컷이 암컷으로 변하는 종들도 있다. 포유류에 속하는 개체들의 암수 구분은 상대적으로 안정화되어 있다. 포유류의 성 결정 방식은 주로 수정 과정에 의존적이다. 그런데 수정 가능성 자체가 번식을 보장해 주지는 않는다. 포유류의 성 결정 방식에서도 암컷과 수컷의 상대적 구분은 다음 도표처럼 분포 곡선으로 나타난다.

 

 


위 도표에서 암컷은 왼쪽 분포 곡선으로, 그리고 수컷은 오른쪽 분포 곡선으로 나타나 있다. 암수 분포 곡선을 결정하는 데 유전적 요인, 호르몬, 생장 및 환경 요인 등이 개입하며, 특히 호르몬은 환경 변화에 민감하다. 각 성 분포 곡선에의 정확한 중간값에 해당하는 암컷과 수컷은 없다. 그 값은 단지 생물학적 연구에 필요한 정상과 비정상의 구분을 논할 때 사용되는 개념적 도구이며, 여기서 정상과 비정상의 구분은 생식 가능성에 국한된 것이다. 정상적인 암컷과 수컷은 각각 분포 곡선의 중간값 근처에 위치한 개체들을 뜻할 뿐이다. 인간은 누구나 일생 동안 암수 분포 곡선의 한 위치만을 점유하지 않는다. 더욱이 노화가 진행되면서 이상적인 암컷과 수컷의 기준선에서 벗어나게 된다. 또한 유성 생식을 하는 모든 종에는 자웅동체 개체들이 존재하는 데, 그러한 개체들은 암수 분포 곡선이 겹친 곳에 위치한다. 이제 우리에게 중요한 물음은 다음과 같다.

 

생식 가능성에 국한된 정상과 비정상의 상대적 구분은 성적 취향과 성 정채성에도 적용되는 것일까? 생식 가능성에 국한된 암수 구분이 인간처럼 상대적으로 안정화되어 있는 경우, 성적 취향과 성 정체성도 생물학적 성 결정에 영향을 미치는 유전적 요인, 호르몬 등에 일방적으로 좌우되는 것일까?

 

성적 취향과 성 정체성은 서로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지만 동일한 것이 아니다. 누가 호기심에 동성애 경험을 했다고 해서 그가 동성애자로 분류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적 취향과 정체성을 구분하여 위 물음에 답해 보자.

 

(3) 성적 취향과의 다양성

암수 구분이 생식 가능성 차원에서 안정화되어 있는 경우에도 그 차원의 정상와 비정상의 구분을 성적 취향에 그대로 적용할 수 없다. 그렇게 적용하려면, 성적 취향 역시 생물학적 성 결정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들에 전적으로 좌우된다고 전제해야 한다. 그러한 요인들이 성적 취향 형성에 영향을 미치더라도, 성적 취향이 그러한 요인들에 구속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이 때문에, 현대 생물학과 심리학에서 성적 취향도 생식 가능성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들에 일방적으로 좌우된다는 주장은 부정된다. 생식 가능성 차원에서 정상적 암컷이나 수컷으로 구분되는 동성애자 X가 있다고 하자. X의 동성애 취향이 선천적이라면, X의 성적 성향 및 선택 등에 영향을 미친 유전적 요인들은 성기 등 표현형의 형성과 연관된 유전적 요인들과는 다르다고 해야 한다. X는 성기가 중요한 역할을 하는 생식 기능성 차원에서 정상적 수컷으로 분류되기 때문이다. X의 동성애 취향이 후천적이라면, X의 성적 성향 및 선택에 등에 영향을 미친 사회문화환경적 요인들이 있다고 해야 한다. 그 어떤 경우에나 생식 가능성 차원에 국한된 정상과 비정상의 상대적 구분을 성적 취향에 그대로 적용할 수 없다. 동성애는 현 사회에서 다수를 차지하는 개인들에 대비된 소수에 속할 뿐 자연적 본성에서 빗나간 비정상적인 것이라 할 수 없다.

 

생식 가능성 차원에서 수컷은 암컷을, 그리고 암컷은 수컷을 선호하는 성향은 분명히 있다. 그러한 성향은 번식에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적 욕구를 충족하는 방식이 생물학적 성 결정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들에 종속된 것은 아니다. 현대 젠더 구성론자들은 소위 정상적인 결혼 생활을 하다가 동성애 취향으로 이혼을 한 사람들과 관련하여 사회문화적 요인들을 강조한다. 성적 취향에 대한 히르쉬펠트의 입장은 젠더 구성론자들보다 급진적이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누구나 생물학적으로는 잠재적 양성애 취향을 갖고 있다. 이를 뒷받침하는 히르쉬펠트의 근거는 생리학과 심리학이다.

 

모든 남성은 미발육 자궁과 생식에 불필요한 젖을 갖고 있으며, 모든 여성도 생식에 불필요한 정소상체 혹은 부고환(epididymis)과 정삭(spermatic cord)을 갖고 있다. 생식에 불필요하지만 남성에게 남아 있는 암컷의 기관 및 특징들, 여성에게 남아 있는 수컷의 기관 및 특징들을 성기와 자궁 등에 대비된 ‘2차 성적 형질들이라고 하자. 발생 및 발달 과정 중, 1차 성적 기관인 성기와 자궁 등이 생식 가능성의 정상적 분포 범위에서 벗어나는 정도는 약하다. , 그것들의 발생 및 발달 과정은 유전적 요인들에 의해 강하게 구속되어 있다. 반면에 암컷과 수컷에 따라 상대적으로 나타나는 2차 성적 형질들이 생식 가능성의 정상적 분포 범위에서 벗어나는 정도는 1차 성적 기관보다 크다. 특히 여성의 남성 호르몬 분비, 남성의 여성 호르몬 분비 정도는 발달 및 노화 과정에서 강한 개인차를 보인다. 히르쉬펠트에게 2차 성적 형질들은 발생 및 발달 과정에서 사라지거나 억제되어 기능을 상실하는 것이 아니다. 그에게 그러한 형질들은 발생 및 발달 과정에서 개인의 성적 취향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에서 잔여의 성(residual sex)’이다. 성적 취향에 영향을 미치는 또 다른 요인들로 성적 동인(sexual drive)과 심리적 반응들이 있다. 이러한 3차 성적 특징들은 더욱더 개인별로 강한 편차를 나타낸다. 그러한 편차를 남성과 여성의 전통적 이분법 구도 속에 가둘 수 없다.

 

히르쉬펠트에게 성적 취향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들은 생식 차원의 성적 기관들, 또 다른 성적 형질들, 성적 동인과 심리적 반응들이다. 이러한 복합적 요인들의 구성체로 성적 취향을 파악할 때, 인간은 누구나 생물학적으로는 잠재적 양성애 취향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발생 및 발달 과정에서 다수가 남성과 여성으로 구분되더라도, 그 구분은 어디까지나 분포적 의미를 가질 뿐이다. 동성애 취향은 소수에 속할 뿐 생물학적 비정상으로 규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정상적 남성이나 여성이라는 분포에 속하는 개체들 각각의 성적 취향은 다르다. 체위, 성행위 대상 선호 방시, 성적 동인의 해소 방식 등은 개인별로 강한 편차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또한 평생 동안 동일한 성적 취향을 갖고 살게 된다는 보장도 없다. 히르쉬펠트는 이러한 점들을 들어 인간의 성적 취향은 누구나 남성과 여성의 중간 단계 혹은 중간 영역에 위치한다고 강조한다. 그런데 이러한 강조는 남성과 여성의 전통적 이분법을 생물학적으로 해체시키려는 그의 의도를 명료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흐릿하게 만들어버릴 수 있다. 이상적으로 가정된 남성과 여성을 점으로 가정하고, 두 점을 이은 선분의 중간 지점에 위치한 성적 취향은 동성애적인가? 아니면 중성적인 것인가? 이러한 물음들은 성적 취향에 대한 히르쉬펠트의 입장을 애매모호하게 만든다. 그래서 그의 입장을 명확히 보여 주는 표상법을 개발할 필요가 있다. 그러한 표상법을 함께 만들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