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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솔로지의 개척자들: 마구누스 히르쉬펠트 2-1. 제 3의 성

착한왕 이상하 2017. 6. 4. 00:55

 

2.

사회 운동가로서 히르쉬펠트는 동성애자, 트랜스젠더 등 성소수자의 권리를 옹호했던 인물이다. 그런데 그의 성과학은 그의 성소수자 해방 운동보다 훨씬 급진적 성격을 갖고 있다. 히르쉬펠트는 기존의 남성과 여성이라는 이분법을 완전히 해체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에 따르면, 생물학적으로 완벽한 남성 혹은 완벽한 여성이란 없다. 누구나 남성과 여성 사이의 중간적 성 정체성을 갖고 있으며, 개인의 성 정체성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남성성, 여성성이라는 젠더 개념도 생물학적 요인들에 저항하거나 혹은 생물학적 요인들과 무관하게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다. 당양한 성 정체성은 이미 생물학적 사실이라는 것이 히르쉬펠트의 입장이다. 이러한 입장에 따르면, 누구나 그 자신만의 성 정체성을 갖고 있다. 현대적 관점에서도 급진적이라 할 수 있는 히르쉬펠트의 입장은 있는 그대로 알려지기보다는 왜곡되기 일쑤였다. 이를 잘 보여는 실례로 3의 성(the third sex)’에 대한 히르쉬펠트의 입장을 프로이트가 왜곡한 것을 들 수 있다.

 

(1) 3의 성 논쟁

도가(道家)의 양생 수행법을 보면, 남성과 여성의 이분법은 기독교나 유교보다 약하다. 남성이 여성이 될 수 있고, 여성이 남성이 될 수 있으며, 신선은 중성으로 거론되기도 한다. 물론 이 글에서 도가의 성 개념을 다루는 것은 아니다. 다만 도가를 운운한 이유는 이렇다. 성 정체성이라는 것이 생물학적 요인보다는 종교, 정치적 이념 등 문화 사회적 요인들에 더 의존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서양의 경우, 기독교 교리가 사회 통합의 원리로 기능하면서 동질이형론(dimorphism), 즉 동질에 근거한 두 개의 서로 다른 성이 있다는 관점은 신성불가침한 것이었다. 남성과 여성의 이분법은 신의 섭리를 반영한 것이자 동시에 자연적인 것이다. 이러한 이분법의 대안으로 갈레노스의 단일 성(one sex) 이론이 제안되기도 했다. 르네상스 시절까지 갈레노스와 함께 권위를 누렸던 단일 성 이론이 동질이형론과 양립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단일 성 이론에 따르면, 오로지 남성이라는 성만 있고, 여성은 발생 및 발달 과정에서 남성성이 온전히 구현되지 않은 불완전한 성이다. 그러한 불완정성은 남성이라는 완전한 것을 대물림시키는 데 필요한 것이다. 멀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문헌에서 엿 볼 수 있는 단일 성 이론 역시 남성과 여성의 이분법을 배제하지 않으며, 남성 지배 사회 구도를 정당화하는 데 사용되었다. 또한 단일 성 이론은 여성이 남성으로부터 창조되었다는 성경의 문구로 재해석될 여지도 갖고 있다. 단일 성 이론은 프로이트의 남성적 리비도(male libido)’ 개념 형성에도 영향을 미쳤을 만큼, 남성과 여성을 이분하는 관점의 그림자는 서양 지성사에 깊게 드리워져 있다.

 

용어 3의 성동성애를 대체하려고 프랑스의 문학가 테오필 고티어(T. Gautier), 오느르 드 발자크(O. de Balzac), 독일의 문학가 카를 하인리히 울리히스(K.H. Ulrichs) 등이 사용했다. 이들은 용어 동성애가 성애 대한 기존의 이분법적 사고방식 틀이 갖는 한계를 보이기에는 역부족이라고 생각했다. 동성애는 그러한 사고방식의 틀에서 남성과 남성, 여성과 여성의 성적 관계만을 뜻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남성과 여성이라는 범주에 속하지 않는 새로운 성으로서 3의 성이라는 용어를 대중적으로 유행시킨 인물은 히르쉬펠트였다. 하지만 그는 3의 성이라는 용어를 그의 과학적, 학문적 작업에서는 사용하지 않았다. 단지 성소수자 해방을 위한 정치적 전략의 일환으로 그 용어를 사용했다.르쉬펠트가 그의 과학적, 학문적 작업에서 3의 성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3의 성은 남녀를 이분하는 분류법에 또 다른 인공적 범주 하나를 더한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히르쉬펠트에게 남성과 여성은 수태 혹은 임신 가능성과 관련해 이상적으로 가정된 개념일 뿐이다. 그에게 개인은 누구나 남성과 여성 사이에 위치한 간성(intersex)이다. 그래서 히르쉬펠트는 3의 성이라는 표현이 제 1의 성인 남성, 2의 성인 여성이라는 이분법에 동성을 새로운 성으로 더한 것에 불과해, 성적 취향과 정체성의 다양성과 복잡성을 숨겨버린다고 여겼다.

 

히르쉬펠트가 대중 강연 및 선전문 등에서 3의 성이라는 용어를 사용했을 때, 그것은 남성, 여성과 구분되는 별도의 독립적인 새로운 성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남성과 여성 사이에서 나타나는 여러 연속적인 성적 형태들을 총칭하거나, 그러한 형태들의 다양성을 암시하는 수사적 장치에 불과하다. 프로이트는 <성이론에 관한 세 가지 접근법(Drei Abhandlungen zur Sexualtheorie 1905)><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아동기 기억(Eine Kindheitserinnerung des Leonardo da Vinci 1910)>에서 성에 대한 히르쉬펠트의 입장을 왜곡시켰다. 프로이트는 제 3의 성을 남성과 여성의 이분법으로 규정될 수 없는 중간 형태의 성으로 볼 여지는 있으나, 3의 성을 남성과 여성의 성적 취향과 무관한 별도의 독립적인 성 범주로 규정하는 시도를 과학적이 않다면서 비판했다. 그러한 비판에서 프로이트는 히르쉬펠트를 울리히스와 함께 엮어버렸다. 그러나 제 3의 성을 별도의 닫힌 성 범주로 규정하는 것에 반대하고 전통적 이분법으로 규정 불가능한 성의 형태로 여겨야 한다고 주장한 인물은 히르쉬펠트였다. 따라서 프로이트는 히르쉬펠트의 입장을 왜곡한 것이다

 

프로이트가 히르쉬펠트를 왜곡한 과정에서 딱히 남성과 여성으로 분류 불가능한 여러 형태의 성 존재 가능성을 강조했다고 해서, 성의 다양한 형태를 자신의 정신분석학에 끌고 들어간 것은 아니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은 남성과 여성의 전통적 이분법 틀을 해체시키지 않았다. 그 결과, 프로이트는 양성적 요인의 일반성을 어느 정도 인정했음에도 동성애를 정상적으로 발달하지 못한 심적 단계로 규정했다. 다시 말해, 동성애는 개인의 선호 문제나 생물학적 요인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유아기에 머물러 있는 미성숙 심적 단계라는 것이다. 동성애에 대한 프로이트의 이러한 입장은 히르쉬펠트의 입장과 양립 불가능한 것이다. 프로이트 역시 동성애자들을 동정했다. 하지만 동성애 자체는 그에게는 치료의 대상이다. 반면에 동성애는 히르쉬펠트에게는 자연스러운 성의 형태들 중 하나일 뿐이다. 동성애에 대한 프로이트와 히르쉬펠트의 입장 차이를 고려한다면, 히르쉬펠트가 프로이트의 추종자가 될 수 없음은 분명하다. 더욱이 양적 연구에 근거한 성과학의 토대를 닦으려 한 히르쉬펠트에게 프로이트의 정신에너지나 리비도 개념과 같은 것은 수용 불가한 것이다. 그러한 것은 측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프로이트의 추종자가 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리고 성에 대한 프로이트의 접근 방식에 동의할 수 없었기 때문에, 하르쉬펠트는 정신분석협회 베를린 지부를 탈퇴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탈퇴 배경으로 그와 융의 불화가 종종 거론되는데, 융은 당시 프로이트의 대변자로 자처했기 때문이다.

 

 

1907년 히르쉬펠트를 묘사한 정치 만평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