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그누스 히르쉬펠트
젠더, 퀴어, LGBTI(lesbian, gay, bisexual, transgender and intersex) 등의 개념이 대중화된지 꽤 되었다. 이제 제 2차 대전 이후 인간의 성 연구에서 한 획을 그었다고 평가받는 알프레드 킨제이(A. Kinsey)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럼에도 현대적 성의학(sexual medicine), 섹솔로지(sexolgy)의 형성에 결정적 기여를 했던 마그누스 히르쉬펠트(M. Herschfeld)를 들어본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성적 취향, 정체성과 관련해 히르쉬펠트가 정상적인 것과 비정상적인 것의 이분법을 해체하려 했다면, 킨제이는 아메리카 인들의 일반적인 성적 활동을 분석하고 보고서를 정기적으로 내어 유명세를 탔다. 성에 대한 두 사람의 접근 차이에도 불구하고, 킨제이의 연구소가 히르쉬펠트의 작업에 영향을 받았다는 점에서 두 사람의 사이에는 역사적 연결성이 있다. 이러한 사실을 아는 사람은 더더욱 적을 것이다. 아마도 국내 학계에서조차 히르쉬펠트를 아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한 것 같다. 그렇지 않다면, 히르쉬펠트를 소개한 신문 기사나 칼럼 정도는 있었을 것이다. 성에 대한 인문학자들의 교양 강의에 푸코, 프로이트는 짜증날 정도로 많이 등장하지만 히르쉬펠트는 거론조차 되지 않는다. 심지어 과학자, 의사들도 성을 다룬 신문 기사나 칼럼에서 그런 얄팍한 교양 강의를 흉내내고 있다. 가까운 일본만 해도 히르쉬펠트를 소개한 신문 기사나 칼럼이 많은 데 말이다. 세세한 논거 없이도 이 점은 일본 인문학 문화가 우리보다는 한 수 위임을 보여 준다. 신문 기사, 칼럼, 대중서의 질적 수준이 높아지지 않고서는 이 땅의 현재 인문학 문화는 유행병에 물들어 자생적 학풍을 가로막는 장벽으로 작용할 것이다.
마그누스 히르쉬펠트는 누구인가? 1868년 태어나 1935년 생을 마친 그는 유대계 독일인 의사로서 당시 사회적 편견에 맞서 성소수자 권리 확대 운동을 주도한 인물이다. 특히 성에 대한 그의 방대한 저술들의 내용은 지금의 관점에서도 혁신적이고 체계적이기 때문에, 그를 ‘현대적 섹솔로지의 창시자’로 부르는 데 주저할 학자는 거의 없다. 사회가 성적으로 좀 더 자유로워지고, 성소수자에 대한 편견이 사라질수록 그의 권위는 더욱 올라갈 것이다. 여기서는 히르쉬펠트에게 ‘섹스의 아인슈타인(The Einstein of Sex)’이라는 별명이 붙은 과정, 성에 대한 그의 입장을 간략히 소개한다.
히르쉬펠트 출처:위키페디아
1.
히르쉬펠트는 지금의 독일, 당시 프러시아의 콜베르그에서 태어나 성장해 브레스로우에서 여러 언어를 익히고 스트라스부르, 뮌헨, 하이델베르크, 베를린에서 의학을 공부했다. 사회 운동가로서 그를 규정한다면, 20세기 초 독일 동성애자 해방 운동을 주도한 인물이다. 그가 동성애자 해방 운동을 주도하게 된 데 영향을 미친 일련의 사건들이 있다. 의학부 학생 시절, 마치 실험동물처럼 나체로 시연된 동성애자들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당시 의대생들 중 학교 당국에 항의를 한 유일한 인물이 히르쉬펠트였다. 학위를 받고 의사로 개업한 1893년, 그는 아파트 주변에서 동성애로 고민에 빠진 어느 군인을 만났다. 군인은 당장 상담을 요구했지만, 히르쉬펠트는 여건상 다음 날 병원에서 만나자고 했다. 그러나 그 군인은 병원에 나타나지 않았다. 자살했기 때문이다. 이 사건으로 히르쉬펠트는 죄책감에 시달렸다.
히르쉬펠트의 성적 취향과 정체성에 대해서 정확히 알려진 것은 없다. 그의 연구자들 중에는 그를 양성애자 혹은 동성애자로 규정한다. 허쉬펠트와 친밀한 관계를 맺은 인물로는 그의 성과학 연구소(Institut fuer Sexualwissenschaft) 기록물 담당관 카를 기제(K. Giese), 그리고 그의 말년 제자 중국인 뤼쉬통(Lui Shie Tong)을 들 수 있다. 그들 간의 친밀한 관계가 성적인 관계도 포함하고 있는지를 밝혀 주는 결정적 단서는 없다. 히르쉬펠트는 인터넷에서 ‘가장 유명한 독일인 게이’ 등으로 회자되곤 하지만, 그의 성적 취향과 정체성은 아직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그가 성의 자유에 대한 확신을 젊은 시절부터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동성애자 해방 운동에 깊숙이 개입한 아들에게 부모가 장래를 걱정해 관심을 돌리려고 했을 때, 히르쉬펠트의 대답은 “콜레라 (치유)가 섹스보다 즐거울 수는 없다”였다.
히르쉬펠트와 Li
성에 대한 과학적 탐구가 성소수자에 대한 사회적 관용을 이끌어 낼 수 있다는 확신 아래, 히르쉬펠트는 에두아드 오베르크(E. Oberg), 막스 스포어(M. Spohr), 요셉 폰 뷜로우(J. von Buelow)와 함께 과학적이고 인본주의적 위원회(Wissenschaftlich-humanitaere Komitee)를 결성했다. 히르쉬펠트의 좌우명은 ‘과학을 통한 정의(per scientiam ad justiam)’였다. 위원회의 주된 활동 목적은 1871년 제정된 반동성애 조항 175의 폐지를 이끌어 내는 것이었다. 많은 동성애자들이 히르쉬펠트에게 상담받으려 모여들었으나, 정작 위원회 활동에는 동참하지 않았다. 히르쉬펠트로 인해 동성애 문제가 부각되면 될수록 사회적 멸시가 심해질 것이라고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위원회 구성원들의 헌신적 노력으로 약 6,000명의 저명인사들이 175 조항 폐지안에 서명했다. 1929년 의회는 위원회에게 175 조항을 폐지하기로 약속했으나,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히르쉬펠트는 1899년에서 1923년까지 <성적 중간 영역에 관한 연례 보고서(Jahrbuch fuer sexuelle Zwischenstufe)>를 발간했다, 각 연례 보고서는 오지 원주민들의 동성애, 동성애에 관한 문학적 해석, 사례 연구 등을 담고 있다. 이러한 연례 보고서에는 성적 취향과 정체성은 남성성과 여성성의 이분법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는 히르쉬펠트의 동기가 깔려 있다. 그는 1908년 프로이트와 만난 후 비엔나 정신분석 협회 베를린 지부 창단 멤버가 된다. 하지만 융(K.G. Jung)과의 불화로 1913년 협회를 탈퇴했다. 그리고 1913년 이반 블로흐(I. Bloch), 하인리히 쾨르버(H. Koerber)와 함께 성과학과 우생학을 위한 의학회를 설립했다.
히르쉬펠트의 화신과 같은 성과학 연구소는 1919년에 설립되었다. 성과학 연구소는 성과 관련된 모든 과학적 사회적 문제들을 다루었고, 끈질기게 연구 결과를 세상에 내놓았다. 히르쉬펠트의 성과학 연구소는 킨제이 성연구 기관(Kinsey Institute for Sex Research)의 정신적 모태라고 할 수 있다. 성과학 연구소와 함께 사회적 유명세를 타게 된 히르쉬펠트는 우파 집단의 여러 차례 공격을 받기도 했다. 1920년 뮌헨 길거리에서 구타를 당해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1921년에는 두개골 골절상을 입기도 했다. 1929년 히틀러가 정권을 잡은 후, 히르쉬펠트는 나치(Nazi)의 감시 인물 목록에 올랐다.
히르쉬펠트는 이성애 이외 모든 것을 비정상적인 것으로 규정하는 통념으로부터 사회를 해방시키려 했다. 히르쉬펠트의 성소수자 해방 운동은 히틀러의 나치에게는 골칫거리였다. 아리안 인종의 순수성을 강조하면서 동성애자들을 반나치적 집단으로 낙인찍었기 때문이다. 나치는 우생학에 근거해 동성애를 반자연적인 것으로 규정했다. 또 한편 우생학과 어울리기 힘든 호르몬 치료법을 가지고 독일 동성애자들을 이성애자들로 변화시키려고 했는데, 여기에는 동성애를 일종의 질병으로 간주하는 당시 관점이 깔려 있다. 히틀러의 눈 밖에 난 히르쉬펠트의 저서들은 화형식을 당했다. 그러한 화형식과 함께 아인슈타인, 프로이트, 쿠르트 바일(K. Weil) 등 유대인들이 자주 거론되지만, 그들 중 나치 집단에게 정치적으로 가장 골칫거리는 하르쉬펠트였다.
나치의 책 화형식
하르쉬펠트는 1930년 미국에 이어 일본, 중국, 인도네시아, 인도, 필리핀, 이집트, 팔레스타인을 돌아다니며 강연을 했다. ‘섹스의 아인슈타인’, ‘서양의 와짜야나(Vatsayana of the West)’라는 별명도 이때 그에게 붙여진 것이다. 와짜야나는 인도의 경전 <카마수투라>의 저자로 알려져 있다. 1932년 유럽으로 돌아온 히르쉬펠트는 독일로의 귀국을 포기했다. 나치는 1933년 히르쉬펠트의 성과학 연구소를 파괴했으며, 이를 TV 뉴스로 방영했다. 당시 히르쉬펠트는 파리의 어느 극장에 앉아 그 뉴스를 통해 자신의 연구소가 파괴되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다. 나치는 1934년 그의 국적을 박탈했다. 1934년 프랑스 니스에 정착한 히르쉬펠트는 다음 해 5월 19일 생을 마감했다.
히르쉬펠트는 동성애자, 트랜스젠더 등 성소수자 해방 운동을 실천하면서도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 성 문제뿐만 아니라 정치, 윤리학까지 망라하는 그의 저술들 중 <이성복장자들(Die Transvestiten, 1910)>, <남성과 여성의 동성애(Homosexualitaet des Mannes und des Weibes, 1914), 세 권으로 구성된 <성병학(Sexualpathologie, 1917)>, 그리고 다섯 권으로 구성된 <성과학(Geschlechtskunde, 1926~1930)>은 현대적 성의학과 섹솔로지 형성 과정을 논할 때 빼먹을 수 없는 작업들이다. 히르쉬펠트는 또한 <다른 것들보다도 다른(Anders aks die Andern)>이라는 무성 영화를 제작했는데, 이 영화는 영화 역사에서 동성애자 해방을 다룬 최초의 작품이다. 반동성애법 조항 175 폐지 운동의 일환으로 제작되어 1919년 초연된 이 영화는 1920년 정부로부터 상영 금지 조치를 당했다.
Anders als Andern의 한 장면
To be continued!
참고 문헌은 이어지는 글에서 소개될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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