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철학 에세이/자연철학

시간 철학: 페레키데스

착한왕 이상하 2019. 1. 10. 00:32

* 개인 원고 <철학자들의 행복>을 2/3 가량 끝낸 상태에서 새로운 개인 원고 <경험과 시간: 한계와 가능성의 관계>를 시작한다. 블로그에는 원고의 본문을 올리지 않는다. 원고는 철학자들의 이름이 등장하지 않는 본문과 두 개의 부록 A, B로 구성된다. 블로그에는 '부록 B. 시간 철학'에서 다루어질 철학자들의 시간 개념을 연대순으로 올린다. 첫 번째 인물은 페레키데스이다. 블로그에 올리지 않는 개인 원고 <경험과 시간: 한계의 가능성의 관계>의 본문 내용을 추측해 보고 싶은 사람은 다음 블로그 용 서문을 참조하라.

 

시간과 경험: 서문(블로그 용)  http://blog.daum.net/goodking/966

 

 

 

페레키데스

 

소크라테스(Socrates) 이 전의 고대 그리스 철학의 흐름은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D. Laertius)의 <유명한 철학자들의 생애와 사상(Lives and Opinions of Eminent Philosophers)>,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의 여러 문헌 등에서 엿볼 수 있는 정도이다. 그래서 그 흐름을 현재 우리가 정확히 알 수 없다. 하지만 그 흐름을 고대 그리스 자연 철학이라 부르는 이유는 있다. 그 흐름에 등장하는 철학자들 대부분은 인간과 사회 및 신의 관계보다는 신과 자연의 관계에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 자연 철학의 주류 관점에 따르면, 경험 가능한 모든 것은 이미 존재하는 다른 것에서 기인했다는 것이다. 특정 종류로 분류되는 어떤 것이 있다면, 그것은 다른 종류의 또 다른 어떤 것에서 기인했다는 것이다.

 

[A] 대상 a가 현재 특정 종류 F에 속한다면, a는 다른 종류 G에 속한 b에서 기인한 것이다.

 

만약 a가 특정 환경 속에서 형태를 유지하는 얼음의 일종이라면, a는 주변 환경에 따라 그 형태가 유동적으로 정해지는 물 b에서 기인했다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 자연 철학자들 일부는 ab의 관계를 순환 관계에서 이해했다. 또 다른 일부는 그 관계를 무질서에서 질서가 생성되는 과정의 관점에서 이해했다. 이 때문에, ab의 관계를 원인과 결과의 관점에서 선후를 따지는 것은 그들에게 이질적인 것이었다. 그들 다수는 a에서의 b로의 변화 또는 둘 사이의 순환을 표면적인 현상으로 간주했다. 그 현상에 숨어 있는 실체, 즉 변화 속에서 본질을 잃지 않고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을 가정했기 때문이다.

 

[B] aF, bG에 속하지만, a는 어떤 실체 x의 한 상태이며, ba와 다른 형태를 갖게 된 실체 x의 또 다른 상태이다.

 

고대 그리스 자연 철학의 주류 사고방식은 [A][B]로 구성되어 있다. 그 사고방식에 따르면, 존재하는 것은 오로지 존재하는 것에서 기인하며, 불변적인 것을 가정해 변화를 설명하는 것만이 근거를 갖춘 합리적 설명 방식이다. [B]의 실체는 경험 가능한 것의 궁극적 물질과 같은 원소일 수도 있고, 무형의 존재일 수도 있다. 고대 그리스 자연 철학에서 실체는 변화의 원리와 분리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졌다. 실체 자체를 그러한 원리로 여기는 경우도 있다. 이 때문에, 고대 그리스 자연 철학에서 원리는 좀 더 포괄적 의미에서 실체 또는 변화의 원리 양자를 뜻한다. 이때 다음과 같은 물음을 던질 수밖에 없고, 그 물음에 답하는 방식에 따라 동일한 사고방식에 근거하면서도 다양한 세계 이해 방식들의 생성이 가능한 것이다.

 

만물의 원리는 하나인가? 아니면 여러 개인가? 여러 개라면, 그 수는 유한한가? 아니면 무한한가?

 

만물의 원리를 하나로 가정하는 것은 두 가지 경우로 나뉜다. 그 하나는 질적 차이를 수반하는 상태 변화를 실재로 가정하는 경우이며, 다른 하나는 그러한 변화를 허용하지 않은 경우이다. 두 번째 경우에서는 인간이 없어도 존재하는 시간을 주장할 수 없다. 두 번째 경우에서 변화는 환영이거나 인간 의식의 산물이 되기 때문에, 변화를 실재로 규정하고 시간과 변화의 연관성을 따질 수 없다. 철학자들은 인간 없이도 존재하는 시간을 객관적 시간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객관적 시간 개념은 두 번째 경우와 논리적으로 양립할 수 없다.

 

만물의 원리를 하나로 가정하는 첫 번째 경우는 객관적 시간 개념과 양립할 수 있다. 우선 인간 없이도 존재하는 시간이 유일한 하나의 원리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주장한 고대 그리스 자연 철학자들은 없다. 그 이유는 당연하다. 변화에 필요한 물질 및 장소마저 시간 개념에서 이끌어 내기란 힘들 뿐더러 불가능해 보이기 때문이다. 시간을 유일한 하나의 원리로 규정하는 것은 첫 번째 경우에서 배제시키자. 이때 남는 것은 시간을 변화의 속성으로 규정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헤라클레이토스(Heraclitus)에게서 엿볼 수 있다. 그가 만물의 원리를 불이라고 했을 때, 그 불은 우리가 경험하는 불이 아니다. 그것은 변화와 생성의 원리로 규정되었기 때문이다. 이때 시간은 무질서에서 질서가 생성되는 변화 과정의 속성, 즉 변화 과정에 내재하는 특징으로 여겨질 수 있다. 하지만 변화의 특징으로서 시간이 존재한다는 관점은 헤라클레이토스의 사상에서 추측해 볼 수 있는 것일 뿐이다. 시간에 대한 그의 구체적 언급은 남아 있지 않으며, 그가 그런 언급을 했는지도 불확실하다.

 

만물을 원리를 여러 개로 가정하고 시간을 논할 때, 두 가지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첫 번째 경우는 시간을 원리들 중 하나로 가정하지 않는 것이다. 이 경우, 시간을 원리들에 근거한 변화의 속성으로 규정할 수 있다. 시간은 무질서에서 질서가 생성되는 변화 과정의 속성이거나, 무질서와 질서 사이를 순환하는 과정의 속성이다. 또 다른 경우는 시간 자체를 원리들 중 하나로 가정하는 것이다. 이 경우, 시간은 인간 없이도 존재하는 것인 동시에 변화 이 전에 전제된 것이다. 이러한 시간을 철학자들은 실체적 시간이라 부른다.

 

객관적 시간 개념을을 변화의 속성으로서의 시간 개념과 실체적 시간 개념으로 분류할 때. 두 종류의 시간 개념에 공통된 것은 인간 없이도 존재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변화의 속성으로서 시간을 파악하는 경우, 시간은 변화 이 전에 전제된 것이 아니다. 실체적 시간 개념에서 시간은 인간 없이도 존재하는 것인 동시에 변화 이 전에 전제된 것이다. 이러한 실체적 시간 개념은 그리스 문학의 첫 산문으로 일컬어지는 페레키데스(Phercydes)의 <헵타미치아(Heptamychia)>에 드러나 있다.

 

페레키데스는 그리스 에게해 키클라데스 제도의 섬 시로스(Syros)에서 태어나 활동한 서기전 6세기 인물이다.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에 따르면, 페레키데스는 고대 그리스 7명의 현자 중 한 명으로 회자되었다고 한다, 그가 죽었을 때 그의 시신을 묻은 인물은 피타고라스라고 한다. 이 때문에, 페레키데스가 피타고라스의 스승이라는 설이 있다. 하지만 그 설의 진위여부를 확인할 길은 없다. 페레키데스는 고대 그리스 영혼 윤회설의 시조로 알려져 있다. 그 영혼 윤회설에 따르면, 사람은 죽어도 영혼은 파괴되지 않으며 다른 사람이나 동물을 통해 환생한다. 페레키데스의 영혼은 육체와 환경의 상호작용 속에서 구성되는 것이 아니며, 추리와 추상화 능력으로 대표되는 합리적 판단 능력의 작인(agent)과 같은 것이라고도 할 수 없다. 페레키데스의 영혼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삶과 죽음의 반복적이며 주기적인 변화 속의 생명의 원리라고 가정하는 것은 그럴듯하다. 파괴 불가능한 영원한 원리로 변화를 설명하려는 사고방식은 페레키데스의 세계 이해 방식 속에 함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페레키데스의 산문, 그에 대한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의 기록에 함축된 세계 이해 방식에 따르면, 만물의 생성과 변화의 설명에 필요한 세 가지 영원불멸의 원리가 있다. 그 세 가지 원리는 자스(Zas)’, ‘크소니(Chthoniē)’, ‘크로노스(Chronos)’라는 신으로 묘사되고 있다. 어원의 측면에서 접근할 때, ‘자스는 제우스를, ‘크소니는 땅을, 그리고 크로노스는 시간을 뜻한다. 세 가지 신과 그것들의 관계에 대한 정확한 해석은 현재 우리에게 불가능한 것이지만, 자스는 크소니와의 대비적이며 상호 보완적 관계를 통해 만물을 생성시키는 원리이다. 페레키데스는 그러한 생성에 필요한 물질들을 물, , 공기로 가정했으며, 크로노스는 물, , 공기의 씨앗이다. , , 공기와 크소니 사이의 직접적 관계는 페레키데스의 산문에 나타나 있지 않으므로, 크소니를 흙이라는 물질에 국한시켜 해석하기는 힘들다. 그렇다면, 크소니를 장소나 공간으로 해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장소는 생성되는 것의 위치로 파악되기 때문에, 장소는 생성과 분리 불가능하다. 따라서 장소 자체를 생성의 한 원리로 가정할 수 없다. 이 점을 고려한다면, 크소니는 흙을 포함한 공간의 원리로서 물, , 공기의 생성 이 전에 전제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러한 해석에 따라 자스, 크소니, 크로노스를 각각 법칙, 공간, 시간으로 규정할 때, 페레키데스의 시간 개념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P1. 시간은 인간 없이도 존재하며 변화 이 전에 영원한 것으로 전제된 것이다. 이 점에서 시간은 실체적이다.

 

P2. 시간과 공간은 서로 독립적 관계를 맺지 않는다. 그 둘은 상호 의존적이며 작용에서 분리 불가능하다. 이 점에서 시간은 절대적이 아니라 상대적이다.

 

P3. 시간은 공간이 존재하는 한 영원하며, 공간 역시 시간이 존재하는 한 영원하다.

 

P.4 페레키데의 산문에서 시간의 방향성에 대한 암시는 찾을 수 없다.

 

P.5 법칙, 공간, 시간은 서로 분리 불가능한 관계 속에서 영원한 것들로 가정되었기 때문에, 질서는 헤시오도스(Hesiodos)의 우주 생성론에서 엿볼 수 있는 최초의 혼돈(chaos)에서 생성된 것이 아니다. 페레키데스의 세계 이해 방식에서 질서와 반대 관계를 맺는 혼돈 혹은 무질서는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것이다. 또한 더 이상의 생성과 변화를 허용하지 않는 완벽한 질서라는 것도 없다. 질서는 항상 다른 질서와의 비교 가능한 정도의 차이를 갖는다.

 

  이하 설명은 생략!

 

* 시간 철학에 관심을 가진 사람에게 페레키데스의 시간 개념과 뉴턴의 절대적 시간 개념을 비교해 보는 것은 흥미로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