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속화와 민주주의 (봉인 해제)/창조 과학의 맹점

이념 전쟁 2.1. 자연 선택 가설을 둘러싼 독단 1. 이념화된 생물학

착한왕 이상하 2010. 2. 24. 23:46

(2) 자연 선택 가설을 둘러싼 독단 1. 이념화된 생물학

자연 선택 가설로 무장한 세력과 지적 설계자 가설로 무장한 세력의 논쟁에는 ‘지적 설계자 가설에 관한 독단’이 깔려 있음을 보았다. ‘자연 선택 가설에 관한 독단’은 ‘자연 선택 가설의 설명 한계’에 대한 인정 유무에 있지 않다. 그것은 자연 선택 가설로 진화를 얼마나 설명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에 답하는 방식이 ‘독단적’이라는 데 있다. 여기서 ‘독단적’이라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기 위해, ‘자연 선택 가설에 관한 독단’을 먼저 규정하자.

 

• 자연 선택 가설은 진화를 설명하는 데 충분한가? 자연 선택 가설로 무장한 세력과 지적 설계자 가설로 무장한 세력이 이 물음에 답하는 방식은 독단적이다.

 

‘독단적’이라는 것은 일반적으로 ‘비판적 사고의 결여’를 뜻한다. ‘비판적 사고의 결여’는 ‘비판 능력의 결여’를 뜻하지 않는다. ‘비판적 사고의 결여’는 나의 생각도 틀릴 수 있거나 한계를 갖고 있음을 인정하는 ‘열린 태도의 결여’를 뜻한다. 물론 비판적 사고의 소유자가 합당한 증거를 결여한 주장이나 입장에 대해서도 열린 태도를 견지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지연 선택 가설로 무장한 세력이 지적 설계자 가설에 대해 열린 태도를 취할 필요는 없다. 지적 설계자 가설로 무장한 세력은 ‘지적 설계자 가설’도 ‘자연 선택 가설’과 동등한 지위의 가설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적 설계자 가설에 대한 과학적 증거는 없다. 인공물을 방불케 하는 미생물의 기관이 우연적인 것은 아니라고 가정해도, 지적 설계자 가설은 ‘과학적 가설’이 될 수 없음을 보게 될 것이다.

 

자연 선택 가설로 무장한 세력이 독단적인 이유는 단순히 ‘자연 선택 가설의 설명 한계’를 부정하는 데 있지 않다. 그 이유는 ‘자연 선택 가설이 생물학의 통합 원리’라는 주장이 ‘생물학의 분과 다양성’을 부정한다는 데 있다. 이를 먼저 알아보고, 지적 설계자 가설로 무장한 세력이 독단적인 이유를 살펴보자.

 

어떤 현상을 설명해주는 가설이 항상 ‘과학적 가설’은 아니다. 특정 측정량과의 연결성을 갖는 가설만이 과학적 가설로 여겨진다. 이때 그러한 연결성을 갖는 가설은 다음을 만족해야 한다.

 

• 첫째, 해당 측정량은 특정 조건 아래 재확인 및 재생산 가능해야 한다. 재확인 가능한 측정량이 주로 관찰과 관련되어 있다면, 재생산 가능한 측정량은 조작 실험과 관련되어 있다.

 

• 둘째, 가설은 해당 측정량에 함축된 사실, 실례로 질량값과 같은 사실을 규명해줄 수 있어야 한다.

 

• 셋째, 인과 설명에 동원되는 그러한 사실의 인정 유무는 자연적 제한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에, 가설은 그러한 인정 유무에 따라 검증 혹은 반증 가능한 대상이 된다.

 

위 세 조건을 만족하는 가설만이 특정 관찰 및 측정량과의 연결성을 확보한 ‘과학적 가설’로 여겨진다. 과학적 가설들은 그 사용법에 따라, 또한 특정 사실로의 대체 가능성에 따라 여러 종류로 분류된다. 실례로 고전역학의 중력법칙은 자연 선택 가설보다 강한 예측력을 가진 가설이다. 혈액 순환 가설은 도구의 발달과 함께 하나의 해부학적 사실이 되었다. 가설의 분류 방식을 논하는 것은 과학의 다양한 분과들에 대한 성격을 규명하는 작업이다. 철학자들의 주목을 받지 못한 그 작업을 여기서 진행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자연 선택 가설이 특정 관찰 및 측정량과의 연결성을 갖는다는 점은 쉽게 보일 수 있다.

 

갈라파고스 군도의 특정 섬인 A 지역에 서식하고 있는 핀치들을 관찰한다고 해보자. 모든 핀치들의 표현형은 다르다. 실례로 부리의 길이가 동일한 두 핀치는 없다. 하지만 부리의 길이를 조사해보면, A 지역 핀치들과 다른 지역 핀치들 사이에는 의미있는 차이가 나타날 수도 있다. A 지역 핀치들의 부리 길이는 상대적으로 길다. 이러한 관찰은 환경이 갑자기 변화하지 않는다면 재확인 가능하며, 특정 측정량으로 표현된다. 자연 선택 가설을 사용하면, 부리 길이의 상대적 차이와 연관된 관찰에 함축된 사실을 추론해낼 수 있다. A 지역의 과거 환경에 적합한 표현형을 가진 핀치들이 살아남게 되었다면, 긴 부리라는 표현형은 과거 환경에 적응된 것이다. 따라서 환경이 급작스럽게 변화하지 않는 한, 상대적으로 긴 부리를 가진 핀치들의 생식적 적합성은 높아야 한다. 즉, A 지역에 격리된 핀치들의 경우, 긴 부리를 가진 핀치들의 개체수 증가율은 짧은 부리를 가진 핀치들보다 높아야 한다.

 

개체군에서 나타나는 표현형의 차이와 생식적 적합성 사이의 상관관계는 관찰 수준에서 재확인 가능하다. 그러한 상관관계는 유전자 빈도 차이로 측정 가능하게 되었다. 자연 선택 가설이 과학적 가설이라는 점에 대해서 의심하는 것은 ‘합당한 근거를 결여한 의심’에 가깝다.

 

자연 선택 가설은 진화를 설명하는 데 얼마나 충분한가? 자연 선택 가설로만 모든 생물 현상을 설명할 수 있다는 주장은 터무니없다. 당장 진화에 필요한 변이의 원천과 대물림 과정은 자연 선택만으로 설명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연 선택 가설로 진화를 충분히 설명할 수 있다는 입장은 자연 선택 가설로 모든 생물 현상을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다. 그 입장은 다음과 같은 주장으로 구성된다.

 

• 첫째, 자연 선택 가설은 검증된 과학적 가설이다.

 

• 둘째, 자연 선택 가설로 모든 생물 현상을 설명할 수는 없지만, 자연 선택 가설로 진화 과정의 대부분을 설명할 수 있다. 왜냐하면 자연 선택 자체가 생물계 진화의 주원인이기 때문이다.

 

첫 번째 주장에는 아무런 하자가 없다. 그런데 두 번째 주장을 보면, 용어 ‘자연 선택’은 ‘가설’ 이외에도 ‘진화의 원인’을 뜻한다. 중력법칙의 수식에 함축된 원인은 중력이다. 그런데 자연 선택 가설에 함축된 원인은 중력과 같은 어떤 ‘인과적 힘(causal power)’이 될 수 없다. ‘자연 선택이 진화의 원인’이라는 주장은 ‘종 변형을 초래할 수 있는 어떤 여건이 마련되었다’라는 주장과 다르지 않다. ‘그러한 여건이 마련되었다’는 주장은 ‘자연 선택이 발생했다고 볼 수 있는 증거가 있다’라는 주장과 다르지 않다. 그러한 증거는 유전자 빈도 차이로 측정되는 ‘표현형의 차이와 생식적 적합성 사이의 상관관계’이다. 따라서 ‘자연 선택이 진화의 원인’이라는 주장은 ‘그러한 상관관계가 있을 때 자연 선택이 발생한다’라는 주장과 다르지 않다. 이때 ‘자연 선택이 진화의 원인’이라는 주장은 다음과 같이 해석된다.

 

• 자연 선택을 발생시키는 요인들은 표현형의 차이와 생식적 적합성 사이의 상관관계와 관련된 요인들이다.

 

‘자연 선택이 진화의 원인’이라는 주장에 대한 위 해석 자체는 큰 문제를 발생시키지 않는다. 그 주장은 단지 진화를 설명하는 데 자연 선택 가설이 필요하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연 선택이 진화의 주원인’이라는 주장은 심각한 문제를 발생시킨다.

 

자연 선택이 진화의 주원인이라면, 개체군에 분포된 표현형의 차이와 생식적 적합성 사이의 상관관계와 관련된 요인들 이외의 것은 진화의 설명에서 불필요하거나 사소한 것이어야 한다. 이때 분자 차원의 무작위적인 돌연변이는 진화의 설명에서 사소한 것으로 여겨지게 되는 까닭에, 분자 차원의 진화라는 것은 생물학에서 큰 의미를 가질 수 없게 된다. 유전은 생존에 적합한 형태와 관련된 변이에만, 즉 자연 선택된 변이에만 국한되는 까닭에, 유전학은 진화 생물학의 하부 분과가 되어버린다. 또한 발생을 인과적으로 제한하는 환경의 역할도 사소한 것으로 여겨지게 된다. 이미 살펴보았듯이, 생존에 적합한 형태 선택이 환경에 의해 제한된 방식은 인과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즉, 환경 변화를 고려하지 않고서는 진화를 설명할 수 없지만, 환경 요인 자체가 진화 과정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연 선택이 진화의 주원인’이라는 주장에 근거한 입장은 다음의 입장과 대등하다.

 

• 자연 선택 가설로 진화의 대부분을 설명할 수 있다면, 자연 선택 가설은 생물학의 통합 원리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때 생물학의 다양한 분과들은 단지 진화 생물학의 하부 분과들처럼 여겨져야 된다. 생물학 분과들 사이에 위계질서가 성립하게 되며, 발생, 발달, 성장 및 다양성이라는 생물학의 은유들은 진화의 관점 속에 갇혀 버린다. 자연 선택 가설로 무장한 세력의 입장에 따른다면, 자연 선택 중심의 진화 생물학은 주인에 비유되며, 다른 분과들은 단지 주인에게 봉사하는 노예에 비유된다. 결국 연구 목적에 따라 분과들이 다양한 거래 관계를 맺게 된다는 ‘생물학의 학제 간 연구의 성격’도 사장된다.

 

자연 선택 가설은 분명히 진화를 설명하는 데 필요한 과학적 가설이다. 그러나 자연 선택 가설로 진화의 대부분을 설명할 수 없다면, 자연 선택 가설이 생물학의 통합 원리라는 주장은 성립할 수 없다. 이 때문에, 이 시대 진정한 생물 철학자 중 한 명인 가이용(J. Gayon)은 ‘과학적 가설로서의 자연 선택’과 ‘이념으로서의 자연 선택’을 구분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자연 선택 가설이 생물학의 통합 원리라는 주장에 대한 과학적 증거가 확보되지 않는 한, 그 주장은 독단적 이념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자연 선택 가설을 생물학의 통합 원리로 과대 포장하는 것은 생물학의 다양한 분과 사이의 소통을 가로 막는 것이다. 또한  그것은 지적 설계자 가설도 생물학의 통합 원리로 여겨져야 한다는 입장에 대한 비판 논거로 사용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