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속화와 민주주의 (봉인 해제)/창조 과학의 맹점

이념 전쟁 1. 지적 설계자 가설에 관한 독단

착한왕 이상하 2010. 2. 15. 11:20

이념 전쟁

 

성서의 기록을 기준으로 과학적 발견을 평가하는 창조 과학 진영은 기독교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 성서를 은유 체계로 보고 자연에서 신의 섭리를 찾아보겠다는 전통을 무시하기 때문이다. 창조 과학 진영은 그러한 전통에 서있는 자연 신학을 마치 자신들의 지적 뿌리인 것처럼 주장한다. 또 창조 과학 진영은 기독교의 참다운 사회적 기능을 위해 학생들에게 진화론의 허구를 알릴 필요가 있다고 여긴다. 이러한 세태 속에서 ‘자연 선택 가설로 무장한 세력’과 ‘지적 설계자 가설로 무장한 세력’ 사이에 벌어진 이념 논쟁이 이 땅에 수입되었다. ‘과학 대 종교의 충돌’ 혹은 ‘합리적인 것 대 비합리적인 것의 대립’으로 그 논쟁을 과장하는 분위가 이 땅에 형성되었다.

 

자연 선택 가설로 무장한 세력은 ‘자연 선택’을 생물학의 통합 원리인 것처럼 과대 포장한다. 그 세력 중 일부는 아예 사회에서 종교의 긍정적 기능 가능성마저도 부정한다. 이러한 점에서 그들은 지적 설계론 옹호자들에 대항한 합리적 비판 세력이 아니다. 그들은 반대편의 입장을 일종의 질병으로 진단하는 이념 세력이다. 반면에 지적 설계자 가설로 무장한 세력은 자연 선택만으로는 진화를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고 본다. 그런데 그 세력은 자연 선택 가설의 설명 한계를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지적 설계자 존재 가정’을 정당화하기 위해 그 한계를 사용한다. 심지어 한술 더 떠 지적 설계자 존재 가정이 과학적 연구 프로그램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창조 과학 진영은 기독교 역사에 무지할뿐더러, 기독교의 건전한 사회적 기능을 가로막는 장본인들이다. 이러한 ‘창조 과학의 맹점’을 알기 위해 무종교인이 자연 선택 가설로 무장한 세력과 지적 설계자 가설로 무장한 세력의 이념 논쟁에 휩싸일 필요가 없다. 자연 선택 가설로 무장한 이념 세력과 지적 설계자 가설로 무장한 세력의 논쟁에는 두 가지 독단이 깔려 있음을 보게 될 것이다, 그 하나는 지적 설계자 개념에 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가연 선택 가설에 관한 것이다. 이 두 독단을 이해하는 것은 기독교 교리의 진위 여부와 상관없이 창조 과학의 맹점을 지적할 수 있는 길을 무종교인에게 열어준다.

 

 

(1) 지적 설계자 가설에 관한 독단

라마르크 이후 다윈을 거치면서 존재 사슬 도식은 생명나무가지 도식에 밀려나게 된다. 19세기 중엽 이후, 존재 사슬 도식은 더 이상 발견을 위한 도구로 기능할 수 없게 된다. 그렇다고 존재 사슬 도식이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존재 사슬 도식은 자연의 위계질서보다는 사회의 위계질서를 정당화하는 데 사용되었다. 존재 사슬을 수직선에 비유할 때 군주를 천사 다음에 위치시키고, 성직자를 군주 다음에 위치시키고, 귀족을 성직자 다음에 위치시키는 해석 방식이 유행했다. 그러한 해석 방식에 따르면, 존재 사슬의 상부를 차지하는 계층은 하부를 목적 달성의 수단으로 삼을 수 있다. 상부가 하부를 수단으로 삼을 수 있는 권리는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것으로 해석되었다. 사회의 위계질서를 강조한 방식의 존재 사슬 도식은 지성인들과 세속화 물결과 함께 중산층 계층의 조롱거리가 되었다. 여러 과학 대중서는 이렇게 조롱거리가 된 존재 사슬 도식에 대한 해석 방식을 표준적인 해석 방식인 것처럼 강조한다. 그리고 그러한 과학 대중서는 진화가 자연 선택 가설로 충분히 설명 가능한 것처럼 묘사한다.

 

그러나 존재 사슬 도식을 대체한 생명나무가지 도식이 진화 과정을 대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암수 구분, 즉 성구분이 진화 과정에서 필요했던 이유는 자연 선택 가설로 설명되지 않는다. 생명나무가지 도식은 성구분이 없는 바이러스나 박테리아 등 미생물의 종 분화 과정에는 적용되기 힘든 도식이다. 즉, 점진적으로 축적된 변이들 중 환경에 적합한 형태와 관련된 것들만 선택되었다는 주장을 미생물들의 세계까지 확대시킬 수 없다. 환경의 완만한 변화만 고려하는 경우에도, 미생물들 사이에는 유전자 교환이 빈번하게 발생하기 때문이다. 생명나무가지 도식이 미생물의 진화 과정을 상징할 수 없다는 사실에 먼저 주목한 생물학자들은 분자 생물학자들이다. 분자 차원의 유전자 교환 현상은 관찰에 의존해 발견될 수 없기 때문이다.

 

자연 선택만으로 진화를 충분히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진화 생물학자가 있다면, 그의 주장은 분자 생물학자들의 동의를 얻을 수 없다. 이때 ‘분자 생물학 진영과 진화 생물학 진영의 의견 차이’를 ‘자연 선택 가설로 무장한 세력과 지적 설계자 가설로 무장한 세력의 갈등’으로 규정할 수 없다. 그러한 의견 차이는 단지 자연 선택 가설의 설명 영역을 둘러싸고 벌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두 입장 A와 B가 양립 불가능할 때 두 입장의 옹호 세력을 중재하기는 힘들어진다. 이를 만족하는 가장 단순한 경우는 무엇일까?

 

• A와 B 모두 어떤 관점 C를 전제한다. A를 옹호하는 세력은 C를 인정하지만, B를 옹호하는 세력은 C를 부정한다.

 

A를 ‘자연 선택 개념으로 무장한 세력’, 그리고 B를 ‘지적 설계자 개념으로 무장한 세력’이라고 할 때 C는 바로 다음이다.

 

• 기독교 교리에 부합하는 유일한 신 개념은 ‘지적 설계자’ 개념이다.

 

물론 현대적 지적 설계론 옹호자들은 자신들의 ‘지적 설계자’가 기독교 교리와는 무관하다고 주장한다. 그들 중 일부는 분자 생물학자들이다. 바이러스나 박테리아의 형태를 살펴보면, 기능의 측면에서 정교한 구조가 다양한 종에 걸쳐 나타난다. 생명나무가지 도식의 은유 속에 설명하기 힘든 그러한 구조는 특정 기능을 수행하도록 설계된 인공물을 방불케 한다. 지적 설계론 옹호론자들은 지적 설계자 가설을 발견을 위한 지침서 개념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과학적 가설’로 과대 포장한다. 그들이 제아무리 기독교와 거리를 두려고 할지라도, 지적 설계자 개념은 기독교의 다양한 신 개념 중 하나이다. 따라서 기독교 교리에 부합하는 유일한 신 개념이 지적 설계자 개념이라는 관점은 현대적 지적 설계론 옹호자들에게도 그대로 통용된다.

 

자연 선택 가설로 무장한 세력 역시 기독교 교리에 부합하는 유일한 신 개념은 지적 설계자 개념이라고 단순화시킨다. 다만 그 세력은 지적 설계자 존재 가능성을 부정한다. 그 세력은 ‘다윈 진화론의 과학화’에 기여했던 유신론자들의 신 개념을 기독교적이지 않다고 주장한다. 진화론의 과학화에 기여했던 인물들로 다윈과 함께 자연 선택 가설을 발견했지만 자연 선택 가설만으로는 진화를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고 여긴 월리스, 통계학에 근거해 자연 선택 가설과 유전학의 양립 가능성을 보인 피셔, 그리고 ‘순종 강세 대 잡종 강세 논쟁’을 불식시킨 여러 균형론자들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생물학자들도 자연 선택을 중심으로 한 진화론이 지적 설계론과 어울릴 수 없다고 여긴다. 하지만 이로부터 진화론과 기독교의 양립 불가능성을 주장하는 것은 일종의 논리적 비약이라고 여긴다.

 

앞서 살펴봤듯이, 전통적 지적 설계론에는 자연에는 역사가 없다는 관점이 깔려 있다. 현대적 지적 설계론자들은 그러한 관점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 대신 그들은 자연 선택 가설이 갖는 설명 영역의 한계를 지적한다. 하지만 전통적 지적 설계론과 현대적 지적 설계론 사이에는 과학적 설명 영역에서 우연적인 것을 최소화하려 하려는 의도가 공통적으로 깔려 있다. 따라서 지적 설계자 가설로 무장한 세력은 진화의 설명에서 우연적인 것의 역할을 최소화하려는 진영, 그리고 자연 선택 가설로 무장한 세력은 이에 반대하는 진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지적 설계자 존재를 둘러싼 논쟁을 필연적인 것과 우연적인 것의 관계에 대핸 진지한 철학적 논쟁으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 자연 선택 가설로 무장한 세력과 지적 설계자 가설로 무장한 세력 모두 지적 설계자 개념만이 기독교 교리에 부합하는 유일한 신 개념이라는 관점을 갖고 있다. 그 관점은 역사적 근거를 결여한 독단에 가깝다. 두 세력 모두 ‘과학의 종교화’라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자연 선택 가설로 무장한 세력의 일부는 기독교 말살론이라는 극단적 입장을 취한다. 그러한 입장은 종교의 사회적 기능마저도 과학으로 대체 가능할 때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다. 지적 설계자 가설로 무장한 세력 일부는 지적 설계자 존재를 증명하는 것도 과학적 연구 계획의 일종이라고 주장한다. 두 세력 모두 ‘재확인 및 재생산 가능한 측정량과 가설의 연결성’을 추구하는 과학적 생활양식을 존중하지 않는 집단이다. 자연 선택 가설에 관한 독단을 살펴보는 가운데, 이에 대한 원인을 규명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