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속화와 민주주의 (봉인 해제)/창조 과학의 맹점

이념 전쟁 2.2. 자연 선택 가설을 둘러싼 독단 2. 자연 선택 가설의 한계

착한왕 이상하 2010. 2. 27. 05:19

(2) 자연 선택 가설을 둘러싼 독단 2. 자연 선택 가설의 한계

개체군에 분포된 표현형의 차이와 생식적 적합성 사이의 상관관계는 유전자의 빈도 차이로 측정 가능하다. 이때 해당 측정량은 표현형의 차이 및 개체수 증가라는 관찰에 대응된 것이다. 그러한 측정량은 특정 조건 아래 반복적으로 재생산 가능하지는 않다. 따라서 자연 선택 가설은 강한 예측성을 가진 분석적 도구로 사용되기 힘들다. 이에 대한 이유로 진화의 선택압으로 여겨지는 환경 요인들을 조작하기 힘들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관찰 가능한 표현형의 차원이 아니라 분자 및 거시 차원의 진화 과정도 자연 선택만으로 충분히 설명 가능한지를 결정하는 것은 쉽지 않다.

 

진화를 분자 차원에서 접근할 때 박테리아 및 바이러스를 포함한 미생물의 세계를 우선적으로 고려해볼 수 있다. 그나마 환경 요인을 인위적으로 제어할 수 있는 영역은 미생물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미생물의 세계에는 암수 구분의 생식적 장벽이 없는 까닭에, 그러한 장벽에 근거한 종 분류 방식은 잘 적용되지 않는다. 이는 다윈 진화론을 상징하는 생명나무가지 도식이 미생물의 세계에 잘 적용되지 않음을 함축한다. 암수 구분의 생식 장벽이 진화 과정에서 출현한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자연 선택 가설만으로는 암수 구분이 필요했던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 암수 구분과 생식적 적합성 사이의 상관관계를 찾기란 힘들기 때문이다. 또한 미생물들의 생존 방식은 개체 중심이 아니라 집단 중심인 경우가 많다. 이 때문에, 개체보다는 집단에 득이 되는 방식으로 미생물의 진화가 진행된 측면을 무시하기 힘들다. 반면에 자연 선택 가설에 따르면, 진화는 어디까지나 개체에 득이 되는 방향으로 진행된다.

 

진화를 분자 차원에서 접근할 때 유전자들의 상호작용과 발현 과정도 무시할 수 없다. 분자 차원에서 발생하는 무작위적인 돌연변이들은 자연 선택 가설에 중립적이다. 다시 말해, 분자 차원에서 발생하는 돌연변이들 중 대부분은 자연 선택과 무관하다. 그러한 돌연변이들은 대부분 사라지지만 진화에 필요한 변이의 원천으로 여겨져야 한다. 또한 그러한 돌연변이의 확률적 고정 과정은 소규모 단위의 진화를 설명하는 데 필요하다.

 

진화가 복잡성의 증가 과정을 따르는지는 현재 과학의 수준에 비추어 알 수 없는 문제이다. 하지만 유전체가 복잡계라는 점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유전자들의 다양한 연결성을 인정한다면, 유전자 발현 과정은 단순한 암호 해독 과정으로만 여겨질 수 없다. 그러한 연결성에 근거한 속성들은 복잡계의 ‘자기 조직화 과정’에 의한 내적 복잡성에 기인한 것으로도 여겨질 수도 있다. 복잡계의 자기 조직화 과정은 자연 선택과 무관하다. 만약 자기 조직화 과정에 기인한 속성들이 유기체의 형태 유지에 필수적이라면, 생존에 적합한 표현형이 자연 선택만의 결과라고 단언할 수 없게 된다.

 

거시 차원에서 진화를 접근할 때, 대규모의 종 멸종, 그리고 그 이후 종 다양성의 폭발 현상은 설명을 요구한다. 그러한 현상에 대한 고고학적 증거는 간과할 수 없을 정도로 축적되었기 때문이다. 자연 선택 가설 중심의 다윈 진화론에 따르면, 생존에 적합한 형태는 변이의 점진적 축적 과정의 결과이다. 이는 완만한 환경 변화를 전제한다. 따라서 급작스런 환경 변화에 의한 대규모의 종 멸종 현상은 자연 선택 가설만으로는 설명될 수 없다. 또한 다윈 진화론에 따르면, 종 다양성의 축적 과정은 점진적인 종 변형 과정의 결과이다. 따라서 급작스런 환경 변화로 인한 대멸종 이후의 종 다양성 폭발 현상도 자연 선택 가설만으로는 설명될 수 없다.

 

생물계의 진화는 일어났고, 또 진행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진화의 관점이 과학 및 의학뿐만 아니라 인문학 및 사회학에도 영향을 미쳤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자연 선택 가설로 진화의 모든 차원을 설명할 수 있을까? 이 물음에 대해 긍정해야만 하는 논리적 이유는 없다. 다윈이 이 물음에 대해 긍정적 입장을 취한 이유는 과학 이론에 대한 당시의 지배적 관점에 기인한 것이다. 그 관점에 따르면, 하나의 원인에 근거하여 다양한 현상을 통합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이론일수록 좋은 이론으로 평가된다. 이러한 평가 방식은 현대 생물학에 통용될 수 없다.

 

자연 선택 가설은 표현형 차원의 진화를 설명하는 데 필수적이며 효과적이다. 자연 선택 가설로 설명될 수 있는 영역의 한계가 규정될 수 있기 때문에, 자연 선택 가설은 오히려 ‘견고한 과학적 가설’의 지위를 확보할 수 있다. 진화의 다양한 차원은 자연 선택 가설과 다른 가설들 사이의 공조 관계를 바탕으로 설명된다. 또 분자 및 거시 차원의 진화를 설명하는 데 동원되는 가설들은 분자 생물학 및 고생물학 등의 분과에 고유한 가설들이다.

 

만약 자연 선택 가설이 생물학의 통합 원리라면, 진화 생물학은 주인에, 그리고 생물학의 다른 분과들은 주인에게 봉사하는 노예에 비유된다. 그러나 자연 선택 가설이 생물학의 통합 원리라는 주장은 과학적 증거를 결여한 것이다. 따라서 자연 선택 가설로 무장한 세력은 ‘생물학의 분과 다양성’을 무시하는 독단적 세력이다. 그럼에도, 그 세력은 과학에 기생하는 철학자들과 결탁하여 ‘생물학은 진화론’이라는 은유를 대중의 마음속에 심는 데 성공했다. 과학에 기생하는 철학자들은 과학적 발견의 실제 양상 및 역사에 무지하며, 자신들의 특정 관점을 널리 알리고 정당화하기 위해 과학을 수단으로 삼는다.

 

자연 선택 가설로 무장한 세력의 일부는 진화론이 종교의 사회적 기능마저도 대체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독단적 주장은 ‘진화론의 종교화’에 해당한다. 이에 대비된 ‘종교의 과학화’에 해당하는 것은 ‘지적 설계자 가설도 생물학의 통합 원리로 여겨져야 한다’는 터무니없는 주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