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속화와 민주주의 (봉인 해제)/창조 과학의 맹점

이념 전쟁 2.3. 자연 선택 가설을 둘러싼 독단 3. 종교의 과학화

착한왕 이상하 2010. 3. 4. 18:02

(2) 자연 선택 가설을 둘러싼 독단 3. 종교의 과학화

지적 설계자 가설로 무장한 세력은 자연 선택 가설의 설명 한계를 강조한다. 그들은 한 발 더 나아가 지적 설계자 가설도 생물학의 통합 원리로 간주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을 받아들이려면, 지적 설계자 가설도 과학적 가설로 여겨져야 한다. 그런데 지적 설계자 가설을 검증 및 반증 가능한 과학적 가설로 볼 수는 없다. 그들은 다음과 같은 입장을 들어 이러한 반박에 항변한다.

 

• 자연 선택 가설이 생물학의 유일한 통합 원리라는 주장은 증거를 결여한 것이다. 그러한 주장은 우연적인 것에만 근거하여 생물 현상을 설명할 수 있다는 이념적 독단에 불과하다. 필연적인 것 없이는 생물 현상에 대한 충분한 설명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필연적인 것을 보장해주는 지적 설계자 가설도 생물학의 통합 원리로 여겨져야 하며, 과학적 연구 프로그램에 흡수되어야 한다.

 

생물 현상을 설명하는 데 우연적인 것과 필연적인 것 양자가 필요하다는 주장은 아무런 문제를 발생시키지 않는다. 이미 살펴봤듯이, 재확인 및 재생산 가능한 측정량과 가설의 연결성을 추구하는 과학적 생활양식은 다양한 세계 이해에 열려 있기 때문이다. 위 입장에서 발생하는 문제는 과학적 발견에 개입하는 세계 이해를 마치 과학적인 것으로 과대포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과대포장을 철학적으로 정당화하는 방식은 다음과 같다.

 

• 진화론은 무신론을 함축하는 자연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다.

• 분자 차원의 진화 과정은 자연 선택 가설만으로는 설명될 수 없다.

• 자연주의라는 이념은 생물학의 토대가 될 수 없다.

• 인공물을 방불케 하는 미생물의 가관을 우연적인 결과로 볼 수 없다.             

• 진화를 충분히 설명하려면, 지적 설계자 가설도 자연 선택 가설과 대등한 지위를 갖는 것으로 여겨져야 한다.

 

위 논증의 첫 번째 전제에서 말하는 ‘자연주의’는 무엇인가? 그것은 ‘과학의 자연주의’가 아니다. 라마르크를 논할 때 과학의 자연주의는 신 존재 가정과 무관하게 성립함을 살펴봤다. 과학의 자연주의 입장은 ‘재확인 및 재생산 가능한 측정량과 가설의 연결성’을 추구하는 과정에 초자연적인 것을 개입시키지 않겠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과학적 생활양식에 사고가 제한된 과학자의 태도와도 같은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과학의 자연주의는 ‘방법론적 자연주의(methodological naturalism)’으로 규정되기도 한다. 즉, 과학의 자연주의는 신의 섭리가 자연에 깃들어 있는지, 혹은 아닌지를 따지는 ‘철학적 자연주의(philosophical naturalism)’와는 구분되어야 한다.

 

위 논증의 첫 번째 전제에 등장하는 ‘자연주의’는 신 존재를 부정해야지만 성립하는 ‘철학적 자연주의’에 해당한다. 이러한 철학적 자연주의가 과학을 하는 데 전제된 것이 아니라면, 위 논증은 성립하지 않는다. 만약 어떤 철학적 자연주의가 과학을 하는 데 전제도어야 하는 것이라면, 그것을 인정하는 사람만이 진정한 과학자로 여겨질 수 있다. 하지만 과학을 하는 데 필요한 자연주의는 ‘철학적 자연주의’가 아니라, ‘과학의 자연주의’ 혹은 ‘방법론적 자연주의’이다. 재확인 및 재생산 가능한 측정량과 가설의 연결성을 추구하는 과학적 생활양식이 다양한 세계 이해에 열려 있다는 주장과 양립 가능한 것은 철학적 자연주의가 아니라 과학적 자연주의이다.

 

자연 선택 가설로 무장한 세력이 무신론을 전제하는 철학적 자연주의를 내세웠다면, 이에 대한 합당한 반박은 무엇인가? 자연 선택 가설의 설명 한계를 가지고 그러한 철학적 자연주의에 대비된 형이상학적 논제, 즉 경험적으로 검증 및 반증 불가능한 논제를 내세우는 것은 합당한 반박이 될 수 없다.

 

지적 설계자 가설을 옹호하는 근거는 자연 선택 가설로 쉽게 설명될 수 없는 미생물의 형태를 우연적 결과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미생물의 형태를 우연적인 결과로 볼 수 없다는 것을 매개로 하여 지적 설계자 존재를 가정할 수는 있다. 또한 지적 설계자의 존재를 믿는 과학자가 측정량과 가설의 연결성을 추구하는 과학적 생활양식에 사고가 제한된 사람일 수도 있다. 설령 그가 과학을 신학의 하부 분과로 위치시킬지라도, 즉 과학적 발견을 자연에 깃든 신의 섭리를 찾는 수단으로 여길지라도, 그는 지적 설계자 가설 자체가 과학적 가설이라고 주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과학의 탄생에 기여했던 근대의 인물들은 이러한 태도를 갖고 있었다. 반면에 지적 설계자 가설로 무장한 세력은 지적 설계자 가설도 과학적 가설로 간주되어야 한다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지적 설계자 가설이 정말 과학적 가설이라면, 그것은 적어도 미생물의 형태와 관련된 측정량 속에 함축된 객관적 사실과 연결 가능해야 한다. 그러나 지적 설계자 가설로 무장한 세력은 단지 그러한 형태를 우연적인 결과로 볼 수 없다는 주장만 되풀이 한다. 그 주장을 수학적 껍데기로 세련되게 포장해도, ‘우연적인 결과로 볼 수 없다는 것’은 측정량 속에 함축된 객관적 사실이 될 수 없다. 인과 설명에 동원되는 그러한 사실은 검증 및 반증 가능한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 어떤 과학적 가설도 성명 영역에서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으며, 자연 선택 가설도 이에 대한 예외로 여겨질 수 없다. 완벽한 세계 이해를 얻기 위해 특정 매개 개념을 바탕으로 검증 및 반증 불가능한 초자연적인 어떤 존재를 가정하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과학적 생활양식은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에 열려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학적 설명 한계를 보충하기 위해 가정된 초자연적 존재 자체가 과학의 직접적인 증명 대상이라고 주장한다면, 이것은 재확인 및 재생산 가능한 측정량과 가설 사이의 연결성을 추구하는 과학적 생활양식을 파괴시킨다. 지적 설계자 가설로 무장한 세력이 자연 선택 가설의 설명 한계에 대해 답하는 방식은 독단적이며, ‘종교의 과학화’로 규정될 수 있다.

 

• 자연 선택 가설로 무장한 세력은 과학을 하는 데 무신론을 함축한 자연주의가 전제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과학적 자연주의를 철학적 자연주의와 구분할 때 이러한 주장은 성립할 수 없다. 또한 자연 선택 가설로 진화를 충분히 설명할 수 있다는 주장은 과학적 증거를 결여한 것이다. 그런데 지적 설계자 가설로 무장한 세력은 그러한 한계를 이용하여 철학적 자연주의의 대안에 불과한 지적 설계자 가설도 과학적 가설로 간주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종교의 과학화’로 규정될 수 있다.

 

지적 설계자 가설로 무장한 세력과 창조 과학 진영 양자에 공통된 것은 종교를 과학화하려는 시도이다. 그러나 지적 설계자 가설로 무장한 세력은 자연 선택 가설의 유용성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반면에 창조 과학 진영은 성서의 기록에 반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자연 선택 가설을 비판 대상으로 삼는다. 창조 과학 진영은 성서를 은유 체계로 보고 자연에서 신의 섭리를 찾아보려고 했던 기독교의 전통에 대해 무지하다. 그럼에도 그 진영은 자연 신학 전통이 마치 그들의 지적 뿌리인 것처럼 주장한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주장이 얼마나 허무맹랑한 것인지를 살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