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갈등 원인의 진단: 경험 해석의 측면
약한 의미와 강한 의미의 비판적 사고 두 진영을 둘러싼 갈등 원인을 구체적 훈련 과정의 설계에 초점을 맞춰 진단할 때 적어도 다음의 네 가지 측면에서 접근 가능하다.
• 경험 해석의 측면
• 형식 절차 해석의 측면
• 일상적 영역과 전문적 영역의 관계 해석의 측면
• 개인 및 집단 평가 해석의 측면
어떠한 해석의 측면에서 접근하는가에 따라 비판적 사고의 두 진영 중 어느 쪽이 갈등의 책임을 져야 하는지가 달라진다. 경험 해석의 측면에서 접근할 때 약한 의미의 비판적 사고 진영보다는 강한 의미의 비판적 사고 진영이 갈등의 불씨가 된다. 반면에 형식 절차 해석의 측면에서 접근할 때에는 약한 의미의 비판적 사고 진영이 우선적으로 갈등의 책임을 져야 한다. 일상적 영역과 전문적 영역의 관계 해석 및 개인 및 집단 평가 해석의 측면에서 접근하는 경우, 두 진영 모두가 비슷한 정도로 갈등의 책임을 져야 한다. 먼저 경험 해석의 측면에서 비판적 사고 두 진영의 갈등 원인을 진단해 본다.
경험은 지식 체계 건설의 가장 기본적인 인지 활동이지만 그것만큼이나 그 규정이 어려운 것도 없다. ‘지각 경험’, ‘의식적 경험’, ‘무의식적 경험’, ‘일상 경험’, ‘개인 경험’, ‘집단 경험’ 등의 표현만 봐도, 경험은 인간의 가능한 모든 활동과 관련되어 언급될 수 있는 듯하다. 하지만 여러 사고 활동과 관련하여 경험은 크게 ‘비언어적 경험’과 ‘언어적 경험’으로 분류된다. 이때 추론 및 판단은 주로 언어적 경험의 영역에 속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반면, 지각 경험은 비언어적 경험의 영역에 속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이로부터 비언어적인 추리 및 판단은 불가능하다거나, 지각 경험은 언어적 사고 활동과 별개의 것 혹은 무관한 것이라고 섣불리 판단해서는 안 된다.
지각 경험은 반드시 언어를 필요로 하지 않는 경험을 대표한다. 경험의 원초적 기반으로 여겨지는 지각 경험의 성격 중 눈에 띄는 성격은 ‘추론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지금 모니터를 보는 것과 자판을 두드리는 것, 혹은 이 장면을 보고 다른 장면을 보는 것 사이에 다른 사고 활동이 개입되지 않는 한, 명백한 추론 관계를 발견하기는 힘들다. 이러한 이유로 많은 철학자들은 한때 추론 활동을 전적으로 언어적인 것으로만 여겼다. 그러나 언어 능력을 전제하지 않는 추론 활동도 있다. 추론에 필요한 상징 기호 조작이 반드시 언어적인 것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비언어적 경험은 추론적이지 않은 영역과 시각 추론 등 추론적인 영역으로 다시 나뉜다. 여기서 약한 의미와 강한 의미의 비판적 사고 진영이 보이는 뚜렷한 차이 중 하나는 다음과 같다.
• 약한 의미의 비판적 사고 훈련 과정에는 비언어적 경험과 관련된 것은 전무하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반면에 강한 의미의 비판적 사고 훈련 과정에는 비언어적 경험에서의 오류나 오판 가능성을 바탕으로 한 교과 과정이 미약하나마 갖춰져 있다.
이러한 차이는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일까?
• 약한 의미의 비판적 사고 훈련 과정이 학제 간 연구에 기반을 두고 설계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소수의 철학자들에 의해 설계된 만큼, 인지 과학자나 인지 심리학자, 심지어 정통 논리학자의 동의를 얻기 힘든 부분들이 많다. 표현의 유의미성을 따지고 베이비 로직의 논증 형식 및 추론 절차가 강조되는 약한 의미의 비판적 사고 훈련 과정을 감안할 때 그 옹호자들은 경험적 내용을 그저 추론과 판단의 입력 정도로 여긴다.
• 강한 의미의 비판적 사고 옹호자들은 지각 경험이나 시각 추론 등 경험의 비언어적 영역을 언어적 추론 및 판단의 단순한 입력으로 취급할 수 없다고 여긴다. 이들은 그러한 영역도 다른 사고 활동과 하나의 체계(system)를 이루어 기능하는 것으로 여기며, 지각 경험조차 외부의 자극에 의한 반응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환경 단서를 찾아나가는 일종의 정보 처리 과정으로 파악하기 때문이다.
현대적 지각 이론이나 인지 과학 및 심리학을 맛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강한 의미의 비판적 사고 옹호자들에게 호감을 가질 것이다. 그러나 강한 의미의 비판적 사고 옹호자들이 훈련 과정에 비언어적 경험과 관련된 실험 사례 등을 포함시키는 동기는 무엇일까? 그들의 예상되는 답변은 다음과 같다.
• 인간은 누구나 오류와 오판을 범하게 되어 있다. 원초적인 지각 경험에서조차 오류와 오판을 피할 수 없는 인간이지만, 인간은 자신의 경험을 근거로 하여 믿는 것에 대해서는 과신을 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한 경향으로 인해 인간은 자신의 입장뿐만 아니라 다른 이의 입장도 공평하게 대하는 열린 태도를 체득하기 힘들다. 인간의 인지는 지각 경험에서부터 추상적인 판단에 이르기까지 편향되어 있다.
이러한 동기에는 70년대 유행했던 ‘인지 편향론’의 관점이 깔려 있다. 약한 의미의 비판적 사고 훈련 과정에는 인간의 합리적 능력이 경험적 내용에 크게 의존적이지 않다는 극단적 관점이 도사리고 있다면, 강한 의미의 비판적 사고 훈련 과정에는 인간은 근본적으로 비합리적이라는 극단적 관점이 도사리고 있다. 그 어떤 관점이든, 열린 태도를 갖춘 비판적 사고의 소유자로 사회 구성원들을 길러내겠다는 목적에는 부합하지 않는다. 약한 의미의 비판적 사고 훈련 과정에 깔려 있는 인간에 대한 극단적 관점은 형식 절차 해석의 측면에서 두 진영의 갈등을 다룰 때 살펴보도록 하자.
강한 의미의 비판적 사고 훈련 과정에 깔려 있는 인간에 대한 극단적 관점은 지각 경험에서부터 언어적 판단에 이르는 과정을 오류투성이로 보는 것이다. 강한 의미의 비판적 사고 옹호자들이 그 관점을 부정하더라도, 그것은 그들의 사고 훈련 과정의 설계 방식에 깔려 있다. 인간의 인지가 선천적으로 오류를 범하도록 타고 나는 것이고, 특별한 교육 없이는 자신의 믿음을 과신하는 것이 인간의 운명과 같은 것이라고 해보자. 이때 그런 운명을 극복하기 위한 비판적 사고 능력은 실제로는 없거나, 아니면 있어도 단지 잠재되어 있을 뿐이라고 결론지어야 한다. 비판적 사고 없이 합리적일 수 없다면, 결국 인간은 아예 비합리적인 동물이어야 한다. 비판적 사고 능력이 그저 잠재적인 것이라면, 비판적 사고 훈련이 일반 교육 과정에 설치되어야 할 충분한 정당성도 서지 않는다.
강한 의미의 비판적 사고 옹호자들이 철학적 독단에서 벗어나 인지 과학 및 심리학과 같은 분야의 연구 결과를 적극 수용하겠다는 태도는 바람직하다. 하지만 그들이 정서적, 인지적 편향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자신들의 입장을 강화할 목적으로 타 분야의 연구 결과를 남용한 것에 불과하다. 이를 알아보기 위해 두 가지 사례만 분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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