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례1>
왼쪽 그림의 (A)는 잘 알려진 뮬러-라이어 착시(Mueller-Lyer illusion) 현상을 보여준다. 삼각형 모양의 끝이 선분 쪽으로 향한 선이 그냥 화살표 모양의 선분보다 길다고 사람들은 판단한다. 그러나 두 선의 실제 길이는 동일하다. 사람들은 엇비슷한 길이의 두 선이 엇비슷하게 보일 것이라고 믿는 경향을 갖고 있다. 하지만 뮬러-라이어 착시 현상은 그러한 믿음이 잘못되었음 보여준다. 원초적인 지각 경험에서조차 인간은 오판을 범하게끔 인지적으로 편향되어 있으며, 착시 현상 등을 통해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원초적인 지각 경험에서조차 인지적 편향에 자유롭지 않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더 이상 보이는 그대로, 듣는 그대로 과신하지 않게 되며, 또 비판적 사고 능력을 발휘하여 (B)와 같은 사고 실험을 할 수 있다.
위에서 말한 것은 강한 비판적 사고 훈련 과정에 담긴 의도를 잘 드러내준다. ‘오류와 오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을 깨닫게 하라. 이를 통해 자신의 경험에 근거한 믿음을 과신하지 않게 해주는 비판적 사고 능력이 활성화될 수 있다.’ 그러나 오류와 오판을 범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은 결코 편향된 인지의 속성을 깨닫게 되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인지의 복잡성’을 알게 되는 것을 뜻한다. 인지의 복잡성을 알게 되는 것은 생리적, 사회적, 환경적으로 제한된 인간의 합리적 능력을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제한된 합리적 능력을 인식하게 되는 것이야 말로 상황에 따른 여러 사안에 대해 공평한 평가를 가능하게 해주는 출발점이다. ‘오류와 오판으로 점철된 인간상(人間像)’의 인식이 비판적 시각을 갖춘 열린 태도로 이어진다는 보장은 없다. 더욱이 그러한 인간상이 인지 편향론에 근거한 것이라면, 그것은 오히려 인간의 비판적 능력 전반에 관한 회의론으로 이어져야 자연스럽다. 그러한 회의론은 비판적 사고를 교육 과정으로 삼는 교육 체계 전반을 부정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 때문에, 지나치게 오류와 오판을 강조하는 비판적 사고 훈련 과정은 자기 모순적일 수밖에 없다.
다시 뮬러-라이어 착시 현상으로 돌아가 보자. 이 세상 그 누구도 그 착시 현상을 불러일으킨 그림에서 선분만을 달랑 떼어내어 보려고 하지 않는다(Gibson, J.J., 1966). 또 예외적인, 곧 일상생활에서 자주 발견되지 않는 착시 현상 때문에, 비숫한 형태의 두 사물이 비슷하게 보일 것이라는 믿음을 포기하는 것이야말로 합리적 근거를 결여한 것이다. 사실 뮬러-라이어 착시 현상의 그림에서 두 형태는 동일한 것이 아닌 까닭에, 그 두 형태에서 선분만을 분리하여 본다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다만, 두 선분의 길이를 비교하도록 강요당하는 상황에서만 뮬러-라이어의 착시 현상은 의미를 갖게 된다. 그러한 착시 현상이 인지 편향론을 지지해 주는 증거라고 주장하기는 힘들다.
지각 경험은 아직 베일에 덮인 신비와 같다. 하지만 지각 경험은 외부 자극에 대한 단순한 반응이 아니라 일종의 정보 처리 과정과 유사하다는 데에는 강한 의미의 비판적 사고 진영의 다수가 동의한다. 이때 ‘정보’라는 개념의 애매모함에도 불구하고,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뮬러-라이어 착시 현상은 인지의 편향성이 아니라 지각 경험의 복잡성을 드러내 준다고 할 수 있다.
• 너무나 당연하지만 설명하기 가장 힘든 지각 경험의 속성은 ‘지각자를 포함한 시공간성’일 것이다. 무엇을 볼 때, 들을 때, 만질 때, 지각 경험은 항상 지각자와 대상을 동시에 포함한 일종의 방(room)을 형성한다. 시각 경험은 ‘시각의 방(visual room)’, 청각 경험은 ‘청각의 방(auditory room)’에 비유될 수 있다(이상하, 2005). 따라서 지각 경험을 정보 처리 과정으로 이해하는 경우에도, 머릿속의 정보 자체를 직접 보거나 듣는다고 판단하는 것은 금물이다. 두뇌를 포함한 지각 체계는 시공간적 지각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내부 기관으로 이해되어야지, 그것 자체가 자극에 반응하여 경험을 산출한다고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 지각 경험을 정보 처리 과정과 연관시켜 생각할 때 두뇌 신경망의 부분적 활성화와 정보를 연관시키는 것은 자연스럽다. 다만, 그런 활성화의 산물 자체를 지각 경험의 직접적 대상으로 간주하는 것은 비상식적이다. 그렇게 간주하는 것은 일상 경험 자체를 부정하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또한 정보를 얻는 것이 대상을 보거나 듣는 과정과 분리되어 있지 않는 까닭에, 환경 지각이 두뇌의 정보 처리 방식에 의존적이라는 사실도 인정해야 한다. 결국 지각 경험은 인지 체계와 환경의 상호 작용의 결과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착시 현상을 다룰 때에도, 그것이 물리적 제한으로 인한 것인지, 아니면 내부 시지각 체계의 기능 방식에 의한 것인지를 면밀히 따져야 한다. 물이 반쯤 담긴 컵 속의 젓가락을 볼 때 우리는 ‘컵 속의 젓가락’을 보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뮬러-라이어 착시 현상을 불러일으키는 전체 그림을 보는 것이지. 특정 선분만을 떼어내 보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젓가락이 휘어져 보이는 것은 해당 환경의 물리적 요인에 우선적으로 기인한 까닭에, 모두에게 동일하게 나타난다. 이 점은 특별한 실험 목적에 따른 착시 현상에 해당하지 않는다. 뮬러-라이어 착시 현상은 이에 대한 보기로 여겨질 수 있다.
• 지각 경험에서 얻어지는 정보가 두뇌 신경망의 부분적 활성화와 관련되어 있다면, 정보 처리는 신경망의 네트워킹(networking) 방식과 관련된다고 가정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러한 정보 처리가 자극에 대한 단순한 반응이 아닌 까닭에, 신경망의 네트워킹 방식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문화적 맥락에도 영향을 받을 가능성이 크다. 뮬러-라이어 착시 현상은 주변 인공 환경이 원형을 띠고 있는 지역 사람들에게는 착시로 나타나지 않는다(Segal, H.H., et., 1966). 뮬러-라이어 착시 현상이 우리에게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이유로 ‘각진 공간 환경’이 거론된다(Gregory, R.L., 1968). 각진 공간 환경에서는 시선 쪽으로 향한 돌출부를 우선적으로 주목하는 것이 공간 활동에 유리하다. 그러한 공간에 길들여진 두뇌를 가진 사람은 뮬러-라이어 착시 현상의 그림에서 화살표 모양 선 끝을 돌출된 부분으로 보게 된다. 이러한 설명을 따를 때 뮬러-라이어 착시 현상을 가지고 인간의 인지는 오류와 오판을 범하게끔 편향되어 있다고 주장할 수 없다.
뮬러-라이어 착시 현상에 의해 지지받을 수 있는 것은 인지 편향론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인간의 원초적인 지각 경험조차 매우 복잡하다는 관점이며, 이 점은 아직까지 다양한 착시 현상을 통합적으로 설명해줄 수 있는 시지각 이론이 없다는 사실과 일맥상통한다. 강한 의미의 비판적 사고 훈련 과정을 설계할 때 굳이 인지 편향론에 근거하여 오류와 오판으로 점철된 인간상을 강조할 필요가 없다. 강한 의미의 비판적 사고 교수법의 기준이 그러한 인간상을 요청하지도 않을뿐더러, 그러한 인간상을 강조하는 것은 인간의 비판적 능력이 갖고 있는 가능성을 축소시키는 것에 불과하다. 강한 의미의 비판적 사고 옹호자들 일부는 아마도 지금까지의 논의를 사소한 것이라면서 묵살하려 들 것이다. 이들은 추론 및 추리 과정에서의 오류와 오판을 중시한다. 과연 추론 및 추리 과정에서의 오류와 오판의 강조가 비판적 사고에 필요한 열린 태도를 길러주는 데 도움이 될까? 두 번째 사례를 통하여 이 물음에 답해보자.
'과학과 철학 에세이 > 비판적 사고' 카테고리의 다른 글
3.0. 갈등 원인의 진단: 형식 절차 해석의 측면 (0) | 2010.03.06 |
---|---|
2.2. 갈등 원인의 진단: 경험 해석의 측면 (사례 2) (0) | 2010.03.06 |
2.0. 갈등 원인의 진단: 경험 해석의 측면 (0) | 2010.03.01 |
1.2. 강한 의미의 비판적 사고 (0) | 2010.03.01 |
1.1 약한 의미의 비판적 사고 (0) | 2010.03.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