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속화와 민주주의 (봉인 해제)/자연의 역사와 우주론

자연의 역사와 우주론 1. 열린 체계로서의 과학 (수정)

착한왕 이상하 2009. 11. 24. 08:17

자연의 역사와 우주론

 

지구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수직선상에 촘촘히 배열한다고 생각해 보자. 현대 과학에 익숙한 이는 죽은 물질계(物質界)에서 출발하여 원시생물을 거쳐 인간에 이르는 과정을 연대순으로 배열할 것이다. 그는 질적 상태 변화의 비순환적 과정, 즉 자연의 역사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그의 수직선은 아래에서 위로 향하는 방향성을 갖게 된다. 그러한 방향성을 갖는 수직선을 ‘자연의 역사선(nature's history line)’이라 부르자.

 

지구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수직선상에 촘촘히 배열한다고 할 때 우주 전체가 위계질서를 가진 하나의 사회에 비유될 수 있다. 이러한 비유에 근거한 것이 바로 ‘존재 사슬’이다. 존재 사슬이 기독교의 다양한 신 개념과 맞물려 논의될 수 있다. 또한 그러한 각 신 개념은 특정 시기에 유행한 자연의 이해 방식에 근거하고 있다. 따라서 태초를 가정하는 우주론은 존재 사슬의 다양한 해석과 맞물린 창조주로서의 신 존재 가정과 양립할 수 있다. 자연에도 역사가 있다는 관점이 존재 사슬과 논리적 모순 관계를 맺는다는 생각은 단지 특정 시기에 유행한 세계 이해의 방식에 기인한 것일 뿐이다. 태초를 가정하지 않는 우주론은 신의 섭리를 반영한다고 여겨지는 존재 사슬의 구조와 양립 가능하기 힘들다.

 

 

(1) 열린 체계로서의 과학

‘자연’이라는 개념은 ‘우주가 존재하는 방식’을 뜻할 때 자연에도 역사가 있다는 관점은 우주에 질적 상태 변화의 비순환적 과정이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지구는 그러한 과정을 보여주는 하나의 박물관에 비유될 수 있다. 이때 적어도 두 가지 물음이 발생하는데, 그 하나는 질적 상태 변화의 비순환적 과정의 성격 규명에 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두 가지 우주론, 즉 ‘태초를 가정하는 우주론’과 ‘태초를 가정하지 않는 우주론’의 구분에 관한 것이다. 첫 번째 물음은 다음과 같다.

 

• 수직선 상부에 위치한 것은 하부에 위치한 것에 기인한 것으로 여겨져야 한다. 둘 다 질적 상태 변화의 비순환적 과정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과정의 성격은 무엇인가?

 

첫 번째 물음에 대하여 현대 과학은 수직선 하부가 상부의 존재를 위한 수단이라는 관점을 부정된다. 그러한 관점은 수직선 하부의 존재 없이는 상부의 존재를 가정할 수 없다는 것이 아니다. 또 하부가 상부보다 열등한 것으로 여겨져야 한다는 것은 더욱더 아니다. 하부가 상부의 존재 수단이라는 것은 하부의 존재 목적이 상부에 의해 결정된 것임을 뜻한다. 식물은 동물의 먹이로 존재한다든가, 동물은 인간 복지를 위한 실험에 유용한 존재라는 생각을 그 보기로 들 수 있다. 현대 과학에 기대어 식물과 동물이 인간의 복지를 위해 존재해야 한다고 주장할 수 없다.

 

지구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하나의 수직선에 연대순으로 배열할 때 하부와 상부는 크게 물질계와 생물계로 계층화된다. 동일한 법칙성이 두 계층에서 발견되더라도, ‘체계(system)’라 불릴 수 있는 것들, 즉 전체의 속성이 부분들의 관계에 의존적인 것들은 그 복잡성(complexity)에서 계층별로 차이를 보인다. 기체 분자들로 구성된 체계는 분자들의 무작위적인 운동으로 인해 조직화에 반하는 복잡성을 보여준다. 태양을 중심으로 한 위성들의 체계는 반복적이고 규칙적인 운동을 보여준다. 반면, 생물체들이 의존하는 부분들은 기체 운동처럼 무작위적이지 않고, 또 태양계처럼 안정화되어 있지도 않다. 부분들의 상호 의존성은 서로서로 뒤얽혀 하나의 관계망을 형성하며, 그러한 관계망에 근거한 생물체의 기능은 각 부분들의 속성만으로는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다. 생물체는 항상성(恒常性)을 갖고 있는데, 항상성은 그러한 유기적인 관계망의 지속적인 발달 과정에 의존적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발달 과정은 죽은 물질계에서는 나타나지 않는 까닭에, 수직선을 죽은 물질계와 생물계(生物界)로 나누는 것은 자연스러워 보인다.

 

자연에 역사가 있다는 관점은 물질계와 생물계 모두가 동일한 물질로 구성되어 있더라도 질적으로 서로 다른 상태라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모든 생물체도 원자와 분자로 이뤄져 있지만, 생물체를 유기체로 규정하는 기본 단위는 세포가 된다. 물질계에서 생물계로의 전이를 ‘역사적 발달’로 규정하는 입장 중 하나는 기체 분자의 체계에서 생물체에 이르는 과정을 복잡성의 증가 과정으로 보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이 현대 과학과 양립하는 것은 맞지만 실험적으로 검증된 가설의 지위를 확보한 것은 아니다. 또 그 입장이 과학적 가설의 지위를 확보하는 경우에도, 복잡성 증가 현상이 자연 역사의 본성인지는 논쟁거리로 남게 된다. 이런 논쟁거리가 과학적 작업 속에서 해결되어 할 필연적인 이유는 없다. 과학적 작업은 재확인 및 재생산 가능한 측정량과 가설 사이의 연결성 추구에 의해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과학의 이러한 성격은 과학과 다른 분야가 서로 연결되어 시기별로 세상을 이해하는 특정 방식을 산출시키는 촉진제로 여겨져야 한다. 이는 과학적 지식 체계가 세계를 이해하는 다양한 방식에 열려 있음을 암시한다.

 

복잡성 증가 개념 자체가 재확인 및 재생산 가능한 측정량에 제한된 엄격한 과학적 가설은 아니지만, 그것은 발견 과정에 개입하여 특정 가설 생성을 자극하는 ‘지침서(guideline)’로 작용할 수 있다. 이를 받아들이는 사람들 중에는 복잡성 증가 개념을 매개로 하여 신 개념에 도달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또 어떤 이는 복잡성 증가가 우주의 자기 조직화 과정의 산물이기 때문에 신과 같은 것을 가정할 필요가 없다고 강조할 것이다.

 

복잡성 증가 개념을 발견에 개입하는 지침서 개념으로 받아들이는 이들이 있다고 하자. 그들 중 어떤 이가 그러한 개념을 매개로 하여 신 존재를 주장하더라도, 모두가 그의 주장을 수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상황은 심지어 그가 위대한 발견을 한 경우에도 변하지 않는다. 복잡성 증가 개념이 일부 과학자들에게 지침서 개념으로 받아들여지는 이유는 발견에 도움이 되는 데 있는 것이지, 신 존재 가정으로 이어질 수 있는 매개 개념의 역할 때문은 아니다. 발견을 유도하는 지침서 개념이 신 존재 가정으로 연결되어야 할 필연적 이유는 없다. 변화 속에 보존되는 것, 즉 보존량 개념이 발견의 지침서 개념으로 정착한 과정은 이에 대한 하나의 역사적 실례가 된다.

 

보존량 개념이 정착하는 데 깊은 신앙심을 가진 과학자들의 기여가 컸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만인교도였던 뉴턴은 다니엘 예언서와 세인트 존의 묵시록에 인류 역사의 비밀이 담겨 있다고 여기고 그 비밀을 파헤치는 데 평생을 바쳤다. 하지만 뉴턴 같은 이들의 신 개념은 성서 자체의 해석에만 기인한 것은 아니었다. 신 개념 또한 시기별 자연 과학의 영향을 받아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무엇이 자연의 변화 속에 보존되는가는 시기별로 우세했던 신 개념과 맞물려 항상 논쟁 거리였다. 속도와 같이 ‘선형적 양화(linear quantification)’에 국한된 실험에 의존한 시기에는 기계론이 득세했다. 그러한 시기에는 운동량과 같은 것이 보존량으로 가정되기도 하였고, 신과 우주는 시계공과 시계의 관계에 유추되어 이해되었다. 열과 같은 물질의 활성도 ‘비선형적 양화(nonlinear quantification)’를 통해 측정 가능해진 이후, 빛, 마찰, 전기, 자기 등 다양한 형태 변환 과정에도 에너지가 보존된다는 ‘에너지보존 법칙’이 정착하게 된다. 이때 에너지보전 법칙은 유사한 조건 아래 재생산 가능한 측정량과 연결 가능한 까닭에 과학 공동체에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 따라서 에너지에 대한 개념적 합의가 불가능한 상태에서도, 에너지보존 법칙은 과학적 가설로 작동할 수 있었다. 보존량 개념이 신 존재의 가정에 역사적 기원을 둔 것일지라도, 과학 공동체가 보존량이라는 지침서 개념을 매개로하여 신 존재를 가정할 이유는 없게 된다.

 

자연의 역사선에서 상부에 위치한 것이 하부에서 발달한 것으로 여겨질 때 그 발달의 성격은 무엇인가? 이 물음은 세계에 대한 완벽한 그림을 요구하므로 과학만으로 대답될 수 없다. 이 때문에 과학의 한계를 지적할 수 있다. 하지만 과학이 세계에 대한 완벽한 그림을 제공할 수 없기 때문에 특정 종교적 교리에 근거해야 한다는 생각은 착각이다. 재확인 및 재생산 가능한 측정량과 가설 사이의 연결성을 추구하는 과학적 생활양식은 그 자체의 고유성을 유지하면서도 다양한 세계 이해 방식에 대해 열려 있다.

 

어느 과학자가 세계에 대한 완벽한 그림을 얻기 위해 과학에 특정 매개 개념을 개입시켜 신 존재 가정을 이끌어낸 경우, 그의 그림이 ‘철학적 감상 대상’은 될 수 있어도 과학에 근거하여 유일하게 받아들여만 하는 것은 될 수 없다. 따라서 첫 번째 물음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과학이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에 영향을 미칠 수 있으며, 또 세계를 이해하는 다양한 방식에 열려 있다는 것이다. 이때 그 열려 있는 방식은 임의적인 것이 아니라 연구 목적에 의존적이다. 실례로 유전자 모임의 발달 과정을 규명하려는 이는 부분의 상호 작용에 의해 전체가 구현된다는 세계 이해에 대해 호감을 가질 것이고, 신체의 특정 표현형의 발현에 기여하는 유전자들을 규명하려는 이는 전체의 특징이 부분의 속성에 기인한다는 세계 이해에 대해 호감을 갖게 될 것이다. 다양한 세계 이해가 하나의 연구 공간에 뒤섞이게 되는 양상이야말로 현대적 학제 간 연구의 중요한 성격이다. 과학적 지식이 신뢰할만한 이유는 유사한 조건 아래 반복적으로 사용 가능한 데 있는 것이지, 결코 유일한 세계 이해를 선별하여 그것을 옹호하는 데 있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