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속화와 민주주의 (봉인 해제)/자연의 역사와 우주론

창조 신화와 자연의 역사 3. 성서 대 자연, 그리고 매개 개념 (수정)

착한왕 이상하 2009. 11. 24. 03:48

(3) 성서 대 자연, 그리고 매개 개념 

성서에서 신의 섭리를 찾든, 자연에서 신의 섭리를 찾든, 그 섭리는 신의 속성으로 여겨지는 전지전능함, 충만성, 통일성과 같은 것과 관련을 맺게 된다. 이 때문에, 신의 섭리를 성서에서 찾아보려는 입장과 자연에서 찾아보려는 입장이 서로 양립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다만 그 두 입장의 공조 관계는 다음의 경우에 깨어지게 된다.

 

• 성서를 은유의 체계로 여기지 않고 글자 그대로 믿는 경우

 

• 성서의 은유 체계를 적대시 하는 경우

 

첫 번째 경우를 자세히 살펴보자. 성서의 창세기를 글자 그대로 믿는 사람은 인류의 역사가 자연의 역사에 포함된다는 주장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또 그는 창세기의 논리적 비정합성도 무조건 거부하려 든다. 그는 인간이 신에 의해 특별히 창조된 존재라는 창조 과학의 논제 SC2가 성립하기 위해 SC1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확신한다. 다시 말해, 화석의 기록으로 측정된 지구의 오랜 나이는 그에게 성서에 대한 공격으로 비춰지게 되는 것이다. 첫 번째 경우에 해당하는 사람은 인류의 역사에 비해 자연의 역사가 사소하거나 없다는 관점도 세계를 이해하는 여러 방식 중 하나라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결국 그에게 성서의 기록은 모든 평가의 기준이 된다. 그는 성서의 기록에 부합하는 과학적 발견만을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성서의 기록에 부합하는 과학적 발견이라는 것이 있을까? 당연히 있다. 성서에 기록된 어떤 역사적 사건에 대한 고고학적 발견을 그 실례로 들 수 있다. 그런데 과연 신 존재 자체에 대한 과학적 발견이라는 것이 있을까? 신 개념 자체를 검증 및 반증 불가능한 형이상학적 개념으로 여기는 사람은 이 물음에 대해 그렇다고 대답할 수 없다. 또한 이 물음에 대해 부정한다고 하여, 신 존재 논쟁의 의미가 사장되는 것도 아니다. 의미있는 과학적 발견은 재확인 및 재생산 가능한 측정량에 함축된 사실을 규명해주고, 특정 조건 아래 검증 혹은 반증 가능한 가설과 관련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반면, 첫 번째 경우에 해당하는 사람은 성서의 기록과 직접적으로 대립하지 않는 모든 발견을 마치 신 존재의 증거인 것처럼 과장한다. 다음 두 사례를 비교해 보자.

 

• [사례 1] 질량 측정

무게와 달리 질량은 직접 경험되지 않는다. 질량값을 얻는 하나의 방법은 이렇다. 두 물체를 충돌시킨다. 충돌 전과 충돌 후의 속도를 측정한다. 운동량 보존법칙에 근거하여 두 물체의 질량비는 속도의 상대비로 표현된다. 질량의 기본 단위를 정함에 따라 각 물체의 질량은 속도의 상대비에 근거해 결정된다.

 

• [사례 2] 떠있는 공

바람 기계를 작동 시키고, 그 위에 공을 올려놓는다. 바람 기계 위의 공이 둥둥 떠 있는 모습을 관찰할 수 있다. 우리의 생각으로는 떠있는 모습의 공이 신기하다. 하지만 과학적으로 보면 공에 미치는 압력의 차이로 일어나는 것임을 알게 된다. 이러한 과학적 설명은 신 존재에 대한 증명이기도 하다. 우리는 과학적으로 설명 가능한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만드시고 성경을 통해 말씀하셨음을 깨달아야 한다.

 

[사례 1]을 분석해 보자. 물질(matter)은 모든 사물을 구성하는 동질적 질료로 여겨진다. 물질을 직접 경험할 수 없는 까닭에, 질량도 무게와 달리 직접 경험할 수 없다. 따라서 질량은 직접적으로 측정될 수 없는 것이다. 질량 측정의 여러 방법 중 하나는 충돌 전후 속도의 상대비로 얻어내는 것이다. 여기에 개입하는 과학적 가설은 고전역학의 ‘운동량보존 법칙’이다. 질량값을 모르는 상태의 두 물체 m1과 m2가 있다고 하자. m1과 m2는 아직 그 값이 결정되지 않은 미지수(未知數)에 해당한다. 이 두 물체의 충돌 전 속도를 각각 v1, v2, 그리고 충돌 후 속도를 각각 v1', v2'라 하자. 이들 속도가 직접적인 측정 대상이 되는 것이다. 운동량보존 법칙(m1v1+m2v2=m1v1'+m2v2')에 의해 두 물체의 질량비는 충돌 전후 속도의 상대비로 나타난다.

 

• m2/m1=(v1-v1')/(v2'-v2)

 

따라서 속도의 상대비를 실험적으로 얻게 되면, 운동량보존 법칙에 의해 질량의 상대비가 결정되는 것이다. 질량의 기본 단위가 결정되면, m2와m1의 값을 결정할 수 있다. 이렇게 각각의 질량값이 결정된다고 하여, 질량 및 물질의 정확한 의미가 규정되는 것은 아니다. 또한 이로부터 운동량보존 법칙이 위협을 받게 되는 것도 아니다. 운동량보존 법칙에 함축되어 있는 ‘운동 중 질량 보존 조건’은 특수상대성이론의 출현으로 깨어졌다. 하지만 여전히 빛 속도에 근접하지 않은 물체의 운동에 대해서 고전역학의 운동량보존 법칙은 유용하게 사용되고 있다. 빛 속도에 근접하지 않은 물체의 운동에 국한하여 생각할 때 속도 측정에 함축된 질량값은 고전역학의 운동량보존 법칙에 의해 결정 가능하다. 역으로 그 법칙도 합당한 가설로 인정받게 되는 것이다. 즉, 그것은 재생산 가능한 측정량과의 연결성을 갖는다. 이를 도식화해 보면 다음과 같다.

 

 

  

[사례 1]과 [사례 2]를 관통하는 것은 법칙, 곧 과학적 가설이 특정 측정량에 함축된 실험적 사실, 실례로 질량값 등을 규명해준다는 것이다. 이러한 경우에만, 가설은 특정 측정량과의 연결성을 만족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 연결성을 만족하는 가설은 특정 측정량에 함축된 객관적 사실을 규명해주기 때문에 검증 및 반증 대상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사례1]과 [사례 2]에는 큰 차이가 있다. [사례 2]의 전반부는 인과 설명 모델을 보여주는 과학적 설명에 해당하지만, 그 결론부는 과학적으로 정당성을 확보할 수 없는 개인의 신앙심을 과학적 설명에 투사시킨 것에 불과하다. 얼핏 보면 [사례 2]에 해당하는 것 같지만 그 실상은 전혀 다른 다음 도식을 분석해 보자.

 

 

  

과학의 모든 가설이 ‘운동량보존 법칙’이나 ‘부력 및 압력에 관한 법칙’처럼 보편성을 지향하는 것은 아니다. 또 가설이 측정량과 연결되는 방식은 다양하다. 가설의 분류 및 측정량과의 연결 방식을 다루는 것은 논외로 하자. 이때 큰 사각형으로 처리된 부분만이 ‘떠있는 공에 대한 과학적 인과 설명’에 해당한다. 공이 떠있는 현상은 압력차에 의해 설명되며, 여기에 부력 및 압력에 관한 법칙이 동원된다. 이러한 설명이 과학적이기 위해서는 압력계와 같은 장치를 이용하여 압력차가 측정되어야 한다. 반복적인 실험으로 원인과 결과 사이의 법칙성에 대한 신빙성이 높아지면, 해당 법칙은 자연 현상의 인과적 설명에 유용한 과학적 가설의 지위를 획득하게 된다. 이제 중요한 물음은 다음이다.

 

• 큰 사각형으로 처리된 과학적 인과 설명에서 신 존재를 이끌어낼 수 있을까?

 

실험에 근거한 과학적 설명에서 신이 존재한다는 가정, 즉 ‘신 존재 가정’을 이끌어내는 것은 가능하다. 하지만 그렇게 신 존재를 이끌어내는 방식에도 타당한 것이 있고 아닌 것이 있다. 과학적 설명에 성서의 기록을 투사시켜 그것이 신 존재에 대한 직접적 증명이라고 주장하는 것, 곧 [사례 2]의 주장은 타당한 방식이 아니다. 그러한 주장은 개인의 신념을 내세운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사례 2]의 결론은 실험 결과가 우연적이 아니라는 것에 근거하여 신 존재를 주장한다. 그러나 실험 결과가 우연적이 아니라는 것은 기독교적인 신의 속성에 의해서만 뒷받침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큰 사각형으로 처리된 과학적 인과 설명이 신 존재를 필연적으로 함축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부력 및 압력에 관한 법칙은 재확인 및 재생산 가능한 측정량과의 연결성을 만족하지만, 신 존재의 가정은 그렇지 않다. 신 존재의 가정은 과학적 인과 설명에 의해 직접적으로 증명될 수 없기 때문에, 해당 발견도 신 존재에 대한 직접적 증거가 될 수 없다. 실험에 근거한 과학적 설명에서 신 존재를 이끌어내는 타당한 방식은 다음을 만족해야 한다.

 

• 신 존재를 가정할 수 있게 해주는 어떤 ‘매개 개념’을 과학적 인과 설명에 투사해야 한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는 경우에만, 해당 설명은 신 존재 가정과 연결될 수 있다. 이때 그 연결성은 필연적인 것이 아니다. 매개 개념에 근거한 신 존재의 정당화 자체가 과학적 작업에 속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과학적 인과 설명에 어떤 매개 개념을 투사시켜야 하는지의 여부는 과학 자체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 어떤 가설이 재확인 및 재생산 가능한 측정량과의 연결성을 확보했다고 하자. 즉, 특정 측정량에 함축된 객관적 사실을 규명해준다고 하자. 이러한 경우에도, 측정량의 데이터는 항상 새로운 해석에 대해 열려있다. 하지만 새로운 해석에 대한 데이터의 열려 있음이 신 존재를 전제하는 것은 아니다. 데이터가 새로운 해석에 열려 있다는 사실은 기존 가설의 한계나 수정 및 대체 가능성을 함축하는 것이지, 결코 ‘신 존재 가정’으로 이어져야 함을 함축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과학적 발견이 ‘신 존재 가정’으로 이어져야 할 필연적 이유는 없다. 그러한 이유를 찾고자 하는 이는 신 존재 가정을 이끌어내기 위해 ‘천구의 안정성’ 혹은 ‘자연의 합목적성’과 같은 매개 개념을 과학적 설명에 투사시켜야 한다. 이러한 ‘매개 개념의 투사 과정’에 대한 정당화는 과학적 작업이 아니다. 그것은 철학적 혹은 신학적 정당성을 확보해 보려는 노력이며, 과학에 대한 아무런 위협도 가하지 않는다. 또 과학의 이론만으로는 이 세계의 정합적인 그림을 얻을 수 없다고 여기는 과학자들도 많다. 그 대표적인 실례로 뉴턴을 들 수 있다.

 

고전역학의 법칙들도 다른 과학적 가설과 마찬가지로 재확인 및 재생산 가능한 측정량과의 연결성을 확보하는 과정에서 그 신빙성을 획득했다. 즉, 각각의 법칙들은 특정 조건 아래 재현 가능한 실험 데이터에 함축된 사실들을 이끌어내는 데 필요하며, 또 그러한 조건들은 법칙들에 의해 설명 가능한 경험 영역의 경계를 규정한다. 하지만 이로부터 고전역학의 법칙들이 완전한 하나의 정합적 체계를 이루어 현상을 있는 그대로 설명해주는 것은 절대 아니다. 중력의 법칙과 달리, 뉴턴의 운동 법칙들은 원거리 작용을 배제한 상태를 가정하고 얻어진 것이었다. 따라서 천구에 관한 그의 이론 체계는 비정합적이다. 이러한 사실을 그 누구보다도 명백히 인식하고 있었던 이는 물론 뉴턴이었다. 더욱이 고전역학 체계 자체에서 천구의 안정성이 증명되는 것은 더욱더 아니다. 뉴턴에게 그 가정은 그의 이론이 갖는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는 천구의 안전성을 설명하기 위해 신의 속성을 논해야 했다. 여기서 우리는 신학자로서의 뉴턴을 발견하게 된다. 뉴턴은 그의 운동 법칙들과 실험적 사실들이 신 존재에 대한 직접적 증거라고 주장한 적이 없다. 그는 그러한 설명이 갖는 한계에 주목하고 천구의 안정성에 대한 믿음을 설명에 투사시켜 신 존재 가정의 필요성을 이끌어 내려고 했던 것이다.

 

뉴턴은 이론을 건설하기 전부터 천구의 안정성이 우연의 결과가 아니라 신이 인간을 위해 마련해준 것으로 믿었다. 그는 천구의 안정성을 위해 능동적 신 개념을 갖고 있었던 까닭에, 그의 관성 개념도 단순한 질량의 속성이 아니라, 물질의 상태 유지를 위해 신이 우주에 부과한 힘이었다. 우리가 지금 고전역학을 이해하는 방식과 달리, 물질의 상태 유지를 위해 신이 태초에 불어넣은 힘은 운동 중 소멸하게 된다. 신이 없다면, 결국 천구의 안정성도 깨어지게 되는 것이다. 뉴턴의 능동적 신은 적절한 시기에 다시 관성이라는 힘을 우주에 불어 넣어준다.

 

천구의 안정성을 설명하기 위해 능동적 신이 가정되어야 한다는 믿음이 뉴턴의 발견에 긍정적 영향을 미친 것은 사실이지만, 이로부터 신을 믿는 자만이 뛰어난 과학자가 된다는 주장은 성립하지 않는다. 또 그의 발견이 신 존재를 직접 증명해주는 것도 아니다. 뉴턴은 천구의 현상을 설명하는 데 드러난 이론적 한계를 보충하기 위해 신 존재 가정을 이끌어냈기 때문이고, 또 그러한 한계가 신 존재 가정에 의해 보충되어야 할 필연적 이유는 없다. 따라서 성서의 기록을 글자 그대로 믿는 것이 전제되어야 참다운 신앙이 가능하다는 주장이 뉴턴에 기댈 근거는 없다. 그렇게 믿는 이들은 과학적 발견에 천구의 안정성과 같은 어떤 매개 개념을 투사시켜 신 존재 가정으로 이어지는 논증 과정을 잘못 이해하고 있다. 그러한 논증 과정은 과학적 발견이 신 존재에 대한 직접적 증명이라는 전제를 깔고 있지 않다. 성서를 글자 그대로 믿는 이들은 위대한 어떤 과학자가 기독교인이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참다운 신앙에 관한 자신들의 입장이 증명된 것처럼 과장한다.

 

재확인 및 재생산 가능한 측정량과 가설의 연결성을 추구하는 과학적 생활양식(scientific mode of life)은 근본적으로 다양한 세계 이해 방식에 대해 열려 있다. 이에 대한 이유 중 하나만을 살펴보자. 모든 성공적인 과학적 가설이 특정 조건 아래에서만 성립하는 까닭에, 유용한 가설은 그 설명 영역에 있어 자체 한계를 명백히 드러내고 있다. 과학적 생활양식이 기계론적 세계 이해, 유기체론적 세계 이해, 전일론적 세계 이해 등에 열려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는 과학자가 바로 ‘세속화된 과학자’라 할 수 있다. 각각의 세계 이해가 신 존재를 전제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기 때문에, 기계론적 세계 이해, 유기체론적 세계 이해, 전일론적 세계 이해에만 국한하는 경우에도 과학적 생활양식에 대해 열려 있는 세계 이해의 방식은 무척이나 다양해진다.

 

세속화된 과학자는 특정 세계 이해의 진위 여부나, 신 개념과 관련된 종교적 교리의 진위 여부 자체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 그는 그 대신 가설 생성에 영향을 미친 ‘지침서 개념(guideline concept)’들, 실례로 보존량, 대칭성, 생기(vital force)와 같은 개념들에 주목한다. 그는 그러한 개념들이 다양한 세계 이해에서 파생된 방식과 그 생성 및 소멸 과정의 역동성에 관심을 갖는다. 이러한 점에서 세속화된 과학자는 특정 세계 이해 방식에 매달리기보다는 관심을 갖고 연구할 뿐이다. 세속화된 과학자의 태도를 기독교가 지배했던 시대를 산 뉴턴에게서 기대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과학적 생활양식이 다양한 세계 이해에 열려 있는 까닭에, 천구의 안정성이라는 매개 개념을 과학적 인과 설명에 투사시켜 ‘신 존재 가정’을 이끌어내는 신학적 정당화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또 그러한 시도를 하는 과학자들이 과학 자체의 적이 되는 것도 아니다. 반면에 성서의 창세기 등을 글자 그대로 믿는 이들은 뉴턴과 달리 성서 기록을 과학적 인과 설명에 직접 투사시킨다. 그 결과, 성서의 기록에 반하는 발견에 ‘반기도교적’이라는 낙인을 찍어 사장시키려 든다. 이때 신의 섭리를 성서에서 찾아보려는 입장과 자연에서 찾아보려는 입장의 공조 관계는 깨어지게 된다.

 

창조 과학 진영은 ‘지적 설계(intelligent design)’ 개념이 등장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자연 신학의 전통이 마치 자신들의 조상인 것처럼 과장한다. 하지만 자연 신학의 대부로 불리는 이들 중에는 성서의 은유 체계를 적대시한 인물도 있다. 대표적으로 보일(R. Boyle)을 들 수 있다. 성서의 은유 체계를 적대시하는 경우에도 신의 섭리를 성서에서 찾아보려는 입장과 자연에서 찾아보려는 입장의 공조 관계가 깨어진다. 성서의 은유 체계를 적대시한다면, 성서를 글자 그대로 믿는 것도 적대시해야 한다. 오로지 신의 섭리를 자연에서 찾아야 한다는 입장만이 살아남게 된다.

 

자연에는 역사가 없거나 자연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보다 사소하다는 관점을 반기독교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무지에 기인한 것이다. 창조 과학 진영은 성서의 기록만 가지고 모든 것을 평가하는 것만이 참다운 신앙에 전제된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다. 창조 과학 진영은 종종 빅뱅 가설을 공격 대상으로 삼는다. 하지만 빅뱅 가설에 근거한 우주론은 태초를 가정한다는 점에서 기독교의 신 개념과 양립 가능하다. 따라서 창조 과학 진영이 빅뱅 가설을 공격하는 것은 기독교 전통에 대한 자신들의 무지와 편협성만 증명한 꼴이다. 자연의 역사를 인정하면서도 태초의 문제에 관해서는 서로 상반된 현대 우주론을 살펴볼 것이다. 이것은 다음 장의 주제인 ‘존재 사슬의 논리적 구조와 그 다양한 해석’이라는 팻말이 꼽힌 정상을 정복하기 위한 전초 기지에 비유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