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속화와 민주주의 (봉인 해제)/자연의 역사와 우주론

자연의 역사와 우주론 2. 태초를 가정하는 우주론 (수정)

착한왕 이상하 2009. 11. 24. 08:19

(2) 태초를 가정하는 우주론

태초를 가정하는 우주론만이 과학적 증거에 근거한 것이라는 생각은 착각이다. 더욱이 자연의 역사가 생각했던 것보다 오래되었다는 사실로 인해 그러한 우주론이 기독교의 신 개념과 모순된다는 생각은 어리석다. 여기서는 다음 물음과 관련하여 그 이유를 밝히고, 이어지는 글에서 태초를 가정하지 않는 우주론을 살펴볼 것이다.

 

• 자연의 역사를 수직선에 비유할 때 그 수직선의 출발점을 가정할 수 있는가? 그러한 출발점은 우주의 태초로 귀결되어야 하는가? 자연의 본모습을 부분들의 끊임없는 생성과 소멸의 반복으로 가정하는 경우, 자연의 역사들은 그러한 반복 속에서만 의미를 갖는 우주의 국소적 현상들이다. 따라서 태초를 논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것인가?

 

태양계가 사라진다면, 생명체가 안식처로 삼고 있는 지구도 사라지게 된다. 지구의 자연 역사선도 끝점을 갖게 된다. 하지만 그 출발점이 무엇인지는 여전히 문제로 남게 된다. 여러 우주론 중에 하나일 뿐인 빅뱅 가설을 확실한 것으로 여기는 이는 끝점은 몰라도 출발점을 가정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러한 이에게 그 출발점은 지구의 탄생 시점이 아니라 우주의 태초가 된다. 마치 기하학의 점과 같은 상태에서 폭발한 우주는 동질적으로 팽창하여 현재의 모습을 띠게 되었다는 것이 빅뱅 가설이기 때문이다.

 

우주에는 수많은 은하계들이 존재한다. 물질계에서 생물계로의 질적 상태 변화가 꼭 우리 은하계에서만 가능한 것은 아니다. 인간보다 뛰어난 지능을 가진 외계 생명체의 존재 가능성도 부정되지 않는다. 생물계의 진화 역사(evolutionary history)가 있는 우주의 부분들을 ‘EH1, EH2, ..., EHn’이라 하자. 이때 빅뱅 가설은 모든 EHi(1≤i≤n)가 동일한 출발점, 곧 빅뱅에 기인한 것임을 함축한다. 따라서 모든 EHi는 빅뱅이라는 태초에서 시작하는 ‘전일적 우주 역사 HCH(Holistic Cosmological History)’에 귀속되게 된다. 다시 말해, 각 EHi의 궁극적인 출발점은 HCH의 태초가 된다. 이 때문에, 각 EHi에 대응하는 자연의 역사선 NHL(Natural History Line)은 우주의 우주 전체의 전일적 역사 속에서 이해되어야만 한다. 

 

   

위에서 첫 번째 그림은 전일적 우주 역사 HCH를 나타낸다. 생물계의 진화 역사를 가진 우주의 부분들은 나뭇가지처럼 표시된 곳들이다. HCH를 나무에 비유할 때 생물계의 진화 역사를 가진 나뭇가지 하나를 무작위적으로 뽑는다고 해보자. 이때 얻을 수 있는 자연의 역사선 NHL은 위에서 두 번째 그림에 해당한다. 각 EHi를 확장한 모든 역사선 NHL은 태초에서 기인했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또 다른 공통점은 생물계 진화의 역사 EHi가 NHL에서 매우 짧게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는 지구상의 자연 역사선만 고려해도 분명해진다. 전일적 우주 역사 HCH의 대부분은 태양계와 같은 항성계의 출현 과정에 할애된다. 모든 항성계가 생물계를 생성시킬 수 있는 조건을 갖춘 것은 아니다. 항성계 내에서 지구와 같은 조건을 갖춘 행성이 출현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그러한 조건이 갖춰지기 위한 기간은 원시 생물이 출현하고 종 분화 과정을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기간에 비해 훨씬 길다. 원시 생물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에서 현생 인류가 출현한 시기는 얼마 되지 않는다. 따라서 현생 인류가 출현한 시기는 NHL의 끝점에 비유될 수 있다. 우주의 전일적 역사를 수십 권의 백과사전으로 편찬한다고 할 때 현생 인류의 출현은 마지막 권 마지막 장의 마지막 문장에 해당하는 정도의 사건에 불과하다.

 

빅뱅 가설에 근거한, 곧 태초를 가정한 우주론이 창조 과학 진영의 비판 대상이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성서의 기록을 글자 그대로 믿으려고 하는 이들은 자연의 역사가 인류의 역사에 비해 사소하거나, 혹은 자연에는 역사가 없다는 관점이 성서의 기록 자체보다는 특정 시기에 대세로 굳어진 세계 이해에 기인한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하지만 성서를 은유 체계로 보는 경우, 그러한 관점만이 신학 전통에서 통용되는 것은 아니다. 창조 과학 진영은 인류의 역사가 자연 역사의 지극히 일부분에 불과하다는 사실에, 또한 인간보다 지적인 외계인의 존재 가능성이 논리적으로 부정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해 적대적 반응을 보인다. 창조 과학 진영은 그러한 사실이 신에 의해 특별히 창조되었다는 인간에 대한 관점을 위협한다고 본다. 이 역시 성서를 은유 체계로 보는 전통에서 일방적으로 통용되지 않는다. 자연이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지, 아니면 신을 위해 존재하는지는 성서에 국한하여 결정될 수 없는 문제이며, 성서의 아담과 이브가 반드시 현생 인류에 국한하여 해석될 필요도 없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이후의 기록은 신에 의해 창조된 ‘도덕 훈련장’인 지구에서 인간이 신을 알아가는 여정으로 여겨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는 존재 사슬이 어떤 식으로 다양한 신 개념과 맞물릴 수 있는지를 살펴볼 때 분명해질 것이다.

 

빅뱅 가설에 근거한 우주론이 근대 이후의 신학 전통과 양립하기 힘든 대목이 있다면, 그것은 태초를 가정하는 전일적 우주 역사가 아니라 생물계 진화 역사의 부분이다. 팔과 다리와 같은 표현형은 과거 환경에 적합했기 때문에 선택되었다는 자연선택(natural selection), 즉 현대 생물학에서 유전자 집단의 빈도 차이로 측정되는 것 이외에도, 소규모 집단에서 발생하는 유전자 부동(gene drift), 자연선택에 중립적인 분자 차원의 무작위적인 돌연변이(mutations) 등이 생물계의 진화를 발생시키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신에 의해 미리 예정된 목적이나 섭리와 같은 개념 등이 진화를 설명하는 데 끼어들 구석은 없어 보인다. 기독교 신 개념의 다양성에 무지한 이들은 두 세력으로 갈린다. 그 하나는 사실로서의 진화의 역사를 부정해야 참다운 신앙인이라 여기는 창조 과학의 세력이다. 다른 하나는 진화론이 무신론을 증명했다면서 과학을 무신론에 대한 이념적 정당화의 수단으로 삼는 세력이다.

 

자연선택, 자연선택에 중립적인 분자 차원의 무작위적인 돌연변이, 유전자 부동 등만으로 생물계의 진화 역사를 완전히 규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과학자가 신에 의지할 필요는 없다. 또 세계의 완벽한 그림을 얻기를 원하는 어떤 과학자가 진화의 역사에서 나타나는 복잡성의 증가 현상을 진화의 본질로 주장하면서, 더불어 지적 설계 개념과 같은 것에 근거하여 신 존재를 옹호할 수도 있다. 다만 그가 자신이 묘사한 세계의 그림이 과학적으로 증명되었다고 주장한다면, 이것은 자연선택 하나만 가지고 진화를 충분히 설명할 수 있다는 주장만큼이나 과장된 것이며, 또한 과학을 이념적으로 이용한 것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입장을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과학을 이용한 것이기 때문이다. 생물계의 진화 역사가 자연선택, 무작위적인 돌연변이, 유전자 부동 등으로 충분히 설명된다고 하더라도, 기독교의 신 개념은 태초를 가정하는 우주론과 양립할 수 있는 여지를 갖고 있다. 현재의 진화 생물학이 물질계에서 생물계로의 전이 과정을 다룰 수 있는 수준에 도달한 것은 아니다. 그러한 전이 과정은 하나의 과학 분과가 아니라 여러 과학 분과들의 공조 속에서만 설명 가능한 영역일지도 모른다. 이때에도 신이 생물계가 나타날 수 있도록 물질계를 마련해줬다는 세계 이해의 방식이 태초를 가정하는 우주론과 양립할 수 있다.

 

태초를 가정하는 우주론에서는 우주의 특정 부분에서 발생한 생물계의 진화 역사가 항상 전일적 우주 역사 속에 귀속된다. 그러한 우주론은 창조주로서의 다양한 신 개념과 양립할 수 있다. 기독교 역사의 다양한 신 개념을 관통하고 있는 것은 어차피 무에서 유를 창조할 정도로 전지전능한 존재자의 가정이기 때문이다. 태초를 가정하는 우주론이 반드시 그러한 존재자에 기댈 필요는 없다. 그러나 그 우주론은 창조 신화에 근거한 기독교의 여러 신 개념과 논리적으로 양립할 수 있다. 자연에서 신의 섭리를 찾아보려는 전통 속에서 탄생한 기독교의 여러 신 개념이 빅뱅 가설에 근거한 우주론과 양립 불가능하다는 생각은 완전한 착각이다. 그러한 생각은 독단적인 두 세력의 무지에 기인한 것일 뿐이다. 그 하나는 창세기 등을 글자 그대로 믿어야 한다고 여겨 자연의 오랜 역사를 부정하는 창조 과학의 진영이다. 다른 하나는 자연의 오랜 역사를 인정하면 바로 기독교의 교리를 반박할 수 있다고 여기는 일부 무신론자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