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속화와 민주주의 (봉인 해제)/자연의 역사와 우주론

창조 신화와 자연의 역사 1. 창조 신화와 자연 (수정)

착한왕 이상하 2009. 11. 24. 03:21

창조 신화와 자연의 역사

 

 

(1) 창조 신화와 자연

기독교의 창조 신화가 과학적 증명 대상이라 여기는 창조 과학은 다음의 핵심 논제로 구성된다.

 

SC1. 지구는 진화론자나 지질학자가 주장하는 것과 달리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다.

SC2. 인간은 신에 의해 창조된 특별한 존재이다.

SC3. 진화론자들의 화석 연대기는 부정확한 것이다.

SC4. 창조 과학은 진화론과 대등하게 학교 과학시간에서 가르쳐져야 한다.

 

SC1에서부터 의문이 발생한다. 기독교의 신 개념과 진화론이 물과 불의 관계로 단순화시키는 통속적인 이해 방식을 받아들여도, 지구의 나이가 진화론이나 지질학에서 주장되는 것보다 짧아야 할 이유는 성서 그 어느 구석에서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지구의 나이를 그렇게 짧게 보는 이들은 성서 전체에서 지극히 일부를 차지하고 있는 창세기의 은유 체계를 글자 그대로 믿고 싶어 하는 심리를 갖고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창세기의 은유 체계를 글자 그대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은 정통 기독교사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될 수 없는 주장이기 때문이다.

 

우선 기독교의 신 개념이 ‘창조의 논리적 순서’를 완전히 배제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명백히 인식할 필요가 있다. 기독교의 신이 무에서 유를 창조했다고 하지만, 그 신도 삼라만상이 존재하기 위해 필요한 것부터 창조했다. 이러한 까닭에, 뉴턴은 신이 물질의 운동을 위한 논리적 전제 조건으로 시공간을 제일 먼저 창조했다고 여겼던 것이다. 시공간이 창조된 이후에 이 세계가 신의 섭리에 따라 형성되었다고 하더라도, 인간만은 신이 몸소 나서서 창조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무에서 유를 창조했다는 기독교의 신 개념이 창조의 논리적 순서를 배제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그러한 창조의 논리적 순서에 대한 명확한 규정이 성서에 드러나 있지 않다면, 지구의 탄생 시기가 진화론이나 지질학의 연대기보다 극히 짧아야 할 이유는 없다. 중세의 아우구스티누스 시절만 하더라도 성서에 함축된 창조의 기록은 은유의 체계, 곧 알레고리(allegory)로 이해되었다. 또 인간도 지구상의 괴물들 중에 더 낳은 존재 정도로 여겨졌다. 종교 개혁기를 거치면서 자연이 신 자체가 아닌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는 인간 중심 사상의 정착과 함께, 인간은 자연의 법칙과 도덕에 관한 확실한 지식 체계를 건설할 수 있는 존재로 급상승하게 되었다. 이렇게 우주에서 인간의 지위가 급상승한 과정은 앞장에서 ‘인간의 천사화 계획’으로 묘사되었다. 따라서 인간은 신에 의해 창조된 특별한 존재라는 관점을 함축한 SC2도 기독교 전체 역사에 걸쳐 단일하게 해석되는 논제는 아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했다는 기독교의 신 개념이 창조의 논리적 순서를 배제하지 않는다면, 지구의 나이가 오래되지 않았다는 논제 SC1에 대한 집착은 창세기의 은유 체계 자체에서 기인한 것으로 볼 수 없다. 그것은 진화론과 지질학이 과학의 분과로 정착하지 못했던 시절에 득세한 창세기 해석 방식에 기인한 것일 뿐이다. 그러한 해석 방식은 다음의 관점에 근거한 것이다.

 

• 자연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에 비해 사소하거나, 자연 자체에는 역사가 없다.

 

자연이 지속하는 시간은 당연히 인류의 역사보다 길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인류의 역사도 불가능한 것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자연의 지속 시간이 ‘자연의 역사’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보게 되듯이, 자연의 역사는 ‘질적 상태 변화의 비순환적 과정’에 근거한다. 자연의 역사가 있다면, 그것은 신이 인간 존재를 위해 마련한 것으로 여겨졌다. 자연의 역사를 인류 출현 이전까지로 좁혀 짧게 보는 관점은 창세기의 은유 체계로만은 그 정당성을 확보할 수 없다. 하지만 창세기의 기록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여야 진정한 기독교인이라 믿는 이들은 하루 혹은 이틀이 수백만 년으로 해석되는 것을 반기지 않는다.

 

자연의 역사를 인류의 역사에 비해 사소한 것으로 여기는 관점을 이해하려면, 창조의 논리적 순서가 자연의 역사와 동일한 것은 아님을 먼저 인식해야 한다. 어떤 대상 혹은 대상들의 상태 A와 B의 관계를 역사적인 것으로 규정하기 위해서는 A가 B에 논리적으로 선행한다는 사실만으로는 불충분하기 때문이다. A와 B의 관계가 역사적인 것으로 규정되려면, 최소한 다음의 두 조건을 동시에 만족해야 한다.

 

• A와 B의 관계는 B에서 A로는 되돌아갈 수 없다는, 즉 ‘비순환적 과정’이라는 조건을 만족해야 한다. 여기서 비순환적 과정은 입자의 무질서도가 증가만 하는 일방향성만 갖는다거나, 에너지의 흐름에서의 ‘비가역성(irreversibility)’과 같은 것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개별 대상이나 대상들의 상태 변화가 원래의 상태로 복원 불가능함을 뜻한다. 책상 위에 놓여 있던 물 컵이 바닥에 떨어져 흩어진 물은 원상 복구될 수 없다. 이러한 사실은 물의 무질서도가 증가하는 방향성만을 갖고 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무질서도 증가 법칙’에 따른 현상 중에도 질적 상태 변화의 순환성을 보여주는 것들이 있다.

 

• A와 B의 관계에서 B는 A에 유래한 것이어야 하며, 또 A에서 B에 이르는 과정은 질적 변화를 반드시 수반해야 한다. 빨간 당구공이 중앙의 다른 당구공과의 충돌로 당구대의 모서리에 위치하게 된 경우, 그 당구공이 질적 변화를 겪은 것으로는 여겨지지 않는다. 그 당구공은 질적으로 다른 상태의 대상이 된 것이 아니라 단지 위치 변화만 겪은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현생 인류와 원숭이가 공동 조상에서 갈라져 나왔다면, 이것은 질적 상태 변화를 수반한 과정이다. 왜냐하면 그 공동 조상은 현생 인류와 원숭이와는 다른 종에 속하기 때문이다.

 

물체의 충돌에 의한 위치 변화의 과정은 위 두 조건을 충족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역사적인 것으로 분류되지 않는다. 액체, 고체, 기체의 상태 변화는 질적 변화이지만 순환적인 이유로 역사적 과정으로 여겨지기 힘들다. 어떤 형태가 이미 결정된 방식에 따라 확장되는 것을 성장으로 보는 전성설(theory of preformation)의 관점을 따를 때 성장도 역사성을 지니지 않은 것으로 여겨진다. 전성설은 기계론이 득세했던 시절 자연 자체에는 역사가 없다는 관점을 옹호할 목적에 부합하는 가설이었다. 이는 자연 자체에는 역사가 없다는 관점은 단순히 창세기의 기록 자체에 기인한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창세기의 해석은 특정 시기의 과학에 담긴 세계 이해와 함께 해온 것이므로, 과학의 발달 경로와 무관할 수 없었다.

 

창세기를 글자 그대로 받아들여야 참다운 기독교인이라 믿는 이들은 자연 자체에 역사가 있고, 또 그 역사가 인류 역사보다 훨씬 길다는 사실을 무조건 부정하려고 든다. 이에 대한 하나의 원인으로 성서의 구성 측면을 들 수 있다. 성서 내에서 특정 종족의 역사는 길게 서술되어 있는 반면, 창세기의 기록은 그에 비해 초라할 정도로 짧다. 성서가 정말 신의 뜻을 있는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라면, 천지 창조는 인류 역사에 비해 사소한 것으로 여겨지게 된다. 신이 인류의 출현을 위해 수백만, 아니 수억 년의 공을 들여야 했다면, 이것은 또 신의 전능(全能)함과도 어울리기 힘든 것으로 여겨지게 된다. 성서의 기록을 글자 그대로 믿으려고 하는 이들은 자연이 신 자신을 위해 존재한다는 관점이 한때 기독교 교리 해석에서 대세였다는 역사적 사실을 무시한다. 자연을 소파(sofa)에 비유할 때 그러한 관점에서 자연은 신의 소파이며, 인간의 특별함은 그저 소파에 편안히 앉아 신이 쓰다듬는 고양이 정도에 비유된다. 이러한 비유에 ‘반기독교적’이라는 낙인을 찍는 사람들은 자연이 신의 대리자인 인간에게 소파가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들은 이러한 믿음이 종교 개혁기라는 격변기의 역사적 탄생물이 아니라 성서 자체에 함축된 것으로 본다. 그들은 자연의 역사가 인류의 역사보다 훨씬 길다는 사실이 신의 전능함뿐만 아니라 인간 존재의 특별함마저도 위협한다는 관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그들은 성서의 다양한 해석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창세기를 은유 체계로 보는 경우, 자연의 역사가 인류의 역사보다 훨씬 길다는 사실은 창조주로서의 신 개념에 별다른 위협을 가하지 않는다. 그러한 은유 체계에서 끄집어낼 수 있는 것은 창조의 논리적 순서가 있다는 것이며, 그러한 논리적 순서가 역사적 해석을 허락하는지 아닌지는 성서의 문구로 결정될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정말 기독교 교리에 반하는 것은 ‘자연에도 오랜 역사가 있다는 관점’이 아니라 ‘태초를 가정하지 않는 우주론’임을 보게 될 것이다. 이를 위해 두 가지를 살펴봐야 한다. 첫째, 자연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에 비해 사소하다는 관점이 한때의 시대정신으로 굳어지게 되는 여정을 살펴봐야 한다. 둘째, 신의 섭리를 성서와 자연 중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가를 둘러싼 논쟁거리를 살펴봐야 한다. 이를 살펴보는 것은 또한 과학적 작업의 성격이 무엇인지를 알게 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