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속화와 민주주의 (봉인 해제)/자연의 역사와 우주론

자연의 역사와 우주론 3. 태초(빅뱅)를 둘러싼 논쟁 (수정)

착한왕 이상하 2010. 2. 2. 20:10

(3) 태초를 둘러싼 논쟁

자연에도 역사가 있다면, 그 출발점을 가정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정당하다. 하지만 자연의 역사가 태초를 가정하는 전일적 우주 역사 HCH 속에 귀속되어야 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기독교의 신 개념과 양립하기 힘든 우주론은 빅뱅 가설에 근거한 우주론이 아니라 ‘태초를 가정하지 않는 우주론’이다.

 

빅뱅 가설은 과학적으로 확정된 가설이 아니다. 빅뱅 가설은 일부 발견에 사변(speculation)이 개입된 하나의 우주론일 뿐이다. 현대 과학은 태초의 물음을 다룰 정도의 수준에 도달하지 못했다. 이러한 까닭에, 태초를 가정하지 않는 우주론도 빅뱅 가설에 근거한 우주론과 마찬가지로 존중되어야 한다. 하지만 ‘빅뱅 가설’이 미국이라는 강대국의 과학을 상징하게 되면서, 또한 우주에 대한 대중의 동경심을 자극하는 출판물들의 홍수 속에서, 빅뱅 가설이 마치 확증된 과학적 가설인 것처럼 회자되는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다른 은하계의 존재는 20세기에 들어서야 공인되었다. 이를 감안할 때 빅뱅 가설이 정말 확증된 과학적 가설이라면, 빅뱅이야말로 인류 역사를 통틀어 최대의 발견일 것이다. 하지만 천체 현상은 아직까지는 ‘조작 실험(operational experiment)’의 대상이 아니다. 즉, 자르고, 부수고, 염색하는 등의 실험 대상은 아니라는 것이다. 천체 현상은 여전히 빛, 라디오파, X-선 등을 매개로 한 관측 대상이다. 또한 소규모 실험실에서 천체 현상을 모방하여 예측 가능하게 해주는 이론도 부재한 상태이다. 다시 말해, 그 어떤 우주론도 재생산 가능한 측정량과의 연결성에 의해 제한된 과학적 이론의 수준에 도달한 것은 아니다.

 

빅뱅 가설에 근거한 우주론이 문제가 되는 이유 중 하나는 수십 차례의 수정 과정을 거치는 동안 여러 사변이 개입되었다는 데 있다. 그러한 사변 중에는 빅뱅 가설을 살려내기 위해 임시 변통적으로 도입되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는 것도 있다. 빅뱅 가설에 근거한 여러 우주론 중 현재 표준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급팽창 우주론(inflationary theory of universe)’을 받아들이려면, ‘차가운 암흑 물질(cold dark matter)’의 존재를 인정해야만 한다. 그러한 암흑 물질은 에너지 전파와 관련된 복사와 무관한 것으로 가정되었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관측 불가능하다. 이러한 까닭에, 실험과 관측을 중요시 하는, 즉 측정 전통에 서있는 천문학자들은 빅뱅 가설 자체를 ‘임시 변통적 가설(ad hoc hypothesis)’로 규정하기도 한다. 그들의 우주론은 태초를 가정하지 않으며, 물질과 시공간의 관계에 대한 입장도 빅뱅 가설 옹호자들과 다르다. 이를 짧은 글 속에서 규명하는 것은 어려운 작업이다. 그러나 ‘적색편이(redschift)’ 현상과 관련하여 급팽창 우주론이 탄생한 과정을 살펴보는 것은 빅뱅 가설을 의심하는 이들의 입장 무엇인지를 알게 해줄 것이다.

 

통상적으로 알려진 ‘허블의 법칙(Hubble's law)’에 따르면, 지구에서 멀리 떨어진 은하계나 강한 전파를 방출하는 준성(quasar)은 파장이 긴 쪽으로 편향된 스펙트럼, 즉 적색편이를 보인다.

 

• 속도=H × 거리

 

위 수식에서 H는 허블 상수를 뜻한다. 속도는 적색편이의 정도에 따라 결정된다. 적색편이가 큰 성체(星體)일수록 빠른 속도로 멀어지는 것으로 해석되는 까닭에, 속도는 적색편이의 비교만으로도 결정 가능하다. 그러나 허블 상수를 정하는 데 필요한 거리를 결정해주는 신뢰할만한 방법은 없는 상태이다. 거리 측정 방법에 따라 허블 상수는 현재 50에서 85 사이의 편차를 나타낸다. 적색편이가 정말 빅뱅에 대한 결정적 증거라면, 허블 상수의 값에 따라 태초의 시점도 다르게 계산된다. 허블 상수가 클수록 해당 성체는 더욱 빠르게 지구에서 멀어지는 것으로 결정되는 까닭에, 역으로 빅뱅의 시점은 현재에 가까워진다. 빅뱅을 전제한 급팽창 우주론에 따르면, 우주의 나이는 150억년으로 추정된다. 만약 허블 상수가 80이라면, 우주의 나이는 80억년으로 대폭 축소된다. 이때 빅뱅 가설에 따른 우주의 나이보다 더 오래된 별도 있다는 모순이 발생하게 된다. 하지만 빅뱅 가설의 진위 여부를 가리기 위한 논쟁에서 더욱 중요한 문제는 다음이다.

 

• 통상적으로 알려진 허블의 법칙에서 속도는 무엇의 속도인가?

 

빅뱅 가설에 근거한 우주론에서 그 속도는 물체의 운동이 아닌 무한소의 점과 같은 것에서 폭발하면서 생겨난 시공간의 팽창과 관련되어 있다. 이러한 까닭에, 우주 어느 곳을 중심으로 잡든 은하계들은 서로 멀어진다. 그것도 동질적(homogeneous)으로 멀어진다. 반면 허블이 생각한 원래의 수식은 ‘측정된 적색편이의 정도=H × 거리’였다. 여기서 적색편이의 정도는 다양한 해석에 대해 열려 있었다. 그것은 시공간의 팽창뿐만 아니라, 물체의 실제 운동, 성체의 나이, 빛 에너지 손실, 그리고 강한 중력장 등과 관련될 수 있다. 어떤 해석을 받아들이는가에 따라 우주론도 다를 수 있다. 이를 보기 위해 세 가지 해석만 언급한다.

 

• 적색편이 현상을 시공간 팽창과 연관시키는 해석

우주는 기하학적 점과 같은 것에서 폭발하여 현재에 이르렀다는 빅뱅 가설이 의지하고 있는 해석이다. 빅뱅 이전의 상태에 대한 예측은 불가능하며, 시공간은 오로지 빅뱅 이후의 산물이다. 적색편이는 시공간의 동질적 팽창에 기인한 것으로 해석된다. 물질의 집중은 중력을 발생시키기 때문에, 물질은 빅뱅 이후의 시공간의 구조에 영향을 미친다. 하지만 물질의 분포 및 변화 방식은 팽창하는 시공간의 양태(mode)로 여겨질 수 있다. 따라서 시공간을 물질이 점유한 장소 및 변화하는 방식과 연관시켜 이해하는 경우, 시공간은 유한한 것이 된다. 반면에 시공간을 우주의 팽창 가능성에 대한 논리적 조건으로 보는 경우, 우리에게 필요한 시공간 개념은 무한한 것이어야 한다. 시공간 개념의 이러한 이중성(duality)은 빅뱅 가설에 근거한 우주론에서는 전제되어야 하는 것이다.

 

• 적색편이 현상을 물체의 운동과 연관시키는 해석

어떤 물체가 관측자에게서 멀어지는 방향으로 운동할 때, 적색편이 현상이 나타난다. 이를 ‘도플러 효과(Doppler effect)’라 한다. 적색편이를 물체의 운동과 연관시켜 해석하는 경우, 적색편이 현상은 시공간의 팽창이 아닌 빠른 속도로 멀어지는 은하계의 운동에 대한 간접적 증거가 된다. 이때 팽창은 오로지 물체의 운동에 근거한 까닭에, 시공간은 물질의 활동 상태에 의존적이다. 즉, 시공간은 물질의 양태로 여겨진다. 적색편이 현상과 관련된 대폭발은 시공간을 발생시킨 사건이 아니라 방대한 우주의 한 귀퉁이에서 발생한 사건일 뿐이다. 이때 우주는 무한한 것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다. 우주 어느 곳이든 대폭발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우주는 영역화될 수밖에 없다. 한 영역의 소멸은 다른 영역의 물질 생성에 기여하는 까닭에, 우주는 영역들로 계층화된 유기적 그물망으로 여겨진다. 알벤(H. Alfvén)은 이러한 우주론을 주장하였다. 알벤은 준중성(quasineutrality)의 전리기체 상태로 우주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물질인 플라즈마(plasma) 연구에서 탁월한 업적을 남긴 사람이다. 그는 자신의 우주론만이 올바른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았다. 실험 전통을 중시하는 알벤의 진의는 관측에 근거한 우주의 연구가 반드시 특정 우주론의 가설을 전제하거나, 그러한 가설을 정당화하기 위한 목적에 종속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 적색편이 현상을 성체의 나이와 연관시키는 해석

생성 시기의 성체일수록 강한 적색편이를 나타낸다는 주장도 있다. 이러한 주장은 우리 은하계와 가까운 지점에 위치한 또 다른 은하계 근처의 준성에서 방출된 X-선 관측에 근거하고 있다. 이때 준성은 근처 은하계의 쇠퇴 과정과 맞물려 새로운 은하계의 탄생을 알려주는 신호탄에 비유될 수 있다. 우주 어느 곳에서나 은하계의 역사가 가능한 까닭에, 물질은 생성과 소멸의 영원한 반복 속에 보존된다. 빅뱅 가설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미국에서 쫓겨나 독일 막스 플랑크 천문연구소 소장으로 활동 중인 아프(H. Arp)는 주장한 이러한 우주론을 주장하였다. 아프의 우주론도 태초를 가정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아프의 우주론에서는 우주의 물질 분포 방식을 팽창하는 시공간과 연관시킬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빅뱅 가설에 근거한 표준 이론, 즉 급팽창 이론은 적색편이 현상을 시공간 팽창과 연관시키는 해석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때 우주의 물질 분포 방식도 시공간의 팽창에 영향을 받는 것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다. 이를 가능하게 해주는 이론은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이론(theory of general relativity)이다. 특수 상대성이론과 달리, 일반 상대성이론에서는 시공간의 객관적 구조가 가정된다. 구소련 수학자 프리드만(A. Friedmann)은 아인슈타인의 방정식에 포함된 ‘우주 상수(cosmological constant)’의 결정 방식에 따라 다양한 우주 모형이 가능함을 증명했다. 따라서 프리드만이 빅뱅 가설을 전적으로 옹호한 것은 아니다.

 

빅뱅 가설에 근거한 우주론이 받아들여지게 된 결정적 계기로 펜지아스(A. Penzias)와 윌슨(R.W. Wilson)에 의해 우연히 발견된 우주배경복사 CMBR(Cosmic Microwave Background Radiation)이 거론된다. 빅뱅 가설이 옳다면, 대폭발 후 시공간의 팽창과 함께 우주는 식게 된다. 그 잔해로 등방성(isotrope)을 가진, 즉 사방에서 동일한 양으로 관측되는 CMBR이 가정되었다. CMBR이 발견될 당시, 빅뱅 가설 지지자들은 CMBR을 20°K에서 30°K로 예측했다. 사방에서 감지되는 CMBR의 실제 관측 결과는 3.5°K에 불과했다. 이러한 예측과 관측 결과의 큰 차이는 빅뱅 가설에 대한 반례로 여겨질 수 있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CMBR은 빅뱅의 흔적이 아니라 에너지 전파 과정의 잔해물로 여겨질 수도 있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펜지아스와 윌슨은 자신들의 발견이 빅뱅 우주론을 지지해주는 증거로 사용되는 것을 경계했다. 빅뱅 가설 지지자들은 CMBR의 관측 결과에 부합하도록 빅뱅 우주론을 수정하는 과정에서 ‘급팽창 우주론’을 탄생시켰다.

 

빅뱅과 함께 시공간의 팽창이 시작되고, 먼지 상태의 물질이 모여 항성을 형성하며, 항성들은 은하계를 형성한다. 그런데 천억 개 정도로 추정되는 은하계들의 분포 방식은 불규칙적이다. 반면 CMBR은 등방성의 특성을 갖고 있다. 은하계 분포의 불규칙성과 CMBR의 등방성이 보여주는 개념적 불일치성을 해소할 목적으로 급팽창 우주론이 제안되었다. 빅뱅 이후 수 분만에 우주가 급팽창하면서 상당수의 은하계들이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로부터 거대한 중력장을 형성하는 은하계들이 이토록 많은 이유는 설명되지 않는다. 수많은 은하계들의 중력으로 인해 우주는 언젠가 팽창을 멈출 수도 있다. 빅뱅 가설이 이론적으로 근거하는 일반 상대성이론에 의하면 물질 집중에 의한 중력은 시공간의 구조에 영향을 미치고, 역으로 시공간의 구조는 물질 분포 및 변화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중력에 의해 우주의 팽창이 멈출 수 있는 경우에 해당하는 1cm3당 물질량은 ‘1 오메가(omega)’로 가정된다. 이때 우주가 팽창하면서도 수많은 은하계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0.5 이상의 오메가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실제 관측된 물질량은 0.01, 0.02 오메가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그 정도의 물질량으로는 지금 존재하는 수많은 은하계를 형성할 수 없다는 모순이 발생한다. 또한 일반 상대성이론과 고전적인 뉴턴 역학의 차이도 사소한 것이 되어버린다. 급팽창 우주론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잃어버린 물질(missing matter)’들이 있어야 한다. 일명 ‘차가운 암흑 물질(cold dark matter)’은 그러한 ‘잃어버린 물질’로 가정된 것이었다. 그런데 암흑 물질은 복사파를 방출하지 않은 것으로 가정되었기 때문에 직접적인 관측 대상이 될 수 없다. 이러한 이유로 실험 전통을 중시하는 천문학자들은 급팽창 우주론을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빅뱅 가설에 근거한 급팽창 우주론은 다음과 같은 두 종류의 문제들을 발생시킨다.

 

• 어떻게 무한한 밀도로 모든 물질이 기하학적 점과 같은 곳에 응축되어 존재할 수 있었을까? 새로운 관측 사실이 발견될 때마다 수정을 거듭하여 탄생한 빅뱅 이론은 태초가 있어야 한다는 전제에 짜 맞춰진 것은 아닌가?

 

• 물질의 분포 방식이 시공간의 팽창에 의존적이기 때문에, 물질은 시공간의 양태로 이해될 수 있다. 한편, 물질 집중에 의한 중력은 시공간의 구조에 영향을 미친다. 시공간을 물질이 점유한 장소 및 변화하는 방식과 연관시켜 이해하는 경우, 시공간은 유한한 것이 된다. 시공간은 항상 팽창 중에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시공간을 우주의 팽창에 대한 논리적 조건으로 보는 경우, 우리에게 필요한 시공간 개념은 무한한 것이야 한다. 결국 시공간 개념은 이중적 측면을 띠게 된다. 그 하나는 팽창 중에 있는 유한한 시공간의 개념이고, 다른 하나는 팽창 가능성의 논리적 조건으로 파악되는 무한한 시공간의 개념이다. 시공간 개념의 이러한 이중적 측면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앞에서 태초를 가정하는 우주론을 논할 때 그 어떤 자연의 역사도 우주 전체의 역사, 곧 ‘전일적 우주 역사’ HCH 속에서 이해되어야 함을 살펴봤다. 생물계의 진화를 포함한 자연의 역사로 우리에게 확실한 것은 지구에서 발생했다. 그러한 자연의 역사를 전일적 우주 역사 HCH 속에 귀속시켜야 할 필연적 이유가 있는가?

 

위에서 첫 번째 종류의 물음들이 과학적 작업의 성격과 관련되어 있다면, 두 번째 종류의 물음들은 철학적인 측면에서의 우주론과 관련되어 있다. 첫 번째 종류와 관련하여 실험 전통을 중시하는 과학자들은 무한한 밀도로 응축된 물질 덩어리의 존재를 수학적으로만 가능할 뿐, 물리적으로 가능한 것으로 보지 않는다. 이러한 입장을 고수하는 이들이 과학적 작업에서 이상화된 수학적 모형이나, 그런 모형과 관련된 사고 실험의 유용성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과학에는 많은 이상화된 수학적 모형들이 있다. 추상화 과정을 거쳐 얻어진 그러한 모형은 시공간적 크기를 가지고 실제로 존재하지는 않지만, 현상을 설명하고 예측하는 데 도움을 준다. 그런데 빅뱅은 구체적인 예측 도구로 사용될 수도 없을 뿐더러, 이상화된 수학적 모형으로 설정된 것도 아니다. 그것은 아득한 과거에 존재한 것으로 전제되었을 뿐이다. 또 빅뱅 가설을 의심하게 만드는 관측 사실이 발견되었을 때마다 빅뱅 가설에 맞춰 그러한 사실을 설명할 수 있도록 수십 차례의 수정 과정을 거쳐 탄생한 것이 급팽창 우주론이다. 그 수정 과정은 기존 가설에 새로운 가정을 뒤섞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이에 대한 실례로 차가운 암흑 물질을 가정하는 것을 들 수 있다. ‘암흑 물질 가정’을 실험적 제한에서 벗어난 사변의 결과로 보는 이들은 빅뱅 가설을 검증된 과학적 가설로 보지 않는다.

 

제아무리 최적 설명의 조건을 갖춘 이론일지라도 실험적 제한에 구속되어 있지 않다면, 그것은 모든 과학자의 동의를 얻기 힘들다. 실험적 제한에 구속되어 있는 물리학의 이론으로 고전역학과 전자기학을 들 수 있다. 이들 두 이론은 물리 현상에 대한 완벽한 설명력을 제공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고전역학과 전자기학의 가설들은 특정 조건 아래 재확인 및 재생산 가능한 측정량에 의해 그 실험적 증거를 확보한 상태이다. 과학의 이론대로 세계가 존재해야 한다면, 고전역학이나 전자기학은 정확한 것으로 여겨질 수 없다. 타원 궤도도 실제 행성 운동을 이상화시킨 것일 뿐, 행성은 절대 동일 궤도를 따라 운동하지 않는다. 반면에 설명 및 예측을 위한 ‘분석적 도구(analytical tool)’로 이론을 보는 경우, 고전역학과 전자기학은 경험적인 설명 영역의 경계를 명확히 함으로써 살아남은 이론들이다. 그러한 설명 영역의 경계가 재확인 및 재생 가능한 측정량과 맞물린 조건들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에, 설명 및 예측의 도구로 이론을 보는 관점은 전자나 유전자를 그저 이론적 구성물로 보는 철학 진영의 반실재론(anti-realism)에 빠지지는 않는다. 과연 빅뱅 가설의 지지자들이 기대고 있는 일반 상대성이론은 고전역학 및 전자기학과 대등한 지위를 획득했는가? 일반 상대성이론이 고전역학보다 더 큰 설명력을 갖고 있는 것은 맞지만, 일반 상대성이론에 대한 증거는 불충분하다. 게다가 고전역학이나 전자기학과 달리 일반 상대성이론의 조건에 따른 실험 설계는 매우 힘들다.

 

급팽창 우주론에 대비되는 플라즈마 우주론의 지지자들의 주무기는 전자기학이다. 우주 대부분을 구성하는 물질이 플라즈마라는 데에는 이견이 있을 수 없다. 플라즈마의 활동에 의한 자기장의 분포와 변화가 어떤 의미에서는 시공간 그 자체로 여겨질 수 있는 까닭에, 시공간은 물질의 양태가 된다. 따라서 급팽창 우주론과 플라즈마 우주론의 관계는 ‘태초를 가정하는 우주론과 태초를 가정하지 않는 우주론의 대립’, ‘물질을 시공간의 양태로 보는 관점과 시공간을 물질의 양태로 보는 관점의 대립’, 혹은 ‘일반 상대성이론 중심의 우주론과 전자기학 중심의 우주론의 대립’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

 

적색편이를 시공간의 팽창이 아니라 성체의 운동과 연관시켜 해석하면, 대폭발을 전일적 우주 역사의 태초로 이해해야 할 필연적 이유는 없다. 그것은 단지 방대한 우주의 한 귀퉁이에서 발생한 사건으로 여겨질 수 있기 때문이다. 우주 어느 곳에서나 그러한 폭발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에, 팽창하는 영역들과 그렇지 않은 영역들로 나눠진 우주 속에서 물질은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게 된다. 은하계들도 플라즈마의 전류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은 우주 탐사에 의해 증명되었지만, 또 플라즈마 우주론이 오랜 기간 동안 증거가 축적된 전자기학의 실험 전통에 서있지만, 물질 집중에 의한 중력장 발생을 구체적으로 규명해야 한다는 난제가 남게 된다. 적색편이를 성체의 나이와 연관시켜 해석하는 경우, 빅뱅을 포함한 그 어떤 거대한 대폭발 가능성도 고려할 필요는 없게 된다. 적색편이를 성체의 나이와 연관시키는 해석에서 물질도 생성과 소멸의 역사를 갖게 되는 까닭에, 하나의 은하계가 소멸한다는 것은 다른 은하계의 탄생을 뜻할 뿐이다. 하지만 물질의 생성과 소멸의 역사를 규정해주는 방정식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여전히 예측력을 결여한 잠정적 가설일 뿐이다.

 

인간은 은하계를 조작 실험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는 거대한 ‘우주적 걸리버(Cosmic Gulliver)’가 아니다. 물리적 도구와 추상적인 이론을 바탕으로 자연에 대한 이해가 확대되더라도, 이 방대한 우주의 태초를 따지는 것은 과학적 지식 체계의 영역에 포섭될 것이라고 낙관할 수 없다. 인간이 그 몸집은 은하계보다 크고 두뇌는 태양계만 한 ‘우주적 걸리버’였다면, 역으로 지금 우리에게 일상적인 현상을 설명하는 것이 난제가 될지도 모른다. 중력, 전자기, 양자 현상 모두를 매끄럽게 통합해주는 이론은 아직 존재하지 않으며, 또 그러한 이론이 물리학의 이상이라는 주장도 근거를 결여한 것이다. 중력, 전자기, 양자 현상 중 무엇을 설명의 중심축으로 잡는가에 따라 우주론도 달라질 수 있다. 빅뱅 가설에 근거한 급팽창 우주론이 마치 확증된 과학 이론처럼 회자되게 된 이유는 설명력, 예측력, 실험적 증거의 측면에서 다른 우주론보다 월등해서가 아니다. 그 이유는 과학에 외적인 정치적인 측면에서 찾아야 하며, 이는 이 작업에서 다루어질 것은 아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28의 두 번째 종류의 물음들, 즉 철학적 측면에서 우주론과 관련된 물음들을 살펴보자. 빅뱅 가설에 근거한 우주론의 옹호자는 그런 물음들에 긍정해야 한다. 무한한 밀도로 물질이 응축된 상태에 대해서는 물리적 의미에서의 시공간을 논할 수 없다. 빅뱅 이후에 팽창하는 시공간만이 물리적으로 의미 있는 시공간으로 여겨져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빅뱅은 질적 상태 변화를 수반한 전일적 우주 역사 HCH의 출발점이 된다. 이때 팽창된 상태의 시공간은 물질이 점유한 시공간을 뜻하기 때문에 유한한 것으로 파악된다. 이와 달리, 우주의 팽창 가능성 자체에 대한 논리적 조건으로 가정되는 시공간은 무한해야 한다. 태초를 가정하는 우주론에서는 이러한 ‘유한성과 무한성’의 이중적 측면을 갖는 시공간 개념이 전제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실제로 사용하는 시공간 개념은 물질에 의해 점유된 장소 및 주기적 현상에 근거하고 있는 까닭에, 시공간은 물질의 양태로 이해되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 누구도 일상생활에서 빅뱅에 의해 생성되고 팽창 중인 시공간 개념을 사용하지 않는다. 우주의 팽창 가능성에 대한 논리적 조건으로 파악되는 시공간 개념은 물질의 운동을 위해 신이 시공간을 창조했다는 고대 기독교의 관점과 양립 가능하다. 또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대상의 양적 속성이 유한하기 때문에, 무한한 밀도로 응축된 물질 덩어리도 ‘무(無)’로 여겨질 수 있다. 따라서 빅뱅 가설에 근거한 우주론이 기독교적 신을 반드시 전제할 필요는 없지만, 그러한 신 개념과 양립 가능하다는 것을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태초를 가정하지 않는 현대 여러 우주론도 빅뱅 가설에 근거한 우주론과 마찬가지로 우주에 대한 고정된 그림을 허용하지 않는다. 또한 태초를 가정하지 않는 우주론에서도 생물계의 출현 역사가 인정된다. 그러한 자연의 역사는 행성에서 발생하는 까닭에 항상 국소적이다. 우주 어느 곳에서나 국소적인 자연의 역사가 발생할 가능성은 모든 현대 우주론에서 인정된다. 그러나 태초를 가정하지 않는 우주론에서는 국소적인 자연의 역사가 ‘전일적 우주 역사 HCH’ 속으로 귀속되지 않는다. 태초를 가정하지 않는 그러한 우주론에서 시공간은 물질의 양태로 여겨진다. 물질이 생성과 소멸의 영원한 반복 속에서 보존된다면, 빅뱅뿐만 아니라 빅뱅에 의한 시공간의 생성과 같은 것도 가정될 이유가 없다. 만약 생성과 소멸의 영원한 반복 속에 보존되는 물질을 창조한 존재를 가정한다면, 이것은 ‘자체 모순적’이다. 영원한 반복과 창조가 동시에 성립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태초를 가정하지 않는 우주론에 신을 등장시킨다면, 그것은 무에서 유를 창조한 기독교의 신 개념이 아닌 물질의 속성으로 여겨져야 한다. 물질의 속성으로 간주된 신 개념에 근거한 범신론(汎神論)을 기독교에 반하는 것으로 규정한 중세의 교황들은 적어도 매우 논리적인 사고의 소유자였다고 할 수 있다.

 

현재 과학기술은 서로 경쟁 관계를 맺고 있는 여러 우주론 중 무엇이 올바른 것인지를 결정해줄 수준에 도달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빅뱅 가설에 관심이 집중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에 뒤섞인 물질과 시공간에 대한 사변의 전통에서 벗어나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기독교가 지배한 지역에서 우주의 태초를 가정하는 것은 당연한 것처럼 여겨졌다. 이러한 이유로, 우주의 생성 과정을 다루는 담론, 곧 ‘우주생성론(cosmogeny)’은 서구 문화에 고유한 하나의 특징으로 여겨져야 한다. 실례로 18세기 어느 학자는 빅뱅과 같은 태초의 사건에 의해 시공간이 창조되었다고 가정했다. 우주의 초기에는 물질들이 무작위적으로 분포되어 있었다. 그는 중력을 신의 섭리를 반영하는 것으로 보았고, 중력으로 인해 우주 곳곳에 은하계가 형성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더 나아가 무생물에서 인간에 이르기까지의 ‘존재 사슬 도식’이 구현되는 장소가 행성이라고 주장했다. 그에게 행성의 본질은 그러한 존재 사슬 도식의 전개 그 자체였다. 따라서 그에게 다른 은하계나 지적인 외계인의 존재 가정이 기독교 교리에 반하는 것은 아니었다.

 

위에서 언급한 18세기 어느 학자는 칸트이다. 당시 허셀(W. Herschel) 남매에 의해 관측된 성운들을 다른 은하계로 해석한 칸트의 사변은 우주생성론의 일종이다. 칸트와는 다른 우주생성론도 있다는 것은 무엇을 암시하는가? 무에서 유를 창조했다는 신 개념의 다양성이다. 이러한 신 개념의 다양성이 유신론자를 혼란스럽게 할 이유는 없다. 그는 그러한 다양성을 자연에 깃든 신의 섭리가 인간에게 반영되는 여러 방식으로 해석하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신 개념의 다양성에 혼란스러워해야 할 인물은 유신론자가 아니다. 그러한 인물은 창세기의 기록을 글자 그대로 믿는 것만이 참다운 신앙에 전제되어 있다고 여기는 사람이다. 그는 성서를 은유 체계로 이해하고 신의 섭리를 자연에서 찾아보려고 했던 인물들조차 마치 자신의 오른팔인 것처럼 주장한다. 그러한 주장이 역사적 날조에 불과함을 알기 위해, 이제 존재 사슬의 논리적 구조와 그것에 대한 여러 해석 방식을 살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