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속화와 민주주의 (봉인 해제)/존재 사슬의 논리

수직선 (수정)

착한왕 이상하 2009. 11. 26. 06:15

 

창조 과학은 두 가지 점에서 받아들이기 힘든 입장이다. 성경의 기록을 과학적 증거보다 우선시 여기면서도 ‘과학’이라는 이름을 내세우는 것 자체가 과학을 왜곡하는 짓이다. 또 성경 기록을 자연 탐구의 기준으로 삼는 것은 기독교 역사를 왜곡하는 짓이다. 이 두 가지 왜곡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는 빅뱅 이론도, 진화 생물학도 아닌 자연 신학이다.

 

창조 과학 옹호자들은 자연 신학 전통의 ‘지적 설계(intelligent designer)’자 개념이 자신들의 지적 뿌리라고 주장한다. 창조 과학과 정통 자연 신학이 서로 양립하기 힘들다는 사실을 밝힌다면, 창조 과학이 과학뿐만 아니라 기독교 역사 자체를 왜곡한 것임을 알 수 있게 된다. 이때 창조 과학 진영은 기독교 근본주의의 입장인 광신적 복음주의의 한 분파에 불과한 것으로 규정된다. 즉, 창조 과학 진영은 정통 신학자들이나 종교학자들에게는 그저 광신도 집단의 행동 방식에 대한 연구 거리 정도일 뿐이다. 창조 과학의 맹점은 다음을 살펴볼 때 명백해질 것이다.

 

• 자연 신학 전통의 ‘지적 설계자’ 개념은 오랜 기독교의 역사 속에서 탄생한 여러 신 개념 중 하나일 뿐이다.

• 오로지 지적 설계자로서의 신 개념만이 기독교적이라고 강조한다면, 이것은 기독교의 다양한 신 개념을 부정하는 역사적 무지를 보여준다.

• 더욱이 창조 과학 진영의 주장과 달리, 자연 신학 전통은 창조 과학 옹호론에 사용될 수 없다.

• 따라서 창조 과학 진영은 기독교 역사에 무지한 광신도 무리일 뿐이다.

 

창조 과학의 여러 주장이 과학적 증거를 결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논하는 것은 너무나 쉽게 입증할 수 있기 때문에, 논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 창조 과학 옹호자는 사전에 성서의 기록에 반하는 것을 배제시키겠다는 태도를 갖고 있다. 성서의 기록은 과학적 증거로 확증 혹은 반증 가능한 가설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창조 과학 진영은 자신들에게 유리해 보이는 발견들을 조합하여 성서의 기록이 과학적으로 증명된 것처럼 과장한다. 이러한 과장은 광신도들에게는 먹힐지 모르나, 기독교를 믿는 건전한 과학자에게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이다.

 

과학적 증거를 결여하고 있는 창조 과학의 여러 주장은 빅뱅 이론 지지자들 및 진화 생물학 지지자들의 반박 대상이 되었다. 앞장에서 살펴봤듯이, 창조 과학의 여러 주장이 과학적 증거를 결여하고 있다는 사실로부터 빅뱅 가설이 증명되는 것은 아니다. 빅뱅 이론 지지자들은 태초의 우주가 기하학적 점과 같은 상태에서 폭발했다는 가설이 마치 충분한 실험적 증거를 바탕으로 한 정설처럼 주장하고 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그리고 창조 과학 진영과 진화 생물학 진영의 싸움은 미국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이 정치 세력과 결탁하여 창조 과학을 공교육 교과 과정으로 정착시켜보려는 시도를 둘러싼 갈등 맥락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진화가 지속적으로 진행된다는 것은 과학적으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진화 생물학이 생물학의 모든 입장을 대표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하지만 일부 진화 생물학자들은 창조 과학의 여러 주장이 과학적 증거를 결여했다는 사실을 이념적으로 이용한다. 그들은 그 사실을 밝히는 과정을 통해 ‘자연 선택 중심의 진화 생물학’이 마치 생물학 전체의 통합 이론인 것처럼 주장한다. 이는 창조 과학을 둘러싼 논쟁이 사회에 확산되면서 생물학 전반에 대한 잘못된 이해 방식을 대중에게 퍼트리는 원인이 되고 있다. 생물학은 곧 진화 생물학이라는, 혹은 진화 생물학이 통합 생물학이라는 주장은 과학적 증거를 결여한 것이다. 자연 선택만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진화 생물학의 특정 입장은 진화의 다양한 원인들을 무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창조 과학의 여러 주장이 과학적 증거를 결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밝히는 것은 좋다. 그러나 이를 이용하여 특정 과학 이론으로 세계의 모든 현상을 이해할 수 있다는 주정 또한 창조 과학 진영의 주장만큼이나 맹목적이다.

 

존재 사슬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다루면서 자연 신학의 역사를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그 이유는 창조 과학의 약점을 역이용하여 특정 과학 분과의 세계 이해 방식을 과대 포장하지 않으면서도, 창조 과학의 불합리성을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무종교인이 과학과 종교의 갈등에 대한 문제에 관심을 가질 때 기독교 역사가 성경 문구 중심의 역사만은 아님을 알아야 한다. 기독교 역사 속에서 나타난 다양한 신 개념을 알고 있다면, 과학적 발견을 둘러싼 논쟁에서 무종교인은 기독교 말살론을 주장할 필요가 없다. 창조 과학 진영은 다양한 신 개념을 인정하기보다는 지적 설계자 개념을 유일한 신 개념으로 간주하고, 지적 설계자 개념에 근거한 자연 신학 전통을 자신들의 지적 뿌리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은 날조된 것에 불과함을 보게 될 것이다. 성서의 기록만을 모든 평가의 기준으로 삼는 창조 과학 진영이야말로 기독교의 건전한 사회적 기능을 가로막는 장본인들이다.

 

 

수직선

 

‘존재 사슬’은 자연의 위계질서를 함축한 도식으로 아리스토텔레스에 기원을 두고 있다. 존재 사슬의 도식은 자연에 대한 시기별 이해 방식에 따라 여러 신 개념을 산출했다. 자연에서 신의 섭리를 찾아보려는 전통이 서양 사상사의 한줄기인 까닭에, 신 개념의 다양성을 반기독교적인 것으로 몰아세울 수 없다. 그리고 존재 사슬 도식의 논리적 구조는 자연의 역사를 허락할 수도, 허락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이때 자연의 역사를 허락하는 존재 사슬에 대한 해석은 ‘전일적 우주 역사’ 속에 귀속되는 경우에 국한된다. 태초를 가정하는 우주론은 기독교적이라 불릴 수 있는 다양한 신 개념에 공통된 ‘창조의 관점’과 양립 가능하기 때문이다.

 

자연에는 역사가 없거나, 자연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에 비해 사소하다는 관점만이 기독교의 신 개념과 양립 가능하다는 주장은 역사적 근거를 결여하고 있다. 그렇게 주장하는 이들은 성서의 기록을 글자 그대로 믿는 것만이 참다운 신앙이라고 여기는 착각에 빠져 있다. 그들은 기독교인이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자연에서 신의 섭리를 찾고자 했던 모든 이들을 마치 창조 과학의 선조인 양 각색하고, 또 성서의 문구에 표면적으로 반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특정 과학 이론을 공격 대상으로 삼는다. 그들이야 말로 기독교의 건전한 사회적 기능을 가로 막고 사회의 분열을 조장하는 장본인들이다. 이 점은 존재 사슬의 논리적 구조에 대한 다양한 해석 가능성을 이해할 때 분명해진다.

 

존재 사슬의 도식을 구성하면서 그 논리적 구조를 분석해 보자. 존재 사슬의 도식 구성하기 위해서는 유한한 길이의 수직선이 있어야 한다. 수직선 위에 나열된 점들은 존재하는 것들의 각 계층을 뜻한다. 신 혹은 신을 상징하는 어떤 속성은 수직선의 정점에 위치하게 된다. 이러한 수직선을 90도 시계 방향으로 회전한 경우 다음의 도식을 얻을 수 있다.

 

위 수직선의 각 점은 존재 사슬의 계층을 나타낸다. 존재 사슬의 논리적 구조는 각 계층 간의 관계, 계층들의 수, 신의 속성 등을 논할 때 그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한 논리적 구조를 파악하려면, 먼저 존재 사슬의 위계질서가 ‘1차원적이라는 것’의 의미를 분명히 해야 한다. C1을 존재 사슬의 정점(頂点)을 차지하는 신이라고 한다면, 그리고 수직선의 제일 하부에 위치한 계층을 C0라고 한다면, 존재 사슬의 도식은 1을 극한값으로 갖는 0과 1 사이의 선분에 비유될 수 있다. 이때 다음의 ‘이행성 조건(transitivity condition)’을 만족하는 {C0, ..., Ci, ..., Cj, ..., Ck, ..., C1}의 사슬을 생각해 볼 수 있다.

 

• 하부와 상부의 관계를 ‘R’이라고 할 때 ‘CiRCj’이고 ‘CjRCk’이면, ‘CiRCk’도 성립한다. (‘CiRCj’는 Ci가 Cj의 하부에 위치한 계층임을 뜻한다.)

 

여기서 위계질서를 나타내는 하부와 상부의 관계 R은 수직선의 정점인 C1의 해석 방식에 따라 파생 관계 등 다른 종류의 관계와 양립 가능할 수도, 양립 가능하지 않을 수도 있다. 여기서는 파생 관계를 고려해 보자. 기독교의 신은 무에서 유를 창조한 존재로 가정되었기 때문에, 정점을 포함한 수직선 전체에 걸친 ‘단순한 파생 관계’는 R과 양립할 수 없다. ‘단순한 파생 관계’ O는 다음을 뜻한다.

 

• Ck가 Cj에서, 그리고 Cj가 Ci에서 파생한 경우, Ck는 Ci에서 파생한 것으로 여겨져야 한다.

 

수학적 구성 방식에서 R과 위의 파생 관계 O는 이행성 조건을 만족한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그러나 단순한 파생 관계가 정점을 포함한 수직선 전체에 걸쳐 해당하고, 수직선의 정점 C1에 신이 위치한다고 가정하는 경우, 역설이 발생한다. 그렇게 가정하는 경우, 신도 수직선 제일 하부를 점유한 계층 C0, 실례로 물질계에서 파생되었다고 결론지어야 한다. 이는 신이 모든 것을 창조했다는 가정에 모순된다. 이러한 모순을 해결하는 가장 단순한 방법은 RO의 양립 가능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이때 수직선의 정점이 수직선의 극한이라고 가정한 후, 신이 모든 계층을 동시에 창조했다는 ‘동시 창조설’과 같은 것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동시 창조설에 따르면, 수직선의 극한에 위치한 신은 우주에 내재적인 존재가 아니라 외부에서 우주를 창조한 존재가 된다. 전능한 신은 그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은 채 존재할 수 있는 유일한 ‘실체(substance)’로 가정되었다. 그러한 유일한 실체로서의 신이 수직선상의 모든 계층을 동시에 창조했다고 가정하면 ‘단순한 파생 관계’는 성립할 수 없게 되며, 언급된 역설도 발생하지 않는다.

 

그러나 ‘창조’가 항상 ‘동시 창조’를 전제할 필연적 이유는 없다. 동시 창조설은 계층 간 차이에 주목할 수밖에 없었던 시절에 환영을 받았다. 계층 간 차이보다는 유사성에 주목하는 경우, 하부 계층 없이는 상부 계층도 존재하기 힘들다. 또 모든 계층은 그 복잡성의 양태와 정도에서 차이를 보일 뿐 동일한 질료로 구성되었다는 가정도 부정하기 힘들다. R의 위계질서가 창조의 논리적 순서나 파생 관계를 무조건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신을 그 어떤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는 실체로 가정하고 수직선의 극한에 위치시키는 경우, 수직선 전체에 걸친 단순한 파생 관계 OR이 서로 배타적일 이유는 없다. R의 정점은 신이지만, 신이 수직선의 극한에 존재하는 까닭에 O의 적용 범위에 속하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이때 생각해 볼 수 있는 신 개념은 여러 가지이다. 우선 ‘연속 창조설’과 관련된 신 개념을 들 수 있다. 신은 수직선 하부에서 상부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계층을 연속적으로 창조했다. 이때 ‘연속적이라는 것’은 수직선상의 점들의 배열 방식도 연속적임을 함축하고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점의 위치와 간격을 논할 때 살펴볼 것이다.

 

신을 수직선의 극한에 위치시키는 경우, OR의 양립 가능성이 연속 창조설에 의해서만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이를 알아보기 전에 동시 창조설과 연속 창조설을 좀 더 자세히 비교해 보자.

 

 

 

 

위 도식에서 계층들의 순서 ‘C0, ..., Ci, ..., Cj, ..., Ck, ...’에 대응된 ‘0, ..., i, ..., j, ..., k, ...’는 창조의 순서를 나타낸다. 정점에 위치한 신은 0번에서 계층 C0를, i번에서 계층 Ci를, j번에서 계층 Cj를, k번에서 Ck를 창조한 것으로 해석된다. 신은 실체로 가정된 까닭에, 그 존재 방식은 그 어떤 다른 것에도 의존하지 않는다. 신이 모든 계층을 창조한 까닭에, 각 계층을 구성하는 모든 것은 신에 의존적이다. 실체로서의 신이 수직선의 극한에 위치한다는 것은 우주를 창조했지만 우주 속에 내재하지는 않음을 뜻한다. 창조에 의한 파생 관계는 오로지 수직선 내부에 해당한다. 이때 ‘0, ..., i, ..., j, ..., k, ...’의 순서에 따라 계층들을 창조했다는 것이 연속 창조설이다. 이에 반해 ‘0 = ... = i = ... = j = ... = k =...’가 성립한다면, 위 도식은 동시 창조설을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된다. 이는 동시 창조설과 연속 창조설의 차이가 실제로는 그리 크지 않음을 암시한다.

 

동시 창조설과 연속 창조설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실체로서의 신은 우주에 내재하지 않으며, 무에서 유를 창조한 까닭에 단순한 ‘질료인(material cause)’로 여겨질 수 없다. 반면 신은 작용인(efficient cause)으로 여겨질 수 있다. 신이 창조 행위의 주체, 곧 행위자(agent)인 까닭에, 신의 작용 없이 각 계층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신이 창조한 계층들은 수직적 위계질서를 형성하기 때문에, 신의 창조 행위에는 그러한 위계질서에 담긴 목적이 있어야 한다. 창조의 목적이 자연 현상에 반영될지라도, 그 목적 자체는 자연에 내재적인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 부여된 것이어야 한다. 동시 창조설과 연속 창조설의 이러한 공통점들을 인정할 때 다음의 난제가 발생한다.

 

• 수직선에 비유된 우주의 위계질서가 신의 작품이라면, 그 위계질서는 어떻게 유지되는가?

 

신이 모든 것을 창조했다고 하여도, 이것이 삼라만상이 신의 섭리에 따라 유지되는 것을 논리적으로 보장해주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위 물음에 답하는 것은 신학적 측면에서 매우 중요하다.

 

• 신은 이 우주의 모든 계층을 동시에 혹은 연속적으로 창조했다.

• 우주의 위계질서는 유지된다.

• 창조만으로는 우주의 위계질서가 유지되는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

• 신은 창조 후에도 상태 유지를 위해 우주에 연속적으로 개입하거나, 아니면 태초에 상태 유지를 위한 힘을 우주에 불어넣었다고 가정할 수 있다.

 

신이 창조 후에도 상태 유지를 위해 우주에 연속적으로 개입한다는 가정은 ‘우인론(occasionalism)’의 핵심이다. 우인론을 받아들이면, 신의 개입 없이는 모든 것은 순간적으로만 존재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신의 개입 없이 우주의 위계질서는 유지될 수 없다. 신의 개입 방식에 따라 우인론을 세부적으로 분류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동시 창조설 및 연속 창조설 모두 우인론과 양립 가능하며, 물질에 내재한 상태 유지의 힘이나 작용력의 가정이 부정된다는 것이다. 이때 우주에서 자율적 모습을 찾아보기란 힘들어진다.

 

위 논증에서 신이 태초에 상태 유지를 위한 힘을 우주에 불어넣었다는 결론을 살펴보자. 뉴턴이 원래 생각한 ‘관성(inertia)’은 질량의 속성이 아닌 물질의 상태 유지와 관련된 힘을 뜻했다. 충돌 과정에서 관성의 총양은 점차 줄게 되며, 물질의 운동은 언젠가는 멈추게 된다. 신은 물질의 운동이 멈춘 시기에 다시 물질에 관성을 불어넣게 된다. 이때 물질이 태초의 관성을 잃어버리기 전까지는 우주의 상태는 신의 개입 없이도 유지된다. 부분적으로나마 자율적인 우주의 모습을 뉴턴에게서 엿볼 수 있다. 이제 흥미로운 물음은 다음이다.

 

• 자율적으로 영원히 유지되고 발달하는 우주의 개념은 기독교 전통에서 불가능한 것인가? 그러한 우주의 개념은 무에서 유를 창조했다는 신 개념과 양립할 수 없는 것인가?

 

신이 창조주이면서 삼라만상의 궁극적인 목적이라고 가정해 보자. 이러한 가정은 동시 창조설 및 연속 창조설을 관통하고 있다. 동시 창조설이든 연속 창조설이든, 그것은 창조를 신의 전능함과 연관시켜 보려는 의도를 깔고 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고 삼라만상의 궁극적인 목적으로 신을 가정하더라도, 신의 전능함이 반드시 동시 창조나 연속 창조로 귀결되어야만 하는 이유는 없다. 신이 운동의 조건으로 시공간을, 그리고 그 다음으로 물질을 창조했다고 해보자. 만약 신이 물질에 어떤 작용력이나 형성력(formative force)을 부여한 후 더 이상 우주에 개입하지 않는다고 해보자. 그러한 작용력이나 형성력에 의해 우주의 위계질서가 생성되고 보존되는 것이라면, 신은 태초 이후에는 작용인으로 여겨질 수 없게 없다. 우주의 위계질서가 우연적인 것이 아니라면, 신은 여전히 창조주이자 우주 존재의 목적으로 여겨질 수 있다.

 

신이 자율적 우주를 창조했다는 관점은 수직선의 하부와 상부 관계를 나타내는 R과 단순하지 않은 파생 관계를 나타내는 O의 양립 가능성을 허락한다. 우주 존재의 목적인 신은 실체로서 수직선의 극한에 위치하기 때문에, 수직선의 정점과 직접적인 파생 관계를 맺게 되는 계층은 없게 된다. ‘자율적 우주 창조설’도 우주의 자율성 정도를 논할 수 있고, 이에 따라 자연의 역사를 부정하는 경우와 자연의 역사를 인정하는 경우로 나뉘게 됨을 볼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여러 우주론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목적으로 존재하는 신은 우주를 외부에서 창조한 전능한 존재라는 것이다. 그런데 신의 전능함을 상징하는 창조의 개념이 반드시 ‘외부에서의 우주 창조’를 논리적으로 전제해야만 하는 것일까? 창조주로서 신을 가정하는 것은 신이 물질의 속성 그 자체가 될 가능성을 부정한다. 그러한 가능성은 그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는 실체로서의 신 개념과 양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이 물질을 창조한 후 물질의 세계를 거주지로 삼을 가능성마저도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성서를 신성을 담은 은유 체계로 간주하고 자연에서 신의 섭리를 찾아보려는 전통 속에는 그러한 가능성을 탐구한 사람들이 있다. 이때 수직선은 신이 신성을 드러내는 과정으로, 그리고 수직선의 정점은 신성이 완전히 구현된 신의 모습을 상징하게 된다. 따라서 존재 사슬을 수직선에 국한하여 분석하는 경우에도 창조의 전능함과 관련된 신 개념은 최소한 다섯 가지이다. 이제 ‘정점의 의미’를 분석함으로써 창조의 목적 개념도 단일적으로 해석될 수 없음을 살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