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속화와 민주주의 (봉인 해제)/존재 사슬의 논리

정점의 의미 4. 17세기 지적 설계론의 핵심 (수정)

착한왕 이상하 2009. 12. 19. 12:18

(4) 17세기 전통의 지적 설계론

중세 본성론에서 우연에 의해 발생한 사건, 즉 기회는 두 가지 측면을 갖는다. 그 첫 번째 측면은 태초 이후 우주의 자체 유지와 맞물린 인과적 복잡성과 관련된다. 이때 인과적 복잡성은 사건 발생의 선후 관계를 따지는 관점이 아니라, 대상이 존재하게 된 이유를 따지는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또한 우연에 기인한 기회는 신의 아가페적 사랑이 이기적이지 않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여기서 ‘이기적이지 않다는 것’은 신이 모든 사건에 일일이 개입하지 않음을 뜻한다. 그 두 번째 측면은 우연적인 것을 기적으로 해석하는 것과 관련된다. 이때 기적은 신의 전능함과 충만성을 상징한다. 따라서 중세 본성론에서 신이 태초 이후에 개입할 여지는 논리적으로 완전히 배제되지 않는다. 이 때문에, 중세 본성론은 약한 자율적 우주 창조설로 분류되는 것이다.

 

중세 본성론과 함께 약한 자율적 우주 창조설을 대표하는 것은 지적 설계론이다. 지적 설계론 옹호자들은 진화론을 생물학의 통합 분과로 과장하는 세력과 자주 충돌하는 세력이다. 성숙한 무종교인은 그 어떤 이념적 독단에도 쉽사리 동화되지 않으려는 태도를 가지고 있다. 성숙한 무종교인은 진화론을 중심으로 모든 생물학의 분과가 통합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진영과 이에 맞서 지적 설계론을 전면에 내세우는 진영의 대립 양상을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한다. 서로 대립 관계를 맺는 이 두 진영은 마치 동전의 양 측면과 같음을 다음 절에서 보게 될 것이다.

 

지적 설계론에는 자연의 역사를 불가능한 것으로 보는 관점이 있고, 가능한 것으로 보는 관점이 있다. 전자의 관점에서 후자의 관점으로 이동한 과정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지난 300여 년 간에 걸친 과학의 발달과, 이에 따른 자연에 대한 이해 방식의 변화 과정을 정확히 알아야 한다. 이를 여기서 다룰 수는 없다. 그래서 자연의 역사를 허락하지 않는 관점에서 자연의 역사를 허락하는 관점으로 이동한 여정을 우회적으로 살펴보도록 하자. 이때 과학적 설명 영역에서 우연적인 것이 잘려 나가게 된 다음의 과정을 알아야 한다.

 

• 사건 발생의 선후 관계, 즉 원인과 결과를 따지는 ‘사건 인과’ 개념이 규칙적이고 주기적인 자연 현상에 적용되기 시작한 시점은 고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규칙적이고 주기적인 자연 현상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변화 속에 불변하는 것’을 가정하는 사고방식이 나타났다. 보편법칙에 근거한 설명을 과학적인 것으로 보는 관점은 그러한 사고방식에 기인한 것이다. 규칙적이고 주기적인 자연 현상이 우주의 마음이나 내적 통합 원리를 반영해준다는 생각은 고대 전통에서 발견된다. 그러한 생각을 띠를 때 사건 인과 개념은 규칙적인 자연 현상을 설명하는 데 부분적인 역할만 하게 된다. 사건 인과 개념만 인정한다면, 어떻게 원인이 결과와 연결되는가라는 물음만 중요해진다. 이때 왜 그런 결과가 존재하게 되었는가라는 물음은 따질 필요가 없는 것이 되어 버린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인과 설명에 질료인, 작용인, 형상인, 목적인과 같은 개념이 동원되는 이유는 사건 인과 개념만으로 자연 현상을 바라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천사화 계획’이 추진되면서, 인간의 합리적 능력은 더 이상 상황에 합당한 판단 능력으로 여겨지지 않게 되었다. 그러한 능력은 보편적인 도덕 원리뿐만 아니라 신이 우주에 부과한 법칙까지도 발견할 수 있다는 ‘이성’ 개념으로 대체되었고, ‘왜’라는 물음은 과학적 설명 영역에서 밀려나게 되었다. 자연을 시계에, 신을 시계공에 비유하는 것은 17세기 세계 이해 방식을 대표한다. 그러한 세계 이해 방식에 따르면, 신의 설계 방식은 이성에 의해 발견할 수 있는 보편법칙으로 가정되었다. 반면에 신의 설계 방식에 담긴 목적은 이성에 의해 요청될 뿐, 과학적 설명 영역에 속하지 않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약 200 여 년 동안 시대정신으로 작동한 이러한 세계 이해의 방식 속에서 사건 인과의 필연적 관계에 근거한 설명만이 과학적인 것으로 취급되었다. 즉, 필연적인 것과 우연적인 것의 상호작용에 근거해 자연을 파악했던 중세의 사유 전통은 낡은 것으로 취급되었다. 그리고 우연적인 것으로 보이는 모든 것은 인간의 무지로 인해 설명할 수 없는 신의 목적으로 대체되었다.

 

과학적 설명 영역에서 우연적인 것을 무지의 탓으로 돌리고, 우연적인 것을 신의 목적으로 대체시키는 방식의 세계 이해는 기계론의 형성 과정 속에 잘 드러난다. 기계론의 형성에 결정적 계기가 된 사건은 ‘원자론의 부활’이었다.

 

따가움과 부드러움 같은 질적 속성은 고대의 원자론에서는 원자의 크기와 형태로 성명되었다. 그러한 속성은 기계론에서는 시공간적 크기와 같은 물질의 연장적 속성, 혹은 운동의 변화로 촉발된 마음의 속성이거나 환영에 불과한 것으로 여겨졌다. 고대 원자론과 기계론의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물질의 기본 단위가 있다는 기계론의 입장은 원자론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이 점은 종종 대립 관계를 맺는 것으로 소개되는 데카르트(R. Descartes)의 기계론과 근대 경험론의 출현에 기여한 기계론 모두에 공통된 것이다. 후자의 기계론 옹호자들과 달리, 데카르트는 운동의 선행 조건으로 가정된 빈 공간 개념을 인정하지 않았다. 물질의 연장이 곧 공간이고, 물질은 무한 분할 가능하다는 주장의 논리적 결론은 빈 공간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다. 빈 공간은 원자론의 핵심 개념인 까닭에, 데카르트는 원자론을 부정한 것처럼 비춰지기 쉽다. 하지만 그 또한 실제 현상을 설명할 때 물질의 기본 단위가 되는 세 개의 원소를 가정했다. 그리고 인과 설명이 충돌과 같은 접촉 등에 기인한 운동의 국소적 변화에 근거한다는 것은 합리론의 대부로 여겨지는 데카르트와 경험론의 토대를 닦은 기계론자 모두가 인정하는 것이기도 했다.

 

원자론이 기계론의 형성에 미친 영향 중 반드시 언급해야 하는 또 다른 것이 있다. 그것은 원자가 스스로 영원히 운동 중에 있다는 것이다. ‘스스로 영원히 운동 중인 원자’의 가정은 기계론에서는 ‘신이 태초에 불어 넣은 힘’이라는 가정으로 연결된다. 하지만 당시의 과학 수준은 에너지와 같은 활성, 즉 물질의 비선형적 속성을 ‘양화(quantification)’할 수준에 도달하지는 못했다. 기계론자들은 연금술 전통에 근거해 그러한 활성을 가정하는 것을 비과학적인 것으로 취급했다. 그 결과, 신이 태초에 불어 넣은 힘은 물질의 상태 유지와 관련된 것으로, 그리고 운동의 변화는 충돌과 같은 접촉에 기인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기계론자들이 오로지 크기와 속도와 같은 선형적 속성을 가지고 삼라만상을 설명하려고 할 때 보편법칙은 그러한 접촉에 기인한 운동 변화에 관한 것이어야 했다. 이때 차가움과 뜨거움 같은 질적 속성이 열이라는 물질의 비선형적 속성과 연관성을 갖게 될 가능성은 차단된다. 따라서 그러한 질적 속성은 단지 물질의 자극에 의한 마음의 산물로만 여겨질 수밖에 없었다.

 

만약 질적 속성이 물질의 연장적 속성 및 운동의 국소적 변화로 촉발된 마음의 속성에 불과하다면, 물질과 마음은 서로 별개의 것으로 다뤄져야 한다. 신을 고려하지 않을 때 물질과 마음은 서도 독립된 실체로 여겨져야 하며, 경험은 마음이 물질에 의해 촉발된 결과가 된다. 이러한 실체적 이원론을 받아들인다면, 물질계는 ‘경험 이전의 세계’를 뜻하게 된다. 이때 근대 철학에 의해서 규정된 경험이라는 개념이 얼마나 비상식적인가는 여기서 따질 필요는 없다. 또한 과학적 지식 체계를 건설하는 데 있어 이성의 기능을 따지는 것도 여기서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다수의 기계론자가 운동법칙을 신에 의해 설계된 것으로 여겼다는 점이다. 이때 충돌 등에 기인한 운동 변화는 그러한 법칙에서 벗어날 수 없다. 원인과 결과의 관계가 그러한 법칙에 근거하여 설명되는 한, 그것은 필연적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이 점은 질적 속성을 단지 경험에 수반된 환영으로 취급했던 기계론자들, 즉 마음의 실체를 부정하고 물질의 실체만을 인정하는 근대적 일원론자들에게도 그대로 해당한다.

 

어떤 원인에서 결과가 발생하는 과정이 운동 변화와 관련된 보편법칙에 의해 설명 가능하다면, 그리고 그러한 보편법칙에 근거하여 원인과 결과가 필연적으로 연결되어야 하는 것이라면, 우연적인 것은 단지 인간의 무지에 기인한 것으로 여겨져야 한다. 이때 우연적인 것이 자연의 역사를 가능하게 해준다고는 생각도 할 수 없게 된다. 왜냐하면 자연의 역사란 질적 상태 변화의 비순환적 과정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원인과 결과의 관계만 따지는 사건 인과 개념만으로 모든 자연 현상을 설명할 수는 없다. 물질의 운동법칙을 안다면, 무게, 시점 및 위치 등에 관한 초기 조건에 그 법칙을 적용시켜 운동 결과를 예측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가설 연역 추리 방식으로는 초기 조건이 존재하게 된 경로를 알 수 없다. 초기 조건도 또 다른 초기 조건의 결과이다. 주어진 초기 조건을 가지고 미래의 결과는 예측할 수 있어도,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태초의 초기 조건까지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개신교 전통에서 인간의 지위는 비록 천사에는 못 미치지만 그 영혼만큼은 천사와 대등한 것으로 간주된다. 여기에 인간에게 지구는 도덕 훈련장이라는 식의 중세적 사유는 끼어들 구석이 없다. 중세 기독교의 전통에 따르면, 자연은 신 자신을 위해 존재하고, 인간은 신성이 깃든 천상을 찬양하는 지구의 괴물들 중 좀 더 나은 괴물일 뿐이며,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에 대한 진보적 반응은 이러한 중세적 사유와의 결별을 뜻하기도 한다. 이때 ‘우주 시장’에서 높아진 지구의 가치는 자연이 인간을 위해 창조했다는 관점을 뒷받침하게 된다. 태양계의 안정성을 정당화하려 했던 17세기 과학자들의 논증은 이와 관련하여 이해되어야 한다. 이때 다음과 같은 난제가 발생한다.

 

• 보편적인 운동법칙에 근거한 과학적 설명은 왜 태양계가 인간 존재를 위해 안정화되어 있는가에 대한 이유를 제공하지 않는다. 그러한 과학적 설명은 ‘어떻게’라는 관점에 종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태양계의 안정성은 입자들의 무작위적인 요동을 중력이 제한함으로써 탄생한 우연적인 결과일 뿐이라는 주장도 가능하다. ‘어떻게’라는 질문 범주와 ‘왜’라는 질문 범주가 서로 중첩되어야 할 논리적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난제를 해결하는 가장 단순한 방법 중 하나는 과학적 설명 영역에서 배제된 우연적인 것을 신의 섭리로 대체하는 것이다. 즉, 사건의 선후 관계를 따지는 인과 설명은 과학에 속하고, 존재의 목적은 신학에 속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17세기 기계론 전통의 지적 설계론의 핵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