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속화와 민주주의 (봉인 해제)/존재 사슬의 논리

정점의 의미 2. 우주 창조설의 분류 (수정)

착한왕 이상하 2009. 12. 4. 03:50

(2) 우주 창조설의 분류 

아리스토텔레스의 신 개념과 기독교의 신 개념을 관통하는 것은 둘 다 질료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둘의 주된 차이는 무엇인가? 우주의 내적 통합 원리 그 자체로 파악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신은 그 어떤 경우에도 작용인이 될 수 없다. 반면에 무에서 유를 창조한 것으로 가정된 기독교의 신은 어떤 의미에서든 작용인이어야 한다. 이때 신이 어떠한 방식으로 우주를 창조했는가라는 물음은 피할 수 없게 되고, 그 창조 방식에 따라 신의 목적도 다르게 해석된다. 기독교 신 개념의 다양성은 자연에서 신의 섭리를 찾아보려는 전통 속에서 이해되어야 하며, 또한 그 전통은 자연을 이해하는 방식의 변천 역사와 맞물려 있다.

 

신을 무에서 유를 창조한 작용인으로 파악하는 경우, 두 가지 창조 방식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 하나는 ‘외부 창조설’이며, 다른 하나는 ‘우주를 서식처로 삼은 창조설’이다. 기독교 역사에서 대세는 외부 창조설이다. 이를 살펴보기 전에 우주를 서식처로 삼은 창조설에 대해 먼저 알아보자.

 

창조주로서의 신은 질료인이 될 수 없다. 그러한 신이 창조와 동시에 우주를 서식처로 삼았다고 가정하는 경우, 신은 결코 물질의 속성으로 여겨질 수 없다. 신이 그러한 속성으로 여겨질 수 있다면, 물질도 신이 창조한 것이라는 가정과 모순되기 때문이다. 신이 우주를 서식처로 삼을 가능성은 ‘창조주와 창조’를 동일시하는 경우에 가능하다. 이러한 가능성은 신의 전능함에 위배되지 않는다.

 

창조주와 창조를 동일시하여 정합적인 우주론을 펼친 인물로 16세기 부르노(G. Bruno)를 들 수 있다. 창조를 신의 무한성이 실현된 순간으로 파악한 그는 무한 우주론을 주장했다. 기독교적 범신론으로 분류 가능한 부르노의 무한 우주론에서도, 은하계의 국소적인 자연의 역사는 ‘전일적 우주 역사’ 속에서만 의미를 갖게 된다. 이 점에서 부르노의 무한 우주론도 태초를 가정하는 빅뱅 우주론과 일맥상통하지만, 그 둘은 어울릴 수 없다. 이미 살펴봤듯이, 빅뱅 우주론에서 시공간의 무한성은 단지 우주 팽창의 논리적 조건으로서만 파악 가능할 뿐, 팽창 중인 시공간의 실제 양상은 유한하기 때문이다. 부르노의 무한 우주론과 빅뱅 우주론의 대립 관계는 기독교의 신 개념이 얼마나 다양한지를 보여준다.

 

부르노의 무한 우주론은 당시에는 이단으로 취급받았다. 그 결과, 부르노는 이단 심문 끝에 화형을 당했다. 하지만 창조주와 창조를 동일시한 그의 우주론이 신의 섭리를 자연에서 찾아보려는 전통에서 사장된 것은 아니다. 창조주와 창조를 동일시한다면, 신은 우주에 내재하는 원초적인 힘 혹은 우주 진화의 목적 등의 개념과 연관성을 갖게 된다. 자연 현상의 다양성은 그러한 원초적인 힘과 맞물려 신의 충만성을 반영하는 것으로, 또 다양성 속의 전체적인 통일성은 신의 목적을 반영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자연의 생산성에 대한 관심이 폭발한 낭만주의 시절에 이르러 부르노와 비슷한 관점을 가진 이들이 사방에서 나타났으며, 헤겔도 그들 중 한 명이었다. 또 정신과 물질 모두 신의 서로 다른 양상이며, 과정 중에 우주의 실체인 신의 속성이 드러나게 된다는 관점도 부르노에게 빚지고 있다. 그러한 관점에 따르면, 종교성의 근원은 신의 속성이 완전히 구현될 단계에 대한 인간의 향수에 기인한 것으로 간주된다.

 

기독교 역사의 대세에 속한다고 할 수 있는 외부 창조설을 살펴보자. 외부 창조설에서 신과 우주의 관계는 목수와 침대의 관계에 비유될 수 있다. 그런데 목수는 침대를 만들었을 뿐 침대의 형태 유지에는 개입하지 않는다. 목수가 침대의 질료마저도 창조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반면에 기독교의 신은 무에서 유를 창조한 전능한 존재로 가정되었다. 신이 질료인이 될 수 없는 이유는 목수가 질료인이 될 수 없는 이유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목수는 이미 있는 것을 가지고 침대를 만들었지만, 신은 무에서 유를 창조했다.

 

우주를 창조한 존재로 신을 가정한다고 하여, 이로부터 우주가 어떻게 보존되는지는 알 수 없다. 전능한 신이 우주가 자체적으로 유지되도록 어떤 힘을 우주에 불어 넣었다고 생각해볼 수도 있고, 아니면 신이 우주의 보존까지도 책임지고 있다고 생각해볼 수도 있다. 후자의 생각은 신이 연속적으로 우주에 개입한다는 우인론에 반영되어 있으며, 우인론에 근거한 창조설은 크게 동시 창조설과 연속 창조설로 나뉜다. 우인론의 관점에 따를 때 우주의 존재 목적은 창조뿐만 아니라 그 보존에 있어서도 신의 전능함을 과시하는 것이다. 이러한 경우, 악(惡)도 단순한 선(善)의 결여가 아니라 신이 창조한 것이라는 딜레마를 발생시킨다. 이에 대하여 악이 없다면 신도 알 수 없게 된다는 식의 항변도 가능하나, 이때 절대 선으로 가정된 신의 속성이 위협을 받게 된다. 이러한 까닭에, 우인론은 기독교 신 개념을 둘러싼 논쟁사에서 우위를 점할 수는 없었다. 우인론을 대표하는 동시 창조설과 연속 창조설에 대해서는 앞 에서 살펴봤다.

 

우인론에 따르면, 우주는 전적으로 신에 의존하는 타율적 존재가 된다. 우인론에 반하는 관점, 즉 단지 창조의 순간에만 국한하여 신을 작용인으로 여기는 관점을 받아들이는 경우, 신의 역할에 대한 해석은 더욱 복잡해진다. 우주의 창조 목적은 신에 의존적이지만, 태초 이후 우주가 존재하는 방식은 자율적 모습을 띠게 되기 때문이다. 태초 이후 우주가 자체적으로 유지될 수 있는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 창조설을 ‘자율적 우주 창조설’이라 하자. 이때 우주가 유지되는 방식에 따라 신의 창조 목적도 달라진다.

 

자율적 우주 창조설은 ‘약한 자율적 우주 창조설’과 ‘강한 자율적 우주 창조설’로 나뉜다. 약한 자율적 우주 창조설은 다시 ‘중세 본성론’과 ‘지적 설계론’으로 나뉘며, 지적 설계론에는 자연의 역사가 불가능한 경우가 있고, 가능한 경우가 있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바탕으로 여러 창조 가설을 도식화해 보면 다음과 같다.

 

 

 

이제 자율적 우주 창조설을 대표하는 여러 창조설을 차례대로 살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