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속화와 민주주의 (봉인 해제)/존재 사슬의 논리

정점의 의미 5. 전성설 (수정)

착한왕 이상하 2010. 1. 4. 06:26

(5) 전성설

‘어떻게’라는 질문 범주와 ‘왜’라는 질문 범주의 구분 속에서 과학을 전자에, 신학을 후자에 위치시키는 기계론 전통에서도 미묘한 입장 차이가 나타난다. 데카르트처럼 과학적 발견의 독자성을 강조하는 진영이 있었는가 하면, 보일처럼 과학적 발견을 신의 섭리를 밝히는 수단으로 여기는 진영도 있었다.

 

물론 데카르트가 존재의 목적을 다루지 않는 기계론 전통의 과학만으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다고 여긴 것은 아니다. 또한 보일도 엄격한 과학적 설명에 신의 목적을 개입시키지는 않았다. 그러나 데카르트는 ‘어떻게’라는 물음의 영역에 속하는 과학적 설명을 그 자체로 완성된 것으로 보았다. 즉, ‘어떻게’라는 물음의 영역과 ‘왜’라는 물음의 영역이 서로 대등한 관계를 맺는 가운데, 세계의 완벽한 이해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데카르트는 과학과 종교의 공존을 위한 논리적 장치인 ‘이성과 신앙의 분리’ 관점의 토대를 마련한 인물로 여겨질 수 있다. 이에 반해, 보일은 ‘어떻게’라는 물음의 영역을 ‘왜’라는 물음의 하부에 위치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과학이 신의 섭리를 밝히는 데 봉사할 때 세계의 완벽한 이해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데카르트와 보일의 입장 차이에 대한 어떤 논리적 이유를 찾기란 쉽지 않다. 오히려 이론가와 실험가의 작업 방식의 차이에서 그 이유를 짐작해 볼 수 있다. 데카르트가 실험을 중시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보일과 비교되는 경우에는 이론가로 분류될 수밖에 없다. 기계론 전통의 실험가가 생명의 원리를 물질의 운동 변화로 환원시켜 설명하려고 하더라도, 생명체의 구조와 기능의 관계를 무시하고 지나칠 수는 없었다.

 

기관의 구조는 실험가에게는 자르고 염색하는 일상적 작업의 대상이다. 구조의 기능을 무시하고는 그러한 작업은 진행될 수 없다. 구조의 기능은 어떤 목적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실험가는 해당 목적에 무관심할 수 없다. 기능의 목적을 물질의 운동 변화로 환원시켜 설명하려고 하는 경우에도, 왜 특정 기관은 하필이면 그러한 목적 수행에 적합한 구조를 갖고 있는 것일까라는 문제가 남게 된다. 예를 들어 심장은 피의 순환에 적합한 기능을 갖고 있다. 피를 구성하는 입자의 흐름은 운동 법칙에 의해 설명 가능할지라도, 왜 심장이 피의 순환에 적합한 구조를 가지게 되었는지는 의문으로 남는다. 보일과 같은 실험가는 기능의 목적을 신의 섭리로 돌리는 방식에만 안주할 수 없었다. 그 대신, 보일은 자신의 과학적 작업이 신의 섭리를 밝혀주는 통로라 여겼다. 이러한 까닭에, 기계론 전통의 지적 설계론에서 보일이 자연 신학의 대부로 불리게 된 것이다.

 

전통적인 지적 설계론에 따르면, 자연의 역사는 불가능하다. 눈에 보이는 모든 변화는 궁극적으로 물질의 운동 변화로 설명되며, 존재의 목적은 신의 섭리로 양도되기 때문이다. 여기에 질적 상태 변화의 비순환적 과정이라는 역사성이 허용될 여지는 없다. 역사는 단지 특별한 존재로 창조된 동물, 즉 자유 의지를 가진 인간의 집단에게만 허용된다. 이때 발생, 번식, 성장, 다양성이라는 생물계 현상에 대한 설명이 요구된다.

 

그 누구도 초기 수정란과 신경계가 형성된 태아를 동일시하지 않는다. 태아와 성장 중인 아이를 동일시하는 사람도 없다. 발생에서 성장을 거쳐 죽음에 이르는 과정은 우리 눈에는 단계적인 발달 과정으로 비춰진다. 죽은 물질계와 달리 생물계를 관통하는 핵심어는 ‘다양성’이다. 동 종 내 개체들도 표현형의 측면에서 모두 다르다. 겉모양만 가지고는 암컷과 수컷을 구분할 수 없는 종들도 많다. 또한 생물계의 역사는 종 다양성의 축적 과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발생, 번식, 성장, 다양성이라는 생물계의 현상은 자연에도 역사가 있다는 관점과 잘 어울린다. 이러한 까닭에, 전통적인 지적 설계론 옹호자는 그러한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대안을 찾아야 했다. 그 대안은 전성설(theory of preformation)이었다.

 

전성설에 따르면, 태초에 신이 유기체의 원형(原形)을 담은 씨앗을 우주에 심어 놓았다. 이때 그러한 씨앗이 개체인지 종인지는 불분명하다. 이러한 문제를 논외로 한다면, 발생과 성장은 단지 씨앗에 담긴 원형의 전개(unfolding)로 여겨진다. 원형의 전개를 보장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논리적으로 전제되어야 한다.

 

• 첫째, 원형은 암컷의 난자나 수컷의 정자 중 한 쪽에만 담겨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원형이 보존될 수 없다.

 

• 둘째, 환경은 원형 전개를 위해 필요한 영양 자원으로만 이해되어야 한다.

 

첫 번째 전제는 ‘원형의 한쪽 배우자 유래설’로 불린다. 만약 유기체의 형태 대물림 과정이 부모 양쪽에서 유래하는 것이라면, 원형이라는 것은 신이 창조한 유기체의 형태로 해석될 수 없다. 발생 과정이 단계적 발달 과정이라면, 발생도 일종의 자연의 역사로 이해된다. 이러한 이해 방식을 허용하지 않기 위해서는 발생은 단지 원형의 확장 혹은 전개 과정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이는 두 번째 전제에 함축된 ‘물리적 환경(physical environment)’ 개념에 의해 뒷받침된다. 환경은 어떤 유기체의 형태 발달이나 규정에 필요한 것이 아니라, 단지 미리 ‘주어진 형태’, 곧 ‘원형’의 확장을 위한 영양 자원으로 이해된다. 이때 환경은 유기체의 형태 발생 과정을 설명하는 데 부수적인 것이 되어버린다.

 

전통적인 지적 설계론을 받아들이면, 질적 상태 변화의 비순환적 과정인 자연의 역사는 불가능하다. 전성설은 살아 있는 유기체의 발생 과정뿐만 아니라 생물계 전체의 진화 역사를 부정하기 위해 고안된 가설이며, 이에 대한 이유 중 하나는 17, 18세기 과학이 아직은 다음과 같은 물음을 다룰 수준에는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 왜 특정 유기체는 이러이러한 형태를 가졌을까?

 

위와 같은 ‘왜’라는 물음은 전통적인 지적 설계론에서는 과학적 설명 영역에 속할 수 없는 것이었다. 생물학의 발달로 인해 이러한 상황은 지속될 수 없게 되었으며, 이에 따라 전통적인 지적 설계론도 변화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지적 설계론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신학적 입장도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