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속화와 민주주의 (봉인 해제)/존재 사슬의 논리

정점의 의미 3. 본성론 (수정)

착한왕 이상하 2009. 12. 10. 05:10

(3) 본성론

본성론은 아리스토텔레스를 연구한 알파라비(Al-Farabi), 아비세나(Avicenna) 등 이슬람 학자의 영향 아래 중세에 유행한 창조설이다. 본성론의 핵심은 우주에 존재하는 개별적인 모든 것은 ‘그 무엇’에 속하도록, 혹은 ‘그 무엇’으로 불릴 수 있도록 해주는 본질(essence)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지상계의 대상들에만 국한하여 생각하는 경우, 그러한 본질을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과 동일시하여도 무방하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신과 기독교의 신 개념이 다른 만큼, 중세 본성론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아류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이를 알기 위해 다음 두 문제를 차례대로 다뤄보자.

 

• 천사는 ‘순수한 영적 존재’로 가정된다. 그러한 존재가 어떻게 가능한가?

 

• 예수는 엄밀히 말해 인간도, 신도 아니다. 그러한 존재가 어떻게 가능한가?

 

종의 고유한 형상에 다가가려는 유기체의 내적 충동 혹은 힘은 영혼(soul)이라는 고대 개념에 기안한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유기체의 발생, 성장 및 기능과 관련된 그러한 힘을 비질료적인 것으로 가정했기 때문에, 그것은 물질적인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러한 힘이 사후에도 소멸되지 않는 정신적 실체로 가정된 것은 아니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천사가 어떤 존재인가를 묻는 다면, 그는 십중팔구 천상계의 질료인 제 5 원소로 구성된 존재라고 말할 것이다.

 

인간의 영혼이 사후에 소멸한다면, 이것은 원죄설을 사후 구원의 전제로 여겼던 중세 기독교 사상과 정면으로 마찰한다. 지상의 괴물들 중 인간의 특별함은 사후에 죄를 씻을 수 있는 존재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이는 가톨릭 교리의 정죄계(淨罪界) 개념에 반영되어 있다. 정죄계는 사후에 죄를 씻는 곳으로 가정되었다. 정죄계 개념에는 악(惡)을 선(善)에 대립된 것이 아니라, ‘선의 결여’로 규정하는 중세 가톨릭의 관점이 배어 있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존재는 선을 결여한 까닭에, 그리고 합리적 능력은 상황에 합당한 해결책을 고안해낼 수 있는 능력 정도로 여겨졌던 까닭에, 행위의 도덕적 평가는 인간이 알 수 없는 절대적 선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걸러진 준칙들에 근거한다. 그러한 평가는 준칙에서 얼마나 벗어났는지, 혹은 예외적인 것으로 인정할 수 있는지를 따진다. 결국 행위의 도덕적 평가는 얼마나 덜 악한가를 가늠하는 과정이었다. 정죄계는 신에 대한 믿음 여부가 사후 심판의 대상이 된다고 여기는 개신교에서는 이단시 되었다.

 

만약 인간의 영혼이 죽음과 함께 소멸되는 것이라고 해보자. 이때 존재 사슬에서 신과 인간 사이에 틈새가 생긴다. 그 틈새는 단순히 공간적인 것이 아니라 구원의 가능성을 논리적으로 불가능하게 만든다.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편 중 하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존재론에 수정을 가하는 것이다. 중세 기독교의 신이 우주의 내적 통합 원리로 여겨질 수 없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그러한 수정은 필요하다. 신과 인간 사이의 틈새를 채우려면, 적어도 인간에 국한하여서는 육체와 영혼의 분리 가능성을 논해야 한다. 그러한 가능성에 대한 중세의 사변을 여기서 자세히 다룰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천사’ 개념이 신과 인간의 틈새를 채우는 데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존재 사슬에서 천사가 신과 인간의 틈새를 매우는 역할을 하는 것이라면, 천사는 육체 없이도 존재하는 영적 존재로 가정되어야 한다. 이러한 가정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존재 사슬 도식에 변화를 가져온다. 우주는 불완전한 지상계와 신성이 구현된 완벽한 천상계로 나뉜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광물에서 동식물을 거쳐 인간에 이르는 과정은 ‘영혼의 등급 매기기’와 관련되어 있다. 식물 영혼보다는 동물 영혼이, 그리고 동물 영혼보다는 인간 영혼이 월등한 것으로 여겨지며, 각 단계의 영혼과 관련된 종의 개체는 발생 과정에서 이전 단계를 거치게 된다. 즉, 아리스토텔레스의 발생 과정은 영혼의 발달 과정이기도 하다. 실례로 유기체의 형태와 기능을 유지해주는 힘이 부모로부터 자궁으로 전달되면, 그 힘은 식물 및 동물 영혼 단계를 거쳐 인간 영혼으로 발달하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지상계에 해당하는 종들의 위계질서는 영혼의 발달 구조를 반영하는 것이지, 결코 신에 비교된 종들의 완벽한 정도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중세 본성론에서는 오로지 창조주인 신만이 완벽한 존재이다. 인간과 신 사이의 틈새를 채우기 위해 가정된 천사조차도 신처럼 완벽할 수는 없다. 천사들 사이에도 서열이 매개질 수밖에 없다. 또 그 자체로 악(惡)한 것이 아니라 선(善)을 결여한 영적인 존재, 곧 악마도 가정된다. 중세 본성론에서도 천상계와 지상계는 구분되더라도, 천상계에도 존재의 등급이 설정되는 것이다. 존재 사슬의 정점인 신을 기준으로 할 때 신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존재일수록 그 완벽한 정도는 상대적으로 낮아진다. 천사는 신에 비해 덜 완벽한 존재이고, 인간은 천사에 비해 덜 완벽한 존재이며, 말 못하는 동물은 인간에 비해 덜 완벽한 존재이다. 우주의 모든 것의 존재성은 창조주인 신에 의존적인 까닭에, 완벽한 정도 사이에는 이행성의 조건이 성립한다. 말 못하는 동물이 인간에 비해 덜 완벽한 존재이고, 인간이 천사에 비해 덜 완벽한 존재라면, 동물도 천사에 비해 덜 완벽한 존재이다. 오로지 신만이 그 자체로 존재할 수 있는 까닭에, 신보다 완벽한 것은 존재할 수 없다. 이때 신이 전능한 이유는 완벽한 정도에서 차이를 보이는 모든 존재를 창조했다는 데 있다.

 

어떤 존재의 완벽한 정도를 따질 때 그 기본 단위는 종과 개체 중 무엇일까? 정확히 대답하기 힘든 이 물음은 예수의 존재 가능성과 관련된 두 번째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중세 본성론에서도 우연에 의해 발생한 사건, 즉 기회적인 사건은 허락된다. 신이 우주를 창조했지만, 특정 대상들이 해당 본질을 완전히 구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는 본질이 구현되는 과정에서 완전히 벗어난 괴물을 ‘비정상적인 것’ 혹은 ‘자연의 질서에서 빗나간 것’으로 간주한다. 만약 이 점을 받아들인다면, 예수도 괴물로 취급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인간도, 천사도 아닌 예수가 속한 종이란 없기 때문이다.

 

본질 그 자체와 본질이 구현된 어떤 것이 서로 일치하는 것은 오로지 신밖에 없다. 신이 자신의 본질과 인간의 본질을 혼합하여 예수를 지상에 보냈다고 가정하는 경우, 종 불변론 혹은 실재론은 허용될 수 없다. 만약 종 불변론 혹은 실재론을 받아들인다면, 예수는 우주의 자연적인 경로에서 이탈한 비정상적인 존재가 되기 때문이다. 반면에 예수가 기적을 상징한다면, 괴물도 자연의 질서에서 빗나간 것으로 여겨질 수 없다. 그러한 괴물은 기적(奇績)으로 여겨져야 하며, 기적은 신의 충만성을 상징한다. 그러한 충만성은 본성을 규정해주는 본질만 가지고는 설명될 수 없다. 따라서 중세 본성론이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 개념으로부터 본질 개념을 차용했더라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종 실재론까지 그대로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종 변형에 의한 자연의 역사는 중세 본성론에서도 거부되었지만, 종 실재론이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2000여 년 동안 서양을 지배했다는 주장은 거짓이다. 어떤 존재의 완벽한 정도를 따질 때 분류의 목적상 종 개념이 필요는 하지만, 그 기본 단위는 개체에 가까운 것으로 여겨졌다.

 

중세 본성론에 따르면,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본성을 추구하도록 운명지어져 있다. 하지만 우주가 스스로 유지될 수 있도록 창조된 까닭에, 지상의 모든 존재가 본성에 맹목적으로 따르도록 운명지어져 있는 것은 아니다. 산모의 꿈이 태아의 발생 과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생각은 중세 시절에는 일상적인 것이었다. 개체의 본질이 구현되는 과정과 맞물린 인과 관계의 복잡성에 대한 통찰은 인간의 인식 영역에 속하지 않는다. 그러한 복잡성은 ‘사건 인과의 관점’, 즉 원인과 결과의 선후 관계를 따지는 관점이 아니라, ‘존재의 생성과 유지의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여기서 질료인, 작용인, 형상인, 목적인 등을 자세히 구분하고 설명하는 철학적 작업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존재의 생성과 유지 과정을 과학적으로, 특히 실험적으로 다룰 수 있게 된 것은 19세기 중엽 이후에야 가능해졌다. 에너지 보존법칙 등 이미 알려진 보편법칙을 가정하더라도, 생물의 발생, 성장 및 진화의 설명에는 여러 분과에 걸친 가설들이 동원된다. 또 실험 목적에 따라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분과가 결정된다. 분과들 사이의 이러한 ‘거래(transaction)’ 관계는 존재 생성과 유지 과정의 복잡성에 대한 인식을 반영한다. 물론 형상에 가까워지려는 유기체의 내적 충동과 같은 것, 즉 관찰과 실험이 불가능한 사변적인 것은 그러한 인식에 결여되어 있다. 하지만 존재의 생성과 유지의 복잡성에 대한 인식만큼은 중세와 현대를 관통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