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속화와 민주주의 (봉인 해제)/존재 사슬의 논리

정점의 의미 1. 아리스토텔레스의 존재 사슬 (수정)

착한왕 이상하 2009. 11. 26. 06:18

정점의 의미

 

(1) 아리스토텔레스의 존재 사슬 

신이 무(無)에서 우주라는 유(有)를 창조했다면, 신 자신은 질료가 될 수는 없다. 신이 무에서 유를 창조했다는 가정을 받아들이면, 신은 어떤 의미에서든 작용인이 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창조와 관련된 신의 속성인 전능함은 다양하게 해석 가능하다. 신의 전능함에 대한 해석 중 어떤 것을 택하는가에 따라 작용인으로서의 신의 의미도 달라지게 마련이다. 그 의미는 창조의 목적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까닭에, 기독교의 다양한 신 개념을 알려면 창조의 목적에 대한 여러 관점을 살펴봐야 한다. 이를 위해 먼저 아리스토텔레스가 생각한 존재 사슬의 구성 방식을 분석해 보자.

 

 

먼저 (A)를 보자. 아리스토텔레스의 천문학에 따르면, 지구에서 달까지의 영역인 지상계는 불완전한 세계이다. 지상계를 구성하는 질료는 지수화풍(地水火風)이라는 실체(substance)들, 곧 사원소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형태는 기능의 산물이다. 기능은 어떤 목적을 수행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까닭에, 완벽한 형태는 그 목적이 완전히 구현된 것과 다르지 않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신성(神聖)이 구현된 세계는 제 5 원소인 에테르로 구성된 천상계이며, 원운동은 그러한 신성을 상징한다.

 

(B)는 (A)를 옆에서 본 모습이다. (B)는 우주의 조직화 방식을 보여준다. 깔때기 모양의 하단부에 해당하는 지상계는 천상계와 달리 영원성이 아닌 생성과 소멸을 상징하는 영역이다. 지상계의 모든 광물 및 동식물은 서로 이질적인 성질을 갖고 있는 사원소로 뒤섞여 있다. 원소는 그러한 뒤섞임 속에서도 그 자체의 본성을 잃지 않는 실체로 가정되었기 때문에, 사원소 자체는 직접적인 경험 대상이 될 수 없다. 땅에는 가라앉는 본성을 가진 흙이라는 원소가 많다고 가정할 수 있을 뿐, 그 원소를 직접 경험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질료인 사원소의 결합은 항상 해체될 여지가 있고, 질료인 사원소 각각의 본성만으로는 특정 기능을 갖는 대상의 형태를 설명할 수 없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각 종(species)을 대표하는 이상적인 형태 혹은 특징, 즉 형상은 신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여겼다. 이때 신은 쇳물에서 주물을 뜨거나 밀가루 반죽에 원형을 찍듯이 물질에 형상을 부여한 ‘외적 작인(external agency)’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신은 ‘우주의 마음 혹은 지성’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각 종에 속한 대상이나 유기체에는 신이 생각한 형상을 구현하고 유지하려는 충동이 있다. 하지만 천상계와 달리 지상계는 형상이 그대로 구현될 수 없다는 점에서 불완전하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개체는 어떤 종에 속하는 대상이다. 각 종에 속하는 개체는 그 형태나 특징이 그 종에 고유한 형상을 닮았다는 점에서 ‘잠재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병아리는 닭이 되려는 잠재적 상태로 여겨질 수 있고, 다 성장한 닭도 닭의 형상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각 종에 속하는 개체는 그 종에 고유한 형상을 닮으려고 하는 충동을 갖고 있으며, 그러한 충동은 개체의 형태 발생과 유지를 주관하는 노력 혹은 비질료적 힘(non-material force)으로 여겨질 수 있다. 어떤 닭을 종과 개체의 관계가 아니라 그것 자체에 국한시켜 고려하는 경우, 그러한 힘은 형태 발생과 유지의 기능을 갖는 ‘유기적 통합의 원리’로도 이해된다. 이때 닭과 같은 유기체의 형태 발생과 유지를 주관하는 비질료적 힘은 목적인이자 형상인, 그리고 작용인이다. 하지만 그러한 힘만으로 종들 사이의 위계질서가 유지된다는 보장은 없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신 개념에는 종들 사이의 위계질서를 보장하려는 그의 동기가 담겨 있다.

 

형상에 가까워지려는 비질료적 힘이 각 개체에 내재하는 것으로 가정하는 한, 그 개체가 우주에서 위치하게 될 ‘자연적 장소(natural place)’는 특정 종이 된다.

 

 

 

 

위 도식에서 원은 지상계에 존재하는 특정 종을, 원의 중심은 특정 종에 해당하는 이상적인 형태나 특징, 곧 형상을, 그리고 원 안의 사선들은 해당 종에 속하는 개체들을 뜻한다. 그 개체들 중 형상을 완벽히 구현한 것은 없기 때문에, 각 개체는 형상에 대비하여 잠재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각 선의 끝이 위치한 지점이 원 중심에 가까울수록 해당 개체의 형태나 특징은 형상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각 선의 끝이 위치한 지점이 원 중심에서 멀리 떨어져 있을수록 해당 개체는 기형적인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 하지만 원 속의 모든 개체들은 형상에 가까워지려는 충동을 갖고 있는 까닭에 유사성에서만 차이를 보일 뿐, 해당 종은 그 모두가 위치하게 되는 자연적 장소가 된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특정 종에 속하는 것은 곧 자연의 질서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에, 종과 개체 사이의 관계는 필연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에게 필연성과 우연성이 공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 공존 가능성은 종 간, 그리고 종 내 개체들 사이의 관계 속에서 파악되어야 한다. 자연의 본성에 따라 생성된 것 중 아무 종에 속하지 않는 것이란 없다. 지상계의 어떤 대상이 특정 종에 속한 개체라면, 그 개체는 다른 종에 속할 수 없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종 실재론, 즉 종을 분류에 필요한 도구적 개념이 아니라 실재한다고 여기는 관점 속에는 두 가지 필연성이 개입되어 있다. 그 하나는 특정 종을 어떤 대상이 점하게 될 자연적 장소로 여기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어떤 것도 두 종에 속할 수 없는 까닭에 종의 겹침이나 종 변환(species transformation)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자연의 이러한 필연적 양상은 신과 관련된 것이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신이 작용인은 아닌 까닭에, 종 내 개체들 사이에는 우연적 요소가 허락된다. 오로지 신성이 구현된 천상계에서만 우연적 요소가 허락되지 않는다.

 

지상계의 그 어떤 대상도 특정 종에 속한다는 것은 필연적일지라도, 동종에 속하는 모든 개체들은 다르다. 신으로 인해 그 개체들 모두가 종의 형상에 가까워지려고 하지만, 신이 그것들을 창조한 것은 아니며, 또 그것들의 발생과 형태 유지에 필요한 영양 자원을 제공해주는 것도 아니다. 그 어떤 개체의 형태나 특징도 형상과 동일할 수 없고, 심지어 기형적인 것으로 분류되는 것도 있다. 그러한 기형의 원인을 개체의 외적 요인으로 돌릴 수 있는 까닭에, 기형은 개체의 비질료적 힘, 즉 충동의 탓으로도, 또 충동이 지향하는 형상의 탓으로도 돌릴 수 없다. 그것은 우연적인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필연성과 우연성의 공존 가능성은 실재의 풍부한 다양성과 생산성, 즉 ‘실재의 충만성’을 반영한다. 그러한 충만성 속에 반영되는 종들의 관계, 그리고 지상계와 천상계의 위계질서는 고정 불변한 것으로서 ‘신의 영원성’을 상징한다. 이 점은 (B)를 수직선으로 나타낸 (C)에 함축되어 있다. 그러나 수직선의 정점은 결코 우주의 외부에 존재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없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신과 우주의 관계는 그의 사원인설과 함께 종종 거론되는 ‘목수와 침대의 관계’ 속에서 해석될 수 없기 때문이다. 목수는 나무라는 질료를 사용하여 침대를 만든다. 목수는 질료인은 아니지만 작용인이다. 목수는 침대를 그냥 만든 것이 아니다. 목수는 편안한 잠자리를 마련할 의도로 그 형태를 고안하여 만든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목수는 형상인이자 목적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신을 목수에 유비시킬 수 없는 이유는 두 가지이다. 첫 번째, 아리스토텔레스의 신은 창조의 행위자로 간주될 수 없기 때문이다. 두 번째,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신은 모든 존재들이 근거하는 우주의 내적 원리 혹은 통합의 원리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신을 우주의 내적 원리로 간주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론은 이(理)를 수동적 원리로, 기(氣)를 능동적 활동성으로 간주하는 동북아의 이기론(理氣論)과 유사한 측면을 갖는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론과 동북아의 이기론을 비교하여 그 공통점과 차이점을 논하는 것은 다루지 않는다. 그러나 그 공통점과 차이점을 논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이견을 제시하기는 힘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