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속화와 민주주의 (봉인 해제)/세속화와 민주주의

종교 시장 논리 (수정)

착한왕 이상하 2010. 5. 2. 05:35

종교 시장

 

‘극단적 복음주의의 출현’, ‘과학의 종교화를 시도하는 집단의 출현’, ‘종교의 대중화’, ‘교파 간 교류 및 경쟁의 국제화’, ‘속세에서 구원이 가능하다는 믿음의 확대’ 등은 ‘현대적인 것’을 대표하는 ‘종교적 특징’들로 자루 거론된다. 그러한 종교적 특징들은 다양한 종교들이 신도들을 놓고 경쟁하는 ‘종교 시장’의 특징들이기도 하다. 그러나 거시적 차원, 미시적 차원에서 종교 시장의 성격을 명확히 규정하려면, 현대적인 것을 대표하는 종교적 특징들을 거론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종교 시장의 성격을 분명히 하기 위해 ‘종교 시장 논리의 맹점’을 지적할 것이다.

 

(1) 종교 시장 논리

‘종교 시장 논리의 맹점’을 지적한다는 것은 종교 시장이 형성되어 있는 현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또한 종교가 개인의 선택 사항이 되는 ‘종교의 상품화’, 그리고 개인이 종교 세력의 고객이 되는 ‘개인의 상품화’와 관련된 ‘시장 경제 논리의 분석’에 따른 것도 아니다. 여기서 종교 시장 논리의 맹점을 지적한다는 것은 세속화 과정 및 세속화된 사회 상태에 대한 잘못된 평가 방식을 지적하는 것이다. 세속화 과정 및 세속화된 사회 상태에 대한 그러한 잘못된 평가 방식을 알 때 종교 시장의 실제 성격도 알 수 있게 된다.

 

종교 시장 논리는 다음을 뜻한다.

 

• 유럽의 세속화 과정의 역사적 파장은 미미한 것이며, 세속화된 사회라는 것도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종교 시장의 확장은 이에 대핸 경험적 증거이다.

 

종교 시장 논리를 옹호하는 사회학자들은 ‘현대적인 사회일수록 세속화된 사회’라는 주장의 허구를 밝히려고 한다. 그들은 다음의 두 가지 근거를 내세워 종교 시장 논리를 옹호한다.

 

• <고전적 이원론이 붕괴된 과정을 전통과의 단절로 보는 관점의 허구>

중세를 ‘신앙의 황금기(Golden Age of Faith)’로 규정하는 것은 역사적 증거를 결여한 것이다. 고전적 이원론이 붕괴되는 과정은 결코 사람들의 신앙이 약화되는 과정이 아니었다.

 

• <종교 종말론을 함축한 세속화 관점의 허구>

합리적인 사람은 증거가 불충분한 것을 무조건 믿지 않는 사람이다. 합리적인 사람은 신과 같은 존재에 대해 유보적이거나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는 사람이다. 세속화된 사회가 그러한 합리적 개인들로 구성된 사회라면, 세속화된 사회에서 종교의 역할은 불필요해진다. 종교 종말론을 함축한 이러한 세속화 관점은 ‘유토피아적 관점’이라는 점에서 비현실적이다. 더욱이 종교의 사회적 기능은 교리의 진위 여부와는 무관하게 평가되어야 하는 측면을 갖고 있다.

 

이 두 가지 근거를 지지해 주는 증거는 많다. 중세 시절에는 다신교 전통이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모든 민중의 마음이 일방적으로 기독교 교리에 매몰된 것은 아니었다. 교회도 수적인 측면에서 근대에 비해 적었다. 중세를 ‘신앙의 황금기’로 부를 역사적 증거는 충분하지 않다. 기독교 신자가 유럽에서는 감소했지만, 종교 시장의 세계화로 인해 전체 기독교인의 수는 오히려 늘어난 상태이다. 인구 밀도를 기준으로 할 때 교회의 수가 가장 많은 지역은 이 땅이다. 더욱이 정기적으로 교회에 나가지 않는 유럽 공동체 시민들 중 상당수는 자발적으로 종교세를 내거나, 여전히 신에 대해 동경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다.

 

종교 시장 논리를 옹호하는 진영은 <고전적 이원론이 붕괴된 과정을 전통과의 단절로 보는 관점의 허구>와 <종교 종말론을 함축한 세속화 관점의 허구>에 대한 문헌학적, 통계적 증거들이 확보된 상태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종교 시장 논리를 비판하는 진영에도 그러한 증거들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많다. 다수의 종교사학자들은 중세를 ‘신앙의 황금기’로 규정할 수 없다는 데 동의한다. 그렇다면, 종교 시장 논리의 맹점은 <고전적 이원론이 붕괴된 과정을 전통과의 단절로 보는 관점의 허구>와 <종교 종말론을 함축한 세속화 관점의 허구>에 대한 증거들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맹점은 <고전적 이원론이 붕괴된 과정을 전통과의 단절로 보는 관점의 허구>와 <종교 종말론을 함축한 세속화 관점의 허구>가 ‘종교 시장 논리를 옹호하기에는 부적합한 근거’들이라는 데 있다. 즉, 그러한 두 근거는 단지 세속화 과정 및 세속화된 사회 상태에 대한 잘못된 규정 방식을 비판할 때 적합한 것이다. 이를 살펴보기 전에 '과학의 세속화'에 대한 두 가지 규정 방식을 분석해 보자.

 

• <과학의 세속화에 대한 첫 번째 규정 방식>

‘과학적 생활양식’은 ‘재확인 및 재생산 가능한 측정량과 가설의 연결성을 추구하는 것’에 의해 제한되어 있다. 과학적 생활양식은 다양한 세계 이해에 대해 열려 있는 까닭에, 발견에 개입된 세계 이해의 형이상학적 관점은 과학적 증명 대상이 될 수 없다. 신 존재를 믿는 과학자가 ‘특정 측정량과의 연결성’을 만족하는 어떤 가설을 발견했다고 하여, 신 존재가 그 가설에 의해 증명되는 것은 아니다. ‘과학의 자연주의’는 ‘방법론적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과학의 자연주의는 가설에 초자연적인 것을 섞지 않겠다는 태도를 말할 뿐이다. 신 존재에 대한 믿음의 여부가 '건전한 과학자'를 판별하는 기준은 아니다. 따라서 ‘건전하지 못한 과학자’는 과학을 빙자해 신과 같은 초자연적인 것을 증명했다거나, 과학이 사회의 다른 분야, 실례로 종교를 대체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과학자이다.

 

• <과학의 세속화에 대한 두 번째 규정 방식>

과학은 ‘존재론적 관점’에서 자연주의 혹은 유물론을 전제한다. 과학은 다양한 세계 이해에 열려 있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무신론과 양립 가능하다. 따라서 무신론자가 아닌 과학자는 ‘건전하지 못한 과학자’이다. 신 존재에 대한 믿음의 여부는 ‘건전한 과학자’를 판별하는 기준이다. 더욱이 과학적 발견과 탐구에서 얻는 정서적 측면은 종교의 사회적 기능을 대체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갖고 있다.

 

<과학의 세속화에 대한 첫 번째 규정 방식>이 올바른 것임은 더 이상 논할 필요가 없다. <과학의 세속화에 대한 두 번째 규정 방식>이 잘못된 것임은 ‘라마르크의 자연주의’를 다루는 것만으로도 이미 밝혀졌기 때문이다. <과학의 세속화에 대한 두 번째 규정 방식>이 잘못된 것임을 확인하기 위해 다음의 물음을 던져보자.

 

• 1914년 미국의 심리학자들은 당시 저명한 과학자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벌였다. 설문 조사의 목적은 신 존재를 믿는 과학자들의 수를 측정하는 것이었다. 약 40%의 과학자가 신 존재를 믿는다고 답했다. 1997년 유사한 설문 조사가 진행되었다. 역시 약 40%의 과학자가 신 존재를 믿는다고 답했다. 80년 동안 신 존재를 믿는 과학자의 비율은 줄어들지 않았다. 이러한 조사 결과를 증거로 문제 삼을 수 있는 것은 <과학의 세속화에 대한 첫 번째 규정 방식>과 <과학의 세속화에 대한 두 번째 규정 방식> 중 무엇인가?

 

당연히 <과학의 세속화에 대한 두 번째 규정 방식>이다. 위 설문 조사 결과를 받아들이면, 적어도 미국에 국한하여 현대 과학계를 대표하는 인물들 상당수가 ‘건전하지 못한 과학자’들이라는 딜레마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과학의 세속화에 대한 첫 번째 규정 방식>은 신 존재를 믿는 과학자들의 수와 무관하게 성립한다.

 

이제 위 설문 조사를 증거로 ‘과학의 세속화 과정’은 허구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고 해보자. 그러한 사람은 일종의 ‘논점 일탈의 오류’를 범한 것이다. 왜냐하면 위 설문 조사를 증거로 문제 삼을 수 있는 것은 단지 <과학의 세속화에 대한 두 번째 규정 방식>이기 때문이다. 종교 시장 논리를 옹호하는 진영도 일종의 ‘논점 일탈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 그들의 근거는 단지 세속화 과정 및 세속화된 사회 상태에 대한 잘못된 규정 방식을 지적하는 데 사용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 살펴보기 위해 세속화 과정이 '종교 사장론을 함축한 일원론'으로 귀결되는가라는 문제를 놓고 벌어진 논쟁을 먼저 다루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