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속화와 민주주의 (봉인 해제)/세속화와 민주주의

일원론 대 다원론 (수정)

착한왕 이상하 2010. 5. 11. 04:17

(2) 일원론 대 다원론

세속화 과정의 결말은 무엇인가? 종교 교리가 더 이상 사회 통합의 원리로 작동할 수 없게 된 사회 상태이다. 그런데 고전적 이원론의 붕괴 과정과 세속화 과정의 연결성을 필연적인 것으로 보고, 고전적 이원론의 붕괴 과정에서 나타난 일부 특징들을 ‘세속화의 본질(essence of secularization)'과 같은 것으로 여기는 철학자가 있다고 해보자. 그의 눈에는 다음과 같은 대립 구도가 들어오게 된다.

 

• ‘과학적 탐구 대상으로서의 자연’ 대 ‘동경의 대상으로서의 자연’

• ‘이성’ 대 ‘충동과 상상’

• ‘개인의 자유’ 대 ‘종교적 권위’

 

그가 위의 대립 구도 속에서 고전적 이원론의 붕괴 과정을 분석하는 경우, 그 붕괴 과정은 ‘과학적 탐구 대상으로서의 자연’이 ‘동경의 대상으로서의 자연’과 대등한 지위를 얻게 되는 과정으로 비춰지지 않는다. 하나가 다른 하나를 대체하는 과정으로 비춰지기 쉽기 때문이다. 이때 고전적 이원론의 붕괴 과정은 더 이상 ‘지상계와 천상계를 이분하는 관점’이 붕괴되는 과정으로 파악되지 않는다. 즉, ‘동경의 대상으로서의 자연’이 약화되거나 혹은 제거되는 과정으로 파악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충동과 상상’이 ‘이성’에 자리를 내주고, 종교적 권위는 더 이상 기능할 수 없게 되는 것으로 파악된다. 이렇게 파악된 고전적 이원론의 붕괴 과정이 19세기 세속화 과정과 필연적으로 연결되는 것으로 여겨지는 경우, 세속화 과정은 궁극적으로 ‘종교 사장론을 함축한 일원론’으로 귀결되어야 한다.

 

종교 시장이 형성된 현실은 ‘종교 사장론을 함축한 일원론’과 어울리기 힘들다. 미국의 경우, 기독교 근본주의가 세력을 확장할 수 있었던 시기는 20세기 초였다. 지금 이 땅에는 극단적 복음주의가 판치고 있다. 건전한 기독교인으로 자처하는 사람조차 시장 경제에 종속된 교회를 비판할 때 ‘교회가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구현하는 데 걸림돌이 된다’고 주장한다. 그는 스스로를 건전한 기독교인으로 자청하지만 자신의 말에 ‘극단적 복음주의’가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한다. 물론 ‘구원’이 중세 때와 달리 ‘현세 구원’을 뜻하게 된 경향 등을 들어, 종교 시장의 형성은 단지 세속화된 사회에서 종교가 살아남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라는 입장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입장을 가지고 ‘종교 시장이 형성된 사실’과 ‘종교 사장론을 함축한 일원론’을 중재하기는 힘들다.

 

세속화 과정은 ‘종교 사장론을 함축한 일원론’으로 귀결되어야 하는 것인가? 야스퍼스(K. Jaspers)는 이러한 문제를 놓고 고민한 인물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스스로를 ‘세속화된 사람’으로 규정했다. 이때 ‘세속화된 사람’은 단순히 특정 종교 교리의 진위 여부에 무관심한 ‘무종교인’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 어떤 이념에도 종속되기를 거부하는 사람’을 뜻한다. 이러한 점에서 야스퍼스를 ‘급진적으로 세속화된 사람’이라고 해도 괜찮을 것이다.

 

급진적으로 세속화된 사람에게도 밤하늘을 바라보며 신비감에 젖는 순간은 있게 마련이다. 이는 ‘동경의 대상으로서의 자연’, ‘구원에 대한 갈망’, ‘초월적 존재에 대한 관심’과 같은 ‘종교적 상징성’을 대표하는 것들이 인간 본성에 속함을 보여준다. 이를 받아들일 때 ‘종교 사장론을 함축한 일원론’은 근본적으로 인간 본성에 반하는 것이다. 그러한 일원론이 인간 본성에 반하는 것이라면, 세속화 과정은 ‘인간 본성에서 벗어나는 과정’이다. ‘삶의 의미’를 중요한 담론 주제로 여긴 야스퍼스가 이러한 입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은 당연하다. 근는 세속화 과정이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에서의 ‘다원론’으로 귀결된다고 보았다.

 

종교적 상징성을 인간의 삶에서 제거할 수 없는 한, 종교가 사장된 사회를 세속화된 사회로 규정할 수 없다. 세속화된 사회에서도 광신도의 무리는 사라지지 않는다. 사회 통합의 원리로 작동했던 종교의 과거 기능이 시장 경제의 이념과 같은 것으로 대체되는 경우도 발생할 수 있다. 심지어 종교의 상징성을 과학을 빙자해 합리화하는 집단들도 나타난다. 그렇다면 세속화된 사회 상태란 무엇인가?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들이 경쟁 및 공존 관계를 맺는 가운데 무종교인들도 당당하게 입장 표명을 할 수 있는 사회 상태를 뜻한다. 고대 시절처럼 무종교인들을 ‘사회에 무관심한 사람’으로, 혹은 무신론자들을 ‘사회에 무책임한 사람’으로 규정할 수 없는 사회가 세속화된 사회이다. 중세 시절을 ‘신앙의 황금기’로 규정할 수 없더라도, 중세에는 기독교 교리에 반하는 입장을 공개적으로 주장할 수는 없었다. 그러한 입장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사회가 세속화된 사회이다.

 

종교 시장에 근거해 세속화 과정을 부정하거나 사소한 것으로 증명하려는 입장, 곧 ‘종교 시장 논리’를 옹호하는 사람은 야스퍼스의 입장을 진지한 반론으로 받아들일까? 종교 시장 형성을 예측한 야스퍼스 자신은 ‘종교 시장 논리’와 같은 것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하지만 세속화 논쟁에서 많은 이들이 종교 시장 논리에 대한 반박으로 다원론을 거론하는 까닭에, 이 물음은 나름의 의미를 갖는다.

 

종교 시장 논리 옹호자들은 다원론을 부정하지 않는다. 더욱이 그들은 종교적 상징성이 종교 시장을 통해 거시적 차원에서 확산된 것으로 본다. 이 때문에, 그들은 다원론이 오히려 종교 시장 논리를 옹호해준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종교 사장론을 함축한 일원론’을 구체화하고, 인간 본성에 호소하지 않은 채 그 일원론의 맹점을 지적해야 한다. 이 경우에만 야스퍼스가 생각한 세속화 과정의 실제 성격이 빛을 발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