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속화와 민주주의 (봉인 해제)/존재 사슬의 논리

정점의 의미 6. 생물학의 두 전통과 우연적인 것 (수정)

착한왕 이상하 2010. 1. 14. 00:30

(6) 생물학의 두 전통과 우연적인 것의 부활 

물질계의 법칙만으로는 생물계의 분류 체계를 건설하기 힘들다는 인식은 18세기에 급성장했다. 이 점은 존재 사슬에 대한 18세기 관점이 주로 생물 현상에 집중되었다는 사실에 의해 알 수 있다. 만약 생물계에 역사가 있다면, 우주가 존재하는 방식인 자연에도 역사가 있다는 관점을 받아들여야 한다. 여기에 생물학의 기여가 있다. 또 생물학의 발달은 유기체의 내부를 조작할 수 있는 실험 방법론의 발달에 빚지고 있다. 그러한 실험 방법론이 없었다면, 발생, 번식, 성장, 다양성으로 대표되는 생물계의 현상을 적절한 단서에 근거하여 설명하기는 힘들었다. 과학적 작업에서 그러한 단서는 일반적으로 실험이라는 통로를 거쳐 발견되기 때문이다.

 

생물학자들은 어떠한 방식으로 생물계의 현상을 역사적 담론 속에 정초시킬 수 있었을까? 이러한 물음에 대하여 가장 단순하면서도 잘못된 대답이 있다. 그것은 ‘역사적 우연(historical contingency)’에 근거한 기회 개념에 호소하여 답하는 것이다. 하지만 ‘역사적 우연’에 호소하려면, 자연에도 역사가 있다는 관점이 과학 공동체의 의식 속에 미리 각인되어 있어야 한다. 따라서 역사적 우연을 강조하여 생물계의 현상을 역사적 담론 속에 정초시키는 것은 일종의 ‘사후 정당화(事後 正當化)’ 작업에 불과하다. 올바른 대답은 다음과 같다.

 

• 유기체와 환경의 관계 속에서 생물계의 현상을 파악하기 시작하면서, 그 관계가 ‘어떻게’라는 물음의 영역을 지배하는 필연적인 법칙성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는 인식이 싹텄다. 유기체와 환경의 관계에 대한 설명은 필연적인 것과 우연적인 것 양자를 필요로 하며, 이때 신의 섭리로 양도 되었던 물음들, 실례로 ‘왜 특정 유기체는 이러이러한 형태를 가지게 되었을까?’와 같은 물음도 과학적 설명 영역에 들어올 가능성이 열린다. 그러한 가능성의 탐구 여정은 발생, 번식, 성장, 다양성으로 대표되는 생물계의 현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결과로 끝났다. 즉, 생물계의 역사를 인정하는 것으로 끝난 것이다.

 

위 대답을 ‘우연적인 것의 부활’이라고 은유적으로 표현하자. 우연적인 것의 부활은 전성설의 부정과 함께 시작되었다.

 

18세기 말에 이르러 전성설이 깨지는 데 결정적 기여를 한 것은 기형 중에도 대물림 가능한 것이 있다는, 즉 유전 가능한 것이 있다는 사실의 발견이었다. 전성설에 따르면, 다지증과 같은 특정 기형은 단지 영양 공급 등의 외부 요인에 기인한 것이어야 한다. 외부 요인이 발생에 미치는 영향도 운동 변화에 의해 설명될 수 있어야 한다. 그러한 설명이 어려운 것은 단지 인간의 무지에 기인한 것일 뿐이다. 이러한 생각은 유전 가능한 기형도 있다는 사실의 발견으로 인해 흔들리게 된다.

 

우성유전(偶性遺傳)에 속하는 다지증의 경우에도, 그것의 실제 발현은 양쪽 부모에 의존적이다. 다지증의 유전은 전성설의 두 전제 중 하나인 ‘원형의 한쪽 배우자 유래설’에 대한 반례(返禮)가 된다. 하지만 그러한 반례로 인해 원형 전개의 확장 수단으로 파악된 환경 개념, 즉 물리적 환경 개념마저도 사장되는 것은 아니다. 원형 대신 양쪽 부모에 분포된 유전 물질을 전개시켜주는 법칙을 가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때 개체 발생에서 환경의 요인은 여전히 사소한 것으로 여겨진다.

 

만약 개체 발생 과정이 유전형에서 표현형으로 향하는 일방향성의 규칙성에 따른 결과라면, 형태 발생에 영향을 미치는 환경 요인들은 사소한 것이 되어 버린다. 이때 종 내 개체들의 표현형적 다양성을 설명하기 힘들어진다. 형태 대물림 과정과 맞물린 유전의 규칙성은 근본적으로 종 내 개체들의 유사성을 설명 대상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또 유전만으로는 종 다양성을 설명할 수 없다. 유기체와 환경의 관계에 대한 관심은 한편으로는 종 내 개체들의 다양성을 설명하려는 동기와, 또 한편으로는 종 다양성을 설명하려는 동기를 낳았다. 19세기 생물학의 두 연구 전통인 개체 발생학과 진화 생물학은 이러한 두 동기에 기인한 것이며, 최근에 와서야 서로가 필요하다는 인식 아래 접점을 찾게 되었다. 유기체와 환경의 관계에서 우연적인 것을 규정하는 방식이 서로 달랐기 때문이다.

 

‘생물학’이라는 용어는 19세기에 탄생한 것이다. 하지만 생리학이나 해부학의 역사를 고려할 때 생물학의 역사는 고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진화 생물학 연구 전통보다 먼저 시작된 개체 발생학 연구 전통은 19세기 생리학의 발전 양상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그 실험 방법은 세포 조직학에 빚지고 있다.

 

생리학의 핵심 주제는 ‘유기체의 내부와 외부’, 즉 ‘안과 밖’의 관계이다. 유기체 내부의 어떤 원리를 가정하여 유기체에 대한 외부 영향을 사소한 것으로 돌리는 관점과, 운동 변화의 법칙에 의해 유기체 내부와 외부를 통합할 수 있다는 관점이 서로 경쟁해 왔다. 이러한 경쟁 구도는 에너지보존 법칙의 등장, 열역학의 발달 및 실험 방법론의 개선 등과 함께 약화된다. 이로 인해 과학적 작업에 사용되고 있는 자연 법칙들에만 근거하여 유기체의 내부와 외부를 구분할 수 있다는 관점이 싹텄다. 그리고 유기체의 형태는 신경계, 내분비체계 등의 복잡한 연결망에 근거하여 유지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유기체의 내부를 주관하는 ‘생기(vital force)’와 같은 별도의 힘을 가정할 필요가 없게 된 것이다. 또한 물질계를 주관하는 보편 법칙을 가정하는 것이 유기체의 내부와 외부를 구분하는 데 걸림돌이 된다는 생각도 사라졌다. 생리학의 이러한 전환기는 개체 발생학의 발달 역사와 중첩되어 있다.

 

수정란의 분할만으로는 개체 발생을 설명할 수 없다. 개체 발생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세포 간 상호작용에 주목할 필요가 있었다. 이에 대한 인식은 세포 조직학에 빚지고 있다. 개체 발생학자들은 특정 세포를 제거하거나 세포 간 연결을 방해함으로써 유기체를 구성하는 각 체계가 단계적으로 형성된다는 사실을 밝혀낼 수 있었다. 그러한 사실은 개체 발생이 ‘세포 간 상호작용에 근거한 발달 과정’이라는 관점을 뒷받침한다. 전 단계에 기인한 단계가 다시 전 단계로 돌아갈 수 없는 까닭에, 개체 발생 과정은 질적 상태 변화의 비순환적 과정, 즉 역사적 과정의 일종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개체 발생은 특정 형태를 산출하는 과정이기 때문에, 세포 간 상호작용은 그러한 형태를 지향하는 방향성을 보여야 한다. 유전 요인들이 세포 간 상호작용에 개입한다고 가정한다면, 개체 발생의 방향성은 일단 자연스럽게 설명된다. 하지만 동종 내 개체들의 표현형적 다양성은 유전만으로 설명될 수 없다. 그러한 표현형적 다양성은 기후, 온도, 중력 등의 환경 요인들도 세포 간 상호작용에 개입한다고 가정할 때 자연스럽게 설명된다.

 

 

 

위의 인과 도식은 이미 알려진 과학의 법칙들에만 근거하여 유기체의 내부와 외부를 구분할 수 있다는 생리학의 발달 여정과 함께 나타난 개체 발생의 설명 방식이다. 유기체는 행동을 매개로 하여 환경에 영향을 미칠 수 있지만, 유기체의 발생 자체가 환경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니다. 환경 요인이 세포 간 상호작용에 인과적으로 개입하는 방식은 우연적이다. 그러한 우연적 요인의 개입 없이는 형태의 다양성을 설명할 수 없다.

 

어떤 과정에 개입하는 요인들의 범주를 가정할 때 유전 요인들의 범주는 ‘유전’이며, ‘환경 요인들의 범주는 ’환경‘이다. 형태 발생에 그러한 요인들이 개입하는 한, 형태 발생은 유전과 환경에 의해 제한되어 있다고 말해야 한다.

 

 

 

 

위 도식은 앞서 살펴본 개체 발생의 인과 도식을 ‘유전’, ‘환경’, ‘형태 발생’이라는 세 범주의 관계로 나타낸 것이다. 환경 요인이 세포 간 상호작용에 근거한 개체 발생에 직접적으로 개입하는 까닭에, 환경은 형태 발생을 인과적으로 제한한다. 또 유기체의 형태 발생 자체가 환경을 조절하는 것은 아닌 까닭에, 환경이 형태 발생을 인과적으로 제한하는 방식은 우연적인 것을 허락한다. 왜 특정 유기체는 이러이러한 형태를 가졌을까? 우연적인 것을 허락하는 위 도식은 이러한 물음에 부분적인 대답을 제공한다. 바다 속 환경 요인들을 고려할 때 헤엄치기에 적당한 형태는 유선형이라고 답할 수 있으며, 유사하면서도 차이를 보이는 다양한 유선형을 가정할 수 있다. 환경이 형태 발생을 인과적으로 제한한다는 관점을 따른다면, 신의 섭리에 호소하여 그러한 형태 다양성을 설명할 필요는 없어진다.

 

만약 중력에서만 큰 차이를 보일 뿐 다른 모든 조건이 동일한 행성에 지구의 생물계를 옮겨 놓는다고 가정하면, 제 1세대 후손에서조차도 형태적 차이가 나타날 것이다. 환경 요인이 개체 발생에 인과적으로 개입하는 방식을 세밀하게 고려한다면, 어떤 형태적 차이가 나타날 것인지를 사전에 예측해 볼 수 있다. 우연적인 것을 과학적 설명에 허락하는 경우, 그러한 예측은 초기조건에 보편법칙을 적용하여 확실한 결론을 얻어내는 방식이 될 수 없다. 그러한 예측은 어떤 과정에 개입하는 요인들을 조합하여 저울질하는 것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생리학이 유기체의 내부와 외부의 관계, 즉 ‘안과 밖’의 관계를 다룬다면, 개체 발생학은 발생의 ‘전후(前後)’ 관계를 다룬다. 환경이 형태 발생을 제한하는 방식이 우연적인 것을 배제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그러한 전후 관계는 자연 역사의 일종으로 여겨질 수 있다. 그런데 생물계의 다양성을 설명하려면, 개체 발생에 국한된 자연의 역사로만은 불충분하다. 생물계의 다양성을 설명하려면, 종 다양성의 축적 과정과 맞물린 전후 관계도 필요하다. 이러한 인식은 개체 발생학과는 또 다른 생물학의 연구 전통을 산출했다. 바로 진화 생물학이다.

 

진화에는 분자 차원의 무작위적인 변이, 유전자의 수평적 교환(lateral gene exchange), 환경 요인, 소규모 집단의 유전자 빈도 차이를 불러일으키는 유전자 부동(gene drift), 집단 간 유전적 차이를 감소시키는 유전자 흐름(gene flow) 등이 개입한다. 그 중 무엇을 고려하는가에 따라 진화의 설명은 분자 차원의 진화, 표현형 차원의 진화, 소규모 집단의 진화, 대규모 집단의 진화, 소진화 및 대진화의 영역으로 나뉜다. 주어진 환경에 적합한 개체들이 살아남게 되었다는 관점에 근거한 자연선택(natural selection)은 표현형 차원의 진화 및 소진화를 설명하는 데 동원되는 가설이다. 자연선택은 환경 요인, 유전자 부동 및 흐름이라는 요인들을 고려하여 유전자 빈도 차이로 측정되는 사실이기도 하다. 진화에 대한 여러 설명 영역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자연선택 없이는 진화를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즉, 자연선택은 진화의 필요조건이다.

 

자연선택이 진화의 필요조건이라는 주장에서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 자연선택 가설 자체에 ‘생존에 적합한 환경’이라는 개념이 함축되어 있다. 여기서 환경 요인은 진화 과정에 직접적으로 개입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선택압(selection pressure)’이라는 은유로 이해된다. ‘선택압’은 중력처럼 물체에 직접 작용하는 인과적 힘과 같은 것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유기체의 생존 적합성에 대한 조건으로서의 환경 요인들’을 뜻한다. 이때 자연선택이 진화의 필요조건임을 함축한 도식은 다음과 같이 나타낼 수 있다.

 

 

 

 

개체 발생학에서는 환경이 형태 발생을 인과적으로 제한한다는 점에서, 환경의 역할은 ‘인과적 제한’으로 규정된다. 반면 진화 생물학에서는 환경이 적합한 형태를 선택압적으로 제한한다는 점에서, 환경의 역할은 ‘선택압적 제한’으로 규정된다. 자연선택을 중심으로 한 진화 생물학에서 유전은 형태 유지를 제한하는 범주로 규정된다.

 

생존에 적합한 형태는 과거 환경에 적응된 것이다. 어느 형태가 생존에 적합한지는 해당 환경 구조와 맞물려 평가되어야 한다. 이때 우연적인 것에 근거한 기회를 무시할 수 없게 된다. 주어진 환경이 유기체의 생존에 적합한지를 따지는 것은 필연적일 수 없기 때문이다. 생존에 적합한 형태의 선택은 변이, 개체군의 이동 및 지리적 분포, 기후 변화 등 우연적인 것에 의존적이다.

 

형태 선택에 대한 환경의 제한적 역할이 우연적인 것을 허락한다면, 왜 특정 유기체가 이러이러한 형태를 가졌는가라는 물음이 부분적으로 대답된다. 생존에 적합한 특정 형태가 자연적으로 선택되었다면, 이것은 유기체가 그러한 형태를 지니게 된 이유 중 하나로 여겨질 수 있다. 또 자연선택에 의한 종 변형 과정이 종 다양성 축적을 수반하는 경우, 그러한 과정은 순환적일 수 없다. 환경의 선택압적 제한이 우연적인 것을 허락하는 까닭에, 진화의 과정을 거꾸로 되돌릴 수도 없다.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의 측면만 인정하더라도, 생물계에는 자연의 역사가 있다고 말해야 한다.

 

19세기 생물학을 대표하는 두 전통, 즉 개체 발생학과 진화 생물학의 전통은 설명의 영역에서뿐만 아니라 환경 역할의 측면에서도 차이를 보인다. 이러한 차이로 인해 두 연구 전통은 오랜 동안 대립 관계를 맺어 오다가, 최근에 와서야 서로가 필요하다는 인식이 정착하게 되었다. 하지만 자연의 역사를 둘러싼 논쟁사를 다룰 때 두 전통의 차이보다는 공통점이 부각되어야 한다. 그 공통점은 신의 섭리로 양도되었던 우연적인 것을 과학적 설명 영역에 부활시킨 것이다. 그 우연적인 것은 형태 발생 및 형태 선택에 미치는 환경의 제한 역할과 관련된다. 그러한 역할에 의해 자연의 역사가 인정되는 까닭에, 생물학의 우연적인 것은 무작위적인 것으로서의 우연 아니라 ‘역사적 우연’으로 규정되게 된 것이다.

 

현대적 지적 설계론은 전통적 지적 설계론과 달리 과학적 설명 영역에서 우연적인 것을 배제하지 않는다. 따라서 현대적 지적 설계론 옹호자를 맹목적인 창조 과학 옹호자와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창조 과학 옹호자는 성서의 기록에 반하는 과학적 발견을 무조건적인 적으로 삼는 반면, 현대적 지적 설계론 옹호자는 신의 섭리를 자연에서 찾는 전통에 서있다.

 

왜 특정 유기체는 이러이러한 형태를 가졌을까? 우연적인 것의 부활과 함께 신의 섭리에 의지하지 않고서도 이러한 질문을 다룰 수 있게 되었더라도, 그 설명은 여전히 부분적이다. 현대적 지적 설계론 옹호자는 그 설명의 한계를 지적한다. 어차피 과학만으로는 세계에 대한 완벽한 이해를 얻을 수 없기 때문에, 지적 설계론 옹호자의 그러한 지적은 과학에 대한 공격으로 여겨질 수 없다. 또 어느 과학자가 세계에 대한 완벽한 이해를 얻기 위해 지적 설계론에 기대는 것도 큰 문제를 발생시키지 않는다. 과학적 지식이 신뢰할만한 이유는 유사한 조건 아래 반복적으로 사용 가능한 데 있는 것이지, 결코 유일한 세계 이해를 선별하여 그것을 옹호하는 데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 생물학의 한계가 지적 설계자 가정을 뒷받침하는 과학적 증거라든가, 혹은 지적 설계자 가정도 과학적 가설로 간주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과학에 대한 침략 행위이다. 자연선택만으로 진화를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실례로 특수한 기능에 적합한 미생물의 구조가 잘 설명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지적 설계자 가정을 마치 과학적 검증 대상처럼 묘사하는 것은 잘못이다. 과학적 작업이 세계를 이해하는 다양한 방식에 열려 있다고 하여, 과학적 작업에 고유한 성격마저도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과학적 작업은 재확인 및 재생산 가능한 측정량과 가설 사이의 연결성 추구에 의해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설명의 한계를 극복할 목적으로 설정된 가정이 곧바로 과학적 가설의 지위를 확보할 수는 없는 것이다. 지적 설계론을 옹호자는 이를 망각하지 않을 때 여러 관점 및 방법론이 뒤섞인 연구 공간 속에서 다른 이들과 함께 할 수 있다.

 

과학적 설명 영역에서 우연적인 것의 부활과 함께 등장한 우주 창조설 중에는 지적 설계론 외에도 ‘강한 자율적 우주 창조설’도 있다. 강한 자율적 우주 창조설은 생물학의 역사적 우연성 외에도 현대 과학에서 인정되는 모든 종류의 우연적인 것을 허락한다. 그러한 우연적인 것은 필연적인 것과 상호작용을 함으로써 우주의 각 계층이 조직화된다. 물질계에서 생물계로의 전이 가능성은 이러한 ‘우주의 자기 조직화’ 과정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우주론적 진화론의 성격을 갖는 강한 자율적 우주 창조설에 따르면, 신의 섭리를 정당화하기 위해 지적 설계 개념이 가정될 이유는 없다. 신의 섭리는 우주 스스로 진화할 수 있도록 해준 너그러움으로 이해된다. 신의 선(善)은 이기심의 완전한 결여로, 그리고 신의 사랑은 사사건건 자식을 간섭하는 보호자의 사랑이 아니라 자식 스스로 삶을 개척하기를 바라는 보호자의 사랑에 비유된다. 이러한 ‘우주론적 진화론’ 혹은 ‘유신론적 진화론(theistic evolution)’의 전통은 고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다윈 이후에 보다 많은 추종자를 거느리게 된다. 다윈과 함께 자연선택 가설의 공동 발견자로 거론되는 월리스(A. R. Wallace), 집단 유전학의 통계적 방법론을 바탕으로 진화론의 과학화를 꾀한 피셔(R. Fischer), 진화의 종합설을 이끈 도브잔스키(Th. Dobzhansky) 등을 들 수 있다.

 

강한 자율적 우주 창조설을 옹호하는 신학자들, 실례로 라너(K. Rahner), 판넨베르크(W. Pannenberg), 존슨(E. Johnson), 호그트(J. F. Haught) 등은 창조와 진화가 서로 양립 불가능한 것으로 보지 않는다. 창조는 신학적 설명 영역에, 과학은 과학적 설명 영역에 속하는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강한 자율적 우주 창조설은 전통적인 이신론의 연장선에 서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둘의 차이는 다음에서 명백해진다.

 

•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할까? 이신론자는 주사위 놀이를 하는 신 개념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강한 자율적 우주 창조설의 옹호자는 주사위 놀이를 하는 신 개념을 받아들인다.

 

위에서 ‘주사위 놀이’는 우연적인 것 혹은 우연적인 것에 기인한 기회를 상징한다. 약한 자율적 우주 창조설을 대표하는 이신론이 강한 자율적 우주 창조설로 전환하게 된 계기는 우연적인 것을 과학적 설명 영역에서 배제할 수 없다는 인식의 성장이었다.

 

강한 자율적 우주 창조설은 앞장에서 살펴본 태초를 가정하는 우주론, 즉 국소적 자연의 역사가 우주 전체의 역사 속에서만 의미를 갖는 우주론과 맥락을 같이 한다. 이미 살펴봤듯이, 태초를 가정하는 우주론과 태초를 가정하지 않는 우주론 중 무엇이 옳은 것인가라는 물음은 현재 과학의 수준에서는 대답할 수 없다. 또한 그러한 물음에 답하는 것이 과학적 작업의 목적이 되어야 할 하등의 이유도 없다. 이는 강한 자율적 우주 창조설 옹호자에게도 해당한다. 그에게 창조는 과학적 설명 영역이 아니라 신학적 설명 영역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신학과 과학의 공조 관계 속에서 세계에 대한 완벽한 이해가 가능하다고 여긴다. 이에 대한 인정 유무는 과학자 개인에게는 선택의 문제일 뿐이다.

 

과학적 설명의 한계가 신 존재에 대한 증거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역사에 무지한 ‘죽은 머리(dead head)’의 소유자이다. 누군가 자연선택 중심의 진화론에 근거하여 무신론이 과학적으로 증명되었다고 한다면, 그 또한 신 개념의 다양성에 무지한 ‘죽은 머리’의 소유자이다. 자연선택 가설을 생물학의 통합 원리처럼 주장하는 무신론 진영 그리고 지적 설계자 가정도 과학적 탐구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지적 설계론 옹호 진영 사이의 갈등은 단지 ‘죽은 머리’ 대 ‘죽은 머리’의 충돌일 뿐이다. 이를 살펴보기 위해 넘어야 할 것이 아직 하나 남아 있다. 존재 사슬을 수직선에 비유할 때 점들의 간격과 위치를 논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