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속화와 민주주의 (봉인 해제)/세속화와 민주주의

중심과 주변의 구분 맥락에 잠재된 유교의 변통 가능성

착한왕 이상하 2011. 8. 6. 22:13

(2) 중심과 주변의 구분 맥락에 잠재된 유교의 변통 가능성

‘관계 중심의 인간 관점’, ‘우열 구분의 관점’, ‘엄격한 신분 구분의 관점’으로 구성된 중심과 주변의 구분 맥락이 고전적 이원론과 비교해 논리적으로 정합적이지 않다고 할 때, 이것은 중심과 주변의 구분 맥락이 모순을 발생시키는 ‘자기 파괴적인 이론 체계’임을 뜻하지 않는다. 만약 중심과 주변의 구분 맥락이 자기 파괴적일 정도로 정합적이지 않다면, 그 구분 맥락을 함축한 유교를 정교한 이론 체계라고 할 수 없다. 이때 유교의 형성 과정에 기여한 사람들과 유교에 따라 생활한 사람들은 비논리적이거나 무비판적인 사람으로 평가되고 만다.

 

‘논리’라는 것을 논증의 형태나 추론 형식에 국한시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적 의미에서 접근할 때, 그것은 그저 ‘내용적으로 잘 들어맞음’을 뜻한다. 동시에 참일 수도 거짓일 수도 없는 모순 관계를 맺는 두 주장이나 입장은 내용적으로 앞뒤가 잘 들어맞지 않는 경우를 대표한다. 그러한 두 주장이나 입장은 비판적으로 글을 대하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눈에 띠게 마련이다. 따라서 중심과 주변의 구분 맥락이 모순을 함축한 자기 파괴적인 이론 체계라면, 유학자들은 논리적으로 생각하지 않으며 무비판적으로 글을 대하는 사람들이라고 말해야 한다. 이는 상식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들다.

 

중심과 주변의 구분 맥락이 고전적 이원론과 비교해 논리적으로 정합적이지 않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것이 모순을 함축한 자기 파괴적 체계가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인가?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 여기서 말하는 ‘논리적으로 정합하지 않다는 것’의 의미를 분명히 하자. 그 의미는 역으로 ‘논리적으로 정합하다는 것’의 의미를 구체화할 때 분명해진다.

 

어떤 두 주장 혹은 입장 A, B에 국한해 ‘논리적으로 정합하다는 것’에 대한 일상적 의미를 구체화해 보자. A와 B가 논리적으로 정합하다고 할 때, 우선 A와 B는 모순이나 반대 관계를 함축한 진술을 발생시키지 않도록 내용적으로 앞뒤가 잘 들어맞아야 한다. 그 다음, A를 받아들이면 B의 부정을 받아들일 수 없을 정도로 A와 B의 양립 가능성은 강해야 한다. 아니면 B를 받아들이면 A를 부정한 것을 받아들일 수 없도록 B와 A의 양립 가능성은 강해야 한다. 따라서 A와 B가 하나의 이론 체계 속에서 논리적으로 정합하다면, 그 둘을 내용적으로 분리하기 힘들다. A와 B가 하나의 이론 체계 속에서 논리적으로 정합하다는 것에 대한 심리적 기준은 다음과 같다.

 

• A를 받아들인 상태에서 B를 부정하기 힘들거나, B를 받아들인 상태에서 A를 부정하기 힘들다고 해보자. 이때 A와 B를 포함한 이론 체계 내에서 A와 B를 내용적으로 분리하는 것은 자연스럽게 다가오지 않는다.

 

A와 B를 내용적으로 분리하기 힘든 정도는 A와 B가 속한 이론 체계의 내용에 의존적이기 때문에 어떤 형식적 기준에 의해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또한 A와 B를 내용적으로 분리하기 힘든 정도는 A와 B 둘 중 무엇을 기준으로 삼는가에 따라 달라진다. A를 기준으로 A를 B와 분리하기 힘든 경우는 ‘A를 받아들인 상태에서 B를 부정하기 힘든 경우’에 해당한다. B를 기준으로 B를 A와 분리하기 힘든 경우는 ‘B를 받아들인 상태에서 A를 부정하기 힘든 경우’에 해당한다. 만약 A를 기준으로 A를 B와 분리하기 힘들고, 동시에 B를 기준으로 B를 A와 분리하기 힘든 경우가 있다면, 그 경우는 ‘A와 B를 내용적으로 분리하기 가장 힘든 경우’에 해당한다. 이러한 까닭에, A와 B의 논리적 정합성을 따질 때 의견의 일치를 보기 힘든 경우가 발생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하지만 그러한 경우 때문에 논리적으로 정합하다는 것의 일상적 의미가 항상 애매모호한 것은 아니다.

 

A를 고전적 이원론의 핵심 관점인 ‘지상계와 천상계의 이분법’, 그리고 B를 고전적 이원론의 또 다른 관점인 ‘인간적인 것과 신성적인 것의 이분법’이라고 해보자. 고전적 이원론의 경우, B는 내용적으로 A에 함축되어 있다. 따라서 A와 B는 모순 및 반대 관계를 맺는 진술을 발생시키지 않는다는 점에서 내용적으로 앞뒤가 들어맞는다고 할 수 있다. 또한 A와 B는 논리적으로 양립 가능하다. 즉, A와 B를 동시에 참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양립 가능성은 A와 B의 내용적 정합성에 대한 필요조건일 뿐이다. A와 B가 서로 정합적이라면, A를 받아들일 때 B를 부정한 것을 받아들이기 힘들거나, B를 받아들일 때 A를 부정한 것을 받아들이기 힘들어야 한다. 다시 말해, A와 B는 내용적으로 분리하기 힘들어야 한다. B가 A에 함축되어 있는 경우, A를 받아들인 상태에서 B를 부정할 수 없다. 그러한 경우, B를 부정하면 A도 부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전적 이원론의 경우는 지상계와 천상계를 이분하는 관점을 기준으로, 즉 A를 기준으로 A를 인간적인 것과 신성적인 것의 이분법인 B와 내용적으로 분리하기 힘들다.

 

이제 C를 고전적 이원론의 또 다른 관점인 ‘평신도와 성직자의 이분법’이라고 하자. 평신도와 성직자의 이분법은 지상계와 천상계의 이분법과 인간적인 것과 신성적인 것의 이분법을 결합하여 사회에 투영할 때 얻어진다. 따라서 고전적 이원론의 체계 속에서 A와 B의 결합은 C를 함의하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이는 A와 B를 결합한 것을 기준으로 A와 B를 C와 내용적으로 분리하기 힘든 경우에 해당한다. 즉, A와 B를 받아들일 때 C를 부정하기 힘들다.

 

고전적 이원론에 대해 살펴본 논의를 중심과 주변의 구분 맥락에 적용하기 힘들다. 이를 알기 위해 중심과 주변의 구분 맥락을 구성하는 ‘관계 중심의 인간 관점’과 ‘우열 구분의 관점’을 교차 비교해 보자. 중심과 주변의 구분 맥락에서의 핵심 관점이라 할 수 있는 관계 중심의 인간 관점은 다음을 뜻한다.

 

• 인간은 천명(天命)에 따라 지(地)를 다스리는 존재로서 천지조화(天地調和)의 중심이다. ‘천지조화’는 유교에서 궁극적 실체로 가정된 ‘이(理)에 따라 기(氣)가 활동한 결과로 나타나는 상태’를 뜻한다. 모든 것은 기의 활동에 따른 전체의 분화 과정 속에서 의미를 갖기 때문에, 만물은 하나의 관계망을 형성한다. 다른 모든 것에 의존적인 인간은 천지(天地)를 매개하는 존재이다. 여기서 ‘인간’은 ‘이(理)가 반영된 본성을 지닌 도덕적 존재’를 뜻한다. 인의예지(仁義禮智)란 이(理)가 사람에게 반영된 것이다.

 

중심과 주변의 구분 맥락을 구성하는 또 다른 관점인 ‘우열 구분의 관점’은 다음을 뜻한다.

 

• 모든 것이 양(陽)과 음(陰)의 상보적 관계에 기인한 것이라고 해도, 양을 상징하는 것은 음을 상징하는 것보다 우월하다. 천지를 매개하는 도덕적 존재인 인간은 양을 상징하는 천(天)의 명(命)에 따라 지(地)를 다스려야 한다. 음양의 상대적 차이에 근거해 중심과 주변이 구분이 나타난다. 그러한 중심과 주변의 구분에 따른 자연의 위계질서가 반영된 사회만이 조화로운 사회이다. 그 누구보다 천명을 받들 수 있는 군주가 사회의 중심이 되어야, 사회의 조화로운 상태는 유지될 수 있다. 사대부는 군주의 명을 받아 아래를 다스리는 자이다. 가족의 관계에서 남편은 천(天)에, 그리고 부인은 지(地)에 비유된다. 자식은 부모를 매개하는 존재이다.

 

이러한 우열 구분의 관점을 관계 중심의 인간 관점에 투영시키는 사고방식 속에서 ‘엄격한 신분 구분의 관점’을 이끌어낼 수 있다.

 

• 우주 전체에 해당하는 천(天), 지(地), 인(人)의 관계가 반영된 사회 상태만이 조화롭다. 천명을 받드는 군주를 제외한 각 사람에게는 받들어야 하는 윗사람이 있다. 사물과 동물을 다루는 천민을 제외한 각 사람에게는 다스려야 하는 아랫사람이 있다. 이 때문에, 각 사람이 속한 신분이 있다. 사람이 각자가 속한 신분에 따라 행동할 때, 위아래의 관계는 군주를 중심으로 조화로운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 엄격한 신분 구분에 따른 위계질서는 자연스러운 것이며, 덕(德)은 각 신분에 요구되는 도리를 자발적으로 행하려는 심성과 다르지 않다.

 

관계 중심의 인간 관점, 우열 구분의 관점, 엄격한 신분 구분의 관점으로 구성된 중심과 주변의 구분 맥락과 서양의 고전적 이원론은 내용적 측면에서 다르다. 또 그 둘은 논리적 구조의 측면에서 다르다. 고전적 이원론의 논리적 구조를 살펴보면, 인간적인 것과 신적인 것을 이분하는 관점은 지상계와 천상계를 구분하는 관점에 함축되어 있으며, 평신도와 성직자를 구분하는 관점은 그러한 함축 관계에 바탕을 두고 있다.

 

중심과 주변의 구분 맥락에서 우열 구분의 관점이 관계 중심의 인간 관점에 내용적으로 함축되어 있다고 그 누구도 자신할 수 없다. 물론 그 두 관점이 반대 및 모순 관계를 맺을 정도로 양립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그 두 관점을 내용적으로 분리할 수 없을 정도로 중심과 주변의 구분 맥락이 정합적인 것은 아니다. 이를 받아들일 때, 엄격한 신분 구분의 관점은 서로 양립 가능한 관계 중심의 인간 관점과 우열 구분의 관점을 사회에 투영하여 얻어진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 따라서 중심과 주변의 구분 맥락은 다음과 같은 구조를 갖는 것으로 파악된다.

 

 

  

A와 B가 양립 가능하다고 할 때, A를 받아들인다고 반드시 B도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역으로 B를 받아들일 때 반드시 A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아니다. 특히 A와 B의 결합이 어떤 전제 C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경우가 그렇다. 이때 C는 A 또는 B를 주장하기 위한 전제가 되거나, 아니면 A, B 모두 공통적으로 기대는 전제가 될 수 있다. C를 받아들이지 않는 경우, A를 받아들여도 반드시 B를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아니며, 이에 대한 역도 성립한다. C를 수긍하지 않는 것은 A와 B의 내용적 분리 가능성을 허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중심과 주변의 구분 맥락을 구성하는 관계 중심의 인간 관점과 우열 구분의 관점은 A와 B의 이러한 관계에 해당한다.

 

관계 중심의 인간 관점에 따라, 인간을 천지(天地)를 매개하는 존재라고 하자. 그러한 존재 없는 우주를 조화로운 것으로 여길 수 없다면, 이(理)가 인의예지(仁義禮智)로 구현된 존재인 인간은 천지조화(天地調和)의 중심으로 간주된다. ‘인’의 한자어 ‘仁’에도 반영되어 있는 이 점은 신유학의 인간 중심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관계 중심의 인간 관점에는 ‘동양적 인간 중심 사상’이 배어 있다고 하는 것이다.

 

관계 중심의 인간 관점을 받아들일 때, 반드시 우열 구분의 관점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아니다. 관계 중심의 인간 관점에서 ‘인간’ 개념은 ‘이(理)가 도덕적 원리로 반영된 존재’를 뜻할 뿐, 그 개념 자체가 천명을 직접 받드는 군주와 백성의 구분, 사대부와 평민의 구분, 평민과 천민의 우열 구분, 심지어 중심국과 주변국의 구분을 정당화해주지는 못한다. 그렇게 정당화하려면, 양(陽)과 음(陰)의 상대적 차이에 따라 형성된 자연의 위계질서가 가치의 측면에서 중심과 주변으로 구분되고, 이러한 구분을 반영한 사회 상태만이 조화롭다는 전제가 필요하다. 유교 전통에 따라 하늘의 명령에 따라 땅을 다스리는 것이 인간의 운명이라고 가정해도, 그러한 전제 없이는 인간 사회에도 중심과 주변이 있어야 한다는 우열 구분의 관점은 성립하지 않는다.

 

유교에서 사회 전체의 중심은 군주이며, 가장 작은 공동체의 단위인 가족의 중심은 부(父)가 된다. 우열 구분의 관점에 따르면, 모든 사람에게는 위로는 받들어야 하는 것이 있고 아래에는 다스려야 하는 것이 있다. 군주는 천명을 받들어 백성을 다스려야 하며, 사대부는 군주를 받들어 무리를 조화롭게 이끌어야 하며, 천민은 사물을 다스린다. 이러한 생각은 관계 중심의 인간 관점이 우열 구분의 관점과 양립 가능하다는 입장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관계 중심의 인간 관점에서 ‘인간’이 사회를 구성하는 개인들을 반드시 뜻하지 않기 때문에, 중심과 주변의 구분에 따른 자연의 위계질서를 반영한 사회가 조화로운 사회라는 전제를 바탕으로 관계 중심의 인간 관점은 우열 구분의 관점과 어울릴 수 있게 된다.

 

그러나 관계 중심의 인간 관점을 받아들여도, 중심과 주변의 구분에 따른 자연의 위계질서를 모방한 사회가 조화로운 사회라는 전제를 반드시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이때 관계 중심의 인간 관점을 받아들인다고 우열 구분의 관점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아님이 분명해진다.

 

• 첫째, 관계 중심의 인간 관점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여 받아들이는 경우, 그 관점에는 동양적 인간 중심 사상이 배어 있다. 이때 인간은 다른 동물이나 사물보다 더 가치있는 존재라고 해야 한다. 여기서 인간은 사회를 구성하는 개인들을 뜻하지 않는다. 따라서 천지(天地)를 매개하는 도덕적 존재인 인간을 다른 동물이나 사물보다 우월하다고 받아들여도, 관계 중심의 인간 관점 자체로부터 개인들의 무리 사이에 우열 구분이 있다는 입장을 이끌어낼 수 없다. 우열 구분의 관점이 근거하고 있는 ‘중심과 주변의 구분에 따른 자연의 위계질서를 반영한 사회만이 조화롭다’는 전제를 부정하는 경우, 관계 중심의 인간 관점은 ‘누구나 인간관계의 중심이 될 수 있다’는 입장과도 양립 가능하다. 이때 군주가 사회의 중심이라는 식의 사고방식은 더 이상 통용될 수 없게 된다. 이는 관계 중심의 인간 관점과 우열 구분의 관점이 내용적으로 분리 가능함을 뜻한다. 이 때문에, 관계 중심의 인간 관점과 우열 구분의 관점은 양립 가능하지만, 전자를 받아들일 때 반드시 후자를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아니다.

 

• 둘째, 관계 중심의 인간 관점에 함축된 인간 개념이 인간 중심 사상을 전제하는 것은 아니라는 입장도 가능하다. 신유학 및 신유학에 바탕을 둔 조선 성리학(性理學)의 전통에서 인간을 ‘천지(天地)를 매개하는 존재’로 규정한 이유는 인간을 도덕적 존재로 정당화하기 위해서였다. 그러한 정당화 과정에서 인간 존재의 기원이 자연 이외의 다른 곳 혹은 다른 것에 있는 것으로 가정되지 않는다. 인간 또한 다른 동물 및 사물과 마찬가지로 천지로 상징되는 양(陽)과 음(陰)의 상보적 관계에 근거한 존재이다. 삼라만상은 이(理)에 의해 제한된 기(氣)의 활동성의 결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동물들도 심성(心性)을 갖고 있으며, 그 심성에도 인의예지(仁義禮智)와는 다른 방식으로 이(理)가 반영되어 있다고 말해야 한다. 인간 심성을 다른 동물과 구분하려는 목적에서 벗어나 관계 중심의 인간 관점을 접근할 때, 관계 중심의 인간 관점에 함축된 인간 개념이 반드시 인간 중심 사상을 전제하는 것은 아님을 주장할 수 있다. 이때 관계 중심의 인간 관점에 기대어 인간의 가치가 상황과 무관하게 동물이나 사물보다 우월하다는 입장은 성립하지 않으며, 또한 그러한 입장에 기대어 중심과 주변의 구분에 따른 자연의 위계질서를 반영한 사회만이 조화롭다고 주장하기는 힘들어진다.

 

관계 중심의 인간 관점을 받아들여도, 자연의 위계질서를 반영한 사회만이 조화롭다는 전제를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이때 관계 중심의 인간 관점을 받아들인다고 해서, 반드시 우열 구분의 관점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아니다. 우열 구분의 관점은 ‘중심과 주변의 구분에 따른 고정된 자연의 위계질서를 반영한 사회만이 조화롭다’는 전제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관계 중심의 인간 관점과 우열 구분의 관점이 내용적으로 분리 가능하다는 것에 대한 천 번째 근거를 받아들이면, 전자의 관점을 문자 그대로 해석해도 우열 구분의 관점을 반드시 수용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즉, 관계 중심의 인간 관점에 배어 있는 인간 중심 사상을 인간과 동물 및 사물의 가치 차이를 인정하는 것으로 해석해도, 그 관점으로부터 인간사에 해당하는 우열 구분의 관점을 이끌어낼 수 없다. 관계 중심의 인간 관점에 함축된 인간 개념 자체가 중심과 주변으로 구분된 자연의 위계질서를 반영한 사회만이 조화롭다고 전제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관계 중심의 인간 관점을 가지고 사회관계에도 중심과 주변의 구분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할 수 없다. 따라서 관계 중심의 인간 관점에 배어 있는 인간 중심 사상을 가지고 인간과 동물 및 사물의 가치 차이를 논하는 경우에도, 누구나 인간관계의 중심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이 가능하다.

 

관계 중심의 인간 관점과 우열 구분의 관점이 내용적으로 분리 가능하다는 것에 대한 두 번째 근거는 첫 번째 근거보다 강하다. 두 번째 근거에 따르면, 관계 중심의 인간 관점에 배어 있는 인간 중심 사상은 인간을 도덕적 존재로 정당화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것일 뿐, 인간과 동물 및 사물의 가치 차이를 전제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천(天)과 지(地)로 상징되는 양(陽)과 음(陰)의 조화는 어느 것 혹은 어느 곳에나 구현되어 있는 것으로 가정되며, 이를 정당화해주는 이(理)와 기(氣)의 관계는 인간과 동물 및 사물의 가치 차이를 함축하는 방식의 인간 중심 사상을 전제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두 번째 근거에 따르면, 인간과 동물 및 사물의 가치 차이를 함축하는 인간 중심 사상은 단지 ‘인간의 측면에서 천지조화(天地調和)를 해석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관계 중심의 인간 관점이 그러한 해석을 확대한 것에 불과한 것이라고 간주하는 경우, 그 관점에 배어 있는 인간 중심 사상은 신분제에 바탕을 둔 사회의 위계질서를 자연에 투영시켜 얻어진 결과라는 입장도 나름의 설득력을 갖게 된다.

 

관계 중심의 인간 관점과 우열 구분의 관점이 내용적으로 분리 가능하다는 것을 받아들이면, 중심과 주변의 구분 맥락은 서양의 고전적 이원론과 달리 논리적으로 정합한 하나의 체계를 이루지 않는다. 중심과 주변의 구분 맥락을 구성하는 관점들은 서로 양립 가능하기 때문에 모순적이거나 배타적 관계를 맺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 양립 가능한 정도는 내용적으로 분리 불가능할 정도로 강하지 않다. 관계 중심의 인간 관점을 받아들인다고 해서, 우열 구분의 관점도 반드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이때 두 관점을 결합한 것을 가지고 엄격한 신분 구분의 관점을 이끌어낼 수 없다.

 

관계 중심의 인간 관점과 우열 구분의 관점이 내용적으로 분리 가능하다는 것에 대한 두 근거를 다시 한 번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 첫째, 관계 중심의 인간 관점에 배어 있는 인간 중심 사상을 인간과 동물 및 사물의 가치 차이를 인정하는 것으로 해석해 보자. 그렇게 해석하는 경우에도, 인간 사회에도 가치 차이를 수반하는 중심과 주변의 구분이 있다는 우열 구분의 관점을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관계 중심의 인간 관점에 함축되어 있는 인간은 사회를 구성하는 개인을 뜻하지 않기 때문이다.

 

• 둘째, 관계 중심의 인간 관점에 배어 있는 인간 중심 사상은 인간 도덕성을 정당화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일 뿐이다. 이 때문에, 인간과 동물 및 사물의 가치 차이를 전제하는 것처럼 그 사상을 확대 해석할 필요는 없다. 따라서 인간, 동물, 사물들로 뒤얽힌 자연이 보여주는 위계질서가 그것들 사이의 가치 차이를 전제한다고 해석할 필요는 없다. 이때 자연에도 중심과 주변의 구분이 있는 것으로 가정하여, 그러한 구분을 전제한 위계질서가 반영된 사회만이 조화롭다고 주장할 수 없게 된다. 이를 받아들이면, 관계 중심의 인간 관점에 근거해 사회에도 중심과 주변의 구분이 있어야만 한다는 우열 구분의 관점은 그 정당성을 잃게 된다.

 

관계 중심의 인간 관점과 우열 구분의 관점이 내용적으로 분리 가능하다는 것에 대한 위의 두 근거를 받아들일 때, ‘유교 자체의 변통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다. 중심과 주변의 구분 맥락을 구성하는 세 관점 중 그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관계 중심의 인간 관점이다. 그 관점의 근간을 유지한 채 우열 구분의 관점과 엄격한 신분 구분의 관점을 허락하지 않는 방식으로 중심과 주변의 구분 맥락을 수정할 수 있다. 이를 ‘유교의 변통 가능성’이라고 하자.

 

중심과 주변의 구분 맥락에 대비된 고전적 이원론의 핵심 관점은 지상계와 천상계를 이분하는 관점이다. 그런데 고전적 이원론은 중심과 주변의 구분 맥락과 달리 논리적으로 정합적인 하나의 체계를 이룬다. 이 때문에, 지상계와 천상계의 이분법이라는 관점의 근간을 유지한 채 인간적인 것과 신적인 것의 이분법 및 평신도와 성직자의 이분법을 허용하지 않는 방식으로 고전적 이원론을 수정하기란 힘들다.

 

지동설에 대한 진보적 입장이 계몽주의의 출현으로 이어지고, 또 계몽주의에 반기를 든 낭만주의자들의 입장이 함께 어울려 ‘백색 도덕 제국주의’가 탄생한 과정을 나무에 비유할 때, 그 뿌리는 인간 중심 사상이다. 서양의 그러한 인간 중심 사상이 정착되는 과정에 담긴 의도를 ‘인간의 천사화 계획’이라는 은유적 표현으로 상징했었다. 인간 중심 사상이 계몽주의로 이어지는 과정은 ‘고전적 이원론을 붕괴시키고 기독교의 틀 속에서 그 대체물을 찾는 과정’으로 볼 수 있기 때문에, ‘인간의 천사화 계획’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던 것이다. 하지만 세속화 과정을 고전적 이원론에 대한 대체물을 찾는 과정에 가두어 놓고 평가해서는 안 된다. 그런 방식의 평가는 배웠다는 자들의 논쟁에 여전히 남아 있지만, 성숙한 무종교인이라면 피해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계몽주의의 물결에 반해 과거 전통을 다른 방식으로 수정하여 복귀시키려는 움직임도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세속화 과정은 어디까지나 종교가 사회 통합의 지배적 원리라는 입장이 약화되는 과정이었지, 결코 종교적인 것에 반하는 어떤 이념으로 사회가 동질화되는 과정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제 이 점만은 분명해졌기를 바란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그 어떤 이념에도 종속되길 거부하는 사람으로 무종교인을 규정한 이유를 파악할 수 없을 것이다.

 

관계 중심의 인간 관점의 근간을 나둔 채 다른 관점들을 허용하지 않는 방식으로 중심과 주변의 구분 맥락을 수정하는 것이 유교의 변통 가능성이라고 할 때, 그 수정 가능성은 관계 중심의 인간 관점과 우열 구분의 관점이 내용적으로 분리 가능하다는 것에 대한 두 근거 중 무엇을 택하는가에 따라 달라진다. 그 두 근거 중 두 번째 것이 첫 번째 것보다 강하다는 의미는 앞서 논했다. 두 번째 근거는 관계 중심의 인간 관점이 근거하고 있는 천지조화(天地調和)의 원리를 인간과 동물 및 사물의 가치 차이까지 함축한 인간 중심 사상과 결부시키지 않기 때문이다. 적어도 18세기 실학자들의 우화적인 글 속에는 이러한 두 번째 근거와 유사한 입장에서 인간과 사물, 그리고 중국과 조선의 관계를 논하고 있음이 나타나 있다. 따라서 ‘이 땅의 역사에도 서양의 세속화 과정에 대응되는 것이 있었다’는 가정 아래 ‘가상의 역사’를 상상해 볼 때, 관계 중심의 인간 관점과 우열 구분의 관점이 내용적으로 분리 가능하다는 것에 대한 두 번째 근거를 택할 것이다. 두 번째 근거를 가지고 유교의 변통 가능성이 실현된 것으로 가정하고 이 땅의 역사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은 그러한 가상의 역사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때 무종교인이 간과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 있다.

 

• 개인의 자유가 확대되어야 하는 입장이 이 땅과 서양에서 지식인들의 호응을 얻게 된 과정은 사뭇 다르다. 이 땅에서는 인간의 가치를 동물이나 사물보다 높게 평가하는 방식의 인간 중심 사상이 약화되는 과정에서 개인의 자유가 확대되어야 한다는 인식이 싹튼 반면, 서양에서는 오히려 인간 중심 사상이 강화되는 과정에서 그러한 인식이 싹텄다.

 

위 차이는 이어지는 절에서 분명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