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속화와 민주주의 (봉인 해제)/세속화와 민주주의

가상의 역사 2. 초기 조건

착한왕 이상하 2011. 10. 3. 00:19

중심과 주변의 구분 맥락과 고전적 이원론은 한때 특정 지역을 지배했던 세계 이해 방식이라는 공통점을 갖는다. 그러한 공통점은 내용적 측면이 아니라 기능적 측면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실체 개념을 통해 분석해 보았듯이, 중심과 주변의 구분 맥락은 내용적 측면에서 고전적 이원론과는 차이를 보이는 세계 이해 방식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고전적 이원론은 내용적 측면에서 정합적인 하나의 체계를 이루는 반면, 중심과 주변의 구분 맥락은 그렇지 않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고전적 이원론은 기독교의 틀 내에서 다른 것으로 대체되어야 한다는 문화적 압력을 받았던 반면, 중심과 주변의 구분 맥락은 유교의 틀 내에서 변통(變通)될 가능성을 갖고 있었음을 살펴보았다.

 

서양의 세속화 과정에 대응시켜볼 만한 것이 이 땅의 역사에도 있었다는 가정 아래 가상의 역사를 구성해 보려는 사람은 우선 유교의 변통 가능성이 실현되는 과정을 생생하게 묘사할 수 있어야 한다. 중심과 주변의 구분 맥락이 내용적으로 정합한 하나의 체계가 아님을 인식할 때, 그러한 묘사는 다음과 같은 서술 상 구조를 가져야 한다.

 

• ‘관계 중심의 인간 관점’과 ‘우열 구분의 관점’은 내용적으로 분리 가능하기 때문에, 그 두 관점을 결합시킨 것을 사회에 투영하여 ‘엄격한 신분 구분의 관점’을 이끌어낼 필요가 없다. 이에 대한 인식이 민중의 삶에 스며들어야, 중심과 주변의 구분 맥락에 함축된 변통 가능성, 즉 유교의 변통 가능성이 실현되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서양의 세속화 과정에 대응시켜볼 만한 것이 이 땅의 역사에도 있었다는 가정 아래 구성될 가상의 역사는 ‘우열 구분의 관점과 엄격한 신분 구분의 관점이 더 이상 행위를 유도하거나 제어하는 규범처럼 기능할 수 없게 되는 과정’을 보여줄 것이다.

 

고전적 이원론의 붕괴 과정을 논하지 않고 서양의 세속화 과정을 논할 수 없지만, 사회의 세속화된 상태를 마치 고전적 이원론의 붕괴에 이어질 필연적인 결과처럼 여겨서는 안 됨을 논했다. 사회의 세속화된 상태는 계층 분화 및 이에 따른 가치 체계의 다원화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특정 지역의 한 시기를 지배한 고전적 이원론의 붕괴나 유교의 변통 가능성의 실현 자체가 사회의 세속화된 상태를 보장해주지는 않는다. 따라서 유교의 변통 가능성의 실현이 가상의 역사가 도달하게 될 마지막 단계라고 주장할 수 없다. 그럼에도 그러한 변통 가능성이 실현되는 과정은 세속화 과정에 대응되는 것이 이 땅에도 있었다는 가정 아래 상상해볼 수 있는 것들 중에 가장 자연스러운 것이다. 왜냐하면 유교의 변통 가능성을 인식한 사람들이 이 땅에 있었기 때문이다.

 

서양의 세속화 과정에 대응시켜볼 만한 것이 이 땅에도 있었다는 가정 아래 가상의 역사를 구성할 때, 유교의 변통 가능성이 실현되는 과정에 대해 먼저 고민해야 한다. 그러한 과정은 서양의 고전적 이원론이 붕괴된 과정과 비교해볼 만한 것이기 때문이다.

유교의 변통 가능성이 실현되는 과정에 대한 상상은 관계 중심의 인간 관점과 우열 구분의 관점이 내용적으로 분리 가능하다는 사실에 근거해야 한다. 그 두 관점이 내용적으로 분리 가능하다면, 그 두 관점을 결합하여 엄격한 신분 구분의 관점을 이끌어내는 시도는 정당성을 읽게 되기 때문이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중심과 주변의 구분 맥락을 구성하는 두 관점인 ‘관계 중심의 인간 관점’과 ‘우열 구분의 관점’이 내용적으로 분리 가능하다는 것에 대한 근거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 첫째, 관계 중심의 인간 관점을 담은 문헌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여 인간이라는 존재를 ‘천지(天地)를 매개하는 우주의 중심’으로 간주하더라도, 즉 관계 중심의 인간 관점이 ‘동양적 인간 중심 사상’을 대표하는 것으로 간주하더라도, 관계 중심의 인간 관점과 우열 구분의 관점을 내용적으로 분리하는 것은 가능하다. 그 두 관점을 결합한 것을 사회에 투영시켜 엄격한 신분 구분의 관점을 이끌어 내려면, 중심과 주변의 구분에 따른 자연의 위계질서가 반영된 사회 상태만이 조화롭다고 전제해야 한다. 그러한 전제를 받아들이지 않는 경우, 관계 중심의 인간 관점에 근거해 우열 구분의 관점을 옹호할 수 없게 된다.

 

• 둘째, 관계 중심의 인간 관점이 인간과 동물 및 사물의 가치 차이를 전제한다고 해석할 필요는 없다. 이때 자연이 보여주는 위계질서는 고정된 것이 아니며, 또 그러한 가치 차이를 전제하지는 않는다고 해야 한다. 즉, 동양적 인간 중심 사상은 인간의 입장에서 인간과 동물 및 사물의 관계를 논하거나 도덕성을 정당화하려고 할 때 나타나는 것일 뿐, 반드시 관계 중심의 인간 관점에 전제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중심과 주변의 엄격한 구분이 자연에 있다고 가정하고, 그러한 구분을 전제한 위계질서가 반영된 사회 상태만이 조화롭다고 주장할 수 없다. 이를 받아들이면, 관계 중심의 인간 관점을 가지고 사회에도 중심과 주변의 엄격한 구분이 있어야 한다는 우열 구분의 관점을 옹호할 수 없게 된다.

 

관계 중심의 인간 관점과 우열 구분의 관점이 내용적으로 분리 가능하다는 것에 대한 두 가지 방식 중에서 첫 번째 방식을 ‘중심과 주변의 구분 맥락에 대한 약한 의미에서의 내용적 분리 가능성’, 그리고 두 번째 방식을 ‘중심과 주변의 구분 맥락에 대한 강한 의미에서의 내용적 분리 가능성’이라고 하자. 이 두 가지 내용적 분리 가능성 중 무엇을 택하는가에 따라 가상의 역사가 전개되는 방식도 달라진다. 따라서 중심과 주변의 구분 맥락에 대한 두 가지 내용적 분리 가능성 중 무엇을 택하는가는 ‘이 땅에도 서양의 세속화 과정에 대응시켜볼 만한 것이 있었다는 가정 아래 구성될 가상의 역사’에 대한 초기 조건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중심과 주변의 구분 맥락에 대한 약한 의미의 내용적 분리 가능성보다는 강한 의미의 분리 가능성을 택한다고, 현대적인 것을 대표하는 특징들이 생성되는 가상의 역사를 좀 더 쉽게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고전적 이원론의 붕괴 자체가 사회의 세속화된 상태에 대한 필연적 선결 조건이 아니듯, 유교의 변통 가능성이 실현되었다는 가정 자체 역시 그러한 사회 상태를 보장해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중심과 주변의 구분 맥락에 대한 약한 의미의 내용적 분리 가능성보다는 강한 의미의 분리 가능성을 택하는 이유는 전적으로 이 땅의 실제 역사에 근거하고 있다.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의 단편 소설들이 다루는 주제와 내용적 변천 과정만 살펴보아도, 강한 의미의 분리 가능성에 대한 인식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