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속화와 민주주의 (봉인 해제)/세속화와 민주주의

가상의 역사 1. 도입부

착한왕 이상하 2011. 9. 27. 02:25

(3) 가상의 역사

서양의 고전적 이원론과 비교해볼 만한 것이 이 땅의 역사에 있었는가? 이 물음에 대해서는 긍정해야 한다. 신유학에 함축된 세계 이해 방식인 ‘중심과 주변의 구분 맥락’을 기능의 측면에서 고전적 이원론에 대응시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중심과 주변의 구분 맥락이 이 땅의 역사에서 붕괴되거나 약화되는 성향은 어느 정도 강하게 나타났었는가?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 서양의 세속화 과정에 대응시켜볼 만한 것이 이 땅에도 있었다고 가정하고, 하나의 가상의 역사를 구성할 것이다. 그러한 가상의 역사는 다음 기준을 충족해야 한다.

 

• 유교에 반하거나 무관심한 사람의 의견이 반사회적이라거나 사회에 무관심한 것으로 평가되지 않는 분위기가 가상의 역사 속에 형성되어야 한다.

 

세속화가 반종교적인 것을 뜻하지 않고, 또 세속화된 사회 상태는 종교 사장론을 전제해야 실현 가능한 것이 아니다. 세속화된 사회 상태는 어디까지나 종교가 사회의 지배적 통합 원리로 기능할 수 없게 된 상태이기 때문이다. 세속화 과정을 그러한 상태에 도달하는 과정으로 이해할 때, 이 땅에도 서양의 세속화 과정에 대응시켜볼 만한 것이 있었다는 가정 아래 구성될 가상의 역사가 위 기준을 충족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그러한 기준을 만족하는 가상의 역사는 당연히 다음과 같은 주장을 정당화해줄 수 있어야 한다.

 

• 중심과 주변의 구분 맥락이 붕괴되거나 약화되는 정도는 고전적 이원론이 붕괴되거나 약화된 정도와 엇비슷하다.

 

세속화 과정에 대응시켜볼 만한 것이 이 땅에도 있었다는 가정 아래 구성될 가상의 역사가 어느 정도 실재를 반영하는 것이라면, 위 주장은 가성의 역사가 아니라 역사적 증거에 근거해 정당화 가능해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 가상의 역사는 실재와는 거리가 먼 허구의 구성물에 불과하다. 이것이 우리가 도달하게 될 결론이며, 이를 바탕으로 이 땅은 서양의 세속화 과정과 같은 것을 거치지 않고 세속화된 곳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된다.

 

서양의 세속화 과정과 같은 것을 거쳐야지만 세속화된 상태가 실현 가능한 것은 아니다. 이는 세속화된 사회 상태의 다양성을 뒷받침해주며, 현대적인 것을 대표하는 특징들인 ‘개인의 선택을 존중하는 것 혹은 누구나 자신의 삶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것’, ‘감정과는 구분되는 추론 및 추상화 과정 등의 합리적 능력이 과학과 기술의 결합을 촉진시켰다는 것’, ‘공동체에 해가 되지 않는다면 누구나 자신의 의견을 내세울 수 있다는 것’, ‘국가 간 경계가 느슨해졌다는 것’ 등이 반드시 서양의 세속화 과정과 같은 것을 통해 사회 속에 나타나고 확장되는 것은 아니다. 이를 받아들인다면, 현대적인 것을 대표하는 특징들과 관련하여 우리의 현실을 논할 때 서양의 지성사를 논의의 중심축으로 삼을 수 없다는 점은 당연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