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속화와 민주주의 (봉인 해제)/존재 사슬의 논리

점들의 간격과 위치 1. 난제들 (수정)

착한왕 이상하 2010. 1. 21. 22:18

점들의 간격과 위치

 

(1)난제들

존재 사슬을 수직선에 비유하여 도식화한 경우를 다시 기억해 보자.

 

 

 

   

수직선의 각 점은 신에 의존적인 존재들의 각 계층을 나타낸다. 신의 전능함과 관련하여 우주의 창조 방식이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음을 살펴보았다. 또 정점의 의미와 관련하여 신 개념의 다양성도 살펴보았다. 따라서 점들의 간격, 즉 계층들 사이의 간격과 위치 설정 방식에 대한 해석도 어떤 신 개념을 택하는가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음을 추측해 볼 수 있다.

 

수직선의 점들, 즉 계층들은 크게 물질계와 생물계로 나뉜다. 점들의 간격을 논하는 것은 전체적으로는 물질계와 생물계 사이에 틈새가 있는지를 논하는 것이며, 부분적으로는 생물계 내의 계층들, 실례로 오랑우탄과 침팬지 같은 계층들 사이에 틈새가 있는지를 논하는 것이다. 간격의 위치를 논하는 것은 오랑우탄과 침팬지 계층 중 무엇을 상위에, 즉 정점인 신에 가까운 곳에 위치시켜야 하는지를 논하는 것이다.

 

자연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에 비해 사소하거나, 자연에는 역사가 없다는 관점이 지배적이었던 시절, 계층들 사이에는 틈새가 없다고 해석되었다. 수직선에 비유된 존재 사슬은 역사적으로 해석될 여지가 없었던 까닭에, 계층 간 틈새를 허락하는 것은 신의 충만성이라는 속성을 위협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자연에는 도약은 없다’는 문구로 표현되는 이러한 생각에 따르면, 수직선에 비유된 존재 사슬은 ‘연속체(continuum)’와 같은 것이어야 한다. 이 경우, 종을 실재하는 것으로 간주할 필요가 없다. 심지어 각 계층은 개체를 뜻할 수도 있으며, 종 구분은 단지 인간에게 필요한 분류의 차원에서만 의미를 갖는다.

 

존재 사슬을 연속체의 일종으로 해석하는 것은 하나의 법칙성이 존재 사슬을 관통한다는 관점을 깔고 있다. 그러한 하나의 법칙성은 신의 통일성이라는 속성을 반영한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기계론이 득세 했던 시절, 충돌과 같은 접촉에 의한 운동 변화에 국한된 법칙만으로 모든 것을 설명하려고 했던 시도를 그 실례로 들 수 있다. 이때 난제가 발생한다. 형태의 기능과 관련된 목적을 신의 섭리로 돌리더라도, 유기체의 다양한 형태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전성설은 이에 대한 하나의 대답이었다. 유기체의 다양한 형태를 담은 씨앗이 신에 의해 미리 마련되어 있는 것이라면, 그리고 발생과 성장이 그러한 형태의 전개에 불과하다면, 운동 법칙만 가지고 물질계와 생물계를 연결시킬 수 있다. 여기에 종 변형에 의한 진화 개념이 파고들 여지는 없다.

 

그러나 계층 간 틈새를 허락하지 않는 연속체로 존재 사슬을 해석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또 다른 난제를 발생시킨다.

 

• 완벽함의 정도에서 차이를 보이는 모든 존재를 신이 창조했다는 점에서 신은 완정성이라는 속성을 가진다. 존재 사슬을 수직선에 비유할 때 정점에 가까운 점에 위치한 계층일수록 좀 더 완벽하다. 존재 사슬이 완벽함의 정도 차이에 따른 위계질서를 함축하는 까닭에, 오랑우탄과 침팬지 계층 중 하나는 반드시 다른 하나의 상부에 위치해야 한다. 또 개와 고양이 계층 중 하나도 반드시 다른 하나의 상부에 위치해야 한다. 그런데 그러한 두 계층 중 하나를 상부에 위치시킬 확실한 근거를 찾을 수 있을까?

 

현대 생물학의 관점에서 본다면, 개와 고양이 중 무엇이 더 완벽한 존재인가를 묻는 것은 의미 없는 질문이다. 즉, 위 난제는 현대 생물학의 관점에서 접근할 때 의미 없는 것이다. 우연적인 것이 과학적 설명 영역으로 들어온 이후, 위의 난제는 적어도 진화 생물학에서는 허용되지 않는다. 하지만 위의 난제가 존재 사슬 도식이 여전히 유행했던 시절에는 나름의 의미를 갖고 있었다. 위의 난제를 해결하는 한 가지 방법은 다음과 같은 ‘생명가지나무 도식’이 ‘존재 사슬의 위계질서’와 양립 가능함을 보이는 것이다.

 

 

 

    

위 도식은 라마르크(J.B.P.A. Lamarck)가 고안한 것이다. 겉보기에 다윈(C. Darwin)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럼에도, 라마르크가 진화 생물학의 대부로 불리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생명가지나무 도식과 존재 사슬의 위계질서가 양립 가능하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만약 그가 그렇게 주장하지 않았더라면, 생물학사에서의 그의 위상은 달라졌을 것이다. 그가 전통적인 존재 사슬 도식을 포기하지 않았음에도, 당시 자연 신학자들, 특히 지적 설계론 옹호자들의 비핀 대상이 되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현대 과학에 비추어 라마르크를 평가할 때 라마르크의 생각은 낡은 것일까? 이러한 일련의 물음들을 살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