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속화와 민주주의 (봉인 해제)/세속화와 민주주의

가상의 역사 3. 연암, 양반, 예법

착한왕 이상하 2011. 10. 17. 23:03

박지원의 호인 ‘연암’은 황해도 금천군에 위치한 골짜기를 일컫는 지명에서 유래했다. 연암은 42세 때 목숨을 보존하기 위해 가족을 데리고 연천군에 숨었다. 나이 50이 넘어서야 하급 관리직에 등용된 연암의 이력을 감안한다면, 연암이 목숨을 보존하기 위해 황해도 골짜기에 숨은 사실은 ‘설명을 요구하는 사실’에 해당한다. 연암이 목숨의 위협을 받게 만든 결정적 원인 중 하나는 그의 글 때문이었다. 양반 신분에 속하면서도 양반의 권세를 누릴 수 없었던, 아니 누리길 거부했던 연암은 그의 글로 인해 당시 사회 질서를 위협하는 무리, 즉 벽파(辟派)에 속하는 인물로 몰렸다.

 

연암이 43세 때 사촌 형을 따라 중국에 사신을 갔던 시기 이전의 글들은 전기 작품으로, 그리고 이후의 글들은 후기 작품으로 분류된다. 따라서 연암이 벽파의 무리에 속한 자로 몰리게 만든 글들은 그의 전기 작품에 해당한다. 연암의 전기 작품들에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비판은 당시 양반 계층을 향하고 있다. 「양반전(兩班傳)」은 그러한 작품들을 대표한다. 「양반전」은 당시 양반 신분을 풍자적으로 비판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한 풍자적 내용에는 다음과 같은 논증이 숨어 있다.

 

• 사대부는 위를 받들어 백성을 편히 살도록 해야 하는 의무를 가진 신분 계층이다.

• 군자의 덕을 갖춘 양반은 백성에게 득이 되어야 한다.

• 지금 대다수 양반은 군자의 덕과 양반의 체면치레를 구분 못하고 그저 체통 지키기에 급급한 자들이거나, 아니면 양반의 권세를 이용해 이득을 취하고 세(勢)를 확장하려는 자들이다.

• ‘양반다움’이 양반의 체면을 살리는 것, 즉 체통을 세우는 것이라면, 양반은 세상에 득이 되지 않는다.

• 양반의 권세가 개인의 이득을 취하고 세를 확장하는 수단이라면, 양반은 세상에 득이 되지 않는다.

• 따라서 지금 대다수 양반은 세상에 득이 되지 않는 자들이다.

 

위 논증에 근거해 연암이 ‘엄격한 신분 구분의 관점’을 부정했다고 주장할 수 없다. 따라서 그가 그러한 관점을 이끌어내는 데 필요한 ‘중심과 주변의 구분 관점’과 ‘우열 구분의 관점’을 부정했다고 주장할 수 없다. 또 연암 자신이 신분제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니었다. 위 논증을 살펴보면, 「양반전」의 내용은 ‘당시 대다수 양반이 세상에 득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연암의 눈에 비친 양반의 행위 규범, 즉 양반이 지켜야 할 행위 규범은 군주를 받들어 아래를 다스려야 하는 사대부가 갖추어야 마땅한 덕과는 거리가 멀다. 유교 전통에 속하는 고전 어디에도 사대부에 속한 양반이 농사를 지어서는 안 된다는 구절은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도 「양반전」에 나오는 당시 양반들의 행위 규범을 보면, 양반의 체통을 지키기 위해 손에 물을 묻히지 말아야 한다. 연암의 눈에 비친 그러한 행위 규범은 양반과 상놈을 구분할 목적으로 형성된 것에 불과하다.

 

양반의 행위 규범이 조선 후기에 이르러 양반과 상놈을 구분하기 위한 ‘체통 지키기의 목록’으로 전락한 원인을 따지는 것은 쉽지 않다. 임진왜란을 시작으로 연이은 전쟁과 난으로 인해 조선 사회는 혼란스러웠다. 이러한 혼란한 시기는 새로운 시대를 여는 계기가 될 수 있지만, 또한 기존 질서를 되찾기 위한 집단적 고민을 정당화해 주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기호학파(畿湖學派)와 영남학파(嶺南學派)로 양분되는 17세기 이후 조선의 예학(禮學)은 그러한 집단적 고민의 산물로 간주될 수 있다.

 

‘예를 강조하는 것’은 사람들의 행동 방식을 규격화하여 사회 질서를 유지하고 국가의 기강을 세우려는 목적을 갖고 있었다. 사회 질서가 엄격한 신분제에 바탕을 두고 있는 한, 혼란기일수록 신분에 따른 예법들을 만들어 사회에 확장시키는 것은 기존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효과적인 수단으로 간주될 수 있다. 각 예법이 주자(朱子)의 가례(家禮)를 확장한 방식이어야 하는지, 아니면 가례를 이론적 바탕으로 하여 구체적 상황에 적합하도록 구성되어야 하는 것인지를 놓고 벌어진 ‘예학의 논쟁’은 특정 사대부 집단이 집권을 위해 예법을 수단으로 삼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예법이 집권의 수단이 될 때, 양반이 지켜야 하는 것은 그저 양반과 상놈을 구분하기 위한 체통을 지키는 것이 되기 쉽다. 「양반전」의 내용은 이것이 18 세기에 현실화되었음을 보여준다.

 

「양반전」을 보면, 제 식구조차 먹여 살리지 못해 신분을 팔아야 했던 양반도 양반의 체통을 지켰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선비라고 불린다. 그러한 선비를 사대부가 갖추어야 할 덕, 즉 군자의 덕을 갖춘 자라고 장담할 수 없다. 사대부에게 요구되는 군자의 덕은 백성에게 득이 될 수 있는 실천적 능력과 관련되어 있는 반면에, 「양반전」에 등장하는 선비는 그저 예법의 표면적인 측면, 즉 양반을 다른 신분 계층과 구분하기 위한 격식만 지키면 양반다운 도리를 다한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그러한 자는 ‘양반다움’에 대한 자격을 놓고 고민조차 해본 적이 없으니, 자신의 신분보다 아래에 위치한 사람들이 편히 살 수 있도록 해주는 방안에 대해서도 고민하지 않는다. 더욱이 신분을 이용해 집권에만 눈이 멀어 남의 세력에 동조하거나 자신의 세력을 확장하려는 자는 그러한 고민을 하찮은 것으로 여길 것이다. 이러한 양반은 백성의 삶을 불편하게 만들기 때문에 군자의 덕을 갖추지 못한 자들이다. 연암의 눈에 비친 당시 대다수 양반들은 그러한 자들이었다.

 

이 땅에도 서양의 세속화 과정에 대응시켜 볼만한 것이 있었다는 가정 아래 구성될 가상의 역사에 대해 생각할 때, 「양반전」에 담긴 양반에 대한 연암의 비판적 관점을 의미해볼 필요는 있다. 왜냐하면 그러한 가정 아래 구성될 가상의 역사는 유교와 같은 종교가 사회의 지배적 통합 원리로 기능할 수 없게 된 사회 상태로 귀결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또 그러한 사회 상태에서 유교 사상에 근거한 엄격한 신분제는 통용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양반전」에는 신분제 자체를 비판하는 대목은 없다. 오히려 그 내용은 당시 양반들을 비판함으로써 양반이 사대부라는 신분에 걸맞게 행동하는 사회를 만들어야 함을 강조하는 것으로 해석될 여지를 갖고 있다. 더욱이 「양반전」에는 앞서 언급한 다음 질문에 대해 답할 수 있는 그 어떤 단서도 들어 있지 않다.

 

• 서양의 세속화 과정에 대응되는 것이 이 땅에도 있었다는 가정 아래 가상의 역사를 구성할 때, 중심과 주변의 구분 맥락에 대한 약한 의미의 분리 가능성보다는 강한 의미의 분리 가능성을 택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중심과 주변의 구분 맥락에 대한 강한 의미의 분리 가능성을 택하는 이유는 이 땅의 실제 역사에 근거하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양반전」은 그러한 선택에 대한 근거를 제공하지 않는다.

 

중심과 주변의 구분 맥락은 논리적으로 정합한 하나의 체계가 아니기 때문에, 그 맥락의 두 핵심 관점인 ‘관계 중심의 인간 관점’과 ‘우열 구분의 관점’은 내용적으로 분리 가능하다. 중심과 주변의 구분 맥락에 대한 약한 의미의 분리 가능성에 따르면, 관계 중심의 인간 관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도 우열 구분의 관점을 반드시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중심과 주변의 구분 맥락에 대한 강한 의미의 분리 가능성에 따르면, 관계 중심의 인간 관점과 우열 구분의 관점이 내용적으로 분리 가능하다는 것에 더해 전자의 관점에 함축된 동양적 인간 중심 사상을 그대로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 그런데 「양반전」에서 중심과 주변의 구분 맥락에 대한 연암의 구체적 입장을 찾아볼 수 없다. 따라서 「양반전」에 담긴 양반에 대한 연암의 비판적 관점은 중심과 주변의 구분 맥락에 대한 강한 의미의 분리 가능성에 근거해 가상의 세속화 과정이라는 역사를 구성해 볼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해 주지 못한다. 그렇다면 그러한 단서는 어디에서 찾아 볼 수 있을까? 연암의 후기 작품을 대표하는 「허생전(許生傳」과 「호질(虎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