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속화와 민주주의 (봉인 해제)/세속화와 민주주의

가상의 역사 5. 소중화 사상 2

착한왕 이상하 2011. 11. 24. 02:05

 

외지에서 들어와 특정 지역의 일부가 된 그 어떤 사상이나 종교도 해당 지역의 상황에 맞추어 토착화된 것이다. 그러한 토착화 과정에서 외지 세력의 사상이나 종교는 집단 간 갈등의 불씨가 될 수 있다. 그러한 갈등이 사회 전체에 걸친 대립 양상으로 나타나는 경우를 ‘문화 전쟁’으로 규정했었다. 유교는 그러한 문화 전쟁을 거쳐 이 땅에 정착했다. 반면에 기독교는 그러한 문화 전쟁을 크게 거치지 않고 이 땅에 정착했다. 기독교는 이 땅에 정착한 이후에야 문화 전쟁의 조짐을 보이는 종교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입장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이에 대해서는 당분간 잊기로 하자.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다음 문제이기 때문이다.

 

• 소중화 사상을 ‘유교의 자기화’ 혹은 ‘유교의 우리화’라는 것으로 보는 입장이 과연 소중화 사상과 사대주의를 연관시키지 않는 것에 대한 충분한 근거가 될 수 있을까?

 

현재 이 땅의 일부로 정착한 그 어떤 사상이나 종교도 나름의 토착화 과정을 거쳤다는 점에서 ‘자기화된 것’ 혹은 ‘우리화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논리에 따르면, 외지에서 들어와 이 땅에 정착한 모든 사상과 종교는 ‘자기화’ 혹은 ‘우리화’되었다는 이유 하나로만 사대주의와 무관한 것이 되어 버린다. 이때 어떤 사상이나 종교와 사대주의를 연관시켜 논할 가능성 자체가 없어진다. 이는 위 물음에 대해 긍정적으로 답하려는 사람이 원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유교의 자기화’ 혹은 ‘유교의 우리화’에 근거해 탈사대주의에 대해 논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그에게 ‘유교의 자기화’ 혹은 ‘유교의 우리화’는 유교가 이 땅에서 대세가 되었다든가, 아니면 토착화되었다는 것만을 뜻할 수 없다. 또한 그것은 자기 것 혹은 우리 것에 대한 자부심과 같은 것도 뜻할 수 없다. 만약 ‘유교의 자기화’ 혹은 ‘유교의 우리화’가 그러한 것을 뜻하는 경우, 사대주의에서 탈피한다는 것은 그저 자민족 중심의 사고방식을 확립한다는 것에 불과해 진다. 이는 앞서 살펴보았다.

 

소중화 사상이 사대주의의 기원이 될 수 없다는 주장을 정댱화하려면, ‘우리의 고유한 어떤 것’이 소중화 사상에 배어 있어야 한다. 이때 우리의 고유한 어떤 것은 자민족 중심의 사고방식이나 우리 것에 대한 우월 의식과 같은 것이 될 수는 없다. 그것은 유교를 맹목적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이 아니라 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독자적 사고방식’과 같은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교의 비판적 수용 과정에서 형성된 독자적인 사고방식을 소중화 사상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경우에만, 소중화 사상을 사대주의와 거리가 먼 것으로 규정하는 입장이 성립한다. 하지만 ‘유교의 변통 가능성에 대한 둔감성’이 소중화 사상에 배어 있다는 사실을 파악하면, 그러한 입장은 성립할수 없음을 알게 된다.

 

조선을 지배한 유교의 이론적 뿌리는 신유학이며, 신유학에서 이끌어낼 수 있는 세계 이해 방식은 ‘중심과 주변의 구분 맥락’이다. ‘관계 중심의 인간 관점’, ‘우열 구분의 관점’, ‘엄격한 신분 구분의 관점’으로 구성된 중심과 주변의 구분 맥락은 서양의 고전적 이원론과 달리 정합적인 하나의 체계로 간주될 수 없다. 사람, 동물, 사물이 뒤얽힌 자연이 보여주는 위계질서가 반영된 사회만이 조화롭다는 전제 아래 관계 중심의 인간 관점과 우열 구분의 관점은 논리적으로 서로 양립 가능하다. 이때 그 두 관점을 결합한 것을 사회에 투영하면, 엄격한 신분 구분의 관점이 얻어진다. 그러나 자연이 보여주는 위계질서가 반영된 사회반이 조화롭다고 전제하지 않는 경우, 관계 중심의 인간 관점과 우열 구분의 관점은 내용적으로 분리 가능하다. 이 때문에, 관계 중심의 인간 관점의 근간을 유지한 채 우열 구분의 관점과 엄격한 신분 구분의 관점을 허락하지 않는 방식으로 중심과 주변의 구분 맥락을 수정할 수 있다. 그러한 수정 가능성을 ‘유교의 변통 가능성’이라고 규정했었다.

 

유교의 변통 가능성이 실현되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은 무엇인가? 중심과 주변의 구분 맥락을 정합적인 하나의 체계로 볼 수 없다는 점, 즉 관계 중심의 인간 관점과 우열 구분의 관점 사이에 성립하는 내용적 분리 가능성을 인식한 사람들이 있어야 한다. 그러한 사람들은 ‘유교의 변통 가능성에 대한 민감성’을 지닌 사람들이다. 유교의 변통 가능성을 인식하는 것이 중심과 주변의 구분 맥락을 구체화하고 그 맥락의 구성 방식을 따져 본다는 점에서 이론적이라고 하더라도, 그렇게 인식하는 것은 사람을 둘러싼 주변 환경의 변화에 의존적이다. 이론적 측면에서 유교의 변통 가능성에 대해 인식한 사람들도 두 부류로 나뉘는데, 그 기준은 유교에 대해 비판적으로 접근해 보도록 자극하는 환경의 유무이다. 소중화 사상을 둘러싼 논쟁과 관련된 그 환경은 바로 중국의 몰락이며, 청이 중원을 차지한 것은 중국의 멸망을 대표하는 역사적 사건이었다. 어떤 지배적 사상에 대해 비판적으로 접근하도록 자극해 주는 환경이 마련되기도 전에 그렇게 접근한 사람들이 있는가하면, 그러한 환경이 마련되거나 마련된 상황에서 그렇게 접근한 사람들이 있다. 전자의 부류에 속하는 사람들이 ‘시대에 너무 앞서 드러나지 않거나 잊혀 지기 쉬운 사람들’이라면, 후자의 부류에 속한 사람들은 ‘변통이 요구되는 적정 시기에 활동한 사람들’이다. 연암 박지원은 후자의 부류에 속한다. 왜냐하면 연암은 명이 망하고 변화가 요구된 격변기에 태어나 활동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연암은 유교의 변통 가능성을 충분히 인식한 인물이었을까? 그의 문집에 담긴 단편들 각각에 대한 분석만으로는 이 물음에 답하기 힘들다. 연암이 남긴 글 대부분은 우화적인 성격을 가진 문학 작품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허생전」과 「호질」을 묶어 연암의 생각을 읽어 내려고 하는 경우, 연암은 유교의 변통 가능성에 대해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적어도 그는 중심과 주변의 구분 맥락을 구성하는 두 핵심 관점이 내용적으로 분리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아챘기 때문이다. 즉, 「허생전」과 「양반전」을 묶어 연암의 생각을 정리해 보면, 관계 중심의 인간 관점과 우열 구분의 관점이 내용적으로 분리 가능하다는 인식이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허생전」을 보면, 연암이 숭명(崇明) 사상에 빠진 당시 사대부들을 비판하는 내용이 나온다. 당시 사대부들 다수는 임진왜란 때 도움을 준 명 나라 장병들을 은인처럼 여겼지만, 조선에 흘러 들어온 그들을 천대했다. 그러면서도 숭명 사상에 빠져 청을 오랑캐라 부르며 업신여겼다. 연암은 당시 사대부들의 이러한 모순적인 태도를 지적하면서 숭명 사상을 비판했다. 그러한 비판은 실제적인 이익을 추구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한 근거가 되며, 이는 조선을 강한 나라로 만들기 위해 청과 유대 관계를 맺고 그 관계를 돈독히 해야 한다는 연암의 입장에 반영되어 있다. 이러한 연암의 입장을 그저 실익을 추구한 정치적 입장과 같은 것으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 「허생전」과 「호질」을 묶어 연암의 생각을 정리하는 경우, 연암이 실익을 강조한 데에는 다음과 같은 ‘우열 구분을 상대화하는 관점’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 사람, 동물, 사물 모두 우주의 통합 원리인 理(이)에 근거한 기(氣)의 활동성에 따른 천지조화의 산물이라면, 그중 무엇이 우월한지를 논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인간다움’을 설명할 목적으로 천지조화에 대해 논하는 경우, 인간은 천지를 매개하는 존재로 파악된다. 하지만 이로부터 인간을 우주의 중심으로 존재하도록 하기 위해 인간보다 열등한 동물과 사물이 존재해야만 한다는 식의 논리는 성립하지 않는다. ‘동물다움’ 혹은 ‘사물다움’을 설명할 목적으로 천지조화를 논하는 경우, 동물 혹은 사물이 천과 지를 매개하는 존재로 파악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람, 동물, 사물이 보여주는 자연의 위계질서는 무엇을 기준으로 하는가에 따라 상대화된다. 이 때문에, 인간을 기준으로 고정된 자연의 위계질서를 가정하고 그러한 위계질서가 반영된 인간 세상만이 조화롭다고 주장할 수 없다. 이를 받아들이면, 모든 나라가 받들어야 하는 중심국(中心國)이라는 것은 없으며, 우리가 항상 ‘중국적인 것’을 본받아 행동하고 ‘중국적인 것’을 평가의 기준으로 삼을 필요도 없다.

 

호랑이가 선비를 꾸짖는 내용으로 구성된 「호질」에는 인간과 동물의 가치를 상대화하는 입장이 숨겨져 있다. 얼핏 보면 그 내용은 그저 사대부가 갖추어야 할 군자의 덕이 복원되어야 함을 강조하는 것으로 비추어지기도 하지만, ‘인성(人性)과 물성(物性)이 본래 다르지 않다’는 18세기 초 낙론(洛論) 계파의 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에 바탕을 두고 있다. 담헌(湛軒) 홍대용(洪大容)의 「의산문답(毉山問答)」을 보면, 인물성동론에 ‘어느 곳이나 중심일 수 있다는 중심 없는 상대론적 우주론’을 더하여 ‘중국을 세계의 중심으로 간주하는 화이론(華夷論)’을 해체시킨다. 「호질」과 「허생전」을 함께 묶어 연암의 생각을 읽어 내는 경우, 그러한 해체론을 발견할 수 있다. 「호질」과 「의산문답」은 문답 방식이라는 작품적 측면에서의 유사성뿐만 아니라 사상적 측면에서의 유사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이 두 작품을 두 측면에서 관련지어 논할 수 있다.

 

연암의 글에는 ‘우열 구분을 상대화하는 관점’이 깔려 있다. 그 관점을 받아들이는 것은 중심과 주변의 구분 맥락을 구성하는 두 핵심 관점인 관계 중심의 인간 관점과 우열 구분의 관점이 내용적으로 분리 가능하다는 입장과 일맥상통하다. 따라서 연암은 유교의 변통 가능성을 인식한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유교의 변통 가능성에 대한 인식은 신유학에 함축된 세계 이해 방식인 중심과 주변의 구분 맥락이 내용적으로 하나의 정합적 체계가 아니라는 것에 대한 인식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관계 중심의 인간 관점과 우열 구분의 관점이 내용적으로 분리 가능하다는 것을 ‘중심과 주변의 구분 맥락에 대한 분리 가능성’이라 할 때, 그 분리 가능성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뉨을 살펴보았다. 중심과 주변의 구분 맥락에 대한 약한 의미의 분리 가능성에 따르면, 관계 중심의 인간 관점에 함축된 동양적 인간 중심 사상을 그대로 받아들여도 우열 구분의 관점을 반드시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중심과 주변의 구분 맥락에 대한 강한 의미의 분리 가능성에 따르면, 관계 중심의 인간 관점과 우열 구분의 관점이 내용적으로 분리 가능하다는 것에 더해 전자의 관점에 함축된 동양적 인간 중심 사상을 그대로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

 

「허생전」과 「호질」을 묶어 연암의 생각을 정리할 때, 화이론을 해체하려는 그의 시도는 자연이 보여주는 위계질서가 인간, 동물, 사물 중 무엇을 기준으로 하는가에 따라 상대화된다는 입장에 근거하고 있다. 그러한 입장은 중심과 주변의 구분 맥락에 대한 강한 의미의 분리 가능성에 대한 인식을 반영하고 있다. 천지를 매개하는 도덕적 존재로 인간을 파악하는 것은 그저 ‘인간다움’을 설명하기 위해 필요할 뿐이다. 그것이 반드시 인간을 다른 것보다 우월한 존재로 여기는 인간 중심 사상을 전제하는 것이 아니며, 이로 인해 인간이 우주의 중심이 되는 자연의 고정된 위계질서를 가정할 수 없게 된다. 이때 그러한 위계질서를 반영한 사회만이 조화롭다는 사고방식은 그 근거를 잃게 되며, ‘누구나 그리고 어느 곳이나 받들어야 하는 위가 있고 다스려야 하는 아래가 있다’는 식의 우열 구분의 관점은 더 이상 통용되기 힘들게 된다. 따라서 중심과 주변의 구분 맥락에 대한 강한 의미의 분리 가능성이 연암의 글 속에 반영되고 있다는 입장을 받아들이면, 다음 입장도 받아들어야 한다.

 

• 서양의 세속화 과정에 대응시켜볼 만한 것이 이 땅의 역사에도 있었다고 가정하고 하나의 가상의 역사를 구성하는 경우, 중심과 주변의 구분 맥락에 대한 강한 의미의 분리 가능성에 근거해 그러한 가상의 역사를 생각해 볼 수 있는 단서를 연암의 글에서 발견할 수 있다. 연암이 그러한 분리 가능성에 대해 인식했다는 것은 유교의 변통 가능성에 대해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는 그가 유교의 변통 가능성에 대한 민감성을 지닌 인물이었음을 보여준다. 유교의 비판적 수용 과정은 그러한 민감성을 지닌 인물들이 없다면 실현 불가능한 것이다. 신유학에 함축된 중심과 주변의 구분 맥락에 대해 비판적으로 접근한 사람이라면 그것의 비정합적인 측면을 인식해야 마땅하며, 또 명의 멸망은 그러한 인식을 자극하는 환경을 마련해 주었기 때문이다.

 

연암 박지원은 박제가, 홍대용 등과 함께 북학파에 속한다. 청에게 배울 것은 배우고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어야 한다는 것이 북학파의 입장이다. 반면에 숭명 사상에 빠져 청을 오랑캐로 간주하고 징벌해야 한다는 것은 북벌파의 입장이다. 소중화 사상을 옹호한 당시 인물들은 북벌파에 속했다. 그들 대부분은 관계 중심의 인간 관점에 함축된 동양적 인간 중심 사상을 그대로 받아들인 까닭에 난론 계파의 인물성동론을 부정했다. 물론 관계 중심의 인간 관점에 함축된 인간 중심 사상을 그대로 받아들여도, 그 관점은 중심과 주변의 구분 맥락을 구성하는 또 다른 관점인 우열 구분의 관점과 내용적으로 분리 가능하다. 즉, 중심과 주변의 구분 맥락에 대한 약한 의미의 분리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 있다. 왜냐하면 인간이 중심인 자연의 위계질서를 가정하더라도, 그러한 위계질서가 반영된 사회만이 조화롭다고 전제하는 경우에만 그 두 관점을 결합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소중화 사상을 옹호한 인물 대부분은 중심과 주변의 구분 맥락에 대한 약한 의미의 분리 가능성을 인식하지 못했다. 만약 소중화 사상을 옹호한 인물들 중 누군가 그 가능성을 인식했더라면, 관계 중심의 인간 관점에 배어 있는 인간 중심 사상을 받아들인다고 해서 우열 구분의 관점까지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입장을 내세웠어야 마땅하다. 우열 구분의 관점에 따르면, 누구나 받들어야 하는 위가 있으며 다스려야 하는 아래가 있다. 이러한 관점을 나라들의 관계에까지 확장한 것이 중국을 중심으로, 그리고 주변을 오랑캐로 간주하는 사고방식이다. 따라서 소중화 사상에 빠진 이들 중 중심과 주변의 구분 맥락에 대한 약한 의미의 분리 가능성을 인식한 사람이 있었다면, 그는 그러한 사고방식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취했을 것이다. 소중화 사상을 옹호한 이들 중에서 그러한 사람을 발견하기는 힘들다.

 

소중화 사상을 옹호한 이들 중에는 민족적 자긍심을 높이려고 한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사대주의에서 탈피한다는 것은 자민족 중심의 사고방식이나 우리 것에 대한 우월 의식과 같은 것이 될 수 없다. 또한 소중화 사상을 옹호한 이들 중에는 유교의 일부를 세련된 논의 체계로 승화시킨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유교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그러한 논의 체계에 결여되어 있다면, 그것을 ‘유교의 비판적 수용 과정을 통해 형성된 독자적 사고방식’이라고 부르기에는 무리가 있다. 소중화 사상을 옹호한 이들 대부분은 중심과 주변의 구분 맥락에 대한 약한 의미의 분리 가능성뿐만 아니라 강한 의미의 분리 가능성을 인식하지 못했거나 무시하려고 했던 사람들이다. 즉, 그들은 유교의 변통 가능성에 대한 민감성을 갖고 있지 않았던 사람들이다. 따라서 ‘유교의 변통 가능성에 대한 둔감성’이 소중화 사상에 배어 있다는 사실을 파악한다면, 소중화 사상이 사대주의와 아무런 연관성을 갖고 있지 않다거나, 심지어 사대주의에서 벗어나는 데 기여했다는 주장은 받아들일 수 없는 주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