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속화와 민주주의 (봉인 해제)/세속화와 민주주의

가상의 역사 7. 자유 1

착한왕 이상하 2012. 3. 2. 04:08

서양의 세속화 과정을 한 나무에 비유할 때, 고전적 이원론의 붕괴 과정은 그 나무의 뿌리와 같다. 고전적 이원론의 근간인 ‘지상계와 천상계를 이분하는 관점’이 위협을 받게 되면서, 서양적 인간 중심 사상이 나타났다. 이러한 인간 중심 사상은 중세 이후의 새로운 변화에 적합하도록 기존의 세계 이해 방식을 수정하는 가운데 형성되었다. 이러한 인간 중심 사상이 시대정신으로 떠오르면서 ‘합리적 개인’ 개념이 탄생했다. 인간은 더 이상 신성이 깃든 곳으로 여겨진 천상을 바라보며 신을 찬양해야 하는 지상의 괴물이 아니다. 이렇게 우주에서 인간의 지위가 높게 평가되면서, 개인은 ‘신으로부터 부여 받은 이성이라는 능력으로 자연 및 도덕의 보편 법칙을 발견할 수 있는 존재’라는 입장이 정착했다. 그러한 입장에 함축된 개인 개념을 ‘합리적 개인’ 개념이라고 한다. 합리적 개인 개념이 개인의 자유가 확대되어야 한다는 인식을 형성하는 데 기여한 것은 맞지만, 개인의 자유 확대가 합리적 개인 개념 때문에 가능했다고 주장해서는 안 된다. 그러한 주장을 받아들이면, 세속화 과정은 합리적 개인과 같은 개념들로 구성된 이론적 체계의 산물로 간주되어야 한다. 또한 그러한 이론적 체계에 반하는 모든 입장은 세속화 과정을 저해한 요인들로 간주되어야 한다. 더욱이 그러한 이론적 체계의 존재는 세속화된 모든 사회 상태에 대한 필요조건으로 간주된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따라온 사람에게 이러한 결론들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서양의 세속화 과정에 대응되는 것이 이 땅의 역사에도 있었다는 가정 아래 하나의 가상의 역사를 구성할 때, 성양의 고전적 이원론과 비교해볼 만한 ‘중심과 주변의 구분 맥락’이 변화하는 과정을 논해야 한다. 앞서 여러 번 설명했듯이, 서양의 고전적 이원론과 이 땅의 중심과 주변의 구분 맥락은 기능적 측면에서 특정 지역의 한 시기를 지배했다는 공통점을 갖지만, 내용적 측면에서는 서로 다르다. 고전적 이원론은 그 내용적 정합성으로 인해, 그것이 위협받을 때 그것의 대체물을 만들어야 한다는 시대적 동기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 이는 동양의 중심과 주변의 구분 맥락에 대해서는 해당하지 않는다.

 

중심과 주변의 구분 맥락을 구성하는 핵심 관점은 ‘관계 중심의 인간 관점’이다. 관계 중심의 인간 관점에는 천지(天地)를 매개하는 존재로 인간을 규정하는 사고방식이 배어 있다. 그러한 사고방식을 ‘우주의 중심으로 인간을 보는 동양적 인간 중심 사상’으로 간주하는 경우, 우주가 존재하는 방식인 자연은 인간과는 다른 동물이나 사물보다 인간에게 더 높은 가치를 부여하는 위계질서를 갖게 된다. 그러한 위계질서가 구현된 사회만이 조화로운 사회로 전제할 때, ‘관계 중심의 인간 관점’은 중심과 주변의 구분 맥락을 구성하는 또 다른 관점인 ‘우열 구분의 관점’과 내용적으로 연결되고, 또한 그 두 관점을 결합한 것을 사회에 투영하여 ‘엄격한 신분 구분의 관점’을 이끌어낼 수 있다. 따라서 자연의 위계질서가 구현된 사회만이 조화롭다고 전제하지 않는 경우, 관계 중심의 인간 관점은 우열 구분의 관점과 내용적으로 분리 가능하며, 엄격한 신분 구분의 관점도 더 이상 받아들일 수 없게 된다. 그러한 내용적 분리 가능성을 ‘중심과 주변의 구분 맥락에 대한 약한 의미의 분리 가능성’으로 규정했었다.

 

중심과 주변의 구분 맥락에 대한 내용적 분리 가능성은 약한 의미에 국한되지 않는다. 중심과 주변의 구분 맥락에 대한 강한 의미의 내용적 분리 가능성에 따르면, 관계 중심의 인간 관점을 문자 그대로 받아 들여 인간 중심 사상이 그 관점에 전제되어 있다는 방식으로 해석할 필요가 없다. 사람, 동물, 사물 모두 우주의 통합 원리로 가정된 이(理)에 근거한 기(氣)의 활동성에 따른 천지조화(天地造化)의 산물이다. 이를 관계 중심의 인간 관점의 근간으로 보는 경우, 그 중 무엇이 우월한지를 따지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 ‘인간다움’을 설명하기 위해 천지조화를 논한다면, 인간은 천지를 매개하는 존재로 파악된다. 이로부터 인간이 우주의 중심이라는 식의 주장은 성립하지 않는다. ‘동물다움’ 혹은 ‘사물다움’을 설명하기 위해 천지조화를 논한다면, 동물 혹은 사물이 천지를 매개하는 존재로 파악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람, 동물, 사물이 보여주는 자연의 위계질서는 무엇을 기준으로 삼는가에 따라 상대화된다. 이 때문에, 인간을 기준으로 고정된 자연의 위계질서를 가정하고 그런 위계질서가 반영된 사회만이 조화롭다고 주장할 수 없다. ‘중심과 주변의 구분 맥락에 대한 이러한 강한 의미의 내용적 분리 가능성’은 중국적인 것을 기준으로 모든 것을 평가하려는 사고방식에서 벗어나려고 했던 실학자들의 글 속에 암시되어 있다.

 

중심과 주변의 구분 맥락이 내용적으로 분리 가능하다는 인식이 사회 전반에 확대되고, 이에 맞추어 기존의 유교를 변화시켜야 한다는 입장을 ‘유교의 변통 가능성’으로 명명했었다. 이러한 유교의 변통 가능성은 신유학의 근간인 중심과 주변의 구분 맥락이 논리적으로 하나의 정합적인 체계를 이루지 않는 데에서 기인한다. 반면에 서양의 고전적 이원론은 논리적으로 하나의 정합적인 체계를 이루고 있다. 이 때문에, 그것이 위협받는 분위기가 형성되었을 때 그것을 대체할 관점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싹들 수밖에 없었다. 중심과 주변의 구분 맥락과 고전적 이원론은 기능적 측면에서 특정 지역의 한 시기를 지배했다는 공통점을 갖지만 내용적 측면에서는 서로 다르다.

 

서양의 세속화 과정을 한 나무에 비유할 때, 고전적 이원론의 붕괴 과정은 세속화 과정이라는 나무의 뿌리와 같다. 그러한 세속화 과정에 대응되는 것이 이 땅의 역사에도 있었다는 가정 아래 하나의 가상의 역사를 구성해 보는 경우, 유교의 변통 가능성이 어떤 식으로 실현될 수 있었는지에 대해 상상력을 발휘해 논해야 한다. 이때 주의할 점이 있는데, 이를 복합 논증 형태를 빌려 구성해 보면 다음과 같다.

 

• 중심과 주변의 구분 맥락에 대한 강한 의미의 내용적 분리 가능성을 인식한 사람들이 이 땅의 과거 역사에 있었다.

• 유교의 변통 가능성이 실현되는 과정을 논하는 경우, 그러한 내용적 분리 가능성을 인식한 사람들의 수가 늘어나게 된 배경을 논의의 출발점으로 삼을 수 있다.

• 그러한 사람들은 관계 중심의 인간 관점에 ‘인간을 우주의 중심으로 보는 동양적 인간 중심 사상’이 전제되어 있다고 여기지 않는다.                               

• 따라서 유교의 변통 가능성은 동양적 인간 중심 사상이 약화되는 과정에서 점차 실현될 수 있을 것이다.

• 서양의 경우, 고전적 이원론이 붕괴하기 시작하면서 ‘인간을 육체를 가진 천사로 여기는 서양적 인간 중심 사상’이 지식인들의 의식을 사로잡았다.

• 동양이든 서양이든 세속화 과정에서 개인의 자유가 확대되었다면, 서양적 인간 중심 사상에 근거한 ‘이상화된 합리적 개인’과 같은 개념은 이 땅에서 개인의 자유가 확대된 과정을 논하는 데 중심축이 될 수 없다. 개인의 합리적 능력만으로 자연 및 도덕의 법칙을 발견할 수 있다는 합리적 개인 개념은 단지 서양에서 자유주의가 출현한 과정을 논할 때 필요한 것일 뿐이다.                                    

• 따라서 서양의 세속화 과정에 대응되는 것이 이 땅에도 있었다는 가정 아래 하나의 가상의 역사를 구성하는 경우, 이 땅에서 개인의 자유가 확대되어 가는 과정을 서양 역사의 전개 방식을 기준으로 논해서는 안 된다.

 

위 논증을 받아들이면, 우리가 구성해 볼 가상의 세속화 과정은 우선적으로 유교의 변통 가능성이 실현되는 과정에 근거해야 한다. 유교의 변통 가능성이 실현되는 과정에서 개인의 자유가 확대외어야 한다는 인식이 싹터야 한다. 따라서 그러한 인식을 정당화해 주는 이론적 기반도 서양의 합리적 개인 개념과 같은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합리적 개인 개념과 같은 것은 중세 말기를 거치면서 서양적 인간 중심 사상이 강화되면서 지식인들의 호응을 받은 반면, 이 땅에서 유교의 변통 가능성이 실현되는 과정은 동양적 인간 중심 사상이 약화되는 과정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유교의 변통 가능성이 실현되고 신분제가 붕괴되는 식으로 이 땅의 세속화 과정이 진행되었다면, 이 땅의 세속화 과정은 개인의 자유가 확대되어야 한다는 것이 유교와 무관하게 받아들여지는 사회의 통념으로 자리잡게 되는 과정이다. 왜냐하면 세속화된 사회 상태가 갖는 실제적 특징들은 세속화 과정에 기여한 이론적 개념들과 무관하게 성립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 분명히 하기 위해, 자유주의가 합리적 개인 개념에 이론적 뿌리를 두고 있지만 자유주의를 둘러싼 현대적 논쟁이 그러한 개념을 전제하고 진행되는 것은 아님을 먼저 다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