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속화와 민주주의 (봉인 해제)/세속화와 민주주의

가상의 역사 9. 세속화 과정과 동양의 자유 개념 1

착한왕 이상하 2012. 6. 24. 20:45

현대적인 특징들로 대표되는 ‘개인주의의 확대’, ‘이성의 강조’, ‘가치체계의 다원화’, ‘세계화’에 대응하는 실제적 양상은 ‘개인의 선택을 존중하는 혹은 누구나 자신의 삶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관점’, ‘감정과는 구분되는 추론 및 추상화 과정이 과학과 기술의 결합에 기여했다는 것’, ‘공동체에 해가 되지 않는다면 누구나 자신의 의견을 내세울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국가 간 경계가 느슨해졌다는 것’이다. ‘자유’를 ‘개인의 선택을 존중하는 혹은 누구나 자신의 삶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양상과 연관지어 논하는 경우, 동양과 서양 역사 모두에 공통된 특징으로 ‘신분제의 붕괴를 수반한 사회 구조 변동’을 거론할 수 있다. 그런데 신분제가 붕괴되는 방식은 서로 다르다.

 

서양의 경우, 신분제의 붕괴는 서양 고유의 오랜 세속화 과정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이 땅의 역사에는 해당하지 않는다. 이 땅의 경우, 하나의 논쟁 주제로 다루어질 만큼 일관되고 오래된 세속화 과정과 같은 것이 있었다고 단언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땅은 서양의 오랜 세속화 과정과 같은 것을 거치지 않고 세속화된 곳이다. 그래서 서양 역사에서 굳어진 중요 개념이나 이론에만 근거해 종교의 사회적 기능을 둘러싼 이 땅의 문제를 진단하는 것은 명백한 한계를 갖는다.

 

서양의 세속화 과정에 대응되는 것이 이 땅에도 있었다는 가정 아래 하나의 가상의 역사를 구성하는 경우, ‘개인의 선택을 존중하는 혹은 누구나 자신의 삶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현대적 특징이 나타나는 과정을 서양 맥락의 자유 개념에 근거해 서술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서양의 세속화 과정은 ‘지상계와 천상계를 이분하는 관점’, ‘인간적인 것과 신성적인 것을 이분하는 관점’, 그리고 ‘평신도와 성직자를 이분하는 관점’으로 구성된 ‘고전적 이원론’이 흔들리면서 시작되었다. 서양의 세속화 과정에 대응되는 것이 이 땅에 있었다면, 유교의 핵심인 ‘중심과 주변의 구분 맥락’이 흔들리면서 시작되었다고 가정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왜하면 고전적 이원론과 중심과 주변의 구분 맥락 모두 기능의 측면에서 한때 특정 지역을 지배했다가 붕괴되거나 약화되었다는 공통점을 갖기 때문이다.

 

고전적 이원론이 흔들리게 된 것을 서양의 세속화 과정이라는 나무의 씨앗으로 보는 경우, 중심과 주변의 구분 맥락이 흔들리게 된 것은 이 땅의 세속화 과정이라는 나무의 씨앗으로 볼 수 있다. 물론 그러한 이 땅의 세속화 과정은 이 땅에도 서양의 세속화 과정에 대응되는 것이 있다는 가정 아래 구성될 가상의 역사 속에서 의미를 갖는다. 그렇지만 그러한 가상의 역사 속에서 의미를 갖는 이 땅의 세속화 과정은 현실 문제를 진단하는 데 도움을 준다. 고전적 이원론이 흔들리게 된 것을 서양의 세속화 과정이라는 나무의 씨앗으로, 그리고 중심과 주변의 구분 맥락이 흔들리게 된 것을 이 땅의 세속화 과정이라는 나무의 씨앗으로 보는 경우, 그 두 씨앗은 다르다. 서양의 세속화 과정이라는 나무와 이 땅의 세속화 과정이라는 나무가 아주 유사한 과일을 결과물로 갖더라도, 각 씨앗의 다름으로 인해 그 두 나무가 성장한 과정은 다를 수밖에 없다. 서양의 세속화 과정에 대응하는 것이 이 땅에도 있었다는 가정 아래 하나의 가상의 역사를 구성하려면, 다시 한 번 이를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이미 살펴보았듯이, 고전적 이원론은 내용적으로 하나의 정합적 체계를 이루는 반면 중심과 주변의 구분 맥락은 그렇지 않다. 고전적 이원론의 내용적 정합성 때문에, 고전적 이원론의 붕괴 과정은 기독교 교리를 재해석하는 가운데 고전적 이원론을 대체할 수 있는 것을 구성해야 한다는 ‘시대적 요청’을 낳았다. 신과 자연, 자연과 인간, 사회와 인간의 관계는 그러한 요청에 부합하도록 조절되는 과정을 겪었다. 그러한 조절 과정을 과거 전통과의 완전한 단절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 그러한 조절 과정을 통해 나타난 세계 이해 방식이 고전적 이원론을 대체하는 기능을 갖더라도, 그 이해 방식은 어디까지나 기존 개념들과 그 관계를 새로운 담론 주제에 맞추어 재구성하는 가운데 탄생한 것이기 때문이다.

 

고전적 이원론을 대체하는 기능을 갖는 것을 찾아 가는 과정에 대해 ‘인간의 천사화 계획’이라는 은유적 표현을 사용했었다. 왜냐하면 그 과정에서 서양적 인간 중심 사상이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인간은 신성이 깃든 천상을 바라보며 찬양을 해야 하는 지상의 괴물이 아니다. 이러한 표현으로 대표되는 서양적 인간 중심 사상은 인간관계의 전통에 의존적이지 않는 ‘자율적 인간의 이상’에 대한 모태와 같은 것이었다. 물론 그러한 자율적 인간의 이상은 비현실적인 것이지만, 이로부터 그것이 현실 문제를 진단하고 평가하는 기준으로 기능할 수 있다는 자격마저 박탈당하는 것은 아니다. 이를 인정하는 분위기 속에서 자유를 합리적 선택과 연관짓는 방식이 주목을 받았다. ‘자유로운 선택’은 자율적이며 동시에 합리적이다. 이 점은 자유주의를 탄생시킨 동기라고 할 수 있다. 정말 자유주의 자체가가 세속화 과정을 이끈 유일한 핵심 이념이었다면, 그 과정은 자유주의가 공간적으로 확장되는 과정이라고 말해야 한다. 그런데 그 과정의 실제적 양상은 개인의 선택 방식이 생존 범위를 벗어나 사회의 다양한 영역을 가로지는 방식으로 확장된 과정이다. 개인의 선택 방식이 생존 범위를 벗어나게 되는 과정에 자유주의를 둘러싼 논쟁이 기여한 것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지만, 그 과정이 반드시 ‘자율적이고 합리적 개인 개념에 근거한 선택의 자유’와 같은 것을 전제해야 실현 가능한 것은 아니다.

 

개인의 선택 방식이 생존 범위에서 벗어나게 된 경우, 개인은 이미 주어진 것들을 선택하는 수동적 존재로 여겨질 수 없다. 개인은 사회 설계에 참여할 수 있는 능동적 존재로 여겨져야 한다. 여기서 흥미로운 물음은 다음과 같다.

 

• 사회 설계 참여의 자유는 반드시 자유주의를 둘러싼 논쟁과 같은 것을 거쳐야 실현 가능한 것일까?

 

사회 설계 참여의 자유가 반드시 자유주의의 자율적이고 합리적인 개인을 가정해야 이론적으로 정당화 가능한 것은 아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이 점은 다양한 정치적 이념을 산출한 19세기 상황만 고려해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하지만 서양의 경우, 사회 설계 참여의 자유에 대한 인식이 자유주의를 둘러싼 논쟁에 빚지고 있다는 점은 그 누구도 부정하기 힘들다.

 

서양의 세속화 과정과 비교 가능한 이 땅의 과정을 구성하는 경우, 위 물음에 대해 긍정적으로 답할 수 없다. 또한 그러한 구성에서 자유주의를 둘러싼 논쟁과 같은 것을 가정할 필요도 없다. 만약 누군가 자유주의를 둘러싼 논쟁, 실례로 선택의 자유와 복지의 관계에 대한 낙천적 입장과 부정적 입장으로 대표되는 논쟁과 같은 것을 거쳐야지만 사회의 세속화가 가능하다고 주장한다면, 그는 마치 이 땅의 현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서양의 계몽주의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사람과 같다. 그런데 그는 서양의 세속화 과정의 실제 양상에 대해 무지한 사람이며, 동시에 서양의 담론을 기준으로 이 땅의 현실 문제를 진단하려고 드는 무비판적인 사람이다. 이 땅의 철학자들 중에는 가족주의와 같은 전통을 비판하면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서양의 계몽주의라고 주장하는 자들이 있다. 그런 자들에게 ‘서양의 세속화 과정에 대응되는 것이 이 땅에도 있었다는 가정 아래 하나의 가상의 역사를 구성해 보려는 시도’는 무의미하다. 이 땅은 서양의 세속화 과정과 같은 것을 거치지 않고 세속화된 곳이기 때문에, 그러한 가상의 역사를 우리 현실에 투영해 보는 것은 종교를 둘러싼 문제를 진단하는 데 도움을 준다.

 

역사적 과정들은 구조적 측면과 내용적 측면에서 서로 비교 가능하다. 가상적으로 구성될 이 땅의 세속화 과정과 서양의 세속화 과정은 구조적 측면에서 다음과 같은 유사성을 갖는다.

 

• 과거 한 시기의 시대정신처럼 기능한 어떤 관점 ‘X’가 약화되는 과정에서 현대적인 것을 대표하는 특징들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러한 특징들은 ‘X’가 약화되는 과정에 기여한 특정 정치적 이념이나 철학적 이론 ‘Y’를 전제해야 만이 정당화 가능한 것이 아니다.

 

여기서 ‘X’는 서양의 세속화 과정을 고려할 때 ‘고전적 이원론’이 되며, 가상적으로 구성될 이 땅의 세속화 과정을 고려할 때 ‘중심과 주변의 구분 맥락’이 된다. 그러나 고전적 이원론과 중심과 주변의 구분 맥락은 내용적으로 차이를 보인다. 이 때문에, 서양의 세속화 과정을 논할 때 필요한 ‘Y’는 이 땅의 세속화 과정을 논할 때 전제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자유 개념과 연관시켜 지금까지의 논의 중 일부를 다음과 같이 요약할 때 좀 더 분명해진다.

 

• 고전적 이원론이 붕괴되기 시작하면서 서양적 인간 중심 사상이 형성되었다. 이 과정에서 자율적이고 합리적인 인간의 이상이 탄생했다. 자율적이고 합리적인 인간의 이상에 근거한 자유주의는 세속화 과정을 논할 때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하지만 세속화 과정을 자유주의가 실현되는 획일적 과정으로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다. ‘개인의 선택을 존중하는 혹은 누구나 삶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현대적 특징이 당연한 것으로 인정되는 현실에 기여한 것은 자유주의라는 정치적 이념 혹은 철학적 이론이 아니다. 그것은 선택의 자유와 복지의 관계에 대한 낙천적 입장과 부정적 입장으로 대표되는 ‘자유주의를 둘러싼 논쟁’이기 때문이다.

 

• 관계 중심의 인간 관점, 우열 구분의 관점, 엄격한 신분 구분의 관점으로 구성된 ‘중심과 주변의 구분 맥락’은 서양의 고전적 이원론과 달리 내용적으로 하나의 정합적 체계를 이루지 않는다. 관계 중심의 인간 관점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경우, 그 관점에는 ‘인간을 천지(天地)를 매개하는 우주의 중심으로 파악하는 동양적 인간 중심 사상’이 배어 있다. 그러한 인간 중심 사상에 근거한 자연의 위계질서가 반영된 사회만이 조화롭다고 전제하는 경우, 관계 중심의 인간 관점과 우열 구분의 관점은 자연스럽게 내용적으로 결합 가능하며, 그 두 관점을 사회에 투영시켜 신분 구분의 관점을 이끌어낼 수 있다. 서양의 세속화 과정에 대응되는 것이 있었다고 가정하는 경우, 이 땅의 세속화 과정의 초기 단계는 인간 중심 사상이 약화되는 과정이다. 그러한 과정이 신유학에 함축된 중심과 주변의 구분 맥락을 대체할 관점을 찾아가는 과정일 필요는 없다. 동양적 인간 중심 사상이 약화되는 과정은 중심과 주변의 구분 맥락이 갖는 내용적 비정합성에 대한 인식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시대의 변화에 적합하도록 유교를 수정하는 것을 ‘유교의 변통 가능성이 실현되는 것’으로 규정했었다. 서양의 세속화 과정에 대응되는 것이 이 땅에 있었다면, 그것의 핵심은 유교의 변통 가능성이 실현되는 과정이다.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 나타날 현대적 특징들은 유교와 무관하게 인정되어야 하는 것이다.

 

서양의 세속화 과정의 핵심이 고전적 이원론의 붕괴 과정이라면, 이 땅의 세속화 과정의 핵심은 ‘유교의 변통 가능성이 실현되는 과정’이라고 해야 한다. 이는 서양의 세속화 과정과 같은 것이 이 땅에도 있었다는 가정 아래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다. 고전적 이원론이 붕괴되는 과정에서 자유주의와 같은 정치적 이념 혹은 철학적 이론이 나타났다. 유교의 변통 가능성이 실현되는 과정에서 자유주의와 같은 것이 나타나기는 힘들다. 고전적 이원론의 붕괴 과정에서 인간 중심 사상이 강화되었다면, 유교의 변통 가능성의 실현 과정에서는 인간 중심 사상이 약화되었을 것이라고 말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유주의를 둘러싼 서양의 논쟁 사례들에 기대어 이 땅의 세속화 과정을 구성해 보는 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에 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