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속화와 민주주의 (봉인 해제)/세속화와 민주주의

가상의 역사 8. 자유 2: 세속화 과정과 서양의 자유 개념

착한왕 이상하 2012. 4. 27. 19:57

현대적인 특징들로 거론되는 ‘개인주의의 확대’, ‘이성의 강조’, ‘가치 체계의 다원화’, ‘세계화’의 실제적 양상은 ‘개인의 선택을 존중하는 혹은 누구나 자신의 삶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관점의 확대’, ‘감정과는 구분되는 추론 및 추상화 과정이 과학과 기술의 결합에 기여했다는 것’, ‘공동체에 해가 되지 않는다면 누구나 자신의 의견을 내세울 수 있다는 것’, ‘국가 간 경계가 느슨해졌다는 것’이다. 세속화 과정을 언급하지 않고서는 그러한 양상들이 두드러지게 나타난 과정을 논할 수 없다. 특히 개인주의의 확대 과정은 ‘자유’라는 개념에 대한 고찰이 정치 철학이나 사회학의 중요한 담론으로 떠오르는 과정과 밀접한 관계를 맺는다.

 

우리 모두 몇 백 년 전에 태어났다고 해보자. 그 당시와 현재에 공통된 점은 삶의 초기 조건이 불평등하다는 것이다. 누구는 부유한 집에서 태어난다. 누구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다. 누구는 건강한 몸으로 태어난다. 누구는 허약한 몸으로 태어난다. 정신박약이나 기형으로 태어나는 사람도 있다. 그럼에도 모두에게 공평한 기회가 주어지고 각자 자신의 기회를 잡을 수 있도록 사회적 제도가 마련되어야 한다는 데 동의한다. 또 그러한 제도는 삶의 초기 조건이 갖는 불평등함을 극복하기 위한 방안과 배타적 관계를 맺지 않는 것으로 간주된다. 이는 권력이 소수에 집중된 과거에는 해당하지 않는다.

 

몇 백 년 전 사회는 기존의 질서를 위협하는 발언이나 행위에 대해서는 관대하지 못했다. 신 존재에 대한 믿음이 사회 통합의 원리처럼 기능한 시절, 신 존재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의심하는 사람은 사회에 무관심한 인물 혹은 반사회적 인물로 간주되었다. 교육도 기존의 질서에 순응하도록 민중을 길들이는 기능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과거 사회에 집단적 측면에서 통용된 자유 개념은 ‘어떤 제약이나 제한의 부재’를 뜻하지 않는다. 어떤 제약이나 제한의 부재로서의 자유는 개인이 갈망할 수 있는 것이지만 사회에서 통용 가능한 개념은 아니다. 어떤 제약이나 제한의 부재를 뜻하는 개념은 과거 사회뿐만 아니라 현대 사회를 논할 때에도 사용되지 않는다. 자유 개념이 정치학, 정치 철학 및 사회학 등에서 사용될 때, 개인적 선택과 관련된 권리의 보장 정도와 허용 범위가 논의의 대상이 된다. 따라서 자유를 논할 때, 과거와 현재의 차이는 그러한 보장 정도와 허용 범위의 차이로 나타난다.

 

세속화 과정을 거쳐 현재에 도달하는 과정은 ‘개인의 선택과 관련된 권리’의 보장 정도와 허용 범위가 확대된 과정이기도 하다. 그러한 과정에 자유주의 전통이 기여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개인의 선택을 존중하는 혹은 누구나 자신의 삶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관점의 확대’가 자유주의의 산물이라는 주장은 역사적 근거를 결여한 것이다. 오히려 그러한 관점이 확대되는 과정에서 자유 개념을 둘러싼 논쟁을 통해 자유권 행사 및 정부 권력 행사의 폭에 대한 여러 입장이 나타났다.

 

개인의 자유를 천부 인권설에 근거한 자연권과 연관시켜 옹호한 이는 로크였다. 이때 ‘자유’는 ‘제도나 타인의 간섭을 받지 않는 선택 행위’로 대표된다. 여기서 다른 사람의 소유권 등을 침해하는 행위는 합리적인 것으로 간주되지 않는다. 반면에 내가 지출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물건을 소유하는 행위는 ‘다른 사람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선택 행위’로 간주된다. 설령 다른 사람의 권유로 물건을 산 경우에도 선택 유무의 결정은 나 자신의 의지에 따른 결과로 여겨진다. 따라서 전통적인 자유주의 입장에 따른 ‘제도나 타인의 간섭을 받지 않는 선택 행위’는 생존권과 관련되며, 개인의 자유를 보장한다는 것은 생존과 관련된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다.

 

여기서 개인의 자유를 제도적으로 보장한다고 할 때, 그것은 국가 권력이 개인의 ‘밥’도 책임진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즉, 국가 권력을 대표하는 집단이 다수 개인의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해 준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물론 국가 권력을 대표하는 집단이 그런 문제를 소홀히 해도 된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개인의 자유를 제도적으로 보장하기 위해서는 국가 권력이 개인의 생존권과 관련된 합리적 선택에 영향을 끼쳐서는 안 된다. 이것이 전통적 자유주의의 입장이다. 따라서 ‘자유’가 ‘제도나 타인의 간섭을 받지 않는 선택 행위’로 대표된다고 할 때, 개인의 생존과 관련된 선택의 범위는 가급적 제도적 영향을 받지 말아야 한다. 또한 타인의 생존권을 침해하지 않는 행위는 허용되어야 한다. 이러한 근대의 전통적 자유주의 입장에 따르면, 국가 권력은 개인의 생존권과 관련된 선택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최소화되어야 한다.

 

전통적 자유주의에 대한 위의 설명 방식에 따르면, 소위 ‘개인의 합리적 선택’은 생존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그리고 생존권과 관련된 합리적 선택의 범위는 사적 영역으로 규정된다. 이러한 규정 방식에는 다음과 같은 근대의 사고방식이 깔려 있다.

 

• 신은 각 개인이 자유로운 선택을 통해 행복을 추구하도록 자연을 창조했다. 자유로운 선택을 통해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자연적 경향이며, 그러한 자연적 경향에 따르는 것은 신의 뜻에 따르는 것이기도 하다.

 

물론 전통적 근대 자유주의의 토대를 마련한 모든 사람이 위의 사고방식에 동의한 것은 아니었다. 개인을 ‘신의 소유물(God's property)’로 규정하고 개인을 신으로부터 생존을 위한 자연권을 보장받은 존재로 여긴 로크와 달리, 홉스는 개인을 ‘만인 대 만인의 투쟁’인 자연 상태를 극복하기 위해 상호 계약을 맺는 존재로 여겼다. 홉스에게 사회 계약은 자연 상태의 잔인함에서 비롯된 공포심에 근거한 것인 반면에, 로크에게 사회 계약은 개인의 자연권을 보호해 주는 제도적 장치이다. 로크에게 자연권이 보장되는 상태가 ‘자연 상태’이며, 국가 권력은 그러한 자연 상태를 유지시켜야 하는 의무를 갖는다. 그러나 ‘자연 상태’에 대한 두 사람의 이러한 의견 차이는 두 사람 모두 생존과 관련된 개인의 합리적 선택을 중시한다는 점에 주목할 때 사소해진다.

 

다른 사람의 생존권을 침해하지 않는 범위에서 자신의 행위 결과에 대한 손익 계산에 따른 선택은 합리적이다. 이를 받아들이면, 인간의 자연적 성향은 이기적이라고 해야 한다. 이때 다음과 같은 물음에 답하는 것이 중요해 진다.

 

• 이기적 성향을 가진 개인들이 어떻게 사회에 대한 책임 의식을 가질 수 있을까? 또 그러한 개인들의 관계에 바탕을 둔 사회는 어떻게 안정적일 수 있을까?

 

전통적인 근대 자유주의가 서양적 인간 중심 사상과 함께 정착하면서 개인의 합리적 선택의 범위는 주로 생존권과 관련하여 이해되었기 때문에, 위 물음에 답하는 것은 서양 지성사에서 의미있는 과업이 되었다. 그러한 이해 방식에 따라 인간의 자연적 성향을 이기적인 것으로 규정하는 경우, 생존권과 맞물린 사적 영역은 이기적인 개인의 자연적 성향이 지배하는 곳으로 이해되었다. 그리고 사적 영역에 대비된 공적 영역은 ‘이기적인 것에 대비된 이타적인 것이 지배하는 곳’으로 이해되거나, ‘개인의 속성으로 환원 설명 가능한 곳’으로 이해되거나, 아니면 ‘신앙의 지배를 받아야 하는 곳’으로 이해되었다. 이러한 사적, 공적 영역과 이기적인 것과 이타적인 것의 대비를 만들어낸 위 물음은 서양 지성사의 맥락에서 중요하다.

 

철학자들은 개인의 이기적 성향이 자연적이라는 주장을 경험 혹은 상식에 근거해 타당한지를 따질 수 있다고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일상 경험을 살펴보면, 철학자들이 말하는 이기적 혹은 이타적 성향은 누구에게나 나타난다. 또한 그 어떤 행위도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주게 마련이기 때문에, 오로지 자신에게만 국한된 선택이라는 것은 없다. 단지 어떤 행위가 다른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의 정도만 차이를 보일 뿐이며, 그러한 정도 차이는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어떤 상황에서 이기적인 것에 가깝다고 여겨진 행위가 다른 상황에서는 아닐 수 있고, 또 이타적인 것에 가깝다고 여겨진 행위가 다른 상황에서는 아닐 수 있다. 이기적인 것과 이타적인 것의 개념적 구분은 단지 행위의 목적과 결과를 설명할 때 필요할 뿐이다. 이에 대해서는 다른 곳에서 논했으므로 여기서는 다루지 않는다.

 

위 물음을 ‘개인과 집단의 관계에 대한 근대의 고민’으로 규정하자. 로크나 홉스 등 17세기 학자들에게서 그러한 고민에 대한 명확한 입장을 찾기는 힘들다. 그러한 고민에 대한 그들의 입장은 항상 재해석의 여지를 갖고 있는데, 이에 대한 이유는 단순히 그들이 다룬 주제의 다양성과 풍부성으로 인해 발상한 애매모호함 때문이 아니다. 그들은 종교 개혁기라는 혼란기의 연장선에 서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사회의 계층 분화 과정으로 인한 정체성의 갈등을 심각하게 경험하지는 못했다. 18세기 학자들이 개인과 집단의 관계에 대해 더욱 깊이 고민한 이유는 그러한 갈등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이기적 성향을 가진 개인들이 어떻게 사회에 대한 책임 의식을 가질 수 있을까? 또 그러한 개인들의 관계에 바탕을 둔 사회는 어떻게 안정적일 수 있을까? 18세기 유럽 지식인들은 개인과 집단의 관계에 대한 이러한 고민을 심각히 받아 들였다. 상업과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각국 사회의 계층 분화가 가속되었고, 국가 간 교류 관계도 더욱 활성화되었다. 개인의 합리적 선택에 따른 생존권에 국한해 자유를 논할 수 없는 상황이 도래한 것이다. 개인 간 거래 관계 또한 자유로운 선택의 범위에 속하는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 그런데 상업적 거래의 결과는 간접적으로 제 3자에게 이득을 주거나 손해를 줄 수 있다. 이 때문에, ‘개인과 집단의 관계에 대한 고민’을 놓고 다음과 같은 상반된 두 입장이 18세기에 이미 공존했다.

 

• 선택의 자유와 복지의 관계에 대한 낙천적 입장

개인의 합리적 선택에 따른 거래 관계는 그 무엇보다도 존중되어야 한다. 따라서 국가 권력은 그러한 관계에 가급적 개입하지 말아야 한다. 국가 권력은 다른 사람에게 직접적 피해를 주는 거래 관계만을 제약해야 하며, 이를 통해 개인 간 거래가 활성화될 수 있는 제도적 틀을 마련해야 한다. 개인 간 거래가 활성화되면 될수록, 다수가 누리는 이득도 커진다. 그러므로 복지는 개인의 선택의 자유를 확대하는 것에 의해 실현 가능하다.

 

• 선택의 자유와 복지의 관계에 대한 비관적 입장

누구나 행위 결과의 손익 계산에 근거해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려는 성향을 갖고 있다. 인간이 그러한 성향을 갖고 있다고 해서, 인간 본성이 이기적이라는 결론은 성립하지 않는다. 또한 합리적이라고 불리는 것은 다양한 측면을 갖고 있기 때문에 하나로 통합될 수 없다. 순수한 의미에서 개인 차원의 합리성이라는 것이 있는지도 의심스럽다. 개인 차원의 그러한 합리성이 있다고 하더라도, 개인의 합리적 선택에 따른 결과가 반드시 모두에게 이득이 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복지가 개인의 선택의 자유를 확대하는 것에 의해 실현될 것이라는 생각은 너무나 낙천적이다. 물론 이로부터 개인의 선택의 자유를 확대하는 것이 복지 추구에 대한 필요조건이라는 입장까지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선택의 자유를 무조건 확대하는 것은 오히려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으로 끝나게 된다. 생존 환경 및 능력의 불평등으로 인해 거래의 무조건적인 자유는 권력 분배의 불평등을 가져 오고, 결국 다수가 소수의 권력에 귀속되게 된다. 이때 개인의 행복을 존중한다는 자유주의의 이념은 파괴된다.

 

개인의 선택의 자유가 확대되는 과정은 개인의 정체성 갈등을 수반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선택의 범위는 일률적으로 혹은 동질적으로 확대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선택의 대상이 속하는 특정 영역에 특정 가치 체계가 대응된다면, 선택의 범위가 확대되는 과정은 가치 체계의 갈등 과정과 맞물릴 수밖에 없다. 만약 자아를 정체성 갈등을 겪지 않는 영역의 중심으로 규정하는 경우, 선택의 범위를 확대하는 것은 정체성 갈등을 극복하고 자아가 좁은 영역의 중심에서 넓은 영역의 중심이 되는 것을 뜻한다. 여기에는 가족이나 친족 영역의 중심인 자아가 사회 전체의 중심이 되어야 집단 간 갈등을 극복할 수 있다는 ‘스토아적 사고방식’이 깔려 있다. 18세기 칸트 등에게서 엿볼 수 있는 그러한 사고방식은 ‘자유와 복지에 대한 낙천적 입장’을 옹호하는 사람이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그러한 사람들 대부분은 이기적 성향을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성으로 가정하기 때문이다.

 

자아가 가족 영역에서 벗어나 사회 전체의 중심이 되어야 집단 간 갈등 극복이 가능하다는 사고방식에 따르면, 개인 간 거래 관계를 통해 자아는 친족 중심의 영역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렇게 자아가 친족 중심 영역에서 벗어나는 것을 ‘사회 전체로의 자아의 확장’으로 규정할 때, 선택의 자유를 보장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거래 관계는 ‘개인의 사회화’인 동시에 ‘자아의 확장 과정’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는 이기적 성향을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성으로 파악하는 것과 정합적 관계를 맺을 수 없다.

 

관계로부터 자유로운 합리적 선택을 가정하는 것은 일상 경험을 통해 정당화될 수 없을뿐더러, 또한 이 땅의 현실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선택의 자유 확대를 ‘자아의 확장으로서의 개인의 사회화’로 보지 않는 자유주의자들은 그렇게 보는 사람들보다 분명히 현실적이다. 친족 영역과 사회 전체를 결코 하나의 가치 체계 아래 하나로 묶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즉, 친족 영역을 그저 사회 전체 영역의 부분 집합처럼 취급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다.

 

그렇다면 ‘자유와 복지의 관계에 대한 낙천적 입장’을 가진 사람들이 주장하는 ‘선택의 자유를 확대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 그것은 선택의 영역마저도 선택의 고려 대상이 됨을 뜻한다. 이를 ‘영역 선택의 자유’라고 규정하자. 영역 선택의 자유는 단지 한 영역의 두 대안 중 무엇을 선호하는가라는 방식에 의해 선택이 결정되지 않는 자유이다. 그것은 여러 상이한 대안들을 함축한 영역들의 비교를 필요로 하는 선택이다. 영역 선택의 자유를 허락하는 경우, 교육, 상업, 정치 등 사회를 구성하는 영역도 선택의 대상이 된다. 따라서 영역 선택의 자유에서 ‘선택’은 특정 영역에 국한된 선택과 비교할 때 ‘메타적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

 

자유로운 선택의 영역이 생존 영역에 국한된 경우를 ‘생존권에 국한된 선택의 자유’라고 규정하자. 17세기에서 18세기 말에 이르는 과정은 ‘생존권에 국한된 선택의 자유’뿐만 아니라 ‘영역 선택의 자유’도 민중에게 허용되기 시작한 과정이다. 이를 벌린(I. Berlin)의 용어를 빌려 표현한다면, 그 과정은 ‘소극적 자유’뿐만 아니라 ‘적극적 자유’도 민중에게 허용되기 시작한 과정이다. 벌린은 ‘소극적 자유’를 ‘생존 및 사적 관심사에 국한된 자유’로, 그리고 ‘적극적 자유’를 ‘개인의 삶을 계획하고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에 근거한 자유’로 규정했기 때문이다.

 

시대의 변화에 맞추어 적극적 자유 개념을 옹호한 이들로는 칸트, 훔볼트(W. von Humboldt), 볼테르, 콩도르세(M. de Condorcet) 등을 들 수 있다. 영역 선택의 자유 혹은 적극적 자유를 옹호하는 이가 인간 본성을 반드시 이기적으로 파악할 이유는 없다. 따라서 자유와 복지의 관계에 대한 낙천적 옹호자가 될 이유도 없다. 앞서 언급했듯이, 칸트는 그러한 낙천적 입장을 지지하지 않았다. 칸트를 서양 실천 철학 전통에서 자유주의에 기여한 인물로 보는 경우, 그는 선택의 자유 확대를 복지에 대한 필요조건으로 본 것이지 충분조건으로 보지 않은 자유주의자이다. 반면에 ‘자유와 복지의 관계에 대한 낙천적 입장’을 옹호한 사람들은 선택의 자유 확대를 복지에 대한 충분조건으로 보았다. 이때 선택의 자유를 확대한다는 것은 ‘영역 선택의 자유’까지도 제도적으로 보장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선택의 자유 확대가 ‘자아의 확장으로서의 개인의 사회화’를 전제할 필요가 없다고 보는 입장이 ‘자유와 복지의 관계에 대한 낙천적 입장’인 것이다.

 

자유와 복지의 관계에 대한 낙천적 입장은 17세기 쾌락 공리주의에서부터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기적 개인들을 바탕으로 한 공동 협력의 가능성을 정당화하거나, 정부의 간섭과 통제를 가급적 배제한 자유 시장 경제를 옹호하는 것에는 그러한 낙천적 입장이 배어 있다.

 

자유와 복지의 관계에 대한 비관적 입장은 낙천적 입장과 마찬가지로 ‘생존권에 국한된 선택의 자유’뿐만 아니라 ‘영역 선택의 자유’까지도 요청되기 시작한 시대의 산물이다. 따라서 자유와 복지의 관계에 대한 비관적 입장을 그러한 시대적 요청에 반하는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자유가 생존 영역을 벗어나 여러 영역에 걸친 개인 간 거래를 허용하는 경우, 먹고 사는 문제가 오히려 더 중요해질 수 있다.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서는 영역 가로지르기 선택은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러한 선택을 위해 기회의 균등만 보장될 뿐 결과의 분배까지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이 때문에, 선택의 자유를 제도적으로 확대하는 것이 반드시 복지의 실현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여기서 더 나아가 분배의 불평등이 다수의 생존권을 위협해 결국 개인의 자유를 억압한다는 것이 ‘자유와 복지에 대한 비관적 입장’이다.

 

세속화 과정이 가속화되면서 선택의 자유는 민중에게 영역 간 거래를 허용하는 것까지 확대되었다. 그러한 과정에서 여러 정치ㆍ철학적 입장들이 나타난 것이지, 그러한 입장들이 세속화 과정을 주도적으로 이끈 것은 아니다. 그러한 입장들을 두 가지로 분류하는 경우, 자유와 복지의 관계에 대한 낙천적 입장과 비관적 입장은 과거 상황을 분석하는 데 도움을 준다.

 

자유와 복지의 관계에 대한 낙천적 입장은 전통적 자유주의와 자유 시장 경제를 옹호하는 자유주의 진영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자유와 복지에 대한 비관적 입장은 19세기 중엽 이후 논쟁된 사회주의나 공산주의 진영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또한 모든 자유주의자가 ‘자유와 복지에 대한 낙천적 입장’을 옹호한 것은 아니었다.

 

모든 자유주의자는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세력을 막기 위해 국가의 존재를 필요악으로 인정한다. 물론 국가 권력을 대리하는 정부도 개인들로 구성되는 까닭에, 정부가 타락할 여지도 있다. 그러므로 정부는 합법적인 절차에 의해 구성되어야 하며, 법치(法治))에 따라 권력을 행사해야 한다. 자유주의 진영 내에서 자유와 복지의 관계에 대한 입장 차이는 다음 물음에 대한 입장 차이로 나타난다.

 

• 국가 권력을 대리하는 정부는 개인들의 관계에 근거한 사회 현상을 얼마나 예측할 수 있을까?

 

이 물음에 대해 강하게 부정하는 입장일수록, 그 입장은 근대의 전통적 자유주의자나 자유 시장 경제 옹호론자의 입장에 가깝다. 이 때문에, 그들은 개인의 사적 영역이나 시장 경제에 정부가 개입하는 것에 반대한다. 반면에 이 물음에 대해 강하게 긍정하는 입장일수록, 그 입장은 ‘복지 지향 자유주의’를 옹호하는 사람의 입장에 가깝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를 바탕으로 한 복지 지향 자유주의 혹은 새로운 자유주의(new liberalism)는 19세기 공리주의의 대부 밀(J. S. Mill), 영국의 사회주의자 그린(T.H. Green)과 홉하우스(L. Hobhouse) 등에 그 사상적 뿌리를 두고 있다.

 

선택의 자유가 영역 간 이동을 허용하려면, 합당한 의료, 교육 및 연금 정책이 받쳐 주어야 한다. 이를 위해 정부가 개인들의 관계에 근거한 사회 현상을 분석하고 문제 해결을 위한 정책을 마련할 수 있다고 가정해야 한다. 이러한 가정은 산업 혁명, 사회 통계의 발달, 그리고 자유주의와 사회주의의 상호 작용을 통해 얻어진 인식이었다. 그러한 상호 작용은 ‘정치를 통해 사회를 특정 방향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는 신념이 지배한 시대에 가능했다. 그러한 시대는 개인의 자유와 함께 평등이 요구되기 시작한 시대였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지식인들을 지배했던 ‘정치를 통해 사회를 특정 방향으로 유도할 수 있다’는 신념이 현재에도 모든 정치적 이데올로기의 핵심으로 작용할 수 있을까? 개인적으로 이러한 물음에 대해 긍정적으로 답할 수 없다. 개인의 자유는 생존 영역을 벗어나 여러 영역을 가로지는 선택 방식으로 확장되었다. ‘개인이 자신의 삶의 주인이 된다는 것’은 다양한 가치 체계를 함축한 여러 영역들마저도 선택의 대상이 되어야 함을 뜻한다. 생존을 위해 두 대상을 비교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이러한 영역 가로지르기 선택 과정을 경험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가능해졌다. 그러한 경험은 여러 가치 체계의 비교를 요구하기 때문에 정체성 갈등을 심화시킬 수도 있다. 즉, 선택의 자유 확대와 정체성 갈등은 서로 배타적 관계를 맺지 않는다. 영역 가로지르기 선택이 허용되는 한, 개인은 더 이상 주어진 대안들을 선택하는 수동적 존재로 여겨질 수 없다. 특히 현대 민주주의 사회의 개인은 사회 설계에 참여할 수 있는 능동적 존재로 여겨져야 한다. 개인의 자유가 선택의 자유에서 사회 설계 참여의 자유로 확대된 현실에서 요구되는 정치론의 핵심은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 유럽 지식인들을 지배했던 신념이 될 수 없다. 그 신념을 ‘정치 속의 사회’로 표현하는 경우, 현재 요구되는 새로운 정치론의 핵심은 아마도 ‘사회 속의 정치’로 표현 가능한 것이 되어야 한다. 그러한 새로운 정치론을 여기서 논할 필요는 없다. 또 나 자신이 그러한 새로운 정치론을 구상하고 체계화해 볼 수 있는 ‘팔자 좋은 상황’에 처해 있지 않다.

 

이제 이 땅의 무종교인에게 중요한 물음은 다음이다.

 

• 이 땅에도 서양의 세속화 과정에 대응시켜 볼만한 것이 있었다는 가정 아래 가상의 역사를 논하는 경우, 그러한 논의는 우선 유교의 변통 가능성이 실현되는 과정에 근거해야 함을 논했다. 이때 그러한 가능성이 실현되는 과정에서 자유라는 개념은 어떻게 파악되어야 할까?

 

서양의 경우, 세속화 과정과 함께 개인의 자유는 생존에 국한된 영역에서 벗어나 영역 간 이동의 자유로, 그리고 사회 설계 참여의 자유로 확대되었다. 이 땅에도 서양의 세속화 과정에 대응되는 것이 있었다고 가정하는 경우, 사회 설계 참여의 자유는 합리적 '개인의 선택의 자유'와 같은 것을 전제하지 않고서도 정당화될 수 있음을 보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