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철학 에세이/비판적 사고

논증의 구성과 사용: 귀납

착한왕 이상하 2012. 5. 17. 18:30

* 다음 자료를 저자 이상하의 허락 없이 변형하여 상업적 목적으로 사용하는 것을 금한다. 유추 및 가추를 다룬 부분은 수정할 곳이 많아 올리지 않는다. (GK 비판적 사고 031-381-2282)

   

논증의 구성과 사용

3. 귀납

 

[3.1] 논증 결과의 구조만 따질 때 타당한 연역 논증에 대응하는 귀납 논증이란 어떤 것인가?

 

논증 결과의 구조는 전제부와 결론으로 구성된다. 연역적으로 타당한 논증의 경우, 결론이 내용적으로 전제부에 함축되어 있다고 판단된다. 타당한 연역 논증에 대응하는 귀납 논증의 경우, 결론은 내용적으로 전제부에 함축되어 있지 않다고 판단된다. 귀납 논증의 결론은 전제부의 데이터에 근거해 그럴듯해야 하는 것이어야 한다.

 

타당한 연역 논증에 대응하는 귀납 논증은 귀납적으로 강한 논증이라 불린다. 연역적으로 타당한 논증의 전제부와 결론의 추론 관계는 내용적 함축 관계를 형성한다. 반면에 귀납적으로 강한 논증의 전제부와 결론의 추론 관계는 내용적 확장 관계를 형성한다. 결론이 내용적으로 전제부에 함축되어 있지 않다고 판단되는 것이 귀납 논증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귀납 논증의 결론을 이끌어 내는 방식은 ‘확장적’인 것으로 분류되며, 데이터는 결론을 주장하기 위한 증거로 여겨진다. 논증 결과의 구조만 따질 때 연역과 귀납의 차이를 다음과 같이 나타낼 수 있다.

 

 

[3.2]논증의 순서적 구성 방식([3.2])에서 접근할 때 귀납적으로 강한 논증이란 어떤 것일까?

 

[2.2]의 [도식 1]과 관련해 논증의 순서적 구성 방식을 살펴봤다. 논증의 순서적 구성 방식을 따질 때 연역 또한 주어진 데이터에서 새로운 결론을 예측하는 기능을 갖는다. 하지만 논증의 주장 범위([2.4]) 내에서 보증진술에 의해 데이터와 결론이 연결되는 방식은 확실하다. 그렇기 때문에, 데이터와 보증진술 모두가 전제부로 취급될 때 결론은 내용적으로 전제부에 함축된 것으로 여겨진다.

 

귀납 또한 그 순서적 구성 방식에서 연역과 다르지 않다. 다만 보증진술에 근거한 데이터와 결론이 연결되는 방식이 귀납에서는 그럴듯하다.

 

논증의 순서적 구성 방식에서 귀납과 연역의 차이는 보증진술의 지위와 관련된다. 연역에서는 보증진술을 사용함으로써 데이터에 근거한 결론이 확실한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에, 보증진술 역시 확실한 것으로 여겨진다. 반면에 귀납에서 보증진술은 데이터에 근거해 확실한 것이 아니라 그럴듯한 결론을 얻는 과정에 개입되기 때문에, 그 신빙성이 논의될 수 있다. 그럴듯한 결론이 얼마만큼 경험적 검증 과정을 견뎌내는가에 따라 보증진술의 신빙성도 영향을 받는다. 연역에 사용되는 보증진술들 다수는 귀납에 의해 얻어진 것으로서 그 신빙성을 더 이상 따질 필요가 없는 것들로 여겨진다. 연역에서 보증진술이 주어진 전제처럼 사용된다면, 귀납은 그러한 전제들을 골라내는 과정으로도 여겨질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연역은 우리가 받아들이는 규칙 등을 데이터에 적용하여 확실하다고 여겨지는 결론을 얻는 논증의 일종이며, 귀납은 그러한 규칙을 정착시키는 데 사용될 수 있다.

 

귀납에 개입된 보증진술이 어느 정도 신빙성을 가져야 확실한 것으로 취급될 수 있는지를 결정해주는 보편적 방법론이나 절차는 없다. 따라서 실제 논증에서 연역과 귀납은 서로를 배척하는 관계를 맺지 않으며, 그 경계가 모호한 경우도 발생한다. 그러나 그러한 모호성은 논증과 관련된 문제를 풀어야 하는 사람에게는 득으로 작용하는데, 이에 대한 이유는 실전비결에서 서술될 것이다.

 

 

[3.3] 귀납에서 결론이 그럴듯할 뿐 불확실한 이유는 어디에서 기인하는가?

 

연역이든 귀납이든 둘 다 보증진술을 사용해 데이터에서 합당한 결론을 이끌어내는 과정이다. 이러이러한 조건들로 구성된 주장 범위 내에서 연역의 결론은 확실하다고 판단되는 반면, 귀납의 결론은 그럴듯할 뿐이다. 귀납의 결론이 불확실한 이유는 복합적 요인들에 의해 평가된다. 그러한 요인으로서 논증에 사용된 보증진술의 불확실성, 데이터의 내용을 들 수 있다.

 

먼저 연역의 결론이 보증진술의 성격에 의해 확실해지는 경우를 살펴보자. “시간당 평균 2m씩 진행하는 거북이 군집이 있다. 거북이들이 10m 떨어진 곳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최소 5시간이 걸릴 것이다.” 산수의 연산 규칙을 보증진술로 잡을 때 거북이가 목적지에 도달하는 시간을 예측할 수 있다. 강한 태풍이 불지 않는다는 조건 등에 의해 규정되는 주장 범위 내에서 그 예측은 확실한 결론으로 여겨진다. 이제 귀납의 결론이 보증진술의 성격에 의해 불확실해지는 경우를 살펴보자. 다음 귀납 논증에서 결론은 데이터에 근거해 확실한 것으로 여겨질 수 없다.

 

(W: 동일한 종에 속하는 동물들은 특정 물질에 대해 일반적으로 유사한 반응을 보인다.)

D: 등이 빨간 거북이와 등이 검은 거북이는 동종에 속한다.

등이 빨간 거북이에게 특정 스테로이드를 먹였더니 활동성이 증가했다.

C: 등이 검은 거북이에게 그 스테로이드를 먹이면 활동성이 증가할 것이다.

 

위 귀납 논증에서 결론 C는 검은 거북이를 빨간 거북이에 유비시켜 얻어진 것이다. 빨간 거북이의 어떤 속성이 검은 거북이에게도 해당하기 위해서는 보증진술 W가 필요하다. 산수의 연산법칙과 달리, 그 누구도 W가 항상 그렇다고 확신할 수 없다. 논증을 위해 W를 참으로 받아들이더라도, 모든 종에 W가 해당한다고 주장할 수 없다. 그 결과, C는 그럴듯한 주장이 된다. 빨간 거북이와 마찬가지로 스테로이드의 복용이 검은 거북이의 활동성을 증가시킨 경우, W의 신빙성은 강화된다.

   

(W: 몸짓의 크기는 자기 과시욕과 관련된다.)

D: 통계 조사에 의하면, 70%의 남성 대학 교수나 고등학교 선생님들이 남학생보다 여학생 앞에서 과장된 몸짓을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김 씨는 여자 고등학교 남자 선생님이다.

C: 김 씨는 아마도 여학생들 앞에서 자기 과시욕을 강하게 나타낼 것이다..

 

위 귀납 논증에서 보증진술 W 또한 확실한 것으로 취급할 수 없다. 설령 그렇게 취급하더라도, 결론 C의 참은 그럴듯할 뿐이다. 데이터 D에서 통계치와 관련된 것은 예외를 허용하고 있다. 김 씨가 그러한 예외가 될 수 있기 때문에, C가 그럴듯하다고 주장할 수밖에 없다.

 

 

[3.4] 왜 귀납의 보기([3.3])에서 보증진술에 해당하는 것을 괄호로 처리하였는가?

 

논증에서 결론의 확실함이나 그럴듯함은 특정 주장 범위 내에서 성립한다. [3.3]의 귀납 논증에서 김 씨가 외계인이 아니라는 조건 등으로 구성된 주장 범위 내에서 결론 C는 그럴듯한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 연역이든 귀납이든, 보증진술 또한 논증 속에 드러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귀납 논증에 사용되는 보증진술들 중 상당수는 경험 속에서 굳어진 신념이나 과학적 실험에 개입하는 불확실한 가설들이다. 특히 전자는 실제 귀납 논증에서 명시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3.5] 귀납 논증에 사용된 데이터부의 진술들이 확실히 참으로 여겨지는 데 이의가 없다고 하자. 이러한 경우, 결론에 대한 반례는 보증진술에 어떤 영향을 끼칠까?

 

데이터부의 진술들이 확실히 참으로 여겨지는 경우가 어떤 연역 논증에 해당한다면, 확실하다고 여겨진 결론은 반박된다. 데이터의 진술들이 의심의 대상이 되지 않기 때문에, 데이터와 함께 논증의 전제부를 구성하는 보증진술 또한 의심의 대상이 된다. 다시 말해, 결론에 대한 반례는 보증진술에 대한 반박으로 이어진다. 반면에 귀납 논증의 결론에 대한 반례는 [3.2]에서 보았듯이 보증진술의 신빙성에 영향을 끼친다. 하나의 반례 때문에 경험 속에서 굳어진 신념이나 과학적 가설을 송두리째 포기하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다. 스테로이드를 먹인 검은 거북이의 활동성이 증가하지 않아도, 김 씨가 자기 과시욕이 강하지 않은 남성일지라도, 동일한 종에 속하는 동물들은 특정 물질에 유사하게 반응한다는 믿음이나 몸짓은 자기 과시욕과 관련된다는 믿음이 포기될 이유는 없다. 귀납에 사용되는 보증진술들은 결론에 대한 예외 사례에 강하게 저항하는 성질을 갖고 있다.

 

 

[3.6] 귀납적으로 강하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논증을 순서적 구성 방식이 아니라 결과의 구조 측면에서 접근할 때 연역적으로 타당한 논증은 전제가 참일 때 결론도 확실하게 참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경우에 해당한다. 귀납 논증에서 결론이 참이라는 주장은 확실하기보다는 그럴듯한 경우다. 타당한 연역 논증에 대응하는 귀납적으로 강한 논증은 다음 조건을 만족해야 한다.

 

• 귀납적으로 강한 논증은 우선 연역적으로 타당한 것에 해당하지 말아야 한다. 전제를 참으로 가정할 때 결론이 확실하다고 판단될 정도로 전제부에 함축되어 있지 말아야 한다. 데이터와 보증진술로 구성된 전제부와 결론은 귀납 논증에서 함축적 관계가 아닌 확장적 관계([3.1])를 맺는다는 점에서 데이터는 결론을 주장하기 위한 증거로 취급된다.

 

• 데이터에 근거한 결론이 결론만 뚝 떼어 독립적으로 평가했을 때보다 더 그럴듯해야 한다. 그래야지만 결론의 그럴듯함에 대한 증거로서 데이터가 취급될 수 있다. 데이터와 무관하게 평가된 결론의 그럴듯함이 데이터에 근거한 경우와 엇비슷하거나 더 강하다면, 해당 귀납 논증은 받아들이기 힘든 것으로 여겨진다. 다시 말해, 귀납적으로 강한 논증만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일만한 자격을 갖게 되는 것이다.

 

 

[3.6] 수긍할만한 귀납 논증은 무엇인가?

 

앞장에서 연역적으로 타당한 논증이 항상 건전한 것은 아님을 살펴봤다. 참으로 가정한 전제부의 진술이 실제로는 거짓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연역적으로 타당하다는 것은 귀납적으로 강하다는 것에 대응된다. 그렇다면, 건전한 연역 논증에 해당하는 귀납 논증은 어때야 할까? 귀납적으로 강할뿐더러 전제부의 진술들이 정말로 참이어야 한다. 그런데 [3.5]에서 살펴보았듯이, 전제부의 데이터에 속하지 않는 보증진술의 대다수가 참이라고 할 때 그 신빙성은 결론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따라서 논증의 순서적 구성을 따진다면, 수긍할만한 귀납 논증은 다음 조건을 만족하는 것이다.

 

• 수긍할만한 귀납 논증은 우선 귀납적으로 강해야 한다.

• 데이터에 속하는 진술들이 정말로 참이어야 한다.

• 논증에 뚜렷이 나타나지 않아도 데이터와 결론을 연결시켜주는 보증진술들의 신빙성이 결론에 의해 지지될 수 있어야 한다.

 

[3.3]의 거북이 논증을 살펴보자. 거북이 논증의 경우, 스테로이드를 복용한 검은 거북이가 활동성이 증가할 것이라는 결론은 데이터의 두 진술에 근거한 것이다. 정말 거북이의 활동성이 증가한다면, 동일한 종에 속하는 동물들이 특정 물질에 대해 일반적으로 유사한 반응을 보인다는 보증진술의 신빙성은 더욱 견고해진다. 데이터를 거짓으로 취급할 근거가 없는 한, 거북이 논증은 수긍할만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자기 과시적 선생님으로 몰린 김씨 논증도 수긍할만한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 여기서 수긍할만하다는 것은 개인의 심리 상태가 아니라 논증 구성과 관련된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 점은 다음 질문에서 더욱 명백해진다.

 

 

[3.7] 수긍할만한 귀납 논증의 결론이 거짓으로 판명될 수도 있는가?

 

그렇다. 귀납 논증에서 데이터를 증거로 하여 얻어진 결론은 확실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귀납 논증이 수긍할만하다는 것은 논증의 구성 방식에 의존해 평가되는 것이다. 지금까지 대한민국의 모든 대통령은 남성이었다는 데이터에 근거해 누군가 다음 대통령도 남성일 것이라고 주장했다. 남녀평등의 의식이 아직 이 땅에 구현되지 않았다는 그의 믿음이 보증진술로 논증 속에 숨어 있다고 하자. 논증 구성의 측면에서 그의 논증은 수긍할만한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 정말 다음 번 대통령도 남성이 된다면, 남녀평등의 의식이 아직 구현되지 않았다는 믿음의 신빙성은 강화된다. 설령 다음 번 대통령이 여성이 되더라도, 논증 구성상 그의 논증은 수긍할만한 것이다.

 

이번에는 지금까지 대한민국의 모든 대통령은 남성이었다는 데이터에 근거해 다음 대통령도 남성일 것이라고 주장한 누군가가 남성이 대통령에 적합하다는 신념을 갖고 있다고 하자. 이 경우 다음 대통령이 설령 남성이 되더라도, 그의 주장이 제3자의 관점에서 그 신념을 지지한다는 보장이 없다고 여겨질 수 있다. 이러한 경우, 그의 논증을 수긍할만한 것으로 받아들이기 힘들다. 김씨를 자기 과시욕이 강한 선생님으로 결론내린 [3.3]의 논증에서 보증진술이 단지 개인적 믿음에 불과한 것으로 평가된다면, 그것은 수긍할만한 것으로 여겨질 수 없다. 귀납 논증의 수긍 가능성은 이렇듯 ‘모 아니면 도’ 식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독일의 역대 수상들은 모두 남성이었다는 데이터에 근거해 누군가 다음 수상도 남성일 것이라고 주장했다고 하자. 그는 비록 참으로 가정했지만 잘못된 데이터에 근거해 결론을 끄집어낸 것이다. 이러한 경우는 귀납적으로 비록 강할지라도 명백히 수긍할 수 없는 것이다. 이제 연역과 귀납 논증의 평가 과정을 살펴보자. 

연역 논증의 평가에서 첫 관문은 타당성 평가이다. 데이터와 보증진술로 구성된 전제부의 진술들이 참으로 가정될 때 결론도 참이어야 한다. (맥락 의존성/ 파기 가능성) 연역적으로 타당한 논증일지라도, 전제부의 진술들이 반드시 참이라는 보장은 없다. 건전한 연역 논증은 타당하면서도 전제부의 진술들이 실제 참인 경우에 해당한다.

 

귀납 논증에서 연역 논증의 타당성 평가에 해당하는 것은 얼마나 강한지를 평가하는 것이고, 건전성 평가에 해당하는 것은 수긍 가능성을 평가하는 것이다. 데이터가 결론을 주장하는 데 증거가 될 수 있는 논증, 혹은 데이터에 근거한 경우의 결론이 그렇지 않은 경우의 결론보다 더 그럴듯한 논증만이 강한 것으로 평가된다. 귀납적으로 강한 논증일지라도, 전제부의 진술들이 정말 참이라는 보장은 없다. 연역과 달리, 귀납 과정에 숨겨지거나 명시되는 보증진술은 결론에 의해 그 신빙성이 영향을 받는다. 따라서 귀납 논증의 수긍 가능성은 데이터의 진술들이 정말 참이라는 조건만으로는 충분히 평가될 수 없다. 보증진술의 신빙성은 결론이 그럴듯할 때 지지될 수 있어야 한다.

 

귀납이든 연역이든, 논증 평가는 우선적으로 논증의 구성 방식을 따지는 것이다. 건전한 연역이나 수긍 가능한 귀납의 결론이 정말로 참이라는 보장은 없다. 결론이 참이라는 주장을 확실히 받아들일 수 있는지, 혹은 그럴듯한지를 따지는 것은 논증 평가에서 고립된 것이 아니라 전제부와 유기적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렇기에 논증을 한다는 것은 ‘그러한 관계를 만들어 나가는 행위’에 가까운 것이다. 귀납이든 연역이든, 논증을 한다는 것은 결코 특정 형식적 절차에 진술을 끼워 맞추는 것이 아니다.

 

 

[3.8] 귀납을 대표하는 논증들은 어떤 종류의 것들인가?

 

결론의 참이 확실한 것이 아니라 그럴듯하게 판단되는 귀납은 그 종류가 연역에 비해 훨씬 다양하며, 사례별 분류 또한 더 복잡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표적인 것들로서 ‘결론이 그럴듯한 것으로 끝나는 일부 유비 논증’, ‘일반화로서의 제거적 귀납’, ‘일반화로서의 열거적 귀납’, ‘권위에 호소한 논증’, ‘진단 논증’, ‘인과 논증’을 들 수 있다.

   

사례 1. 유비 논증

 

D: 지난 번 박 판사는 고아 출신의 절도범에게 집행유예를 선고했다.

절도범으로 구속된 B는 고아 출신이다.

C: 박 판사는 B에게 집행유예를 선고할 것이다.

 

인간의 인지는 생리적, 환경적, 사회적으로 제한되어 있다. 다시 말해, 인간은 불확실한 상황 속에서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존재인 것이다. 따라서 합당한 판단으로 귀결되는 논증에서 이미 알려진 혹은 합의된 것의 권위는 무시될 수 없다. 두 대상이 처한 상황에서 유사성을 찾아 그럴듯한 결론을 이끌어내는 유비 논증은 일상생활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논증 형태 중 하나이다.

 

[사례 1]에서 B는 박 판사의 지난번 판결 대상인 절도범에 비교되고 있다. 두 절도범이 처한 상황은 유사한데, 이에 대해 둘 다 고아 출신이라는 단서를 들 수 있다. 두 사람에게서 발견된 유사성은 데이터 D의 진술들에 함축되어 있고, D를 근거로 결론 C가 추론되었다. 유비에 의한 추론은 ‘유추’로 불린다. CD에 근거해 유추하는 과정에는 판사의 판결은 대개 일관성을 유지한다는 보증진술 혹은 가정 W가 숨겨져 있다. 판사가 범죄자의 신원을 제대로 파악했다는 등의 조건들로 이뤄진 주장 범위 내에서 C는 확실한 것으로 여겨질 수 없다.

 

어떤 이가 D의 진술들을 양과 질적인 면에서 어떤 결론을 도출하기에는 부족하다고 여긴다면, [사례 1]은 그에게 논증 자격을 갖추지 못한 것이다. 그렇지 않은 경우, DC에 대한 증거로 여겨진다. D 없이 C를 평가하는 것보다는 D에 근거해 C를 평가하는 것이 C의 그럴듯함을 강화시켜준다. 이 점에서 [사례 1]의 유비 논증은 강한 것으로 평가될 수 있다. D의 진술들과 결론 C가 정말 사실이라면, 이에 의해 판사의 판결은 대개 일관성을 유지한다는 보증진술의 신빙성도 올라간다. [사례 1]은 수긍할만한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

 

사례 2. 일반화로서의 제거적 귀납

 

W: 식물에도 암수 구분이 있다.

D: 관찰 결과, 꽃의 수술은 동물 수컷의 생식세포에 해당한다.

여러 꽃들의 수술 길이, 모양, 수에 관한 통계자료가 축적되었다.

C: 수술의 수가 기준이 될 때 식물의 종분류가 가장 효과적이다.

 

귀납이 데이터에서 일반화된 결론을 얻는 데 사용되는 경우, 제거적 귀납과 열거적 귀납이 자주 거론된다. 제거적 귀납은 데이터의 양이 충분할 때 특정 대상의 속성, 분류 등과 관련된 여러 가능한 일반적 규정 중 하나를 골라내는 것이다. 하나를 골라낸다는 것은 상대적으로 목적 달성에 부적합한 것을 제거해 나간다는 것이다. 따라서 제거적 귀납은 하나의 논증 형태로 주어진 경우에도 실제로는 여러 가능성을 시도한 후의 결과이다. 베이컨(F. Bacon)이 일반화 방법론으로서의 귀납을 언급할 때 그것은 제거적 귀납에 가깝다.

 

[사례 2]에서 보증진술은 데이터 D를 근거로 결론 C를 주장하는 데 사용되었다. 다시 말해, D 없이는 W에서 C로 연결될 수 없다. D의 진술들은 축적된 관찰 자료의 성격을 명시하고 있다. D를 근거로 암수 구분과 함께 식물 종분류에 효과적인 기준을 찾을 때 수술의 길이, 모양, 수가 고려 대상이 될 수 있다. 각각의 경우를 실험해 본 후 길이, 모양이 종분류에 부적절한 것으로 배제된다면, D에 근거한 식물 종분류에 일반적으로 사용될 수 있는 것은 수술의 수이다. 이처럼 귀납의 결론이 더욱 그럴듯해지기 위해서는 실험 등이 요구되는 경우가 많다. 귀납에서 데이터와 결론의 관계가 확장적([3.1])이기 때문에, 결론의 최종 수락 여부가 실험에 의존하는 경우는 귀납의 정신에 위배되지 않는다. [사례 2]의 수긍 가능성에 대한 평가는 독자의 몫으로 남긴다.

 

사례 3. 일반화로서의 열거적 귀납

 

D: 지금까지 보아온 까마귀들은 검다.

C: 모든 까마귀들은 검을 것이다.

 

데이터 D는 지금까지의 관찰에 근거한 까마귀들의 표현형적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 동종에 속하는 동물들은 유사한 표현형적 특징을 공유하고 있다는 가정, 곧 보증진술의 도움을 받아 결론 C를 주장할 수 있다. 그러한 보증진술 W는 논증에 명시되지 않았다. 동종에 속한 동물들에 대한 과거 경험이 영원한 미래까지 지속된다는 보장은 없다. 따라서 C의 반례가 발생할 때 D가 사실일지라도 보증진술 W의 신빙성은 약화될 수 있다. 이러한 식으로 접근할 때 [사례 3]의 수긍 가능성은 의심의 대상이 된다. 결론 C를 대다수 까마귀들은 검을 것이라고 바꾸는 경우, 논증의 수긍 가능성은 의심의 대상에서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다. 그러나 다양한 집단의 경험은 동질화될 수 없기 때문에, 결론의 수긍 정도를 결정지을 수 있는 정확한 까마귀의 수를 규정해주는 보편적 방법은 없다. 이러한 사실 역시 귀납의 유용성을 위협할 수 없다. 그 유용성은 현실세계에서 잠정적으로 써먹을 수 있는 그럴듯한 결론을 제공해주는 데 있기 때문이다.

 

사례 4. 권위에 호소한 논증

 

W: 제품의 유명세는 고장률과 반비례하기 마련이다.

D: A사와 B사의 모니터 사양은 대등하지만, A사의 것이 싸고 게다가 무결점 화소를 보장해준다.

B사는 모니터 업계에서는 잘 알려진 오래된 회사다.

C: B사의 것이 고장률이 적을 것이다.

 

권위에 호소한 논증은 구매를 포함한 선택 상황에서 종종 발견된다. 부족한 정보에 근거한 선택에서 권위는 결코 비합리적 요인으로 간주될 수 없다. 선택 대상인 상품 정보는 데이터 D로 주어져 있다. 두 상품 A와 B 중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회사 B가 갖는 권위가 결론 C를 이끌어내는 데 작용했다. 권위에 호소한 귀납 논증이 항상 약하고, 동시에 수긍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DC에 대한 증거로 작동하고 있으며, 권위에 호소한 것은 W에 반영되고 있다. D의 진술들이 정말 참이고, C가 구매 후 참으로 판명난다면, W의 신빙성도 강화된다.

 

사례 5. 진단 논증

 

W: 심한 열꽃이 오래 지속된다면 감기가 아닐 가망성이 크다.

D: 아이의 열꽃이 3일째 지속되었다.

C: 아이를 빨리 전문 병원에 데려가는 것이 좋다.

 

의사는 진단을 위해 증세를 살펴야 한다. 사냥꾼이 꿩을 추적하는 데에는 눈밭에 난 발자국과 같은 지표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러한 증세나 지표는 진단이라는 판단에 개입하는 기호로 취급된다. 의사나 사냥꾼이 자신의 판단을 정당화하기 위한 논증을 펼칠 때 기호는 데이터의 진술에 나타난다. 열꽃이라는 증세의 지속은 결론 C를 이끌어내는 데 증거로 사용되었으며, WC의 그럴듯함을 지지해준다. 아이가 실제로는 사소한 감기에 걸린 것에 불과할 수도 있기 때문에, 결론 C는 확실한 것으로 여겨질 수 없다.

 

사례 6. 인과 논증

 

W: 통계청의 보고에 의하면 지난 1년간 교통사고의 70%는 과속으로 발생했다.

D: 지금 사고가 난 자동차 속도계의 바늘이 시속 160km를 향하고 있다.

C: 그 자동차 사고의 원인은 과속일 것이다.

 

어떤 진술이 논증의 조건이나 가정으로서 보증진술에 속하는가는 논증 맥락에 의존적이다. 통계가 데이터처럼 주어진 것으로 취급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데이터에서 그럴듯한 결론을 끄집어내는 데 필요한 보증진술로 기능하는 경우가 있다. [사례 6]에서 통계는 후자의 경우에 해당한다.

 

원인과 결과의 인과 관계를 사건 발생의 관계에 국한시킬 때, 인과 관계는 원인이 결과에 선행한다는 조건을 충족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그러한 선후 관계가 인과 관계에 충분한 것은 아니다. 속도계의 바늘이 과속을 향한 후 사고가 발생해도, 사고의 원인은 속도계의 바늘의 위치가 아니라 과속으로 취급된다. 결과에 대한 원인은 다발적이고, 또 하나의 원인이 여러 결과와 맞물리기 때문에, 단일 원인과 단일 결과가 필연적 관계를 맺는 경우는 현실세계에서 매우 드물다. 따라서 대부분의 인과관계는 통계나 확률이라는 도구를 빌려 표현된다. 그러한 인과관계를 가정한 논증의 결론은 그럴듯한 것으로 취급되게 마련이며, [사례 6]은 그 보기가 된다. [사례 6]의 논증에 대한 분석과 평가는 독자에게 맡긴다.

 

 

[3.9] 귀납 논증의 여러 종류를 통합해줄 수 있는 보편 형식이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합의 가능한 의견은 아직 없다. 질문이 귀납의 다양한 방식을 통합할 수 있는 보편 형식, 즉 논증 상황과 무관한 형식의 가능성을 묻는 것이라면, 대답은 부정적이다. 왜 그런지 따져보기 위해 연역적으로 타당한 논증 형식에 관한 언급([2.6])을 다른 방식으로 재구성해보자.

 

연역적으로 타당한 논증 형식은 실제 논증에서 내용을 무시한 채 이상화된 것이다. 그렇게 이상화하는 과정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추론 형태를 기본적인 것으로 전제하고 있다.

   

화살표가 추론관계를 나타낸다고 할 때 왼쪽은 P, Q, R에 의해 S가 추론되었다. 정보가 주어지는 순서, 즉 P, Q, R의 순서는 무관한 것으로 가정된다. 단지 P, Q, R 모두가 참일 때만 S가 참인지, 아니면 P, Q, R 중 적어도 하나가 참이면 S가 참인지와 같은 진리치 계산만이 중요해진다. 그 결과, P, Q, R 모두가 참인 경우는 논리적 연접으로, 그 중 적어도 하나가 참인 경우는 논리적 이접으로 규정되며, 추론관계는 내용이 아니라 P, Q, R, S의 진리치에만 의존하게 된다. 결국 위 도식의 왼쪽은 오른쪽의 특수한 형태로 귀결된다. [... 그리고 ...], [... 또는 ...], [... 면 ...]과 같은 접속사는 실제로는 진술의 내용과 정보가 주어지는 순서에 의해 그 의미를 달리하는 경우가 많지만, 이것을 무시한 형식화에서 그 것들은 접속사가 아니라 참, 거짓의 진리치 계산에 종속된 논리적 연결사로 취급된다. 형식연역논리의 진술논리라는 것은 상황 및 내용과 무관한 그러한 논리적 연결사의 규정에 의해 연역적으로 타당한 논증들을 [((P→Q)∧P)→Q]과 같은 추론형식으로 취급한다.

 

그러나 형식연역논리의 진술논리라는 것은 ‘모든’, ‘적어도 하나’와 같은 양화 개념을 품에 안을 수 없다. 양화 개념이 개입된 논증들의 형식화는 범주논리에서 먼저 다루어졌다. 하지만 범주논리에서 형식화의 기본 단위는 진술이 아니라 개념인 반면에, 진술논리에서의 형식화의 기본 단위는 진술, 더 엄밀히 말하면 진술의 참 거짓 판단 대상이 되는 의미 단위로서의 명제이다. 이 점은 다음 도식에 반영되어 있다.

 

모든 ab다.                               ((P→Q)∧P)→Q

ca다.        

cb다.

 

도식의 오른쪽은 진술논리의 올바른 추론형식 중 하나를 나타낸 것으로서 [2.6]의 [종류 II]에 해당하는 논증 형식에 해당한다. 도식의 왼쪽에서 ‘a’, ‘b’, ‘c’는 임의의 진술이 아니라 개념을 나타낸다. 범주논리와 진술논리를 통합하려면, 진술의 논리적 구조를 논해야 한다. 개념을 술어의 의미로 취급하는 이들은 그러한 논리적 구조를 [주어+술어]라는 도식에 포섭시킴으로써 범주논리와 진술논리의 통합을 꾀했는데, 이에 의해 탄생한 것이 ‘술어논리’이다. 술어논리는 완성된 형식연역논리를 대표한다.

 

그러나 현대 술어논리로 대표되는 형식연역논리에 모든 연역 논증이 귀속되는 것은 아니다. 그 논리는 무조건적이 아니라 특정 경계조건 아래에서만 유효성을 갖는다.

 

• 진술들은 명백히 참 또는 거짓으로 판명 가능해야 한다.

• 논리적 연결사는 내용과 무관한 진리치 계산으로 귀결된다.

• 진술의 기본 논리적 구조는 [주어+술어]이다.

 

이러한 경계조건에 근거한 분석이 유효한 논증들에 해당하는 것이 지금 잘 알려진 형식연역논리인 것이다. 그래서 동양 고전이나 불교의 논증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그 논리와는 다른 경계조건을 갖는 논리학을 ‘비정규논리’로 부르기도 한다. 더욱이 연역 논증의 건전성은 형식연역논리 안에서만 평가될 수 없다. 앞장의 실전비결에서 살펴보았듯이, 동일한 형식에 서로 다른 내용을 갖는 논증들이 배열되는 경우는 다반사다.

 

논증의 내용적 혹은 실천적 추론은 어떤 형식에 진술을 대입시킨 것으로 여겨져서는 안 된다. 이 점은 실제 논증에서 연역이나 귀납 모두에 해당한다. 그런데 귀납 논증을 형식화하는 것은 또 다른 이유에서 더욱 어렵다. 귀납 논증을 형식화하는 전통이 귀납의 종류 다양성에 의해 동질화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전통이 크게 귀납주의와 파스칼(B. Pascal) 이후의 확률주의로 나뉘므로, 전자를 파스칼적이 아닌 것, 후자를 파스칼적인 것으로 부르기도 한다.

 

• 귀납주의: 주어진 데이터에서 그럴듯한 결론을 얻는 귀납 과정은 관찰을 일반화하여 다음 사건을 예측하는 행위에 근거한 것이다. 과거 관찰에 근거해 일반화된 결론의 그럴듯함은 어떻게 평가될 수 있는가? 데이터에 함축된 관찰에 근거한 결론의 ‘기대치’, 즉 예측한대로 사건이 발생할 ‘가망성’이 높은 정도에 따라 해당 귀납의 강한 정도가 결정된다. 귀납주의에서 형식귀납논리는 귀납의 강한 정도에 관한 보편적 조건을 명시화하는 것이며, 그 조건은 관찰에 근거한 결과의 가망성을 평가하는 것과 관련된다.

 

• 확률주의: 귀납주의의 가망성 개념은 사전 예측과 관련된 것이 아니다. 가망성의 정도는 실제 관찰 및 동전 던지기와 같은 실험의 결과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확률론은 아직 알려지지 않은 사실 혹은 사건까지 다룬다. 많이 회자되는 베이즈주의는 확률의 공리체계 혹은 계산식으로부터 귀납주의의 가망성 조건들을 끄집어낼 수 있다는 관점에 근거한다. 가망성은 사전 정보에 근거한 확률로 귀결되며, 귀납주의에서 지향된 귀납논리 또한 확률추론 혹은 확률논리의 한 부분이 된다.

 

먼저 귀납주의에 모든 종류의 귀납이 포섭될 수 있는지 따져보자. 유비 논증, 권위에 호소한 논증, 진단 논증, 인과 논증을 제외하더라도, 귀납의 일반화는 전통적으로 열거적 귀납과 제거적 귀납으로 나뉜다. 귀납주의에서 언급된 일반화는 일단 열거적 귀납과 잘 맞아떨어지는 듯 보인다. 지금까지의 까마귀 관찰 결과, 내일 볼 까마귀도 검을 것이라는 일명 ‘까마귀 논증’은 열거적 귀납을 대표한다. 그런데 동일한 과거 관찰에 근거하는 경우에도, 여러 결론이 귀납적으로 가능하다. 왜 그럴까?

 

까마귀 논증만 하더라도 과거 관찰을 함축한 데이터의 진술들이 결론의 증거가 되려면, “동종에 속한 개체들은 유사한 표현형적 특징들을 보여주게 마련이다”와 같은 가정이 보증진술로 깔려야 한다. 비록 귀납의 결론이 단 하나의 반례에 의해 깨지더라도, 귀납에 개입된 그러한 가정은 아니다. 또 논증이 논증 상황에 의존적이기 때문에, 논증은 논증의 목적에 중립적이지 않다. 까마귀 개체군에 대한 관찰이 겉보기에 유사한 새들 중 까마귀의 분류 목적과 관련될 때 논증자는 색, 형태적 구조, 그러한 구조상의 어떤 부분, 울음소리, 행동 등을 따져 보아야 한다. 그의 최종 결론이 색이 아니라 까마귀의 꼬리라면, 그는 그의 결론을 하나의 논증 형태로 주장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논증은 실제로는 여러 논증들을 비교 검토한 과정의 종착지인 셈이다. 베이컨이 귀납을 강조했을 때, 그의 것은 그러한 과정에 바탕을 둔 제거적 귀납이다. 여러 결론 중 가장 부적합 것을 골라내고 그 우선순위를 매기는 것이 결론의 가망성 계산에 종속될 수 있는가라는 문제는 아직 종결되지 않았다. 게다가 권위에 호소한 논증이나 진단 논증이 그러한 가망성 계산에 포섭되기는 힘들다.

 

확률주의에서 언급된 베이즈주의를 여기서 자세히 알 필요는 없다. 그것은 원래 가망성 개념을 확률계산식으로 대체시키려는 동기를 갖고 있었지만 후에 ‘주관적 확률 개념’을 대표하게 되었다. 중요한 것은 확률주의 역사에 등장한 확률 개념이 동질적이지 않다는 점이다.

 

• 논리적 확률: 케인즈(J.M. Keynes), 존슨(W.E. Johnson), 제프리(R. Jeffrey), 그리고 후기 카르납(R. Carnap)에 의해 개발된 주관적 확률 개념에 따르면, 확률은 주어진 증거에 근거해 합리적 행위자들이 의견의 일치를 볼 수 있는 믿음의 정도를 나타낸다.

• 주관적 확률: 램지(F. Ramsey), 피네티(B. de Finetti) 등의 기여로 정교화된 주관적 확률 개념에 따르면, 주관적 확률은 합리적 행위자가 어떤 진술이나 선택지에 내기를 걸 수 있는 정도에 의해 평가 가능한 믿음의 속성이다. 주관적 확률의 평가 대상이 되는 믿음은 우선적으로 단일 사건과 관련된다.

• 기회 확률: 멜로어(D.H. Mellor), 루이스(D.K. Lewis) 등에 의해 주장된 기회 확률 개념에 따르면, 확률은 단일 사건과 관련된다. 그러나 주관적 확률과 달리 개인의 믿음이 아니라 ‘기회’가 단일 사건의 비관계적 속성을 규정한다.

• 빈도 확률: 폰 미제스(R. von Mises)에 의해 정교화된 빈도 확률 개념에 따르면, 확률은 유사한 상황이나 개체군에서 발견되는 사건의 발생 빈도를 나타낸다. 특정 조건 아래 발생하는 사건의 확률은 상대 빈도수로 표현된다.

 

각각의 확률 개념이 어떻게 형성되었는가를 따지는 것은 어려운 작업이다. 이 시점에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확률 개념이 단일적이거나 동질화될 수 없다는 것이다. 동일한 확률계산식은 어떤 확률 개념을 선호하는 가에 따라 다르게 해석된다. 또 확률 개념의 선택은 확률계산식의 형식적 차이를 유발한다. 결론의 그럴듯함을 확률과 연관시키는 것은 자연스러워 보이지만, 그럴듯한 결론을 이끌어내는 과정이 특정 확률 개념에 종속될 이유는 아무 데에도 없다. 실제 다양한 확률 개념이 논증 속에 반영되어 있으며, 이는 각각의 확률 개념에 효과적인 맥락이 있고 그렇지 않은 맥락이 있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또 결론의 그럴듯함과 가장 어울릴 수 있는 확률 개념이 모호하게 되는 논증 맥락도 있다. 당장 상대적 빈도수 개념과 주관적 확률 개념 중 어느 것이 까마귀 논증에 가장 합당한 확률 해석을 제공할 것인가라는 질문 자체가 쉽게 대답될 수 없다.

 

 

[3.10] 귀납에서 ‘까마귀 논증’이 유명해진 유래는 무엇일까?

 

훌륭한 논증 선생은 결과로서의 논증을 구분하고 평가하는 방식뿐만 아니라 행위로서의 논증 구성 방식을 학생들에게 일깨워 주어야 한다. 논증을 배우면서도 실제 논증을 할 수 없다면, 논증을 배울 필요가 있는가라는 민감한 학생의 반문은 진실로 정당한 것이다. 그러한 학생은 연역과 귀납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논증론의 소개에 회의감을 가질 수도 있다. 영민한 학생이라면, 일상생활에서 벌어지는 논증들이 연역과 귀납을 축으로 하여 모두 설명될 수 있는지 의심할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연역과 귀납에는 공통점이 있다. 데이터를 주어진 것 혹은 전제로 삼고 논증을 한다는 것이다. 모든 논쟁이 그러한 것은 절대 아니다. 데이터가 주어진 것이 아니라 설명해야 할 대상으로 취급되는 논증 형태도 있다. 실제 법률 논증에서는 기각 사유 및 예외 사례 규정 등과 같은 좀 더 세밀한 기법이 필요하다. 또 많은 수사적 논증의 평가는 행위에 의해 결판난다. 나 또한 연역과 귀납으로 논증론을 시작했지만, 이것은 단지 현행 관행에 따랐을 뿐이다. 연역과 귀납에 관한 지식이 시험 등 실전에 필요한 것으로 되어버렸기 때문인데, 사실 논증 문제는 정말 다양하게 개발될 수 있다. 최근에 와서 최선의 설명론, 시각추론 등이 가끔 실전에 등장한다고 하지만, 귀납 및 연역 중심의 문제 유형들만이 실전을 주도하고 있는 지금의 세태는 가히 ‘논증의 암흑기’로 불릴만하다. 논증의 다양성은 무시된 채 논증의 필요성이 교육에서 강조된다면, 논증 교육은 왜곡될 수밖에 없다.

 

당장 연역만 해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삼단논법이 기본으로 소개되고 있지만, 그가 고민했던 문제, 곧 논증에 개입되는 진술들의 기능적 측면은 도외시 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대전제는 논증에서 데이터와 결론을 연결시켜주는 보증진술, 혹은 논증 전체에 깔려 있는 가정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그의 논증 방식은 일반적으로 대전제를 받아들인 상태에서 결론에 도달하기 위한 데이터 혹은 소전제를 찾는 방식이다. 그의 귀납은 실제로는 실천적 판단에 도달하게 해주는 여러 논증들과 관련된 것이다. 다시 말해, 열거적 귀납을 대표하는 까마귀 논증이 귀납을 대표하는 것은 아니다.

 

지난 세기 초, 연역과 귀납 중 무엇이 과학적 지식 체계를 표상할 수 있는지가 논의되었다. 논쟁의 중심축은 귀납주의였다. 귀납주의에 함축된 일반화가 열거적 귀납과 가장 잘 맞아 떨어졌고, 그 결과 까마귀 논증이 귀납의 전형적인 보기로 회자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여파가 지금 이 땅에 남아 있는 것으로 보면 된다.

 

사실 모든 과학적 가설이 관찰에 근거한 일반 진술이라는 주장은 터무니없다. 왜냐하면 그러한 진술에 근거한 예측은 너무나 사소한 것이기 때문이다. 열거적 귀납에서 중요한 것은 오히려 결론을 이끌어내는 과정에 함축된 가정들이다. 동종의 개체들이 유사한 표현형적 특징을 갖는다와 같은 가정에 근거한 분류 작업은 얼마나 유용한가? 이러한 물음을 다루는 과정에서 식별형질에 근거한 분류 작업의 한계가 드러났고, 지금의 분류체계가 탄생한 것이다. 하지만 이로부터 원래 가정의 신빙성이 완전히 사장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왜 그럴까? 이 철학적 물음은 독자의 몫으로 남긴다.

 

 

[3.11] 논증은 형식논리의 적인가?

 

그렇다고 말한 적이 없다. 단지 논증을 형식논리의 규칙에 진술을 끼워 맞춘 방식처럼 취급하는, 혹은 논증이 논리학에 종속된 것이라는 입장에 반대했을 뿐이다. 논증 상황과 목적, 그 내용적 구성 방식을 초월해 어떤 보편 형식에 논증을 가두려는 시도에 이의를 제기했을 뿐이다. 다양한 논증을 통일적으로 포섭할 수 있는 형식은 과거에도, 지금도 없다. 논리학의 역사는 단일 논리체계가 아니라 수십 개의 체계들로 귀결된 상태다. 각각의 체계는 특정 경계조건 아래에서만 유효성을 갖는다. 접속사의 기능이 논리적 연결사로, 논리적 연결사의 기능이 내용과 무관하게 규정될 수 있는 조건 아래에서만 일반적인 형식연역논리는 유효하다. 또 귀납논리에는 여러 종류의 공리체계가 존재하며, 그 쓰임새도 맥락에 따라 달라진다.

 

논리학의 가장 훌륭한 학습은 각 논리체계가 갖는 경계조건을 인식시켜줄 때 가능해진다. 그러한 조건을 앎으로써 논증 분석이 더욱 세련되게 되고, 논증을 모방할 수 있는 기계나 인공지능의 구현이 손쉬워지며, 또 새로운 형식체계가 가능해진다.

 

계량심리학자나 통계학자가 베이즈 확률 공식이 주관적 확률 개념에 근거한 것이라는 입장에 무관심하다면, 어떤 철학자는 그의 무지를 탓한다. 나는 오히려 그 철학자에게 이의를 제기할 것이다. 원래 베이즈주의는 특정 확률 개념보다는 가망성 개념을 확률계산식으로 대체하려는 동기에서 태동한 것이다. 다만 베이즈 확률 공식만으로는 모든 귀납 논증을 다룰 수 없고, 또 확률 및 통계와 관련된 여러 문제를 풀 수 없다. 이러한 양상이 혼란으로 비추어진 시절, 혼란을 제거하기 위한 각종 개념적 도구가 탄생했다. 현재 계량심리학자나 통계학자는 그렇게 개발된 도구를 혼란 제거의 목적이 아니라 문제 해결의 관점에서 사용한다. 다시 말해, 확률 개념이 다양하다는 것은 그에게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제 해결에 적합한 도구 선별 및 도구 개발이 그에게 오히려 중요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지금의 양상은 논증과 형식논리의 관계 역사를 아는 이에게만 뚜렷이 인식된다. 그는 논증 분류 작업에 근거해 특정 형식논리체계의 구축이 가능하지만, 그 역은 아니라는 사실을 논리학사 학습을 통해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