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속화와 민주주의 (봉인 해제)/세속화와 민주주의

가상의 역사 11. 세속화 과정과 동양적 자유 개념 3 (백이와 숙제 이야기)

착한왕 이상하 2012. 9. 16. 02:53

‘사회 분리된 개인’은 관계 중심의 인간 관점에 배어 있는 동양적 인간 중심 사상에 근거하여 정당화될 수 없다. 그렇게 이상화된 개인 개념은 서양에서는 인간 중심 사상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나타났다. 그 형성 과정은 고전적 이원론의 붕괴 과정과 밀접히 맞물려 있다. ‘사회와 분리된 개인’이 관계 중심의 인간 관점에서 정당화될 수 없다면,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을 이분하고 선택의 자유를 사적 영역에 우선적으로 허용한 서양 근대 초기의 사고방식도 관계 중심의 인간 관점에서 정당화될 수 없다. 서양의 오랜 세속화 과정에 대응되는 과정이 이 땅에 있었다는 가정 아래 가상의 역사를 구성하는 경우에도, ‘사회와 분리된 개인’은 그러한 가상의 역사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없었다고 여기는 것이 자연스럽다.

 

이 땅의 세속화 과정의 첫 단계는 유교의 변통 가능성이 실현되는 과정임을 논했다. 그러한 과정은 중심과 주변의 구분 맥락에 함축된 비정합성의 인식에 기인함을 살펴보았다. 이 땅의 경우, 유교의 변통 가능성에 대한 인식은 인간 중심 사상을 전제하지 않고서도 관계 중심의 인간 관점의 근간이 성립한다는 인식에 기인했다. 유교의 변통 가능성이 인간 중심 사상을 관계 중심의 인간 관점에서 탈색시키는 과정을 통해 실현되기 시작한다면, 사회와 분리된 합리적 개인 개념은 우리가 구성해 볼 가상의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없다. 관계 중심의 인간 관점에서 인간 중심 사상을 완전히 탈색시킨 경우에도, 각 개인은 복잡한 인간관계에 근거한 사회 속에서만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교의 변통 가능성이 실현되는 과정을 이 땅의 세속화 과정의 핵심으로 가정할 때, 그 과정에서 나타날 사회 설계 참여의 자유도 과거 전통의 자유 개념을 변통시킨 것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즉, 사회 설계 참여의 자유에 대한 씨앗 개념을 과거 전통에서 찾아 볼 수 있어야 한다. 이때 그 씨앗 개념은 다음의 두 조건을 만족하는 것이어야 한다.

 

• 유교의 변통 가능성이 실현되는 과정은 ‘사회와 분리된 개인’ 개념을 전제하지 않는다.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을 이분하고 사적 영역의 생존권을 보장하기 위한 ‘서양 근대의 선택의 자유’와 같은 것은 이 땅의 세속화 과정에서 나타날 ‘사회 설계 참여의 자유’에 대한 씨앗 개념이 될 수 없다. 따라서 생존권에 국한된 선택 행위를 자유와 연관시키고, 이후 선택의 자유가 다양한 사회 영역들을 가로지는 방식으로 발전하는 것은 이 땅의 세속화 과정에서 기대하기 힘든 것이다.

 

• 우리가 찾는 씨앗 개념은 유교의 변통 가능성이 실현되는 과정 속에서 사회 설계 참여의 자유 개념으로 변화 가능한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사회 설계 참여의 자유가 반드시 그러한 씨앗 개념을 전제하고 정당화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러한 씨앗 개념은 단지 이 땅의 세속화 과정을 논하고 서양과 비교할 때 의미를 갖는 것이야 한다.

 

사회 설계 참여의 자유에 대한 이 땅의 씨앗 개념을 찾기 위해 신유학의 중심과 주변의 구분 맥락이 지배했던 시절로 돌아 가 보자. 그러한 시절, 사람들은 중심과 주변의 구분 맥락의 내용적 비정합성을 인식하지 못한 채 모든 체계에는 중심과 주변의 구분이 있다고 믿었다. 이러한 믿음에 따르면, 우주의 중심은 천지(天地)를 매개하는 인간이며, 사물과 동식물은 주변이다. 사회의 중심은 군주이며, 군주는 천명(天命)을 받들어 주변인 백성을 다스린다. 자연의 위계질서를 반영한 사회만이 조화롭다는 전제 아래 관계 중심의 인간 관점을 우열 구분의 관점과 결합하고, 이러한 결합에 근거해 엄격한 신분 구분의 관점을 정당화할 수 있었다. 이때 사회 속에서 중심과 주변을 구분하는 것은 수직상하의 위계질서를 함축하게 된다. 엄격한 신분 구분이 정당화되었던 과거 시절, 누군가 뜻을 세운다고 해 보자. 그 뜻은 유교의 가치 체계와 부합하는 것이어야 한다. 따라서 스스로 삶을 계획한다고 할 때, 삶의 방향성은 유교적인 것을 따르도록 이미 결정된 것이다. 위의 두 조건을 만족하는 씨앗 개념은 ‘현실 수긍 여부에 따른 자발적 의사 결정’과 같은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 이에 대한 이유를 따지기 전에, ‘현실 수긍 여부에 따른 자발적 의사 결정’으로서의 자유 개념이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를 의로운 사람들로 미화하는 이야기 등에 어떤 식으로 반영되고 있는지를 먼저 살펴보자.

 

사마천(司馬遷)에 의해 전해 내려오는 백이와 숙제의 이야기는 은(殷)나라 말과 주(周)나라 초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백과 숙은 상나라 영주 고죽군의 두 아들이다. 고죽군은 영지를 막내 숙에게 물려주려고 했다. 고죽군이 죽자, 숙은 형 백에게 영지를 양보했다. 백은 자신이 영지를 물려받는 것은 아비의 뜻을 져버리는 짓이라면서 숙의 권유를 물리쳤다. 당시 상나라의 서쪽에는 훗날 서주의 문왕(文王)으로 추대되는 희창이 작은 영주들을 책임지는 서백(西伯)의 자리에 있었다. 희창이 죽자 그의 둘째 아들 희발은 강태공의 도움을 받아 상나라 주왕을 치려고 했다. 희발은 상나라 주왕을 토벌하고 주를 세운 주무왕이다. 희발이 상나라에 반역하려고 했을 때, 백이와 숙제는 희발의 계획에 참여하지 않았다. 희창의 장사를 지내지 않은 상태에서 전쟁을 벌이는 것은 인륜(人倫)을 저버리는 짓이요, 또 신하가 군주를 죽이는 것은 천륜(天倫)을 저버리는 짓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에 노한 희발은 백이와 숙제를 죽이려고 했으나, 이들을 의로운 사람으로 본 강태공이 희발을 말렸다. 상나라가 망한 후, 백이와 숙제 형제는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먹고 살았다. 그러자 왕미자가 형제를 회유하기 위해 수양산에 찾아 왔다. 왕미자가 그대들이 먹는 고사리는 주나라 고사리라고 말하자, 백이와 숙제는 굶어 죽었다.

 

백이와 숙제 이야기를 놓고 ‘형제가 세상을 원망하면서 죽었을까?’라는 문제에 대해 이 말 저 말이 떠돈다. 공자(孔子)는 백이와 숙제가 아무런 원망 없이 죽었다고 말했다고 한다. 공자의 말을 집대성한 <논어(論語)>에는 백이와 숙제가 네 번 언급되고 있는데, 이는 그러한 언급에 근거한 것이다. 백이와 숙제가 원망 없이 굶어 죽었다는 것에 대한 공자의 이유는 <논어>의 문구만으로는 정확히 알기 힘들다. 하지만 백이와 숙제가 자신들의 뜻을 지켰다는 점에서 의(義)로운 사람들로 대표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때 그 뜻은 유교의 가치 체계에 부합하는 것이다. 즉, 백이와 숙제는 사대부로서 지켜야 할 도리를 지켰기 때문에 의로운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사마천은 백이와 숙제가 세상을 원망하면서 죽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동양 사상에서 ‘세상’이란 인간들의 관계에 근거한 사회 혹은 인간사에 국한된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 본성이 기인한다고 여겨진 천(天)과 인간사가 중첩된 개념이다. 백이와 숙제의 죽음에 대한 사마천의 평가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그 평가에는 인간 및 인간사의 도덕적 기원을 천으로 잡는 사고방식을 부정하거나 비판하려는 동기가 깔려 있을까? 이러한 물음에 대해 긍정할 수 없다. 사마천은 ‘중국적인 것’의 의미가 갖는 애매모호함을 약화시키기 위해 그것에 대비된 ‘오랑캐’라는 개념을 정초시킨 인물이다. 이때 ‘중국적인 것’을 상징하는 ‘황제(皇帝)’는 ‘천명(天命)을 받드는 자’로 간주된다. 황제는 하늘이 점지해준 인물이라는 점에서 ‘천자(天子)’인 것이다. 황제가 정치를 그르치면 다른 황제로 바뀌는 것은 하늘의 뜻이며, 그런 바뀜으로 인해 나라 이름은 달라질지라도 오랑캐에 대비된 ‘중국적인 것’은 영원히 지속된다. 따라서 백이와 숙제의 죽음을 가지고 사마천이 인간사의 도덕적 기원을 천으로 잡는 사고방식을 부정한 것은 아니다. 그러한 사고방식은 전통적인 유교의 핵심이기도 하다. 이 때문에, 백이와 숙제의 죽음에 대한 공자와 사마천의 입장 차이를 그들 사이의 사상적 차이로 확대시키기는 힘들다.

 

사회 설계 참여의 자유에 대한 씨앗 개념을 백이와 숙제의 이야기 등에서 찾고자 하는 경우, 백이와 숙제 형제의 죽음에 대한 공자와 사마천의 평가에서 나타나는 차이점보다는 공통점에 주목해야 한다. <논어>와 <사기>의 기록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공자와 사마천 모두 백이와 숙제뿐만 아니라 주무왕도 ‘의로운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다. 사마천은 주왕의 죄목을 늘려 기록했지만, 그 기록의 진위여부는 논란거리가 될 수 있다. 주왕의 죄목을 늘린 사마천의 동기는 주무왕이 주왕을 죽인 것을 정당화하고 주무왕을 현자로 부각시키려는 데 있다. 우리에게 익숙한 <논어>는 주자가 집대성한 <논어주집(論語集註)>을 일컫는다. 따라서 <논어>에 묘사된 백이와 숙제 및 주무왕에 대한 공자의 평가를 있는 그대로 믿을 수는 없다. 주자에 의해 각색된 공자의 사상에 따르면, 그들 모두 의로운 사람들이다. <논어>를 보면, 천리(天理)가 구현된 가상의 시대는 상고(上古) 시대이며, 그 당시 성인들의 뜻은 주무왕을 거쳐 공자에게 계승된 것으로 강조되고 있다. 백이와 숙제가 주무왕을 섬기지 않는 대가로 굶어 죽었다고 해도, 그들 모두가 <논어>에서 의로운 사람으로 간주되고 있는 것이다.

 

의로운 사람이란 어떤 사람인가? 신유학 사상이 사회의 지배적 통합 원리로 지배하던 시절의 서당 훈장에게 이 물음에 대한 답을 구한다면, ‘상고 시대는 천리가 인간사에 완벽하게 구현된 세상인데, 성인의 말과 행위는 천리에 따른 것이고, 의로운 사람은 성인의 뜻을 받드는 사람이며, 성인의 뜻을 받드는 것은 곧 천리를 받드는 것이기도 하다’라는 식의 대답을 듣게 될 것이다. 여기에는 ‘천지(天地)를 매개하는 존재로 인간을 가정하는 자연의 위계질서가 반영된 사회만이 조화롭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그러한 전제 아래 유교의 가치 체계가 완전히 구현된 상고 시대의 성인의 뜻을 따르는 것은 곧 천리를 따르는 것이 된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다. 백이와 숙제와 주무왕 모두 상고 시대의 성인들의 뜻을 따른 인물이라는 점에서 의롭다고 할 때, 그들 사이의 관계는 원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단순한 방법은 상고 시대와 현실을 구분하는 것이다.

 

상고 시대는 유교의 가치 체계가 완전히 구현된 이상적인 가상의 시대이다. 반면에 백이와 숙제와 주무왕이 살았던 시대는 유교의 가치 체계가 붕괴된 시대로 간주된다. 두 시대의 이러한 상황적 차이로 인해 그들 각자가 상고 시대의 성인의 뜻을 따르려고 했으나, 즉 백이와 숙제는 신하됨의 도리를 다하려고 했고 주무왕은 난세를 바로 잡기 위해 군주의 덕을 펼치려고 했으나, 그들 사이에는 갈등이 일어날 수 있었다.

 

상고 시대의 성인은 어떤 사람인가? 자신이 생각한 대로, 심지어 충동에 따라 행동해도, 그 생각과 행동은 천리에 따른 것이다. 따라서 상고 시대의 성인은 아무런 제약 없이 혹은 거침없이 생각하고 행동해도, 그의 생각과 행동은 항상 올바르다. 성인의 말과 행동은 아무런 제약 없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자유롭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자유에 대한 이러한 접근 방식은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없다. 우리의 문제는 세속화된 사회 상태의 특징인 ‘사회 설계 참여의 자유’에 대한 동양적 씨앗 개념을 찾는 것이다. 상고 시대의 이상화된 인간 개념인 ‘성인’에게서 엿볼 수 있는 ‘무제약적인 자유’가 그러한 씨앗 개념이 될 수는 없다. 더욱이 상고 시대는 성인 살았던 시대로 가정된 가상의 시대일 뿐이다.

 

성인의 뜻을 따르는 것이 의롭다고 할 때, 의로운 사람은 죽음 앞에서도 자신의 삶에 대해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이에 근거해 백이와 숙제는 자유로운 삶을 살았다고 한다면, ‘자유’는 ‘뜻을 지키는 것’을 뜻하며, 이때 그 뜻은 유교적 가치 체계와 부합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렇게 ‘자유’를 해석하는 경우, 자유로운 것은 유교적 가치 체계 내에서 의로운 것인 동시에 도덕적인 것이다. ‘유교 가치 체계에 부합하는 뜻을 지켰다는 것’이 사회 설계 참여의 자유에 대한 씨앗 개념으로 간주될 수는 없다. 의로운 사람은 자유로운 사람인가? 자유로운 사람은 의로운 사람인가? 이러한 물음들에 대해 긍정하도록 만드는 자유 개념은 유교에서 의로운 사람일 필요가 있는 근거를 강화할 때 필요하다. 하지만 그러한 자유 개념은 유교적이지 않거나 의롭지 않은 모든 것을 자유의 범주에서 제외시켜 버린다. 즉 자발적으로 유교적 가치 체계에 부합하지 않는 것을 따르는 경우도 자유의 범주에서 제외시켜 버린다. ‘유교적 가치 체계에 부합하는 뜻을 지키는 것’으로서의 자유 개념은 종교를 포함한 사회 문제를 다루는 경우에는 너무나 제한적이어서 그 필요성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사회 설계 참여의 자유에 대한 동양적 씨앗 개념은 두 가지 조건을 만족해야 한다. 첫째, ‘사회와 분리된 개인’과 같은 개념은 유교의 사고방식과 어울리기 힘들기 때문에, ‘서양 근대의 선택의 자유’와 같은 것도 이 땅의 세속화 과정에서 나타날 ‘사회 설계 참여 자유’에 대한 씨앗 개념이 될 수 없다. 둘째, 그러한 씨앗 개념은 유교의 변통 가능성이 실현되는 과정 속에서 사회 설계 참여의 자유를 보장해 주는 방식으로 변화 가능해야 한다. ‘유교적 가치 체계, 그것도 엄격한 신분제를 정당화해 주는 가치 체계에 부합하는 뜻을 지킨다는 것’은 이 두 조건 중 두 번째를 만족할 수 없기 때문에 사회 설계 참여 자유에 대한 씨앗 개념으로 간주될 수 없다. 백이와 숙제 이야기 등에서 찾아 볼 수 있는 그러한 씨앗 개념은 ‘현실 수긍 여부에 따른 자발적 의사 결정’과 같은 것이 되어야 한다.

 

백이와 숙제는 자신들이 살던 시대를 난세로 규정했다. 주왕의 폭정으로 혼란한 상황에 대해 한탄했지만 군주를 몰아내기 위한 주무왕의 봉기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것은 군신의 도리에 어긋난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주무왕 또한 자신이 살던 시대를 난세로 규정했으니 백이와 숙제와 마찬가지로 당시 현실을 부정적으로 평가한 인물이다. 이러한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그들 사이에는 명백한 차이점이 존재한다. 백이와 숙제는 자신들의 듯을 지키기 위해 세상을 버리고 산 속에 들어가 고사리로 연명했다. 반면에 주무왕은 뜻을 펼치기 위해 칼을 들었다. 백이와 숙제가 당시 현실을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뜻을 지키기 위해 세상을 버렸다면, 주무왕도 백이와 숙제처럼 당시 현실을 부정적으로 평가했지만 뜻을 펼치기 위해 세상 속으로 뛰어 든 것이다. 이를 일반화하여 이끌어 낼 수 있는 자유 개념은 ‘현실 수긍 여부에 따른 자발적 의사 결정’이다. 이러한 자유 개념은 뜻을 지키려는 것을 의로운 것으로 함축하지만, 이에 대한 역은 성립하지 않는다. 이를 알아보는 가운데, 현실 수긍 여부에 따른 자발적 의사 결정으로서의 자유 개념을 명확히 하자. 또한 그 자유 개념이 앞서 언급한 두 조건을 어떤 식으로 만족하는지를 살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