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속화와 민주주의 (봉인 해제)/세속화와 민주주의

가상과 실재 1

착한왕 이상하 2012. 11. 14. 23:07

신유학에 함축된 중심과 주변의 구분 맥락에 대한 강한 의미의 내용적 분리 가능성을 인식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유교의 변통 가능성을 인식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만약 그러한 사람들의 수가 늘어나고, 그들을 따르는 무리가 사회 전반으로 확대되었다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중심과 주변의 구분 맥락에 대한 강한 의미의 내용적 분리 가능성을 인식한 사람들의 입장에 따르면, 그 구분 맥락의 핵심인 관계 중심의 인간 관점이 반드시 동양적 인간 중심 사상을 전제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때 인간 존재를 우주의 중심으로 간주하고, 이에 따른 자연의 위계질서가 반영된 사회만이 조화롭다고 전제할 수 없게 된다. 그러한 전제는 관계 중심의 인간 관점과 우열 구분의 관점을 결합시킨 것을 사회에 투영하여 엄격한 신분 구분의 관점을 옹호하는 토대와 같은 것이다. 따라서 그러한 전제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관계 중심의 인간 관점에서 인간 중심 사상을 탈색시키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관계 중심의 인간 관점이 천지(天地)를 매개하는 존재로 인간을 규정하는 방식을 전제하지 않는다는 인식을 사상적 측면에서 접근할 때, 인간, 동식물 및 사물의 가치를 상대화하는 우주론을 옹호할 필요가 있다. 인간, 동식물 및 사물의 우열 구분은 이(理)에 의해 제한된 기(氣)의 활동성 자체에서 기인했다기보다는, 단지 인간의 눈으로 사회와 자연을 설명할 때 나타나는 것일 뿐이다. 이러한 식으로 인간 중심 사상을 비판하거나 약화시키려는 동기가 사상적으로 구체화된 시점은 명(明) 멸망 이후였다. 그러한 동기는 나라나 민족 간 위계질서를 부정하려는 동기로 이어졌다. 그리고 국가 간 위계질서를 부정하는 동기는 우열 구분의 관점을 약화시키거나 붕괴시키려는 시도를 자극할 수 있다.

 

우주뿐만 아니라 나라나 민족 간 관계에도, 그리고 한 나라의 사회뿐만 아니라 가족 내에서도 중심과 주변의 구분이 있다는 우열 구분의 관점은 인간 중심 사상의 약화 과정과 함께 흔들리게 되었다. 우주뿐만 아니라 나라 및 민족 간 관계에서 한 나라의 사회 및 가족 관계로 시각을 좁혀 우열 구분의 관점을 비판하려는 사람들이 극복해야만 하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청(淸)이 중원을 차지한 후 이 땅에서 득세한 소중화(小中和) 사상이다.

 

소중화 사상이 명 멸망 이후 이 땅의 주체성을 확립할 목적으로 나온 것이라고는 하나, 그것은 여전히 중국적인 것을 기준으로 모든 것을 평가한다는 점에서 사대주의적 발생임을 논했다. 소중화 사상은 중국적인 것을 이 땅으로 가져온 것에 불과한 까닭에 여전히 나라나 민족 간 우열 구분의 관점에 근거하고 있다. 따라서 소중화 사상이 약화되지 않고서는 유교의 변통 가능성을 인식한 사람들의 세력이 민중 속으로 확대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신유학에 함축된 중심과 주변의 구분 맥락은 대다수 민중에게는 그 정확한 의미와 무관하게 단지 암묵적으로만 시대정신처럼 기능했다. 이 때문에, 그 맥락의 근간인 관계 중심의 인간 관점이 반드시 우열 구분의 관점과 내용적으로 연결될 필요가 없다는 인식이 학문적 토론과 같은 것을 통해 민중에게 전파되기란 힘들다. 그러한 인식은 우열 구분의 관점이 약화되는 경우가 소중화 사상이 강화되는 경우보다 실익을 줄 수 있다는 실천적 운동을 통해서만 민중 속으로 파고들 수 있다. 그러한 운동을 ‘실학 운동’으로 규정할 수 있다. 왜냐하면 천지를 매개하는 우주의 중심으로 인간을 간주하는 동양적 인간 중심 사상을 비판하고, 이에 근거해 우주뿐만 아니라 나라나 민족 사이에도 우열 구분이 없다고 주장한 사람들은 실학자들이었기 때문이다.

 

관계 중심의 인간 관점이 우열 구분의 관점과 연결될 필요가 없다는 인식이 실천적 운동 차원에서 민중 속으로 확대되려면, 실학자들이 권력의 실세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들은 청이나 일본을 통해 외지 문물을 적극 수용했을 것이다. 나라 사이에 우열 구분이 없다면, 어느 지역의 문물이든 실익의 수단으로 삼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과학도 천문지리를 벗어나 사양의 화학이나 기술을 적극적으로 수용했을 것이다. 과학과 기술의 결합을 바탕으로 한 경제는 새로운 직업군을 산출시킬 수밖에 없었고, 이에 따른 제도의 개선은 필수적이었을 것이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도식화해 보면 다음과 같다.

 

 

 

위 도식에 반영된 이야기는 어떻게 진행될 것인가? 이 물음을 다루기에 앞서, 그 이야기는 가상의 측면을 갖고 있음을 지적하자. 인간 중심 사상을 비판하면서 나라나 민족 사이에도 중심과 주변의 구분이 있다는 관점에 정면으로 도전한 사람들이 있었다. 중국적인 것을 기준으로 모든 것을 평가하는 중국 중심 사관에 맞서 변화하는 주변 정세에 적합하도록 사회를 변통시키려고 노력했던 실학자들이었다. 실학자들의 노력은 결실을 보지 못했다. 이 때문에, 실학사상이 있었음에도, 실학 운동의 존재 여부는 논쟁거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

 

명 멸망 이후 왕권은 약해졌지만, 이것이 사회 개혁의 원동력은 되지 못했다. 양반 신분이 거래되는 가운데 신분 상승에 대한 사람들의 열망은 식지 않았으며, 세도가들의 권력은 오히려 강화되었다. 당시 민중의 마음을 사로잡은 구연 작품들, 실례로 ‘박씨전’, ‘임경업 장군전’ 등의 내용을 살펴보면, 당시 변화하는 주변 정세에 적합하도록 사회를 변통시켜야 한다는 동기는 결여되어 있다. 왕과 권세가들의 무능력을 비판하는 내용 속에는 오히려 소중화 사상을 정당화하려는 동기가 숨어 있다. 그러한 비판은 절대 왕권에 대한 의심을 허락하지 않는다. 오히려 왕에 대한 연민의 정을 자아내며, 영웅을 내세워 오랑캐에 대비된 조선을 미화하려는 목적을 갖고 있다. 이때 오랑캐에 대비된 조선은 유교의 정통성을 계승한 나라로 묘사되고 있다. 따라서 멸 멸망 이후 민중의 의식을 파고든 것은 소중화 사상일 가능성도 배제되지 않는다.

 

앞서 살펴본 도식에 반영된 이야기는 가상의 측면을 지니고 있다. 이제 그 이야기를 이어 나가자. 이를 통해 ‘현실을 직시하기 위해 과거를 살핀다’는 것의 의미가 무종교인에게 분명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