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속화와 민주주의 (봉인 해제)/세속화와 민주주의

가상과 실재 2

착한왕 이상하 2012. 12. 18. 05:18

동양적 인간 중심 사상의 약화와 함께 관계 중심의 인간 관점은 자연의 고정된 위계질서를 부정하는 방식으로 해석되고, 자연의 고정된 위계질서가 반영된 사회만이 조화롭다고 전제할 수 없게 되면, 관계 중심의 인간 관점과 우열 구분의 관점의 내용적 분리 가능성은 강한 의미에서 해석된다. 또한 두 관점을 결합시킨 것을 사회에 투영하여 엄격한 신분 구분의 관점을 정당화하는 것도 설 자리를 잃어버리게 된다. 따라서 앞서 살펴본 가상의 역사가 그대로 이어진다면, ‘누구나 관계의 중심이 될 수 있다’고 인식한 사람들이 늘어날 것이다. 이때 그러한 인식은 다음을 뜻한다.

 

• 개인의 판단은 개인들의 관계에 의해 형성된 그물망에 의존적이다. 이 때문에, 기존의 가치 체계나 전통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개인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사회로부터 분리된 개인’과 같은 개념은 이 땅에서 나타나기 힘들다. 이로부터 사회와 멀어지려는 어떤 개인의 의지나 삶의 태도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개인이 관계 의존적이라는 것은 관계에 대해 판단하고 고려하는 개인의 능력을 배재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관계는 개인에게 판단 대상이 된다. 그 관계는 기존의 사회 질서를 포함한 관계뿐만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세계의 그림에 근거한 관계도 포함한다. 이 때문에, 관계를 새로운 환경에 적합하도록 변통시켜보려는 개인의 노력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이러한 생각은 사회 구조 자체를 판단 대상으로 삼을 수 있어야 가능한 까닭에, 우열 구분과 엄격한 신분 구분의 관점에 세뇌된 개인에게는 통용되기 힘들다. ‘누구나 관계의 중심이 될 수 있다’고 인식한 사람은 사회 구조 자체를 판단 대상으로 삼을 수 있는 존재이다.

 

• 사회 구조 자체를 판단 대상으로 삼을 수 있는 개인은 사회의 여러 영역들과 그것들 사이의 관계에 대해 고민할 수 있는 존재이다. ‘현실 수긍 여부에 따른 자발적 의사 결정으로서의 자유’ 개념을 그에게 적용하는 경우, 그 개념은 소극적 의미가 아니라 적극적 의미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사회를 여러 영역들로 구성된 하나의 공간에 유비시킬 때, 그는 현실 수긍 여부에 따른 판단을 바탕으로 ‘특정 영역 속에 갇힌 점’과 같은 존재가 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는 여러 영역을 가로지르는 공간적 이동을 원한다. 다만 현실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적정 만족 수준을 지향하는 결정을 하거나, 현실에 대해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현실과 타협하는 결정을 하는 경우, 개인은 사회의 특정 영역에 안주하려는 경향을 갖는다. 개인이 사회의 여러 영역을 이동하기를 원하든, 특정 영역에 안주하기를 원하든, 그 어떤 경우에나 개인은 자발적 의사 결정 과정에서 사회관계를 대화상대로 삼는다. ‘누구나 관계의 중심이 될 수 있다’고 인식한 사람은 이처럼 ‘현실 수용 여부에 따른 자발적 의사 결정 과정’에서 사회관계를 대화상대로 삼을 수 있는 존재이다.

 

• 개인은 관계에서 분리된 존재가 아니다. 개인은 관계에 의존적이면서도 관계를 판단 대상으로 삼는 독자성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자유로운 존재이다. 이를 받아들일 때, 점적으로 주어진 것에서 사회 전체로 확장되는 방식의 자아 발달 개념, 곧 18세기 중엽 이후 서양에서 유행한 자아 발달 개념과 같은 것이 이 땅에서 유행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오히려 자아 발달은 기존 관계와 자신이 원하는 세계의 그림 사이에서의 갈등을 통해 사회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찾아가는 방식으로 규정된다. 개인 스스로 사회 공간의 한 영역에 자신을 위치시키는 과정을 통해, 사회 구조도 변화할 수 있다. ‘누구나 관계의 중심이 될 수 있다’는 인식은 ‘누구나 현실 수긍 여부에 따른 자발적 의사 결정에 근거해 사회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만들어 나갈 수 있음’을 뜻한다.

 

이제 ‘누구나 관계의 중심이 될 수 있다’는 인식은 다음과 같이 정리 된다.

 

• ‘누구나 관계의 중심이 될 수 있다’고 인식한 사람은 사회 구조 자체를 판단 대상으로 삼을 수 있는 존재이다. 그러한 사람은 이처럼 ‘현실 수용 여부에 따른 자발적 의사 결정 과정’에서 사회관계를 대화상대로 삼을 수 있는 존재이다. 또한 그러한 사람은 ‘현실 수긍 여부에 따른 자발적 의사 결정에 근거해 사회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만들어 나갈 수 있는 존재’이다.

 

어떤 인식의 확장과 그에 따른 사회 변화가 항상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근대 서양의 계몽주의는 동양과 달리 인간 중심 사상이 강화되면서 나타났다. 개인의 개선을 통해 사회를 개선할 수 있다는 계몽주의를 둘러싼 논쟁 속에서도, 고전적 이원론을 구성하는 세 가지 관점들 중 유독 ‘평신도와 성직자를 이분하는 관점’은 완전히 붕괴되지 않았다. 그 관점의 붕괴는 기존 사회 구조의 종말을 뜻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그 관점을 부정하는 사람들은 ‘급진주의자(radical)’들로 불렸다. 이는 신분제를 바탕으로 한 사회 구조의 붕괴 과정이 사상적 측면에서의 변화만으로는 설명하기 힘듦을 보여준다. 급진주의자들의 관점이 급진적인 것이 아니라 일반적이고 상식적인 통념처럼 받아들여지게 되는 과정은 사상적 측면이나 물질적 측면 어느 하나만을 잘라내어 단선적으로 분석하는 경우 설명할 수 없는 것이 되어버린다.

 

누구나 관계의 중심이 될 수 있다고 인식한 사람들은 신분제를 부정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 땅의 급진주의자’들로 불릴 수 있다. 물론 그러한 급진주의자들이 나타나게 되는 과정은 서양 역사의 맥락 속에서는 해석될 수 없다. 그러한 급진주의자들의 인식이 싹트는 과정에는 계몽주의를 둘러싼 논쟁이나 자유와 복지의 관계에 대한 낙천적 입장 및 비판적 입장의 교차 과정과 같은 것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추정해 볼 단서가 없기 때문이다. 서양의 오랜 세속화 과정의 큰 줄기는 고전적 이원론의 붕괴 과정이다. 이 땅에 그러한 세속화 과정에 대응시켜 볼만한 과정이 있었다고 가정하고 가상의 역사를 구성해 보는 경우, 이 땅의 세속화 과정의 큰 줄기는 유교의 변통 가능성이 실현되는 과정이다. 따라서 이 땅의 세속화 과정을 서양 역사의 맥락 속에 집어넣어 생각한다면, 그러한 생각은 역사적 근거를 결여한 상상에 불과하다. 만약 누군가가 무지로 인해 그러한 생각을 바탕으로 ‘이 땅의 근대화’라는 주제 아래 체계적인 이론을 만든다면, 그의 이론은 역사적 날조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여기와 저기의 급진주의자들이 사회적 역할의 측면에서 갖는 공통점에 주목해야 한다. 그들 모두는 신분제를 정당화해 주는 이론 체계에 비판적이었고, 신분제를 붕괴시키기 위한 운동을 도모했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누구나 관계의 중심이 될 수 있다’고 인식한 이 땅의 급진주의자들은 개인을 ‘사회 구조 자체를 판단 대상으로 삼을 수 있는 존재’로 간주한다. 이러한 생각은 인간, 동식물 및 사물의 차이를 상대화하는 관점이 인간들의 관계에 근거한 사회에도 적용되어야 가능하기 때문에, 우열 구분의 관점은 그들에게 통용될 수 없다. 우열 구분의 관점이 통용될 수 없다면, ‘현실 수긍 여부에 따른 자발적 의사 결정으로서의 동양적 자유’ 개념은 더 이상 개인을 특정 사회 영역에 가두어 버리는 방식의 소극적 의미에서 해석될 수 없다. 이 땅의 급진주의자들에게 개인이란 현실 수긍 여부에 따른 자발적 의사 결정 과정에서 사회관계를 대화상대로 삼을 수 있는 존재로 간주된다. 그러한 존재로서 개인이 자신의 뜻을 실천으로 옮기는 경우, 그는 사회라는 공간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만들어 가는 존재로 간주된다.

 

이 땅의 급진주의자들은 신분제를 당연시 여기는 세태에서는 기존 사회 질서를 위협하는 ‘반사회적 존재’들로 여겨졌을 것이다. 급진주의자 모두는 기존 사회 구조를 인정하지 않고 변화를 갈망한다는 점에서 진보주의자들이다. 하지만 변화의 속도와 폭을 놓고서는 급진주의자들 사이에도 의견이 나뉠 것이다. 어떤 급진주의자는 현실의 장벽을 인정하고 세상을 버리는 방식의 결정을 할 것이며, 또 어떤 급진주의자는 현실을 인정하면서 점진적 변화를 꾀할 것이다. 신분제가 사라진 세상의 그림을 실현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실천하는 급진주의자도 있을 것이다. 이들 모두가 융합하여 신분제 타파를 위한 운동을 실천하고, 여기에 민중이 동조하기까지에는 상당한 기간이 요구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되는 과정을 단일하게 서술할 수 있는 방법은 없기 때문에 다루지 않는다. 대신에 ‘현실을 직시하기 위해 과거를 살핀다’는 것의 의미를 분명히 하기 위해 다음 과정을 다룰 것이다.

 

• 이 땅의 급진주의자들의 운동이 민중에게 확산되어, 그 운동이 더 이상 급진적으로 여겨지지 않게 된다면, 신분제를 바탕으로 한 기존 사회 질서는 붕괴 위기를 맞게 될 것이다. 또한 ‘누구나 관계의 중심이 될 수 있다’는 관점은 신분제가 사라진 사회에서 유교와 무관하게 필요한 인식으로 받아들여지게 될 것이다. 이 과정에서 기존의 사회 구조와 정치 체제를 대체할 다양한 실험들이 진행된다. 그러한 실험들을 고려해 본다면, 현재 방식의 민주주의가 이 땅의 가상의 역사에서 자연스럽게 이어질 정치 형태라고 속단하기는 힘들다.

 

위 과정 역시 실재보다는 가상에 가깝다. 왜냐하면 급진주의 운동이 나타날 가능성은 이 땅에 있었지만, 그 운동은 실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명(明) 멸망 이후, 소중화(小中華) 사상의 득세로 실학은 민중 운동 차원으로 확장되지 못했고, 또 ‘누구나 관계의 중심이 될 수 있다는 인식’이 싹터 자리잡기도 전에 외세의 침략을 받았다. 하지만 실제 과거에는 항상 또 다른 가능성이 담겨 있게 마련이다. 그러한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가상과 실재로서의 역사를 비교하면서 현실을 고려할 때, 현실의 문제는 자체적으로 해결의 실마리를 드러내 준다. 이를 알려면, 급진주의 운동이 민중에게 확산되는 과정에서 기존의 사회 구조와 정치 체제를 대신할 다양한 실험들이 진행되는 가상의 역사를 간략히 구성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