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속화와 민주주의 (봉인 해제)/세속화와 민주주의

가상과 실재 3. 새로운 사회 구조와 정치 체제가 필요하다는 인식

착한왕 이상하 2013. 3. 11. 22:04

신분제를 용납할 수 없는 인물들을 더 이상 급진적이라거나 반사회적 인물들로 분류하기 힘들게 된 가상의 시점에서 논의를 이어가 보자. 그 시점은 유교의 변통 가능성이 사회적으로 실현된 시기로 여겨져야 한다. ‘현실 수긍 여부에 따른 자발적 의사 결정’으로서의 동양적 자유 개념도 소극적 의미가 아니라 적극적 의미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이때 개인은 여전히 과거 전통이나 인간관계에 의존적인 존재로 여겨진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서양의 세속화 과정의 핵심은 고전적 이원론의 붕괴 과정이며, 고전적 이원론의 붕괴 과정의 출발점은 인간 중심 사상이 형성되면서 시작되었다. 반면에 이 땅의 세속화 과정은 유교의 변통 가능성에 대한 인식에서 출발했으며, 그러한 인식은 천지(天地)를 매개하는 존재로 인간을 규정하는 동양적 인간 중심 사상의 약화로 이어졌다. 인간 중심 사상이 약화되면서, 관계 중심의 인간 관점의 근간을 유지하되 어디에나 중심과 주변의 엄격한 구분이 있다는 관점은 통용되기 힘들어졌다. 신유학에 함축된 주변과 중심의 구분 맥락을 구성하는 두 관점 ‘관계 중심의 인간 관점’과 ‘우열 구분의 관점’은 내용적으로 분리 가능하다. 자연의 고정된 위계질서를 가정하여 그것이 반영된 사회만이 조화롭다고 전제하지 않는 한, 그 둘을 결합시켜 엄격한 신분 구분의 관점을 옹호할 수 없다. 이 땅에서 신분제가 붕괴되는 세속화 과정은 결코 인간관계에서 자유로운 개인의 관점이 논쟁 대상이 되는 과정이 아닐 것이다.

 

사회와 분리된 개인이나 이상화된 합리적 개인 개념에 근거한 선택의 자유를 둘러싼 논쟁과 같은 것이 이 땅에서 벌어질 가능성은 희박하다. 또한 그러한 자유와 복지의 관계에 대한 낙천적 입장과 비관적 입장의 교차 과정도 나타나기 힘들었을 것이다. 이를 받아들이면, 그러한 교차 과정에서 출현한 다양한 정치적 이념들, 실례로 공산주의, 민주주의, 사회주의, 아나키즘 등만을 기준으로 하여 이 땅의 과거 사회를 진단해서는 안 된다. 이때 다음과 같은 물음이 중요한 담론 주제로 떠오른다.

 

• 공산주의, 민주주의, 사회주의, 아나키즘 등과 같은 정치적 이념은 ‘정치가 세상을 특정 방향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는 신념이 서양 지식인들의 의식을 지배한 시대에 형성되었다. 선택의 자유와 복지의 관계에 대한 낙천적 입장과 비관적 입장의 교차 과정은 그러한 신념을 탄생시킨 밑거름과 같다. 그러한 교차 과정과 내용적으로 일치하는 과정을 이 땅의 역사를 고려하여 가정하기는 힘들다. 그렇지만 ‘현실 수긍 여부에 따른 자발적 의사 결정’으로서의 동양적 자유 개념을 더 이상 소극적 의미에서 해석할 수 없을 정도로 유교의 변통 가능성이 실현되었다고 가정하는 경우, 신분제를 대체할 정치적 이념을 구성하느라 바쁜 이 땅의 지식인들을 상상해 보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러한 지식인들이 구상한 정치 체제들은 어떤 것이었을까?

 

새로운 사회 구조와 정치 체제들에 대한 가상의 실험들은 위 물음에 대해 답하는 과정에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들이다.

 

선택의 자유와 복지의 관계에 대한 낙천적 입장과 비관적 입장의 교차 과정에서 여러 정치적 이념들이 탄생한 시기는 신분제가 종말에 이르는 상태였다. 그러한 교차 과정을 이 땅의 역사에서 찾기는 힘들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유교의 변통 가능성이 실현되는 과정에서 사회와 분리된 혹은 이상화된 합리적 개인과 같은 개념이 대세가 될 것이라는 생각은 받아들이기 힘들다. 그 과정은 ‘현실 수긍 여부에 따른 자발적 의사 결정’으로서의 동양적 자유 개념이 소극적 의미가 아니라 적극적 의미에서 해석되도록 만든 과정이기 때문이다.

 

선택의 자유와 복지의 관계에 대한 낙천적 입장과 비관적 입장의 교차 과정과 유교의 변통 가능성의 실현 과정은 내용적 측면에서 분명한 차이를 보인다. 하지만 그 두 과정은 기능적 측면에서 공통점을 갖는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그 두 과정 모두 엄격한 신분제의 붕괴 과정과 함께 한다는 것이며, 이는 ‘저기’와 ‘여기’ 모두 ‘절대적 의미의 기득권층’을 인정할 수 없게 된 세태를 반영한다. 이때 ‘절대적 의미의 기득권층’은 다음을 뜻한다.

 

• ‘실질적 기득권층’은 ‘민중을 자신의 뜻에 따라 강제적으로 혹은 습관적으로 행위하도록 재화 및 권력을 사용할 수 있는 사람들로 구성된 계층’을 뜻한다. ‘형식적 기득권층’은 ‘그 신분이 계급으로 보장된 계층’을 뜻한다. ‘절대적 의미의 기득권층’이란 ‘실질적 기득권층이 동시에 형식적 기득권층으로 보장받는 사회의 집단’을 뜻한다.

 

실질적 기득권층이 반드시 형식적 기득권층과 동일한 것은 아니며, 이에 대한 역도 성립한다. 두 종류의 기득권층이 동일한 경우, 해당 계층은 절대적 의미에서의 기득권층으로 간주된다. 따라서 절대적 의미의 기득권층이 지배하는 사회란 실질적 기득권층이 상위 신분 계급으로 형성된 사회와 다르지 않다. 계층적으로 분화된 사회 구조를 세속화된 사회 상태의 특징이라고 할 때, 계층 분화는 탈계급을 수반하는 것이어야 한다. 과거에는 특정 종교 혹은 종교성을 함축한 정치적 이념에 근거해 신분제가 정당화되었기 때문에, 세속화된 사회 상태를 기준으로 한 과거는 절대적 의미의 기득권층의 시대이기도 하다.

 

절대적 의미의 기득권층이 사라지기 위해서는 형식적 기득권층이 사라져야 하며, 형식적 기득권층이 사라지기 위해서는 엄격한 신분제가 붕괴되어야 한다. 신분제 붕괴 과정은 실질적 기득권층이 형식적 기득권층이 되는 것을 제도적으로 가로막는 것이며, 동시에 실질적 기득권층에게 기득권을 내려놓으라는 민중의 요구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과정이다. 따라서 형식적 기득권층이 실질적 기득권층과 동일시될 수 없거나, 실질적 기득권층이 실질적 기득권층과 동일시될 수 없는 상황은 절대적 의미의 기득권층의 약화 조짐으로 여겨질 수 있다.

 

절대적 의미의 기득권층이 약화되는 조짐은 이 땅에 실제로 나타났었다. 임진란 이후 양반 신분도 거래 대상이 된 상황은 실질적 기득권층과 형식적 기득권층을 동일시할 수 없게 된 세태를 반영한다. 이러한 혼란기를 수습하기 위해 나라의 부국강병(富國强兵)을 도모한 지식인들은 경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이(理)와 기(氣), 그리고 도덕과 감정의 관계에 대한 그들의 우주론적 논쟁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백성의 삶에 관심을 가지고 지신의 ‘경세론’을 펼치고 그에 따라 실천하려고 했던 개혁적 인물들을 통칭해 ‘실학자’라고 부를만한 이유는 있다. 그러한 실천 정신은 이전의 지식인들에게는 뚜렷이 나타나지 않는다. 따라서 그러한 실천 정신으로 무장한 개혁적인 인물들을 이전 지식인들과 구분할 필요가 있었다. ‘실학자’라는 용어는 그러한 필요에 의해 탄생한 용어라고 해도 무방하다.

 

실학자들은 백성의 삶을 윤택하려 할 목적으로 경세론을 펼쳤다. 하지만 정치적 측면에서 그들 모두가 민중의 편이었다고 속단하기는 힘들다. 도덕성과 감정의 관계 등에 대한 이론적 논쟁을 고려하지 않는 경우에도, 모든 실학자들이 한 부류를 형성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정치적 측면에서 실학자들을 분류하는 경우, 그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그 하나는 ‘지배자 관점의 실학자들’이며, 다른 하나는 ‘피지배 관점의 실학자들’이다.

 

• 지배자 관점의 실학자들

비록 권력의 실세에 속하지는 않았지만 과거 시험을 통해 관직에 오른 인물들로서 민중의 삶을 개선시키기 위해 경세론을 펼쳤다. 그들은 신분을 막론하고 능력있는 자들을 적재적소에 등용해야 한다는 직분제(職分制)를 옹호했다. 하지만 신분제 자체에 반대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전란 후 위기를 맞은 기존 사회 체제를 복원하기 위해 예(禮)를 중시했다. 이 점에서 그들은 여전히 지배자의 관점을 옹호한 인물들이다. 여기서 ‘지배자의 관점’이란 엄격한 신분제를 바탕으로 한 기존 질서를 유지하면서도 조화로운 공동체가 가능하다는 관점을 뜻한다.

 

• 피지배자 관점의 실학자들

피지배자 관점의 실학자들과 마찬가지로 피폐한 민중의 삶을 개선시킬 목적으로 경세론을 논하고 실천한 인물들이다. 하지만 그들은 벼슬을 하지 않았거나, 벼슬을 해도 잡직에 머무른 인물들이다. 그들은 몸소 농사를 지으며 가족을 먹여 살렸고, 또한 지역 공동체 사람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이 때문에, 그들은 지배자 관점의 실학자들보다 더욱 실천적인 인물들이라 할 수 있다. 또한 기존의 지배 구조를 정당화하기 위해 지나치게 예를 강조하지도 않았다. 피지배자 관점의 실학자들은 사농공상(士農工商)으로 대표되는 신분제를 붕괴 대상으로 여긴 것은 아니었지만 사대부의 특권을 수용하지 않았다.

 

지배자 관점의 실학자들과 피지배자 관점의 실학자들의 분류 방식에 따르는 경우, 동일 계보에 속한다고 알려진 실학자들에 대한 평가도 달라진다. 이에 대한 실례로 성호(星湖) 이익과 다산(茶山) 정약용을 들 수 있다. 둘은 사제지간으로 동일 계보에 속한 인물들로 회자된다. 그러나 글 속에 반영된 그 둘의 사고방식의 차이는 의외로 크다. 그 차이는 성호가 학문적으로 누구에게 기대고 있으며 다산은 누구에게 기대고 있는지에 기인하지 않는다. 성호 이익이 민중을 대변한 피지배자 관점의 실학자 모습에 가깝다면, 다산 정약용은 적어도 내 눈에는 지배자 관점의 실학자로 분류될 여지를 가진 인물로 비추어지기 때문이다.

 

성호는 이(理)와 기(氣)의 관계에 대한 이론적 논쟁을 멀리하였다. 대신에 종종 ‘잡설(雜說)’로 분류되는 내용의 글들을 많이 남겼다. 그 내용은 주로 경제 정책에 관한 것이었다. 성호는 당쟁(黨爭)마저도 경제가 붕괴한 것에 기인한다고 여겼다. 부와 자원이 한정되어 있는 상태에서 지나치게 많은 수의 관료 때문에, 당쟁이 일어난다고 보았다. 이는 성호가 군주와 사대부를 포함한 지배층의 덕에 바탕을 둔 통치보다는 경제와 지혜에 바탕을 둔 통치를 강조했음을 보여준다. 또한 성호 이익이 예를 강조했을 때, 이것은 누구에게나 공평한 법치를 강조한 것이다. 결코 각 신분에 적합한 격식을 강조한 것은 아니었다. 특히 그는 군(君)과 민(民)의 수직적 구조는 인정했으나, 사대부의 특권은 비판 대상으로 삼았다. 이에 대한 성호 이익의 동기는 무엇이었을까?

 

성호는 소규모 공동체에 바탕을 둔 자급자족 방식의 경세론을 옹호했다. 그러한 경세론을 실천하는 데 방해가 되는 요인으로 사대부 계층의 수적 팽창을 들었다. 따라서 그에게 사대부 계층은 적어도 수의 측면에서 제한될 필요가 있는 계층이며, 왕이 아주 지혜롭다면 없어도 되는 계층이다. 그가 강조한 법치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소규모 공동체 내, 공동체 간 거래가 원활하도록 해주는 틀을 엄격히 다지는 것이 성호에게는 다름 아닌 법체계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다산은 지배자 관점의 실학을 옹호한 인물에 가깝다. 그가 법치를 들어 예를 강조했을 때 기존의 신분제를 수정할 의도는 없었다. 각 신분에 적합하도록 사람들을 교육해야 사회 질서가 바로 잡힌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또 그가 사대부의 권력 자체를 약화시켜야 한다는 의도를 가지고 사대부를 비판한 것은 아니었다. 단지 사대부 계층의 사람에게 요구되는 덕과 격식의 복권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따라서 반계(磻溪) 유형원에서 시작해 성호 이익을 거쳐 다산 정약용으로 이어지는 계보를 하나로 분류하는 경우에도, 누구를 지배자 관점의 실학자로, 또 누구를 피지배자 관점의 실학자로 분류할 여지는 남게 되는 것이다.

 

이제 우리에게 중요한 물음은 다음이다.

 

• 지배자 관점의 실학자들과 피지배자 관점의 실학자들 중 어느 쪽이 유교의 변통 가능성을 먼저 인식하고 그것을 실현하려고 했을까?

 

유교의 변통 가능성이 이 땅에서 정말 실현되었다면, 그것은 동양적 인간 중심 사상이 약화되면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관계 중심의 인간 관점의 근간을 유지한 채 그 관점에서 인간 중심 사상을 탈색시키는 경우, 그 두 관점을 결합시킨 것을 사회에 투영하여 엄격한 신분 구분의 관점을 논리적으로 정당화할 수 없게 된다. 관계 중심의 인간 관점과 우열 구분의 관점을 강한 의미에서 내용적으로 분리 가능하다고 인식한 인물들은 피지배자 관점의 실학자들이었다. 유교의 변통 가능성이 그러한 내용적 분리 가능성에 바탕을 두고 있는 까닭에, 유교의 변통 가능성을 먼저 인식하고 그 가능성을 실현하려고 한 인물들은 피지배자 관점의 실학자들이었다고 말해야 한다. 물론 그들이 신분제를 완전히 부정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적어도 천지(天地)를 매개하는 존재로 인간을 규정하는 동양적 인간 중심 사상에 비판적이었으며, 자연의 위계질서를 상대화하려고 했다. 또한 이에 근거해 중국을 중심으로 나라 사이에도 우열 구분이 있다는 사고방식을 부정했다.

 

유교의 변통 가능성을 인식하고 실현하려는 사람들의 수가 늘어났다고 해보자. 이는 이 땅의 역사가 외부의 충격이나 영향에 저항하여 자생적으로 진행되었다는 가정 아래 상상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유교의 변통 가능성이 실현되는 과정에서 신분제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수가 다수를 차지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들은 신분제에 근거한 기존의 사회 체제와 타협할 수 없다는 점에서 ‘급진주의자’로 불렸을 것이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그러한 급진주의자들의 관점을 아주 당연한 혹은 평범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사회 상태가 다름 아닌 ‘유교의 변통 가능성이 실현된 사회 상태’이다. 유교의 변통 가능성이 실현된 사회 상태의 다수는 신분제를 더 이상 당연시여기지 않는다. 물론 그러한 다수가 유교의 변통 가능성과 같은 것을 의식할 필요는 없다. 역사적 흐름에서 어떤 관점이 대세가 된 경우, 모든 사람이 그렇게 되는 과정에 동참하거나 그 과정을 명확히 인식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유교의 변통 가능성이 실현된 사회 상태를 ‘자유’ 개념과 연관시켜 고려할 때, 그것은 ‘현실 수긍 여부에 따른 자발적 의사 결정으로서의 자유’가 더 이상 소극적 의미에서 해석될 수 없게 된 사회 상태를 뜻한다. ‘현실 수긍 여부에 따른 자발적 의사 결정으로서의 자유’가 소극적 의미에서 해석되는 사회 상태의 경우, 생존을 위한 수단을 마련하는 방법마저도 각 개인이 속한 신분의 영향을 받는다. 따라서 신분은 현실이라는 공간에서 개인의 이동을 제한하는 일종의 감옥에 비유된다. ‘현실 수긍 여부에 따른 자발적 의사 결정으로서의 자유’가 적극적 의미에서 해석된다는 것은 그러한 감옥이 없어진다는 것을 뜻하며, 이때 개인들이 자신의 뜻에 따라 넘나들게 되는 ‘계층’은 더 이상 ‘계급’이나 ‘신분’을 뜻할 수 없게 된다.

 

유교의 변통 가능성이 실현되는 과정은 이제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 신분제에 반대하거나 비판했다는 이유 때문에 급진적이라 여겨졌던 관점이 지극히 당연하고 평범한 관점으로 바뀌게 되는 과정이다.

 

• 현실 수긍 여부에 따른 자발적 의사 결정으로서의 자유 개념이 소극적 의미에서 적극적 의미로 해석되게 되는 과정이다.

 

유교의 변통 가능성이 실현되는 과정에서 서양의 ‘선택의 자유와 복지의 관계에 대한 낙관적 입장과 비관적 입장이 교차하는 과정’과 같은 것은 이 땅에서 나타나기 힘들다. ‘사회 설계 참여의 자유’가 보장되는 방식이 반드시 서양 역사의 맥락에 따라 나타나는 것은 아니며, 또한 그러한 맥락에서 대세를 이룬 정치적 이념 등에 의해서만 정당화 가능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미 논의했듯이, 유교의 변통 가능성이 실현되는 과정은 동양적 인간 중심 사상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동양적 인간 중심 사상에서 ‘인간’은 천지(天地)를 매개하는 우주의 중심으로 간주되는 까닭에 우주의 조화를 상징한다. 이때, ‘인간’은 ‘사회에 대비된 개인’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천지의 조화에서 기인한 것으로 가정된 도덕성이 구현된 개체’와 같은 엇을 뜻한다. 동양적 인간 중심 사상의 약화 과정은 신유학에 함축된 중심과 주변의 구분 맥락이 갖는 내용적 비정합성에 대한 인식에 근거한다. ‘유교의 변통 가능성’은 그 구분 맥락의 핵심인 ‘관계 중심의 인간 관점의 근간을 유지한 채 신분제를 받아들일 필요가 없도록 시대의 변화에 맞추어 유교의 핵심 개념을 변통시킬 수 있음’을 뜻한다. 따라서 그 가능성이 실현되는 과정에서 요구되는 개인 개념은 ‘사회에 대비된 혹은 사회에서 자유로운 개인’과 같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회관계 및 전통이 개인의 선택과 행위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부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유교의 변통 가능성이 실현되는 과정에서 요구되는 개인 개념은 ‘현실 수긍 여부에 따른 자발적 의사 결정에 의해 사회 계층들 사이를 넘나들 수 있고, 또한 기존 관계를 변화시키는 데 기여할 수 있는 존재’이다. ‘누구나 관계의 중심이 될 수 있다’는 은유는 그러한 존재를 상징한다. 그러한 은유는 ‘현실 수긍 여부에 따른 자발적 의사 결정으로서의 자유’가 소극적 의미에서 적극적 의미로 해석 가능하도록 변통된 상황에서 누구나 암묵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것이다.

 

사회에 대비된 혹은 사회와 분리된 이상적인 개인을 가정하고, 이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를 둘러싼 논쟁사와 같은 것을 이 땅의 역사에서 찾아보기는 힘들다. 그러한 논쟁사를 대표하는 것이 ‘자유와 복지의 관계에 대한 낙천적 혹은 비관적 입장의 교차 과정’이며, 여기서 자유 개념은 어디까지나 사회관계 및 전통의 영향을 받지 않은 상태의 이상적인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선택의 권리에 근거한 것이다. 그러한 자유 개념은 이 땅의 역사적 맥락 속에 쉽게 흡수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자유와 복지의 관계에 대한 낙관적 혹은 비관적 입장이 교차하는 과정은 어디까지나 서양 역사의 맥락 속에서만 큰 의미를 갖는다. 이를 안다면, 확실해지는 것이 있다. 현대적인 것을 대표하는 특징들이 동양과 서양 곳곳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더라도, 그것들이 나타난 방식 및 이론적으로 정당화되는 방식은 차이를 보일 수밖에 없다.

 

서양의 세속화 과정은 고전적 이원론이 흔들리면서 시작되었다. 중심과 주변의 구분 맥락과 달리, 고전적 이원론은 내용적으로 하나의 정합적 체계를 이룬다. 이 때문에, 기독교 전통을 유지하는 경우에도 고전적 이원론을 시대의 변화에 맞추어 변통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대한 대체물 찾는 것은 근대 초기의 중요한 주제였다. 그러한 대체물을 찾는 것은 근대를 연 주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전적 이원론이 지배했던 시기, 인간은 신성(神聖)이 구현된 천상을 바라보며 찬양하는 존재로 여겨졌다. 지동설의 정착과 함께 고전적 이원론이 흔들리게 되면서, 서양적 인간 중심 사상이 싹트기 시작했다. 중세와는 구분되는 근대의 독자성을 확보하려는 지식인들은 중세 시절의 인간 개념에 대한 대체 개념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그러한 노력 속에서 탄생한 것이 사회에 대비된 혹은 사회와 분리된 인간 개념이다. 따라서 서양에서 나타난 그러한 인간 개념이 우리에게 잘 와 닿지 않는 것은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유교의 변통 가능성이 조선 후기 어느 시점에서 실현되었다고 해 보자. 그러한 시점에서 다수는 특정 사상적 혹은 이론적 배경 없이도 신분제를 받아들일 수 없는 것으로 여긴다. 따라서 그러한 시점에서는 기존의 신분제를 대체할 새로운 정치 체제를 찾는 것이 시대적 과업으로 떠오른다. 이러한 상황은 ‘정치를 통해 세상을 특정 방향으로 유도할 수 있다’는 신념이 지배하기 시작하는 상황이다. 그러한 신념이 지배한 상황이 동서양 양자에 공통적으로 나타났다고 가정 해 보자. 이때에도, ‘정치를 통해 사회를 특정 방향으로 유도할 수 있다’는 신념에 바탕을 둔 동서의 정치 체제들이 거의 유사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한 신념이 지배한 시절에 탄생한 서양의 정치적 이념들, 즉 공산주의, 민주주의, 반국가주의, 전체주의 등이 동일한 내용으로 이 땅에서 자생적으로 나타났을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이미 논의 했듯이, ‘정치를 통해 세상을 특정 방향으로 유도할 수 있다’는 신념은 서양의 경우 ‘선택의 자유와 복지의 관계에 대한 낙천적 입장과 비관적 입장이 교차하는 과정’의 연장선에 서 있다. 그러한 교차 과정이 이 땅의 과거 역사의 한 장을 차지했을 것이라고 추측하기는 힘들다. 그러한 교차 과정은 ‘사회에 대비된 혹은 사회와 분리된 합리적 개인’ 개념을 둘러싼 논쟁에서 촉발되었다. 그 개인 개념은 지동설의 출현과 함께 인간을 천사나 자연을 이용할 수 있는 신의 대리자로 비유하는 서양적 인간 중심 사상에 빚지고 있다. 이와 달리, 이 땅의 세속화 과정의 첫 부분은 신유학에 함축된 동양적 인간 중심 사상의 약화가 차지해야 함을 논했다. 또한 그 약화되는 방식은 유교의 변통 가능성에 대한 인식에 바탕을 두고 있음을 논했다. 유교의 변통 가능성이 실현되는 과정에서 동양적 자유 개념으로 추정된 ‘현실 수긍 여부에 따른 자발적 의사 결정으로서의 자유’는 소극적 의미가 아닌 적극적 의미에서 해석되도록 변통되게 된다. 현실 수긍 여부에 따른 자발적 의사 결정으로서의 자유가 적극적 의미에서 해석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시점은 신분제가 붕괴 직전에 다다른 시점이기도 하다.

 

신분제가 종말을 맞이하게 되는 시점에서 ‘정치를 통해 세상을 특정 방향으로 유도할 수 있다’는 신념이 담론 주제로 떠오를 것이라고 추측해 볼 수 있다. 그 주제는 세속화 과정에서 이 땅에서도 나타날 수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주제가 이 땅과 서양에서 생성되는 방식은 다르기 때문에, 그 주제를 다루는 방식에서는 동서의 차이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서양의 경우, ‘정치를 통해 세상을 특정 방향으로 유도할 수 있다’는 신념은 ‘자유와 복지의 관계에 대한 낙천적 입장과 비관적 입장이 교차하는 과정’의 연장선에 서있다. 이 땅의 경우, 그러한 신념은 유교의 변통 가능성이 실현된 시점에서 나타났을 것이다. 서양의 경우, 고전적 이원론의 붕괴 과정에 이어진 것이 자유와 복지의 관계에 대한 낙천적 입장과 비관적 입장의 교차 과정이다. 후자의 과정이 이 땅에서 중요한 담론 주제로 떠올랐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는 힘들다. 고전적 이원론이 붕괴되는 과정과 유교의 변통 가능성이 실현되는 과정은 기능적 측면에서 유사할 뿐, 내용적 측면에서는 아주 다르기 때문이다. 이제 이 점은 지금까지의 논의를 의심의 눈으로 따라온 사람에게도 분명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