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속화와 민주주의 (봉인 해제)/세속화와 민주주의

가상과 실재 4. 새로운 정치론의 이론적 배경

착한왕 이상하 2013. 4. 19. 08:02

유교의 변통 가능성이 실현된 시점에서 이 땅의 지적인 어느 누구가 자유와 복지의 관계에 대한 낙관적 입장과 비관적 입장을 둘러싼 논쟁을 본다면, 그는 두 입장 중 무엇에 호감을 가질까? 두 입장을 둘러싼 논쟁은 ‘사회에서 분리된 합리적 개인’ 개념에 근거한 선택의 자유가 과연 공동체의 조화를 보장할 수 있는지에 관한 것이다. 그러한 자유가 근거하는 개인 개념은 서양적 인간 중심 사상이 형성되면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그의 눈에는 단순히 실제 개인을 이상화한 것이 아니라 이질적인 것으로 다가올 것이다. 따라서 그가 호감을 가지고 자유와 복지의 관계에 대한 낙관적 입장을 받아들이기는 힘들 것이다. 그 낙관적 입장은 개인의 선택의 자유를 보장하고 개인 간 자유로운 거래를 통해 복지가 실현 가능하다는 입장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가 자유와 복지의 관계에 대한 비관적 입장을 무조건적으로 수용하기도 힘들다. 그 비관적 입장은 그에게 단지 낙관적 입장에 대한 극단적 반발로 비추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후자보다는 전자의 입장에 호감을 가졌을 가능성은 크다. 이에 대한 이유를 알아보기 위해 서양의 선택의 자유가 근거하는 ‘합리적 개인’ 개념의 의미를 지금까지와는 약간 다른 방식으로 정리해 보자.

 

‘합리적’이라는 표현의 일상적 용법을 살펴보면, 합리성은 단 하나의 이론에 귀속되거나, 단 하나의 측면을 띤다고 할 수 없다. 그것은 선택의 동기, 행위 결과의 지속 여부, 행위자의 만족도 및 다른 사람과의 관계 등에 따라 여러 측면을 나타낸다. 추리 및 추상화 능력이 합리성을 대표하더라도, 그 능력이 발휘되는 방식은 상황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능력을 경험 내용 이전에 주어진 것으로서 가정하고, 상황에 적용되는 특정 관념이나 형식과 같은 것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

 

만약 합리적 능력이 경험 내용 이전에 주어진 것으로서 상황에 적용되는 특정 관념이나 형식과 같은 것이라고 해보자. 인간관계나 전통 등이 뒤섞인 상황은 그저 그런 관념이나 선험적 형식이 적용되는 초기 조건과 같은 것에 불과하며, 감정이나 충동 등은 합리적인 것과 상보적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라 합리적인 것에 반하는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또한 합리적 능력을 발휘하는 주체는 그런 관념이나 선험적 형식을 사용하는 주체이기도 하다. 이때 그 주체는 경험 및 능력 발휘 자체에 내재하는 것이 아니라 육체와 분리된 영혼과 같은 것이거나, 아니면 경험 이전에 주어진 어떤 실체에 기인한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전자의 사고방식은 데카르트에게서, 그리고 후자의 사고방식은 칸트에게서 엿볼 수 있다.

 

데카르트에게서 칸트에 이르는 과정은 고전적 이원론의 세 관점 중 ‘지상계와 천상계의 이분법’, ‘인간적인 것과 신성적인 것의 이분법’이 몰락하는 과정이다. 또한 서양 근대의 ‘합리적 개인’ 개념이 굳어지는 과정이기도 하다. 데카르트나 칸트의 사고방식에 따른 ‘행위의 순수한 주체’는 전통이나 인간관계 등으로부터 독립된 존재이며, 그런 주체를 원자에 비유할 때 사회나 집단 현상은 개인들의 속성에 의해 설명 가능한 것으로 가정된다. 이러한 가정은 서양의 인간 중심 사상이 강화되면서 설득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합리적 개념’은 전통이나 인간관계 등으로부터 독립된 것으로 가정된 행위 주체 개념에 근거해 정당화되곤 했다. 이 때문에, ‘합리적 개인’은 ‘사회에 대비된’ 혹은 ‘사회와 분리된 개인’으로 규정되는 것이다. 서양 근대와 관련된 ‘선택의 자유’는 합리적 개인 개념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세속화 과정은 그러한 좁은 의미의 ‘선택의 자유’가 ‘사회 설계 참여의 자유’로 확대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현실 수긍 여부에 따른 자발적 의사 결정으로서의 자유’를 동양적 자유 개념으로 받아들일 때, 그 개념은 서양의 합리적 개인 개념에 근거한 선택의 자유 맥락 속에서 정당성을 확보할 수 없다. 이는 더 이상 언급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여기서는 행위 평가와 관련해 두 자유 개념이 보여주는 차이에 대해서만 언급한다.

 

선택의 자유를 서양 근대의 ‘이상화된 합리적 개인’ 개념에 근거해 논하는 경우, 행위 시점의 동기나 결과로 행위를 평가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한 개인은 사회에 대비된 혹은 사회와 분리된 이상적인 인간으로 규정되었다. 이 때문에, 가장 손쉬운 행위 평가 방식은 행위 시점의 행위자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자유와 복지의 관계에 대한 낙관적 입장의 가장 극단적 사고방식에 따르면, 개인의 선택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은 복지에 대한 충분조건으로 간주된다. 개인 간 자유로운 거래를 통해 조화로운 공동체가 실현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성을 자기중심적이거나 자기 주위를 우선시하는 성향으로 간주하고, 행위 결과 중심의 관점에서 조화로운 공동체의 구성 및 실현 방식을 설명해 보려는 근대 지식인들에게서 살펴볼 수 있다. 물론 그들이 자유주의 옹호자들 모두를 대표하는 것은 아니다. 개인 간 거래를 통해 개인의 자아가 자기주위를 우선시하는 행위 반경을 넘어 사회 전체로 확대 가능하도록 해주는 방안을 놓고 고민한 사람이 있었는가 하면, 선택의 자유 확대는 복지에 대한 필요조건일 뿐 충분조건은 아니라고 여긴 사람이 있었다. 행위 평가에서 동기의 중요성을 강조한 이들은 ‘자유와 복지의 관계에 대한 비관적 입장’을 받아들이지는 않았지만 낙관적 입장에 대해 경계심을 가지고 있었다.

 

‘현실 수긍 여부에 따른 자발적 의사 결정으로서의 자유’ 개념은 선택의 자유와 배타적 관계를 맺지 않는다. 하지만 그 동양적 자유 개념에 따르면, 이상화된 합리적 개인 개념에 근거한 선택의 자유란 그저 개인이 사회 속에서 자신의 ‘적소(niche)’를 찾는 데 필요한 수단 정도로만 간주된다. 선택의 자유가 그러한 수단으로 간주될 때, 그것은 또한 정치적 제어 대상이 된다. 이를 분명히 해야, 이 땅의 과거사 한 장을 장식할 수도 있었지만 장식하지 못한 ‘정치적 실험’에 대해 논할 수 있다.

 

‘현실 수긍 여부에 따른 자발적 의사 결정으로서의 자유’가 소극적 의미에서 해석되든 적극적 의미에서 해석되든, 그것은 ‘사회라는 공간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정초시키는 것’과 관련이 있다. 신분제가 당연시 여겨졌던 시절, 그러한 자유는 소극적 의미에서 해석되었다. 이 경우, 각자가 사회라는 공간 속에서 위치할 적소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유교의 변통 가능성이 실현되면서 그러한 자유가 적극적 의미에서 해석되는 경우, 각 개인은 사회라는 공간 속에서 자신의 적소를 찾아 나아가는, 심지어 만들어 나아가는 잠재력을 지닌 존재로 규정된다. ‘현실 수긍 여부에 따른 자발적 의사 결정으로서의 자유 개념’이 개인에 대한 그러한 규정 방식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에, 그 자유 개념에 따른 행위 평가 방식은 행위 시점에 근거한 것이 될 수 없다. 동양적 자유 개념에 따른 행위 평가 방식에서 행위의 동기나 결과는 행위 시점이 아니라 개인의 삶 전체를 고려하여 평가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개인의 삶 전체는 공동체와 분리되어 평가될 수 없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 이는 ‘현실 수긍 여부에 따른 자발적 의사 결정으로서의 자유’ 개념의 모태라고 할 수 있는 ‘관계 중심의 인간 관점’에 함축되어 있다. 따라서 유교의 변통 가능성을 인식한 사람들 대부분은 ‘사회와 분리된 합리적 개인’ 개념에 공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실질적 의미에서의 선택의 자유’를 부정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실질적 의미에서의 선택의 자유’란 그저 ‘두 대안 중 자신이 선호하거나 것을 선택함’을 뜻할 뿐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부정한 것은 그런 선택의 자유가 사회와 분리된 합리적 개인에 근거해 정당화되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현실 수긍 여부에 따른 자발적 의사 결정으로서의 자유’ 개념은 ‘실질적 의미에서의 선택의 자유’를 배제하지 않는다. 그런데 전자의 개념이 항상 후자와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개인의 선호 방식의 충족 여부에 의해 결정되는 선택의 자유는 행위 시점의 동기나 결과에 의해 평가되는 반면, 현실 수긍 여부에 따른 자발적 의사 결정으로서의 자유는 ‘사회 속 개인의 삶 전체’에 걸쳐 평가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교의 변통 가능성을 인식한 이들은 개인이 사회라는 공간에서 자신의 적소를 찾아 가거나 만들어 가는 데 선택의 자유를 필요한 것으로 여기더라도, 선택의 자유 확대로 조화로운 공동체가 실현될 것이라는 입장에 대해서는 결코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심지어 선택의 자유의 확대가 복지를 보장하기에는 충분하지 않다는 입장에서 더 나아갈 것이다. 선택의 자유가 경제적으로만 해석되는 경우는 복지를 실현하는 것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여길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이를 받아들이면, 유교의 변통 가능성을 인식했거나 그 가능성이 실현되는 과정에 참여한 가상의 인물들이 자유와 복지의 관계에 대한 낙관적 입장을 옹호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

 

현실 수긍 여부에 따른 자발적 의사 결정으로서의 자유 개념에 국한해 이 땅에서 벌어졌을만한 ‘정치적 실험 무대’를 생각해 보자. 여러 번 강조했듯이, 그러한 정치적 실험 무대는 유교의 변통 가능성이 실현되어 신분제가 더 이상 통용될 수 없는 시대에 형성되었을 것이다. 그러한 시대에서는 현실 수긍 여부에 따른 자발적 의사 결정으로서의 자유가 소극적 의미가 아닌 적극적 의미에서 해석된다. 신분제를 대체할 정치 체제를 찾는 것은 그 자유 개념이 소극적 의미로 해석될 수 없도록 해주는 사회적 조건들 마련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따라서 ‘정치를 통해 사회를 특정 방향으로 유도할 수 있다는 신념’은 그러한 조건들을 마련하는 방법론을 모색하고 정당화하는 실천 속에서만 실현 가능한 것이다.

 

현실 수긍 여부에 따른 자발적 의사 결정으로서의 자유 개념을 서양 근대에 형성된 ‘합리적 개인에 바탕을 둔 선택의 자유 개념’에 대비시켜 동양적 자유 개념으로 받아들이고 적극적 의미에서 해석해 보자. 이때 적극적 의미에서 해석된 동양적 자유 개념은 ‘사회 설계 참여의 자유’를 자연스럽게 함축하고 있다.

 

• 현실 수긍 여부에 따른 자발적 의사 결정으로서의 자유가 적극적 의미에서 해석되는 경우, 개인은 사회라는 공간 속에서 자신의 적소(適所)를 찾아보려는, 심지어 만들어 보려는 존재로 간주된다. 사회라는 공간은 정치, 경제, 종교, 과학과 기술 등과 관련된 여러 영역들과 직업군 및 소득 격차 등과 관련된 여러 계층들이 서로 중첩된 공간이다. ‘현실 수긍 여부에 따른 자발적 의사 결정으로서의 자유를 개인이 누릴 수 있다는 것’은 ‘개인에게 그런 영역 및 계층 간 이동이 허용되어 있음’을 뜻한다. 이때 개인의 선택은 한 영역에 국한된 두 대안 중 하나을 결정하는 방식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것은 여러 영역을 가로지는 선택의 방식까지 포함한다. 앞서 논했듯이, 영역 가로지르기 선택 방식은 정치적 이념을 포함한 세계 이해 방식마저도 선택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는 ‘사회 설계 참여 자유’의 보장에 대한 필요조건과 같다. 따라서 ‘현실 수긍 여부에 따른 자발적 의사 결정의 자유’가 적극적 의미에서 해석되는 경우는 ‘사회 설계 참여의 자유’도 누구에게나 허용되어야 한다는 인식이 정착하기 시작한 경우이다.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이 있다. ‘현실 수긍 여부에 따른 자발적 의사 결정으로서의 자유’가 지향하는 선택 및 행위의 목적은 행위 및 선택의 직접적 결과에 국한해 평가될 수 없다는 것이다. 각 개인에게 그 목적은 어디까지나 ‘사회라는 공간 속의 적소 찾기 혹은 만들기’이기 때문이다.

 

사회와 분리된 합리적 개인을 가정하고 이를 바탕으로 사회의 형성과 유지를 논하는 방식은 유교의 변통 가능성이 실현되는 과정에서 고려하기 힘든 것이다. 그러한 합리적 개인에 근거해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을 이분하고 선택의 자유를 생존과 관련시켜 사적 영역에 우선적으로 허용한 서양 근대의 사고방식은 관계 중심의 인간 관점에서 정당화될 수 없기 때문이다. 유교의 변통 가능성이 이 땅에서 실현되는 과정은 관계 중심의 인간 관점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관점에서 동양적 인간 중심 사상을 탈색시키는 것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서양 근대의 합리적 개인 개념은 인간을 천사에 가까운 존재로 이상화시키면서 탄생한 서양적 인간 중심 사상에 근거한 것이다. 또한 사적 영역에 우선적으로 허용된 선택의 자유를 공적 영역으로 확대할 필요가 있다는 인식이 정착하면서 발생한 ‘자유와 복지의 관계에 대한 낙관적 입장과 비관적 입장의 교차 과정’과 같은 것도 이 땅의 세속화 과정을 논할 때 그 핵심은 될 수 없다.

 

현실을 개인이 처한 상황 인식의 대상으로 간주할 때, 현실 수긍 여부에 대한 판단은 크게 두 가지 요인에 좌우된다. 첫 번째 요인은 개인이 처한 상황 그 자체이다. 두 번째 요인은 그러한 상황을 포한한 사회 상태로서의 현실에 자신이 원하는 것을 비추어 보는 것이다. 그러한 사회 상태로서의 현실을 명확히 규명하기는 힘들뿐더러, 자신이 원하는 것은 자신의 주변에 국한된 것에서부터 사회 전체 구조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해석된다. 이 때문에, 현실에 대한 평가 방식으로서의 현실 수긍 여부는 현실에 대한 긍정적 평가와 부정적 평가로 명확히 이분될 수 없는 성격을 갖는다. 이때 현실 수긍 여부에 대한 판단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현실에 비추어 만족 수준을 고려하는 것’에 바탕을 둔다. 그러한 만족 수준에 따라 현실에 대한 긍정적 혹은 부정적 평가가 이루어지면, 현실 수긍 여부에 따른 자발적 의사 결정 과정은 ‘원하는 것이 현실 속에서 얼마나 실현 가능한가’라는 물음에 의존적이다.

 

현실에 대한 평가가 긍정적으로 판단된 경우, 그 판단에 따른 자발적 의사 결정은 ‘높은 만족 수준을 지향하는 결정’과 ‘적정 만족 수준을 지향하는 결정’으로 나뉜다. 현실에 대한 평가가 부정적으로 판단된 경우, 그 판단에 따른 자발적 의사 결정은 ‘타협적 결정’과 ‘비타협적 결정’으로 나뉜다. ‘타협적 결정’은 다시 ‘능동적 결정’과 ‘수동적 결정’으로 나뉘며, ‘비타협적 결정’은 ‘세상을 버리는 결정’과 ‘세상 속으로 나아가는 결정’으로 나뉜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개인이 지향하는 세계의 그림에 국한시켜 이러한 분류 방식을 분석했다. 그 분석을 존중하는 경우, ‘심성론’, ‘도덕론’, ‘방법론’으로 구성된 폭넓은 의미의 정치론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러한 정치론의 궁극적 목적은 신분제를 대체할 정치 체제를 찾고 사회에 정착시키는 것이다. 여기서는 그러한 정치론의 ‘방법론’을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심성론’과 ‘도덕론’은 논외로 한다. 다만 그 개요만을 언급한다.

 

• <심성론>

‘현실 수긍 여부에 따른 자발적 의사 결정’의 분류 방식을 따를 때, 가장 이상적인 사회는 아마도 ‘의로운 사람’에 대해 더 이상 논할 필요가 없는 사회일 것이다. 그러한 이상적인 사회에서는 사회 구성원 모두가 현실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하기 때문에, 뜻을 지키기 위해 갈등하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현실 수긍 여부에 따른 자발적 의사 결정’의 분류 방식을 분석한 곳에서 보았듯이, 의로운 사람은 현실에 대한 부정적 평가에도 불구하고 뜻을 지키거나 펼치기 위해 현실과 타협하지 않는 사람이다. 사회가 조화롭게 유지되기 위해서는 의로운 사람들이 비록 소수일지라도 필요하다. 사회의 발전을 저해하는 문제들을 제거하지 않고서는 사회의 조화로운 유지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의로운 사람은 그러한 문제를 제거하기 위해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는 사람이다. 의로운 사람이 갖추어야 할 첫 번째 소양은 부정적으로 판단된 현실과 타협하지 않으려는 태도이다. 두 번째 소양은 현실에 대한 부정적 평가를 정당화할 수 있는 논리력이다. 그러한 논리력은 자신이 원하는 세계의 그림에 대한 평가를 함축한다. 현실에 대한 부정적 평가는 자신이 원하는 세계의 그림과 현실 사이의 간극을 가늠하는 것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세 번째 소양은 자신이 처한 상황을 고려해 뜻을 지키기 위해 세상을 버릴지, 아니면 뜻을 펼치기 위해 세상 속으로 나아갈 지를 결정하는 분별력이다. 심성론은 의로운 사람이 갖추어야 할 소양들을 다룬다.

 

• <도덕론>

어떤 의로운 사람이 분별력을 발휘해 세상을 버려야 자신의 뜻을 지킬 수 있다고 결정했다. 이러한 결정은 현실에 대한 부정적 평가에 따른 ‘비타협적 결정’ 방식 중 하나이다. 그러한 비타협적 결정 방식 중 또 다른 하나는 뜻을 펼치기 위해 세상 속으로 나아가는 결정 방식이다. ‘뜻을 펼치기 위해 세상 속으로 나아가는 결정’이 ‘뜻을 지키기 위해 세상을 버리는 결정’보다 더 진취적이라고 단언할 수 없다. 그 두 결정 방식 중 어느 것이 더 진취적인지를 따지는 것은 개인이 처한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상황을 고려해 행위를 평가하는 경우, 이기적인 것과 이타적인 것의 구분은 그러한 평가에 도움을 줄 뿐이다. 더욱이 ‘현실 수긍 여부에 따른 자발적 의사 결정’으로서의 자유 개념에 근거해 행위를 평가할 때, 그 평가는 행위의 직접적인 결과가 갖는 효용에 국한되지 않는다. 개인이 처한 상황을 무사한 채 어떤 행위 하나만을 단절시켜 그것을 가지고 옳고 그름을 논하는 방식은 유교의 변통 가능성이 실현되는 과정이나 실현된 이후에도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다. 더욱이 사회와 분리된 합리적 개인과 같은 것도 행위의 옳고 그름을 논할 때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다.

 

개인이 처한 상황을 고려해 행위의 옳고 그름을 논할 때, 개인이 원하는 세상의 그림에 대한 정당성뿐만 아니라 그 그림의 실현 가능성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 여기에 자기중심적이거나 자기 주위를 우선시하는 행위 반경의 성향에 대해 보편적인 인간 본성을 가정하는 것이나, 아니면 자기 주위를 우선시하는 행위 반경을 넘어선 성향에 대해 도덕적 가치를 부여하는 어떤 이론과 같은 것이 전제될 필요는 없다. 그렇게 전제하는 것은 단지 자기중심적 행위 반경에 속하는 성향을 악의 기원으로 간주하는 원죄설과 같은 것이 대세로 작용했던 문화의 산물이다. 그러한 문화에서는 자기 주위를 우선시하는 행위 반경을 넘어선 성향에 대해 도덕적 가치를 부여하려는 입장이 강할 수밖에 없었고, 또 그런 입장에 반해 자기중심적이거나 자기 주위를 우선시하는 행위 반경의 성향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보고 모든 행위를 그러한 성향으로 설명하려는 입장이 나타났다. ‘이기주의 대 이타주의’로 불리는 이러한 두 입장 사이의 줄다리기는 결코 문화를 초월한 것이 아니다. 이를 받아들이면, 개인이 원하는 세계의 그림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방식은 인간 본성 등에 관한 어떤 가정이나 상황을 초월한 어떤 이론적 기준에 바탕을 둘 필요가 없다. 새로운 정치론을 구성하는 도덕론은 다양한 세계의 그림들 중 허용할 수 없는 것이 시행착오의 역사를 통해 인류에게 인지되는 방식, 그리고 현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어떤 세계의 그림을 공동체에 정착시키려고 하는 경우의 정당한 수단을 다룬다.

 

이제 유교의 변통 가능성이 실현되었다는 가정 아래 생각해 볼 수 있는 정치론의 ‘방법론적 측면’을 살펴보자. 이후 논의에서 ‘새로운 정치 체제’는 ‘그러한 정치론의 방법론적 측면’을 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