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속화와 민주주의 (봉인 해제)/존재 사슬의 논리

점들의 간격과 위치 2. 라마르크와 다윈 (수정)

착한왕 이상하 2010. 1. 22. 06:19

(2) 라마르크와 다윈

진화에 대한 라마르크와 다윈의 입장 차이는 다음 두 도식을 비교할 때 드러난다.

 

 

 

 

 

각 도식은 수직선과 생명가지나무로 구성되어 있다. 편의상 <라마르크 도식>과 <다윈 도식> 모두 동일한 생명나무가지에 근거한다고 가정하자. 라마르크와 다윈 모두 종 변형에 의한 진화의 역사를 인정한다. 이때 둘의 결정적 차이는 수직선에 대한 해석에 기인한다.

 

<라마르크 도식>에서 수직선은 시간축이면서 동시에 존재 사슬을 나타내는 반면, <다윈 도식>에서 수직선은 시간축만을 나타낸다. 생명나무가지의 각 점을 특정 종이라고 할 때 그 점과 수직선의 점 사이에 성립하는 대응 관계는 <라마르크 도식>에만 해당한다. 따라서 <라마르크 도식>에서 진화는 종 다양성 축적의 과정인 동시에 종들의 위계질서가 형성되는 과정이다. 반면에 <다윈 도식>에서 진화는 종 다양성 축적의 과정일 뿐이다.

 

<라마르크 도식>은 존재 사슬을 정적인 것이 아닌 종 변형의 역사 속에서 해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라마르크 도식>에서 수직선상의 점의 위치는 더 이상 신을 기준으로 한 특정 계층의 완벽함 정도를 상징하지 않는다. 생명나무가지의 특정 종에 대응된 각 계층은 복잡성의 정도를 상징한다. 생명나무가지에서 동일선 상에 위치한 두 종의 경우, 수직선의 상부에 대응된 종의 유기체들이 하부 종보다 더 복잡한 구조를 갖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환경이 상당 기간 일정하게 유지된다는 전제가 붙는다. 따라서 라마르크에게 진화의 역사는 복잡성 증가의 역사이기도 하다. 그의 ‘용불용설(用不用說)’도 이와 함께 이해되어야 한다.

 

라마르크의 용불용설은 후천적 경험에 의한 획득 형질도 유전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용불용설을 정확히 이해하려면, 진화의 경로에 미치는 환경의 역할에 대한 라마르크의 입장을 알아야 한다.

 

라마르크가 환경을 변이(variation)의 원천이자 변이 선택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간주했다는 통설은 잘못된 것이다. 이를 알려면, 진화에서 유전 물질의 변이가 중요한 이유를 알아야 한다. 단순히 발생 및 성장 과정에 의한 유기체의 형태 다양성만으로는 진화를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한 다양성은 유전적으로 제한되어 있는 까닭에, 종 내 개체들은 모두 유사하다. 동종 내 개체들 중에는 주어진 생존 환경에 적합한 것들이 있고 아닌 것들이 있다. 진화의 초기 조건으로 여겨지는 이러한 사실은 변이가 지속적으로 일어나고 있음을 암시한다. 하지만 라마르크나 다윈은 변이의 원천을 과학적으로 규명할 수 있는 시대에 살지 않았다.

 

환경적 요인들이 발생 과정에 개입한다는 점에서, 환경은 발생을 인과적으로 제한한다. 반면에 환경은 자연선택을 중심으로 한 진화 과정에 일종의 선택압으로 존재한다. 즉, 환경 요인은 변이 선택 과정에 직접적으로 개입하지 않는다. 환경에 적합한 형태가 선택된다고 할 때 이것은 특정 변이의 선택을 의미한다. 여기서 환경이 변이를 걸러내는 여과기와 같은 기능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단지 지리적 풍토, 온도 등과 같은 조건에 적합한 개체군의 수가 증가할 수 있는 까닭에, 환경 요인을 고려하지 않고서는 진화를 설명할 수 없다.

 

변이의 원천과 유전 과정을 알 수 없었던 시절, 라마르크는 환경을 진화에 작용하는 선택압으로 여겼다. 이때 생존 환경에 적합한 형태와 관련된 변이만을 고려한다면. 진화는 변이의 양을 줄여가는 과정이다. 결국 진화 과정은 정체된다. 라마르크의 용불용설에는 진화가 복잡성 증가의 과정임을 밝히는 동시에 이러한 난제를 해결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다. 이를 긴 부리를 가진 핀치의 ‘생식적 적합성(fitness)’, 즉 개체 수 증가와 관련된 적합성을 살펴보자. 용불용설과 함께 자주 거론되는 기린에 대해서 라마르크 자신은 큰 관심을 갖고 있지 않았다.

 

핀치의 무리가 이러이러한 이유로 특정 지역에 옮겨졌다고 가정하자. 핀치의 거주 환경이 바뀐 것이다. 핀치들이 잡아먹는 벌레는 나무 표면 틈새나 속에 살고 있다. 새로운 거주 지역의 나무들의 표면은 이전 나무들보다 두껍다. 새로운 거주 지역은 긴 부리를 가진 핀치들에게 상대적으로 보다 적합한 생존 환경이다. 이 점은 다윈뿐만 아니라 라마르크에게도 해당한다. 다윈에 따르면, 부리가 짧은 핀치들의 생식적 적합성은 감소하게 된다. 결국 부리가 긴 핀치들이 새로운 지역에서 번창하게 된다. 라마르크에 따르면, 부리가 짧은 핀치들은 벌레를 잡아먹기 위해 부리를 사용하며, 이로 인해 변화된 부리의 형태도 후손에게 대물림된다. 라마르크에게 부리가 긴 핀치들이 새로운 지역의 거주자들이 된 이유는 부리가 짧은 핀치들의 생식적 적합성이 감소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 이유는 먹이를 잡기 위해 길어진 부리가 후손에게 대물림되었기 때문이다. 핀치의 사례에 대한 라마르크 방식의 해석과 다윈 방식의 해석이 차이를 도식화해 보면 다음과 같다.

 

 

위 도식과 관련하여 흥미로운 물음은 다음이다.

 

• 라마르크의 ‘부리의 사용’ 개념은 다윈의 ‘생존 적합성’ 개념을 배제하는 것인가?

 

라마르크는 환경을 진화에 직접 개입하는 인과적 힘이 아니라, 진화에 필요한 선택압으로 여겼다. 라마르크에게도 긴 부리를 가진 핀치들은 새로운 환경에 적합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살아남게 된다. 따라서 라마르크가 자연선택 개념을 부정했다고 볼 수 없다. 이때 다음과 같은 물음이 중요해진다.

 

• 그렇다면 어떤 이유에서 라마르크는 ‘부리의 사용’을 강조했을까?

 

간단히 말해 라마르크는 자연선택만으로는 진화를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부리의 사용’ 개념은 생존에 적합한 환경의 역할을 인정하고, 여기에 라마르크의 유전 이론이 더해진 것이다. 변이의 원천과 유전 과정을 실험적으로 연구할 수 없었던 시절, 라마르크는 유전 물질을 환경 조건에 따라 변화할 수 있는 매우 ‘부드러운 것’으로 여겼다. 자손에게 대물림된 유전 물질은 특정 기관의 반복적 사용으로 인해 변형되게 되는데, 이때 해당 기관의 크기가 커지는 것으로 가정된다. 이것은 복잡성 증가의 첫 단계로 해석된다. 만약 핀치의 거주 환경이 지속적으로 변한다면, 기관들의 연결 관계도 복잡해질 것이며, 결국 핀치와는 전혀 다른 형태의 종도 출현 가능하다. 이러한 까닭에, 라마르크는 종 멸종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현재 존재하지 않는 동식물의 화석은 다른 종으로 변해버린 과거 종의 흔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라마르크에게 환경은 진화에 선택압으로 존재할 뿐, 변이의 원천이 아니라는 것이다. 변이는 주어진 기관의 사용 유무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환경이 변이의 원천이라는 관점은 라마르크가 아니라 오히려 다윈에게 나타난다. 다윈의 <종의 기원>이 한 권의 책이라는 생각은 착각이다. 자연선택을 중심으로 한 진화론, 일명 ‘다윈적 진화론’은 <종의 기원> 제 2판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판이 바뀔수록 그 내용은 달라지며, 변이의 원천과 유전의 문제를 다룬 작업이 병행되었다. 다윈 스스로 자연선택만으로는 진화를 충분히 설명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유전과 관련하여 범생설(pangenesis)을 주장했다.

 

범생설에 따르면, 유기체의 형태는 ‘제뮬(gemmule)’이라 불리는 생입자(生粒子)들로부터 발생한 것이다. 생존 환경의 변화는 그러한 생입자들의 변형을 가져온다. 이때 환경 요인이 그러한 변형에 직접적으로 개입한다고 여겨진 까닭에, 환경은 변이의 선택을 인과적으로 제한한다. 이는 환경이 개체 발생 과정을 인과적으로 제한한다는 생각과 유사하다. 따라서 후기 다윈의 진화론을 ‘거시적 차원의 발달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름의 근거를 가지고 있다. 라마르크의 용불용설의 폐기와 함께 시작된 ‘신다윈주의’는 범생설 등을 포함한 후기 다윈의 작업을 사소한 것으로 규정한다. 하지만 범생설은 실제 다윈에게는 사소한 것이 아니었다.

 

유전 물질을 분자 차원에서 접근할 때 무작위적인 돌연변이가 지속적으로 일어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러한 돌연변이의 발생은 방사성 동위원소의 붕괴 현상처럼 무작위적이지는 않지만, 핀치의 무리가 특정 지역으로 옮겨지는 것과 같은 ‘자연선택에서의 우연성’은 아니다. 분자 차원의 지속적인 돌연변이는 중력이나 화학 반응의 법칙에 의해 제한된 상호작용만으로도 거의 무작위성에 가까운 우연성이 발생 가능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분자 차원의 무작위적인 돌연변이는 자연선택에 중립적이다. 이는 자연선택 가설이 분자 차원의 영역에는 잘 적용되지 않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자연선택 가설은 팔과 다리와 같은 표현형 차원의 진화 영역에서만 설명력을 갖는 가설임을 보여준다. 분자 차원의 무작위적인 돌연변이가 없다면, 자연선택은 지속e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러한 돌연변이는 ‘변이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발견은 20세기 중반 이후에야 이루어진 까닭에, 라마르크나 다윈에게는 알 수 없는 것에 해당한다.

 

현대 진화 생물학의 관점에서 볼 때 라마르크의 용불용설이나 다윈의 범생설 모두 틀린 것이다. 하지만 둘 다 자연선택 가설만으로는 진화를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는 사실을 명백히 의식하고 있었으며, 이 점에서 라마르크의 용불용설은 현대적 의미를 갖게 된다.

그러나 이 작업과 관련하여 정말 흥미로운 점은 다음 물음을 다룰 때 나타난다.

 

• 라마르크는 존재 사슬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했을까? 그가 생각한 신 개념은 무엇이었으며, 이때 그에게 과학적 작업은 어떤 의미를 지녔을까?

 

이 물음을 차례대로 살펴보는 것은 유신론자, 무신론자, 그리고 무종교인 모두에게 매우 흥미로울 것이다.